「월간 새마을」 잡지
1972년에 창간된 《월간 새마을》에 수록되었던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잡지 이야기
서정범 교수의 새마을교육연수 소감
소생이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일들과
생각들이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참새가 전깃줄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포수가 총을 쏘자 맨 끝에 앉은 참새만 죽었다.
포수가 총을 쏘자 맨 끝에 앉은 참새만 죽었다.
이유는? “누가 맞았나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가”
198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참새시리즈 유머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비롯하여 당시 유행하던 이야기를 ‘별곡시리즈’로 엮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국어학자 서정범교수(1926~2009)입니다. 그는 우리말과 알타이어의 어원을 연구했고 한국 무속인의 전통언어 연구를 개척한 국어학자 이지만, 당대의 언어 양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별곡시리즈’는 단순한 유머집이 아니라 언어가 시대를 어떻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는 자료인 셈입니다.
1976年, 봄
서정범 교수는 새마을교육연수원에서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연수 교육을 마친 뒤 그는 김준 원장에게 감사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서정범 교수가 김준 원장에게 보낸 서신(1976년 4월 28일)
“ 저는 이번 연수 기간을 통하여 농민들이 저희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만 앞세우는 저희들보다 농민들은 실천으로 자조와 근면 그리고 협동을 터득한 분들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
저의 아내에게도 새마을지도자의 연수를 시키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1973年
서정범교수가 새마을교육
연수를 받게 된 계기
독농가연수언을 계승한 새마을교육연수원은 농어촌 지도자뿐만 아니라 공무원, 기업인 학생, 종교인, 사회지도층으로 교육 대상을 넓혔습니다.
새마을운동을 전 국민의 잘살기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한 정부의 방침이었죠. 이는 서정범 교수가 새마을교육 연수를 받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연수원 교육은 신분의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이루어집니다. 서로 다른 직업과 서로 다른 생활환경을 지닌 300여 명의 연수자들이 일주일간 규칙적인 일정을 소화하게 되는데, 다만 교육 내용은 연수 대상의 특성에 따라 맞춤현 안배되었습니다. 사회지도자층의 경우 실제적인 전문 교육보다는 성공사례를 듣고 토론하는 ‘분임토의’에 좀 더 집중합니다.
새마을운동을 전 국민의 잘살기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한 정부의 방침이었죠. 이는 서정범 교수가 새마을교육 연수를 받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연수원 교육은 신분의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이루어집니다. 서로 다른 직업과 서로 다른 생활환경을 지닌 300여 명의 연수자들이 일주일간 규칙적인 일정을 소화하게 되는데, 다만 교육 내용은 연수 대상의 특성에 따라 맞춤현 안배되었습니다. 사회지도자층의 경우 실제적인 전문 교육보다는 성공사례를 듣고 토론하는 ‘분임토의’에 좀 더 집중합니다.
분임토의는 각자 자신의 과제와 목표를 정하여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토론 시간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고민해보는 계기를 부여합니다. 분임토의 시간에 큰 감명을 받은 서정범 교수는 “농민들이 저희들보다 앞서 있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아내에게 연수교육을 제안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지요.
“ 소생은 새마을운동에 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을 널리알리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아울러 연수 기간에 얻은 것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입교할 때는 시무룩한 표정이더니 나올때에는
무척 활기찬 표정이었습니다.
사회지도자들 중에는 연수원 교육에 거부감을 지닌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은 새마을운동과 관계가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단체합숙 생활에 대한 거북스러움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론이 아닌 현장중심의 실천적 경험사례를 접한 뒤에는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의 본질을 깨우치고, 용광로에서 구워진 참숯‘으로서 적극적인 새마을운동 지지자가 되곤했습니다.
서정범 교수가 김준 원장에게 보낸 서신
(1976년 5월 23일)
(1976년 5월 23일)
서정범 교수는 교육연수를 마친 아내를 마중하러 나갔다가 느꼈던 감정을 서신에 담아 다시 김준 원장에게 보냅니다. 아내가 입교할 때는 시무룩한 얼굴이더니 나올 때는 무척 활기차고 명랑한 표정이었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자신이 재직하는 경희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나눈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연수교육원에 들어섰던
그들이 이제는새마을운동의 효과적인 방안을 의논하고 있다는 겁니다.
밥 중에서는 애인에게 대접하는 밥이 가장 정성을 들이는 밥이니, 연수원에 오신 분을 애인으로 여기고
정성껏 식사를 제공합니다.
서정범 교수는 새마을지도 연수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애인의 밥」이라는 수필을 발표했습니다. 글은 연수원 식당에서 먹은 ‘죽’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평소 위장이 약했던 서정범 교수는 300여 명이 단체로 식사하는 곳에서 밥 대신 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받은 친절의 배경을 알게 됩니다. 식당일을 담당하는 분들이 분임토의에서 “연수원에 오신 분을 애인으로 여기고 정성껏 식사를 제공하자”라고 결의하였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에게 받았던 애인 대접, 그것이야말로 가정을 낙원으로 꾸미는 “꽃송이들”의 따스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그러한 낙원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니,
평소 위장이 약했던 서정범 교수는 300여 명이 단체로 식사하는 곳에서 밥 대신 죽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이 받은 친절의 배경을 알게 됩니다. 식당일을 담당하는 분들이 분임토의에서 “연수원에 오신 분을 애인으로 여기고 정성껏 식사를 제공하자”라고 결의하였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에게 받았던 애인 대접, 그것이야말로 가정을 낙원으로 꾸미는 “꽃송이들”의 따스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그러한 낙원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니,
영생하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소감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