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새마을」 잡지
1972년에 창간된 《월간 새마을》에 수록되었던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잡지 이야기
새마을운동 나무 심기 운동을 이끌어낸 조림왕 임종국 이야기
붉은 산과 흰 옷이 보고싶다4
「붉은 산」이라는 김동리의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붉은 산과 흰옷이 보고 싶다.”
그가 말한 ‘붉은 산’이란 일제의 수탈로 인해 헐벗은 조국강산을 뜻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조국의 산은 푸르게 우거진 모습이 아니라 흙이 벌겋게 드러난 민둥산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풍경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전체 산림의 68%가 민둥산이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위험천만한 존재입니다. 장마철만 되면 빗물을 품어줄 나무뿌리가 없어 산 아랫마을들은 빗물에 잠기거나 쏟아져 내리는 토사에 파묻히곤 했습니다.
이런 풍경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토는 황폐해졌고, 전체 산림의 68%가 민둥산이었습니다. 나무가 없는 산은 위험천만한 존재입니다. 장마철만 되면 빗물을 품어줄 나무뿌리가 없어 산 아랫마을들은 빗물에 잠기거나 쏟아져 내리는 토사에 파묻히곤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느덧 반세기 만에 세계가 인정한 조림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할 때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UN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인공 조림에 성공한 사례”라고 평가했고,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인 레스터 브라운은 “한국의 산림녹화는 기적이며 개도국의 성공 모델”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푸른 강산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추진해온 치산녹화 사업 덕분입니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자연휴양림(월간 새마을 1972년 창간호)
나무를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다
전남 장성군 축령산 자연휴양림에는
1,148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아름드리 편백나무와 삼나무로 빽빽한 숲이 있습니다. 해마다 100여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이 이 ‘피톤치드의 바다’를 찾아와 피곤에 지친 마음과 몸을 치유하고 갑니다. 전국 최대의 조림 성공지로 알려진 이 숲은 조림사업의 선진국인 독일이나 스위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울창하다고 합니다.
이 숲은 현재 산림청 소유의 국유림이지만 정부가 조성한 것이 아니라 임종국이라는 한 개인의 헌신으로 이룬 것입니다. 일찍이 잠업과 특용작물 재배로 자수성가한 그는 부유하고 안락한 여생을 즐길 수 있었지만 조림 사업에 재산과 삶을 송두리째 바쳤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촌 김성수 선생 소유의 야산에서 쭉쭉 뻗어 자라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구경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우리 강산에도 이런 나무가 자랄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이 그를 한국의 ‘조림왕’으로 이끈 것입니다.
1987년 세상을 뜨기 전, 그는 “나무를 더 심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게 나라 사랑하는 길이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산림청은 그의 공로를 기려 축령산 편백나무숲을 ‘고 임종국 조림지’로 명명하고 그의 이름 석 자를 ‘숲의 명예전당’에 올렸습니다. 그는 지금 축령산 숲에 수목장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강산을 푸르게 만들자
숲에 대한 임종국 선생의 열정이 본보기가 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본격적인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산지나 해안의 사면이 붕괴되는 것을 막는 사방 사업이 우선이었습니다.
나무 심기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국민들(새마을 화보, 1975년)
그런데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 열풍이 불자 나무 심기 행사는 온 국민이 참여하는 새마을운동이 되었습니다. 봄에는 식목일, 가을에는 육림(育林)의 날을 휴일로 제정하여 학생과 군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산이나 들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우리 힘으로 강산을 푸르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국민으로 하여금 공동체 의식과 협동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소중한 산림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인공 조림에 성공한” 비결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