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이야기
새마을지도자들의 생생한 활약상을 통해
그들의 리더십과 당시 마을 단위별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들의 리더십과 당시 마을 단위별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를 소개합니다.
지도자 이야기
공동어장 양식업으로 일군 흑색혁명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이가리 김호달 씨 이야기
풍요한 이가리 어촌 마을 전경(새마을 화보, 1976년)
공생의 길로 가기 위한 첫 걸음
1970년대 초반, 터키의 알라니아라는 어촌에서 주민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서로 유리한 조업 지점을 선점하여 더 많은 고기를 잡으려는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장은 피폐해지고 주민들은 다투기 시작했다. 갈등이 쌓여 폭발 직전에 다다르자 어민들은 해결책을 모색했다. 어획량을 제한하고 조업 위치와 간격을 설정하는 한편 좋은 지점에서 조업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알라니아 마을 주민들은 스스로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연간 소득 630만 원의 미역 채취 공동 작업(새마을 화보, 1976년)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경북 포항시 청하면 이가리 어촌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몇 척 안 되는 낡은 어선에 의지하여 잡어를 잡는 수준이었다. 마을이 관리해야 할 공동어장도 지역의 대형 업자들이 임대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어장 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민 아닌 어민이었다.
1971년 주민 절대 다수의 추천을 받아 어촌계장에 선출된 김호달 씨는 마을의 가장 큰 자산인 공동어장을 돌려받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공동어장을 돌려받는다는 것은 어장을 주민 스스로 운영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민들은 마을 직영제로 어장을 관리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반가워했지만 전문지식과 기술이 없었다.
김호달 씨는 자신이 배운 양식업을 주민들에게 전수한 뒤, 첫 공동 사업으로 수심이 깊은 동해안에 적합한 미역 양식장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양식 사업은 국내에 보급되기 전이었고, 더군다나 미역 양식은 생소한 분야였다. 1970년은 수산청이 미역 인공종묘기술을 개발하여 보급을 막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가리 어민들은 미역 양식에 성공했고, 이어서 돌김 양식에도 도전했다. 이가리 마을에 ‘흑색 양식’ 혁명이 일었다.
양식장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주민들 간의 마찰은 없었다. 남보다 더 많이 벌기 위해 경쟁하기보다는 협동하고 양보했다. 자신들이 ‘공동’ 관리하는 어장이었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전국 어촌이 이가리를 벤치마킹하다
이가리 앞바다에는 ‘몰’ 또는 ‘잘피’라 불리기도 하는 진저리가 지천이었다. 오늘날 진저리는 바다를 청정하게 만드는 수초로 알려져 인위적으로 조성되고 있지만, 당시 어민들에게는 쓸모없는 바다잡초였다. 김호달 씨는 해결 방안을 고민하던 중 해조류 가공 공장에서 진저리를 다량으로 사들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민들과 채취해 판매했다. 나중에 가서는 아예 해조류 가공 공장을 차려 해조분을 직접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양식 사업도 전복, 성게, 해삼 등으로 종목을 늘여나갔다.
이가리 주민들(새마을 화보, 1976년)
우리나라에서 해조류 양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는 1975년. 바로 이가리의 양식사업이 성공을 거둔 시기였다.
당시 수산청은 전국 어촌계장 회의를 이가리에서 열어
다른 지역의 지도자들이 보고 배우도록 했고,
이가리는 전국 어촌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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