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이야기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동영상과 사진을 활용해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 새마을지도자 삶의 면면을 엿볼 수 있도록
가공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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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야기
논밭 갈던 일소, 세계 명품 한우로 거듭나기까지
새마을소득사업이 견인한 1970년대 한국 축산 발달
농촌 풍경을 바꾼 소
먼동이 틀 무렵 아버지는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밭으로 향한다. 소는 쟁기를 끌고 아버지는 “이려! 이려!” 외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소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 꼴을 먹이다가 뉘엿뉘엿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외양간 구유에 물을 부어주며 소등을 쓸어준다. 그 당시 소는 병원비, 결혼자금, 대학 등록금을 대주는 든든한 보험이었다.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새마을소득사업을 계기로 농촌의 전통적인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경운기가 쟁기와 수레를 대신하게 되었고, 도시민의 육류 소비가 늘면서 축산 농가가 장려된 것이다. 농민들은 외양간이 아닌 축사에서, 가마솥의 쇠죽이 아닌 영양 사료로 소를 살찌웠다.
1970년대 새마을소득사업을 계기로 농촌의 전통적인 풍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경운기가 쟁기와 수레를 대신하게 되었고, 도시민의 육류 소비가 늘면서 축산 농가가 장려된 것이다. 농민들은 외양간이 아닌 축사에서, 가마솥의 쇠죽이 아닌 영양 사료로 소를 살찌웠다.
한국 축산업을 선도한 삼화축산
1970년대 한우 비육(肥育)으로 소득을 올리는 축산 농가라 해도 대개는 수십 마리 규모였다. 이 무렵 드넓은 초지에 소를 방목하여 키우는 대규모 목장이 등장했다. 그 중의 하나가 충남 서산 일대에 자리 잡은 삼화축산이다. 목장 소유자는 당시 정계를 떠난 김종필 의원으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남이 하지 않는 일, 그러나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이 일을 한번 해보기로 작정”하고 1969년부터 2,150정보(1정보는 3,000평으로 약 9,917.4㎡)의 야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10년 후 푸른 초원에는 1,400두의 한우와 젖소가 풀을 뜯게 되었고, 국내 최초의 자동화 사료공장, 23동의 우사,각종 기계장비 등의 선진 시설도 갖추었다. 1976년부터는 다양한 비육 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축산농가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식과 기술을 무상으로 전수했다. 목장에서 낳은 송아지를 인근 농가에 15개월간 위탁 사육하여 주민들의 소득에도 기여했다.
1979년 김종필 의원은 삼화축산이 자립 단계에 이르면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삼화축산을 운정장학재단에 기증했다. 오늘날 삼화축산은 한우 품종 개선에 이바지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1979년 김종필 의원은 삼화축산이 자립 단계에 이르면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삼화축산을 운정장학재단에 기증했다. 오늘날 삼화축산은 한우 품종 개선에 이바지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운영되고 있다.
명품 한우의 탄생 배경
오늘날 한우의 맛과 육질은 세계에서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적인 낙농국가도 아니고 축산업의 역사 또한 짧은 한국은 어떻게 이런 경쟁력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그 시작은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에 축산법이 제정되고 한우개량협의회가 설립됨으로써 농가의 ‘일소’가 육우로 개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9년부터는 전국한우챔피언대회를 통해 씨수소를 선발했고, 그 씨수소를 통해 개량된 우수한 품종의 한우가 농가에 보급되었다.
1960년대가 한우 개량의 개척기였다면, 1970년대는 다양한 품종의 실험기라 할 수 있다. 전국 8개 도에 1개소씩 한우개량단지가 설치되었고, 다양한 교배종 사육을 통해 점차적으로 품질을 개선해 나갔다. 한편 축산 농가에서는 새마을 영농교육으로 습득한 한우의 사료 배합, 온도, 조명, 전염병 관리 등의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소득을 증대했으며 부농을 일군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시기 이후 한우를 키우는 축산 농가가 안정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1960년대가 한우 개량의 개척기였다면, 1970년대는 다양한 품종의 실험기라 할 수 있다. 전국 8개 도에 1개소씩 한우개량단지가 설치되었고, 다양한 교배종 사육을 통해 점차적으로 품질을 개선해 나갔다. 한편 축산 농가에서는 새마을 영농교육으로 습득한 한우의 사료 배합, 온도, 조명, 전염병 관리 등의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소득을 증대했으며 부농을 일군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시기 이후 한우를 키우는 축산 농가가 안정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