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이야기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동영상과 사진을 활용해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 새마을지도자 삶의 면면을 엿볼 수 있도록
가공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 새마을지도자 삶의 면면을 엿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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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야기
쌀이 주인공인 반세기 동안의 드라마
혼분식에서 쌀 소비 운동에 이르기까지
먹을 수 없었던 쌀, 이제는 먹지 않는 쌀
한때 ‘무미일(無味日)’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쌀 없는 날 또는 쌀을 먹지 않는 날이다. 이 날은 ‘분식의 날’이기도 했다. 1969년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5시까지 모든 식당은 쌀로 만든 음식을 팔 수 없었다. 1972년부터 통일벼가 농촌에 보급되어 쌀 자급이 이루어진 1977년 무미일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쌀과자, 쌀케이크, 쌀음료 등 다양한 종류의 간식거리가 개발되었음에도 매년 쌀 소비량은 생산량에 한참 못 미친다. 어느덧 서구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17년 기준 61.8킬로그램. 하루에 고작 한 공기 반을 먹는 꼴이다. 주식이라는 지위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그간 우리의 음식문화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쌀과자, 쌀케이크, 쌀음료 등 다양한 종류의 간식거리가 개발되었음에도 매년 쌀 소비량은 생산량에 한참 못 미친다. 어느덧 서구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17년 기준 61.8킬로그램. 하루에 고작 한 공기 반을 먹는 꼴이다. 주식이라는 지위가 위태로울 지경이다. 그간 우리의 음식문화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1950년대 행정명령 아래 절미 운동도 병행했던 대한민국의 식탁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절미 운동과 혼분식 장려 운동
1950년대 후반,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구호물자와 미국의 원조 밀가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양곡관리법’이라는 행정명령 아래 절미 운동도 병행되었다. 무미일 시행은 이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음식점에서는 모든 음식에 보리와 국수를 25% 이상 포함해야 했고, 관공서, 국영기업의 구내식당에서도 쌀을 만든 음식을 내놓지 않았다. 육개장·곰탕·설렁탕에 국수를 곁들여 먹는 방식은 이 무렵에 생겨난 식문화이다. 물엿 재료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로 한정했다. 양곡관리법은 점점 강화되다가 쌀 자급자족이 실현된 1977년을 기점으로 완화되었으나, 혼분식 장려사업은 중단 없이 추진되었다.
보리 섞지 않은 쌀밥은 편식!
1970년대에 중고등학생이었던 세대에게 ‘도시락 검사’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교사는 학생들의 점심밥에 쌀과 보리가 7대 3으로 섞여 있는지 확인하면서 쌀밥을 싸온 학생을 꾸짖곤 했다. 학교에서는 혼분식을 주제로 한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 대회 등의 행사를 실시했다.
한편 식품 연구가들은 보리의 다양한 효능과 영양이 풍부한 보리밥을 홍보했고, 요리 연구가들은 보리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을 선보였고, 여성 단체에서는 식품 경연대회 또는 궐기대회를 벌였다. 이 모든 캠페인의 제목은 ‘식생활 개선’이었다.
라면 대신 쌀을 먹자!
1980년대 후반, 줄어드는 쌀 소비를 걱정하는 격세지감의 현상이 빚어졌다. 그새 입맛이 변해서 쌀밥보다 빵과 햄버거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진 탓이다. 그러자 밀가루 음식은 성인병의 원인이며 쌀 음식은 영양 균형이 잘 갖춰진 건강식이라는 내용의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하물며 “쌀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밀가루와 잡곡의 소비를 늘리고자 쌀의 우수성이 낮게 평가되었던 것이 사실”이라는 고백도 볼 수 있다. 쌀 소비 감소는 생산 감소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위태로운 국면에 처하기 때문이다.
쌀이 주인공인 반세기 동안의 드라마는 ‘잘 먹고 잘 살았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이다. 특히 보릿고개 시절 절미 운동과 혼분식을 장려한 식생활 개선이라는 절정의 국면이 있었기에 더욱 빛나는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