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이야기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동영상과 사진을 활용해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 새마을지도자 삶의 면면을 엿볼 수 있도록
가공한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 새마을지도자 삶의 면면을 엿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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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이야기
교육 없는 발전은 없다
1972년 독농가연수원 제1기 교육을 통해 살펴보는 새마을교육
1976年
서울내기 엘리트 출신이 일으킨 기적
1976년 새마을운동의 현지 생활교육장으로 지정된 충남 예산군 예산읍 창소1리. 지방 각 지에서 농촌 지도자들이 이 마을을 찾아와 며칠씩 머물면서 새마을지도자 전영우 씨로부터 영농 노하우와 정신교육을 받았다.
창소1리를 찾은 영농지도자들을 지도하는 전영우 씨 (1971-1972년)
이곳 창소1리가 새마을 선도 마을로 발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6년.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도자 전영우 씨의 이력이다. 낫질 한번 해본 적 없이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며 귀농한 도시 출신이라는 것.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농사에 관한 경험도 지식도 전무했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 시설들을 정비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고소득을 안겨주었으며, 농산물의 안정적인 유통 문제도 해결했다. 이런 발전을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972년 1월 14일 독농가연수원 설립 현판식
농촌지도자를 육성하라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에 번져나간 배경에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농어촌지도자를 비롯하여 공무원, 기업인, 부녀자, 대학교수, 대학생 등 신분과 계층의 구별 없이 약 5만 4,000여 명의 연수자를 배출한 새마을운동의 산실.
그러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기틀은 1972년 출범한 독농가연수원에서 다져진 것이다. ‘독농가(篤農家)’란 농사를 열심히 짓는 모범 농가 또는 농부를 뜻한다. 독농가연수원은 그 명칭이 말해주듯 ‘자주·자조적 협동농촌 건설을 위한 지도자 교육’을 위해 탄생한 기관이다.
전영우 씨는 독농가연수원 제1기 교육생으로, 2주간의 단체 합숙생활을 통해 농촌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울 수 있었다. 가난한 창소1리를 고소득 영농마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의 힘이었다.
“여기 와서 새마을운동이라는 걸 배웠어요. 그때 원장님께서 무슨 원리를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굵은 파이프로 물이 나가서 가는 파이프를 거쳐서 다시 굵은 파이프로 물이 나가는 양이 얼마나 되느냐. 아 그야, 암만 굵어도 가는 것만큼밖에 안 나가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다 가압을 하면 되느냐. 아, 가압을 하면 터지죠. 그걸 알면 되었다 하시더군요. 새마을운동이라는 건 굵은 데를 계속 굵게 만드는 게 아니고 제일 약한 부분을 보완해나가는 거라 하시더라고요. 그래, 고향에 돌아가 우리 동네 제일 약한 부분이 어딘가 찾으러 댕겼죠. 하수구도 들여다보고 쫓아댕기다가, 이불 속에서 찾았어요. 가만히 드러누워서 생각해보니까 가장 약한 부분이 경제 부분이더라고요. 돈을 벌어야 잘살죠. 그제야 돈 벌 거리를 찾으러 댕겼죠.”
- 전영우 성공사례 음성기록물
독농가연수반 제1기 수료기념 앨범 표지 및 단체사진 (1972년)
엄격한 일정 관리로 지도자를 양성한 독농가연수원
연수원의 일과는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이다. 아침 6시 기상 밤 10시 취침, 외출이나 외부 접촉이 불가하며 신문·전화·라디오도 접할 수 없다.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따지지 않고 빠듯한 일정을 따르게 되어 있다. 교과 과정은 영농 기술, 농협 운동, 새마을가꾸기 사업, 교양과 새마을 정신, 분임 토의, 성공사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과표
그 중에서 성공사례 발표와 분임토의는 교육생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농가 소득을 올렸거나 환경 개선에 성공한 모범 사례를 경청하고, 저녁에는 분임반별로 마을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다. 우리 마을은 왜 못사는가? 우리 마을에 가장 필요한 사업은 무엇인가? 주민 단결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쳐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이었다.
연수가 끝난 뒤에도 새마을교육은 계속 이어졌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지도자들은 연수원장 및 교관들과 서신 교환을 통해 현지에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사후관리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고 나서 자기 마을을 발전시킨 지도자는 새마을운동의 전도사로 거듭난다. 현지 생활교육장으로 선정된 예산읍 창소리의 전영우 씨가 바로 그러한 예다.
독농가연수원을 새마을운동의 산실로 만들라
1973년 정부는 독농가연수원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확장함으로써 지도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교육 대상자는 농어촌 지도자뿐만 아니라 공무원·교수·기업인 등의 사회 지도층, 나아가 여성과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주간이지만 ‘하면 된다’는 개혁정신과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교육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간 지도자들은 더 이상 무모한 도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솔선수범의 정신으로 봉사하고, 주민의 협동을 이끌어, 하나씩 하나씩 눈에 보이는 성과를 쌓아나갔다.
독농가연수원에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이어진 교육의 풀무질이 아니었다면
1970년대 전국적으로 일어난 새마을운동의 불길은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