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물 해제
새마을운동 기록물의 주요 내용 및 해당 기록물이
갖는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한 해제문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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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양곡은행대부미원장 송라양곡은행
해제일
20181231
해제작성자
황병주
해제문
[정의]
1977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미 원장
[주요내용]
이 자료는 1977년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미 현황을 정리한 대장이다. 개인별 카드로 날짜에 따라 대부 상환 담보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기입하게 되어 있는 도표이다. 대부미 규모는 1~10가마였으며 이자율은 연 20%였다. 양곡을 대부했지만 그 가격을 병기하여 현금으로 계산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용어정리]
[의의]
이 자료는 1977년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 현황을 알려준다. 1970년대 농촌지역의 금융기구는 매우 적었다. 농협을 제외한다면 주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구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사채가 성행했으며 고리채로 불릴 정도로 이자율이 높았다. 보통 50%를 넘어 100%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저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금융기구의 필요성이 높았으며 송라리는 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미곡은행 등과 함께 양곡은행도 운영했다. 이자율은 연 20%에 불과해 사채보다는 매우 저렴했다. 송라리의 공동체적 경제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원문 기록물 보기
1977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미 원장
[주요내용]
이 자료는 1977년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미 현황을 정리한 대장이다. 개인별 카드로 날짜에 따라 대부 상환 담보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기입하게 되어 있는 도표이다. 대부미 규모는 1~10가마였으며 이자율은 연 20%였다. 양곡을 대부했지만 그 가격을 병기하여 현금으로 계산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
[용어정리]
[의의]
이 자료는 1977년 송라리 양곡은행의 대부 현황을 알려준다. 1970년대 농촌지역의 금융기구는 매우 적었다. 농협을 제외한다면 주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금융기구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사채가 성행했으며 고리채로 불릴 정도로 이자율이 높았다. 보통 50%를 넘어 100%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저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는 금융기구의 필요성이 높았으며 송라리는 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미곡은행 등과 함께 양곡은행도 운영했다. 이자율은 연 20%에 불과해 사채보다는 매우 저렴했다. 송라리의 공동체적 경제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