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이야기
1960~1970년대 제작되었던 새마을운동 홍보만화의 핵심 줄거리를
주요 인물들의 대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으며,
만화 전문의 원문 뷰어를 제공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대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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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이삭 줍던 55명의 소년단이 보여준 ‘할 수 있다’2018-12-17작성일 : 2018-12-171970년대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은 칠원리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1950년대 최빈국을 벗어나 경제 강국을 이룬 한국의 발전상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한국은 어떻게 이러한 급성장을 이루었을까? 세계는 그 성장 동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권위 있는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높이 사면서 “캔두이즘(Candoism, ‘할 수 있다’는 정신)이 있다면 세계는 절대빈곤을 종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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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괭이, 한 손에 새마을 깃발을 든 목사2018-12-17작성일 : 2018-12-17‘인간 불도저’ 새마을지도자 목사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사회지도층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명실상부한 국민운동이 될 수 있었다. 특히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지역 주민의 자립을 견인한 종교계 인사의 헌신이 적지 않았다. 가난한 섬마을에서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박인환 목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실성한 사람, 지나친 모험가, 억척이 박 서방. 홀로 고군분투하던 박 목사를 주민들은 이렇게 불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그의 별명은 ‘인간 불도저, 영웅,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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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새마을운동의 불씨를 당긴 직장금고2018-12-17작성일 : 2018-12-173만원으로 시작한 인천제철 직장금고 현대제철의 전신인 인천제철주식회사에 직장금고가 생긴 것은 1968년이었다. 맨 처음 몇 명의 근로자가 출자금 3만 원으로 시작한 것이 8년 뒤에는 전 직원 2천여 명이 가입한 1억 2,300만 원 규모의 금고로 성장했다. 이 자금을 은행에 예치하자 연말에는 근로자들에게 이익금 배당이 20%나 돌아갔고, 학자금이나 결혼자금 등의 목돈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대출이 가능했다. 직장금고의 성과는 1976년 공장새마을운동으로 이어졌다. 조합원이 나서서 실천한 물자 절약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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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 5기의 신화를 일군 남자2018-12-17작성일 : 2018-12-17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선재도 인천 옹진군 서해에 위치한 작은 섬 선재도. 금빛 낙조가 아름다운 이 섬은 썰물 때면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500미터를 걸어 목섬(무인도)까지 다녀올 수 있다. 이런 특색 때문에 2012년 미국의 CNN방송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곳’ 중 1위로 선재도를 선정하기도 했다. 지금 선재도는 육지와 연결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2000년까지만 해도 교통편이라곤 배뿐이었다. 더욱이 1960년대에는 바지락 채취와 보리&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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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자조 정신을 일깨운 지도자2018-12-17작성일 : 2018-12-17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타인의 도움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를 돕는 것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19세기 중반‘자조(self-help)’라는 개념으로 개인의 개혁을 강조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새뮤얼 스마일스가 남긴 말이다. 새마을운동은 이 ‘자조’의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 1970년 정부는 전국 농어촌 3만 3천여 마을에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스스로 노력하는 마을’로 거듭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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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로 쌀 증산왕이 된 농사의 달인2018-12-17작성일 : 2018-12-17식량 자급국가로 만들어준 통일벼 50원짜리 동전 뒷면에는 벼이삭이 새겨져 있다. 그 벼의 품종은 무엇일까? 바로 1972부터 농촌에 보급되어 1992년까지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던 통일벼다. 쌀은 한국인의 주곡이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쌀 생산량이 풍족하지 못해 서민들은 보릿고개를 겪었다. 생일이나 명절에나 먹던 흰쌀밥이 평소 밥상에 오르게 된 것은 1976년부터로,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 허문회 박사가 개발한 통일벼 품종 덕이다. 통일벼는 키가 작으면서도 줄기가 두텁고 이삭이 커서 재래종보다 알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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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땅을 논으로 바꾼 사람들2018-12-17작성일 : 2018-12-171960年 쌀농사의 염원을 이룬 갯마을 1960년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서해안 간척사업 덕분에 한국의 국토 면적은 크게 늘었다. 특히 시화지구와 화옹지구 간척지를 보유한 경기도 화성시의 면적은 현재 서울시보다 넓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이고, 그 이전에 화성시의 바닷가 마을은 대개 넓거나 긴 갯벌 마당을 보유하고 있었다. 노하리 주민의 오랜 숙원사업이 어떻게 3년만에 해결되었을까? 지금은 산업단지에 둘러싸여 있는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노하3리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