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새마을」 잡지
1972년에 창간된 《월간 새마을》에 수록되었던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기사들 가운데 오늘날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의미한 기사들을 재조명합니다.
잡지 이야기
오늘날 간소한 의식문화의 씨앗을 제공한 가정의례준칙
예식장, 신부용 꽃다발, 면사포, 사진 촬영 공짜,
기념품으로 거울 증정
“제49회 새마을시민 결혼식이 3일 오전 11시 구자춘 서울시장 주례로 시민회관 별관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는 37쌍인데 72년 3월 이래 새마을 시민결혼식을 통해 2,917쌍이 가연을 맺었다. 서울시는 3월부터 매월 2차례의 시민결혼식을 거행키로 하였으며, 1일에는 시장이 15일에는 각 구청장이 주례를 맡는다. 시민결혼식 희망자는 관할 동사무소, 구청 사회과 또는 시청 부녀과에 신청하면 된다. 비용은 무료.”(조선일보, 1976. 3. 4.)
1972年부터
서울시는 시민들을 위해 새마을시민 합동결혼식을 주관했습니다. 신랑 예복은 코르덴(골덴) 국민복, 신부 예복은 한복 차림에 하얀 면사포. 예식부터 사진 촬영 비용까지 서울시가 부담하고 기념품으로 거울을 선물했습니다.
덕분에 서민들은 결혼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지요.
절약할 수 있었지요.
서울시의 합동결혼식은 가정의례준칙에 의거한 대민 서비스였습니다. 가정의례준칙이란 1969년 관혼상제 의례를 간소화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로, 1973년에 벌칙 규정이 추가되어 새마을운동과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합동결혼식이라는 새로운 풍속은 이때 생겨난 것입니다.
새로운 가정의례준칙을 지켜 남들처럼
잘살아보지 않으시렵니까?
1973 年 2月 14日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가정의례 간소화 운동 방안을 마련하여 전국 3만 4,668개 마을에 2만 5,587개 지도반을 편성, 127만 명의 부녀회원들에게 12개의 주요 준칙을 보급하였습니다.
*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대통령령 제6104호)는 1972년 3월 7일부터 내무부 장관이 위원장, 각 부처 차관 12명을 위원으로 하여 운영 되었다. 협의회의 목적은 새마을운동에 관한 시책과 계획을 협의·조정하여 종합적이고 통일성 있는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생략하고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에게만 알리기
• 꽃다발이나 조화는 보내지 않기
• 상가에서 음식 대접을 하지 않기
• 상례 때 굴건과 제복(除服)을 폐지하고 상장(喪章)으로 표시하기
• 과도한 축의금과 부의금을 내지 않기
• 상가는 100일 탈상으로 하기
• 약혼식은 호적등본과 건강진단서 교환으로 하기
• 공회당이나 공공건물을 결혼식장으로 이용하기
• 제례 대상을 부모, 조부모, 배우자로 한정하기
• 제사 대상은 직계 조상으로 한정하기
• 기제는 적당한 시간에 평상시의 반상음식으로 하기
• 지방 및 축문은 한글서식으로 하기
가정의례준칙(월간 새마을 1973년 3월)
이러한 내용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혼례는 인륜지대사이고 상제는 효심의 표현이므로 되도록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는 통념 때문이었지요. 1년 가계 수입의 4분의 1 정도가 관혼상제 비용으로 지출된다는 통계수치가 당시 현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변의 이목을 의식하는 체면치레는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로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새마을정신에 역행하는 ‘구습’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같은 의식의 변화를 주도한 것이 바로 가정의례준칙을 통한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가정의례준칙의 실천(새마을 화보, 1973년)
벌칙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게 진정한 ‘법’입니다
가정의례준칙이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닙니다. 유교를 숭상하던 계층에서는 서구식 절차가 전통문화를 훼손한다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자산을 축적한 상류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는 호화 혼수와 고급 예식장, 값비싼 장례용품으로 부를 과시하려는 풍조 때문이었죠.
중요한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가정의례준칙이 권장하는 ‘의식의 간소화’가 호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례준칙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9년에 폐지되었지만, 그간 경조사는 소박한 형태로 변해왔습니다. 일단 대중의 공감을 얻으면 벌칙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게 진정한 ‘법’입니다.
오늘날 장례식은 대부분 3일장으로 치러지고 상복은 굴건제복을 찾아보기 어렵니다. ‘상다리 부러지게’ 진상하는 제사 상차림도 옛말이 되었고, 결혼식은 조촐한 ‘스몰웨딩’이 유행입니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법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켜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가정의례준칙이 권장하는 ‘의식의 간소화’가 호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례준칙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9년에 폐지되었지만, 그간 경조사는 소박한 형태로 변해왔습니다. 일단 대중의 공감을 얻으면 벌칙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게 진정한 ‘법’입니다.
오늘날 장례식은 대부분 3일장으로 치러지고 상복은 굴건제복을 찾아보기 어렵니다. ‘상다리 부러지게’ 진상하는 제사 상차림도 옛말이 되었고, 결혼식은 조촐한 ‘스몰웨딩’이 유행입니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법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켜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