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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 4월 22일에 가난을 물리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새마을사업을 시작하면서 33,000개 마을에 시멘트 300포대와 철근 반 톤씩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어떤 마을은 그것을 가지고 두세 배 자체적으로 붙여서 했고, 어떤 마을은 나누어서 부뚜막을 고치고, 어떤 마을은 몇 사람이 빼돌리기고 했는데, 잘된 마을을 보니까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키려면 지도자를 양성시켜야겠다면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는 책임자를 물색하라고 해서 여러 사람이 물망에 올랐는데 그 중 가나안농군학교 장로인 김홍기는 종교색이 너무 짙어서 안 되고, 연세대 철학교수인 김영석은 관념적이지 실질적이지 않다고 안 되었는데, 농협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김준이 교육과정(Curriculum)을 짜서 올린 자료가 있었는데 그 자료를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 마음에 들어서 무명 인사이었던 김준을 지도자육성하는 책임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독농가교육으로 3기까지 했는데, 독농가는 자기 농사는 잘 짓지만 새마을지도자처럼 마을을 이끌어가고 봉사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고 해서 1972년도에 새마을연수원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새마을연수원 창설된 이후 제가 김준 원장과 새마을운동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의 교육은 어떠했나요?
답. 기관 요원들을 선발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때는 소속이 모두 농협소속이어서 교수요원 한명 선발하려면 며느리나 사위 선보듯이 한 사람 한사람 전부 만나서 면담을 하고 엄선해서 요원을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새마을교육이 시작되었고, 1972년 7월 2일이 새마을지도자 1기입니다. 에피소드가 하나있는데 연수원에 와서 교육을 받으려면 일요일에 와서 등록을 하고 월요일에 입교식을 하는데, 당시 2주씩 교육을 했습니다. 첫 교육이니까 장관이 6명이 오고 부총리도 왔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국기개양을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하고, 구보(驅步) 2㎞를 하고, 체조하고, 일과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6시에 모이라고 종을 치니까 2/3정도는 운동장에 나왔는데, 1/3은 그때서야 칫솔질하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5분정도 기다리다가 안 와서 그냥 나온 사람만 뛰자고 해서 2㎞를 뛰고 오니까 나중에 나온 사람들이 왜 다 모이지도 않았는데 뛰었냐는 말을 하기에 김준 원장이 “당신 같은 사람이 새마을지도자라면 나는 교육을 하지 않겠다. 6시에 일어나는 질서하나도 못 지키는데”라고 말을 했더니 어떤 사람이 “새마을에서 고생했다고 내무장관이 오라고 해서 왔는데 당신이 뭔데 하네, 마네 그러냐”라고 하니까 내무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내무부에서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된 거냐고 하니까 김준 원장이 “나한테 맡겨라, 교육은 내가 맡았지, 당신들이 와서 원장 얘기 들어보고 교육생 얘기 들으면서 심판역할을 할 거면 나는 교육을 못한다. 나한테 맡기려면 맡기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안 한다”라고 하니까 내무부에서 알았다고 하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3일정도 교육하고 나니까 반대했던 사람들이 내용이 이렇게 좋을지 몰랐다고 하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 1기 교육생들이 분임토의를 새벽 2시 내지 3시까지 하다보니까 그게 기강이 잡혔습니다. 그 다음 교육생들은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미 반 교육이 되어서 왔습니다. 그래서 새마을교육이 상당히 성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청와대 특별보좌관이 3명이 나왔는데, 박진완 교수가 경제를 하고, 임방연 특보가 새마을 운동과 지도이념, 장동완교수가 사회관련 강의를 했습니다. 내무부에서도 담당 국장이 왔고, 연수원에서는 김준원장과 제가 강의하고, 성공사례 발표하고, 전석환이 와서 노래지도를 하니까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분임토의는 반별로 제목을 선택했는데 예를 들어 ‘새마을운동의 활성화방안’, ‘마을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우겠는가’, ‘지도자의 리더십’등 주제를 선택해서 분임별로 토의를 하면 졸업할 때에 발표가 우수한 곳은 상도 주곤 했습니다. 전부 경험 있는 사람들이 분임토의하고 발표를 하니까 상호교육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상당히 내실 있게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 지도자들이 새마을운동은 남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녀자들이 동참했을 때 더 성과가 있다면서 부녀지도자교육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1주일로 교육기간을 줄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부녀자들이 타 지역에 가서 1주일씩 교육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관심을 가지고 내무부에서 지시가 내려오니까 군수가 부녀자 집에 찾아가서 시부모와 남편의 허락을 받아 부녀자들이 교육을 받으러 왔습니다. 부녀자들이 오니까 분위기가 더 좋아지고, 노래 소리도 커지고, 상당히 상승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도시지도자도 교육을 해 달라고 해서 도시지도자도 교육을 했습니다. 농촌, 도시, 부녀회 교육을 하다가 공무원들이 새마을에 대한 정신자세가 미흡하니까 새마을담당 교육을 시켜 달라고 해서 새마을담당 공무원들 교육을 했고, 그 다음에 시장과 군수도 새마을교육을 시켰습니다. 시장과 군수도 교육을 하고 나니까 중앙에 고급공무원들도 교육을 시켜야지 밑에 있는 사람들만 교육을 시켜서 되겠느냐 해서 중앙에 있는 고급공무원들 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청와대 새마을 담당관인 정종택 장관과 내무부장관인 고건 씨가 앞장서서 교육을 받겠다고 하니까 청와대, 문교부, 상공부, 농수산부 등에서 주무국장이 오게 되었고, 다른 곳도 다 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고급공무원들이 처음에는 불평이 많았는데 와서 교육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애국가가 4절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새마을지도자들 한명 한명과 대화를 해 보니까 진솔한 얘기를 듣고 농촌지도자들이 애국심과 애향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데 고위공무원으로서 뭘 하는 것인가 해서 상당히 자성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요일에 사사로운 일로 관용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부인이 피곤했는지 좌석에 머리를 기대니까 공무원이 일요일에 관용차 타는 것도 미안한데 자세가 그게 뭐냐고 나무랄 정도로 사람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기업에서도 참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나와서 기업사장들 교육을 받으라고 하는데 안 받으니까 할 수 없이 관청 말을 듣는 상공회의소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의 전무나 부회장들이 와서 교육을 받고 3~4일이 지나니까 처음에 왔던 마음과 전혀 달라져서 분임토의를 새벽 2~3시까지 했고, 그 사람들이 했던 분임토의가 공장새마을 지침서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나서 기업인과 기업의 총수까지 교육을 해 달라고 해서 기업인 들이 다 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기업인들이 교육을 받으니까 회사가 달라졌습니다. 우선 식당메뉴가 달라지고, 근무복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큰 회사는 사내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지었습니다. 당시 여직원들이 가정이 어려우니까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야간학교를 지어주니까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교육받고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타니까 너무 좋고, 일을 해도 해도 신이 나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니까 생산성이 올라가고 품질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수들은 왜 교육을 안 하느냐 해서 대학총장과 교수들까지도 교육을 했고, 나중에는 국회의원과 장․차관까지 다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천지에 장차관, 국회의원, 기업의 총수 이런 사람들이 농촌의 부녀자 및 지도자들과 섞여서 같이 잠자고 같이 밥 먹고 일어나서 애국가 부르고 성공사례 들으면서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하는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곳에서 국민총화(國民總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곳에서 엄청난 원동력이 생겨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民族中興)이라는 큰 역사의 과업을 완수하는 원동력이 생기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게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육이 새마을운동을 성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연수원을 다녀간 사람들이 달라지니까 연수원을 ‘인간용광로’라고도 했습니다. 각 군에서 처음에 오는 사람들은 2주 동안 교육을 했는데, 2주간 교육을 받았다고 사람이 달라질 수는 없는데, 어떤 일이 있었냐하면 대통령이 관심과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수원을 짓지 않고 고양에 있는 농협대학에서 교실 두 칸을 합해서 140명 강의를 했는데, 하루는 대통령이 강의를 듣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방음시설이 안되어 있으니까 방음시설을 해라, 앞에 칠판이 낡아서 흐리니까 새것으로 바꿔라, 또 평면으로 되어 있어서 뒤에서는 잘 안보이니까 계단식이 되도록 책상과 의자를 높여 줘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대통령이 농촌지도자들 교육하는 곳에 와서 세세하게 관심을 표명하는 대통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140명이 수료소감을 써놓고 가면 직원이 요약해서 보고를 하는데, 대통령께서는 요약한 것은 대충보고 140명이 써놓은 수료소감을 세세히 다 읽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사람의 수료소감이 어땠는지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셨습니다. 수료소감을 보고 보완 할 것이 없는지 그런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또 하나 2주간 교육을 할 때 마지막 목요일 저녁때 청와대를 내방을 했습니다. 대통령이 바쁘시니까 영부인이 영접을 했는데,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영부인 손은 살짝만 댔다 떼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영부인을 뵈니까 두 손으로 영부인 손을 꽉 잡고 아래위로 흔들기까지 했습니다. 저녁 식사 때 영부인이 수저를 못들 정도로 손이 떨렸습니다. 그런데 육영숙 영부인이 하는 말씀이 “각하께서는 정무(政務)에 바빠서 여러분을 친히 뵙고 싶지만 할 수 없이 제가 만났습니다. 각하께서는 새마을지도자가 최고의 애국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그 양반을 모시고 살지만 그 양반이 지금 대통령을 안했다면 무엇을 했을까라는 생각하면 틀림없이 구미 상모리 마을에서 여러분과 같이 새마을지도자를 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지도자들의 가슴에 정말 와 닿았습니다. 지도자들이 마을 하나를 가꾸는 것도 힘든데 대통령이 나라를 안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저렇게 노심초사하는구나, 내 마을은 내가 맡아야 되겠다하면서 사명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면장이나 군수가 시켜서 피동적으로 했는데 지도자가 사명감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하다보니까 안목이 달라지고 방법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니까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마을교육에 많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초기지도자들이 교육을 받고, 감동을 받고,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교육을 희망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게 된 것입니다.

문. 부산공장새마을연수원장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답. 공장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구로공단에 서울공장새마을연수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요는 많고 도저히 감당을 못하니까 여기저기서 공장새마을연수원을 짓겠다고 희망을 했는데, 대통령께서 이것저것 난리 펴서 해 놓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져서 안 된다고 하니까 태완선 부총리가 부산에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니까 양정모 부산 상공회의소 사장이 건의해서 부산에 연수원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부산연수원의 책임자를 누구로 보낼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 김준 원장한테 누구를 보낼 것인지 부탁을 하니까 김준 원장은 보낼 사람이 없고, 만약 보낸다면 곽정현 부원장밖에 없는데 보내려면 각하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보낼 수가 없다고 하니까 태완선 부총리가 대통령께 곽정현 부원장이 가야한다고 하니까 대통령이 김준 원장이 언제까지나 원장 할 수는 없으니까 원장 수업한다는 생각으로 부산에 보내라고 해서 제가 부산에 가게 된 것입니다. 경남, 경북 일대의 교육을 부산 연수원에서 맡아서 공장새마을운동 교육을 했습니다.

문. 국보의 새마을기획단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답. 12.6 사태가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고 그 뒤에 여러 가지로 혼란기가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할 거냐고 상당히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때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생겨서 전두환 대통령이 보완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胥吏), 국보위 상임위장장 삼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연수원의 김준 원장과 매일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수요일에 통화를 하는데 김준 원장이 큰일 났다면서 전화로 얘기를 못한다고 해서 그날 바로 올라가서 김준원장을 만났습니다. 김준 원장이 하는 말이 전두환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새마을운동을 성원할 테니까 방안을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김준 원장 주변에는 유명한 교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교수들에게 새마을운동 방안에 대해서 내놓으라고 하니까 교수들이 하는 얘기가 ‘우리가 신군부에 참여를 하면 우리는 학교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국회의원 자리를 주던지, 수석이나 장관자리를 주던지 신분을 보장을 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연수 원장이 무슨 수로 그런 자리를 보장을 합니까. 대통령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방안은 없고,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이 새마을도 방대한 데 한두 사람이 해서는 안 되니까 국보위에 새마을기획단을 만들어서 새마을기획단에서 좋은 방안을 만들어내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냐고 해서 제가 하겠다고 하니까 부산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해서 부산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단, 당시 국보위가 삼천동에 있었는데 새마을기획단이 국보위 안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밖에 따로 사무실을 내주라고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김준 원장이 전두환 대통령 앞에 가서 새마을은 워낙 덩어리가 크고 한두 사람이 하루 이틀에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국보위가 모든 국정을 재단하고 있는데 새마을도 그런 차원에서 기획단을 만들어 연구해서 방안을 내놓겠다고 하니까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국보위에 새마을기획단을 만들고 세종문화회관 3층을 사무실로 쓰면서 새마을방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시간이 지나니까 신군부가 5.18.과 12.12.를 겪으면서 여의도 광장에서 새마을지도자 30만 명 내지 50만 명을 모아서 신군부를 지지선언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준 원장이 지시를 받고 나서 한숨을 짓고 있기에 제가 김준 원장에게 그것하면 김준 원장 당신도 죽고 새마을도 송두리째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은 조직이 없기 때문에 군 단위 협의회만 있지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새마을을 다시 조직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마을운동본부를 만들어야 하는데, 면단위협의회, 군단위, 도단위, 중앙단위까지 만들려면 몇 달이 걸린다고 하면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계실 때는 새마을조직을 해 놓으면 정치적 압력단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군단위협의회 이상을 못 만들게 했습니다. 그게 옳은 일인데, 당시 상황이 여의도광장에 모여서 선언하고 나면 새마을 깃발을 다 내려야 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어서 새마을 본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새마을본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새마을부녀지도자협의회, 공장새마을, 직장새마을 등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중앙회를 만들어서 중앙회장을 선발해야 하는데 마을단위 지도자가 중앙회장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그렇다고 아무나 시킬 수도 없는 일이어서 3명을 선발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논산에 있는 황경철 지도자인데 그 분은 최고 지도자 훈장을 받은 분입니다. 또 한명은 이철우 씨인데 수원 농대를 나와서 축산을 하며 새마을지도자를 했고, 평택의 황모 씨는 서울법대를 나왔는데 맨 먼저 황경철을 오라고 해서 새마을지도자 중앙회장을 해야 되겠다고 하니까 ‘논산에서 어떻게 서울을 다니느냐, 도회장을 맡은 것도 오토바이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젖소를 기르는데 지장이 굉장히 크다’라면서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무위원회의 간사로 있던 민병도 씨가 그 자리를 놀러왔었는데, 황경철이 자리에서 없어졌기에 보니까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람은 안 되겠다 얼마나 힘들면 화장실에서 울고 있겠느냐”라고 했더니 민병도 씨가 “그런 사람이 진짜고 진국이다”라고 해서 그 사람을 억지로 시켰습니다. 또 부녀지도자 회장을 선발하는데 마을단위 부녀지도자가 중앙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마침 서울에 박정애 씨라고 남편이 미술대학학장이고 새마을봉사단 단장을 했기에 이 사람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가죽점퍼 입은 덩치 큰 사람이 오더니 곽정현 씨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종로경찰서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박정애 씨를 왜 만나려고 하느냐고 해서 국보위 위원인데 새마을부녀지도자 조직관계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박정애 씨를 데리고 와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에피소드를 겪어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새마을운동과 사회정화운동을 합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새마을도 아니고 사회정화도 아닌 제3의 것을 만들어 이름도 새롭게 하고 이념도 새마을과 사회정화가 아닌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마을은 이름도 없어지고, 이념도 없어지는데 새마을은 10년 동안 해서 세계적으로 관심사가 되어서 성공한 국민운동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게 없어진다면 역사적으로 큰 손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은 수많은 지도자와 국민들이 나서서 피땀 흘려 10년 동안 이룬 것인데 아무 자격도 없고 대표권도 없는 제가 동의할 수 없었고, 그런 역사적인 책임을 질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정화운동과 새마을이 합쳐지는 게 결렬(決裂)이 됐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이 지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새마을지도자한테 죽을죄를 졌어도 최소한 두 번은 사면은 받을 수 있다. 첫 번째 5.16 광장에서 새마을지도자 30만 내지 50만을 불러다 놓고 지지성명 했으면 새마을은 지금 짓밟히고 아무 것도 없고, 두 번째 사회정화와 합친다고 했을 때 ‘알아서 하시요’라고 했으면 지금의 새마을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은 사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마을본부가 지금 새마을중앙회가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태어났지만 꼭 필요한 조직이었느냐에 회의를 느끼고, 새마을중앙회가 잘 되기를 바라는 무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고, 이름도 내가 짓고 조직도 내가 하고, 새마을조직 육성법도 만들었기 때문에 새마을 지도자에게 잘하면 3번 아니면 2번 정도는 사면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답. 한마디로 요약하면 잘살기운동 이었습니다. 인간이 살고 싶다는 욕구가 제일 크고, 잘살고 싶고, 더 잘살고 싶은 욕구가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이었기 때문에 생존의 법칙에 합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서 잘 사는 것이 근면이었고, 자조는 잘살기 위해서 부지런하자였고, 협동은 함께 잘살기 위해서 부지런하자는 것이 새마을운동의 근면․자조․협동인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어느 청년모임에서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새천년 덕담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덕담으로 한 말이 “잘 살 짓 하면 잘 살고 못 살 짓 하면 못 산다”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났는데 2011년을 맞이해서 뭔가 덧붙여야 된다는 생각에 천리교본부라는 곳을 우연히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큰 돌에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오늘 부지런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오늘만 살고 있고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하자입니다. 지금 부지런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잠자는 사람이 아니고 깨어있는 사람이고,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생각만하지 않고 결심하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이고, 결심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시작하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 부지런하고 지금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부지런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같은 일을 빨리하는 사람, 꾸준한 사람, 시작한 일을 끝마무리 해 내는 사람이 가장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이게 새마을운동입니다. 옛 말에 근백선지장(勤百善之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가지 모든 착한 것 중에서 부지런한 것이 으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먼저 들에 나가는 농사꾼,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먼저 가게 문을 여는 장사꾼,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하는 직장인,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먼저 등교하는 학생을 보면 1년이 지나면 별 차이가 없지만 강산이 변하는 10년이 지나면 부지런한 사람은 저만치 앞서 가서 튼튼한 도로에 서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새마을이라는 말을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서 나도 잘살고, 함께 잘사는 것이 협동인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말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억지로 하면 되지 않은데 인간의 기본욕구에 맞추어서 했기 때문에 잘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