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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 추진배경과 대통령의 의지는?
답. 새마을운동 초창기에는 경기도에 근무했다가 1972년에 경기도 평택 군수를 나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1970년 4월 22일에 새마을운동을 제창 하셨는데, 실제로 마을에서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71년 하반기에서부터 72년으로 그때 시멘트가 공급되고 사업도 한창 계획을 하고 추진했던 때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그 무렵 저는 평택 군수로서 현장에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많은 마을사람들과 같이 지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후 74년에 내무부로 들어가서 새마을교육과장, 1979년에 새마을담당관을 하다보니까 현장과 정책을 거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부지사라든지 시장, 도지사를 하면서 실제 행정적으로 새마을을 했던 경험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제 공직생활 중에 새마을운동과는 깊은 인연을 가졌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새마을운동 초창기에 현지에서 뛰었던 경험,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신 그 당시에 저는 새마을운동 담당관으로서 실무적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 새마을지도자대회를 앞두고 한참 준비를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굉장히 비통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동력으로 활동할 때 그것을 이끄시던 대통령께서 돌아가시는 아픔을 경험하고, 1980년에 새마을운동이 큰 변화를 가져오는 민간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바뀌는 일이 있으면서 새마을운동이 변화되는 고비 때 새마을담당관으로 있었다는 것이 제가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때 새마을운동이 왜 시작이 되었느냐, 또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느냐는 문제에 대해 저는 이렇게 봅니다. 우리가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 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얘기를 하는데, 좀 더 우리가 배경을 들어보면 아시는 바와 같이 1960년 초만 하더라도 우리 국민소득이 100불 이하의 최빈국이었습니다. 국민생활도 정말 연명을 걱정해야 될 그런 어려운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우리나라 근대화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는 정책으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고 하는 것을 선택을 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산업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대표적인 게 울산에 공업단지를 만든 것이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초창기였고, 지역에는 시멘트 공장으로 쌍용양회라든지 시멘트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나라가 지하자원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석회석밖에 없어서 우리나라 자원을 활용해서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공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 바탕위에서 1차5개년계획이 끝나고 2차5개년계획을 마친 때가 바로 1970년이 됩니다. 그때 우리 상황이 어땠느냐 하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50불정도 됐습니다. 100불도 안되던 국민소득이 250불되면 많이 발전했다고 평가를 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우선 농촌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농촌은 그때만하더라도 전락농가가 발생할 때 이고 농촌기초생활환경도 형편없고, 거기다가 소득이 없으니까 잘살 희망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농민들이 전쟁을 겪고 못살고 산업화 했다고 하더라도 농민들이고 직접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 비료 같은 것이 울산공단에 세워졌지만 농민들에게 비료가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보니까 농민들이 공업화는 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잘살게 해 줘야 하는 기대는 있지만 변화가 없으니까 좌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농촌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느냐, 그때만 하더라도 농민이 우리 인구의 65% 정도 될 때였는데 농민들이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잘사는 나라가 되지 농촌이 잘살지 못하면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농촌을 잘살게 하느냐가 박정희 대통령께서 고심을 했던 분야가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경제개발5개년계획해서 산업화를 하기 위해서 공장을 세웠는데 우리가 그때만하더라도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질적으로도 그렇고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여건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판로가 있어야 산업화가 되는데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국내시장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될 수 있게 국민 구매력을 키워야 되는데, 국민들 중 농민이 많으니까 결국 구매력이 약화되고 시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시멘트를 쌍용에서 생산을 해 내도 시멘트를 쓸 때도 마땅치 않고 수출할 여지도 안 되어서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국내에서 어느 정도 판매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도 상식적인 여건이었던 것입니다. 산업도 발전시켜야 되고, 농촌도 발전시켜야 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고심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가뭄이 아주 심했습니다. 1970년에 영남지역을 시찰을 하시다가 경부선 기차를 타고 가시는데 경상북도 청도군에 신도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이 기찻길 옆에 조그마한 산골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을 쳐다보시는데 보잘 것 없는 마을인데도 농민들이 길도 깨끗하게 다듬어서 쓰고, 또 그때만하더라도 농촌에 담 허물어진 게 많았고, 집 벽도 허물어진 채로 사는 농촌이 허다했는데 주민들이 아주 깨끗하게 담장도 쌓고 마을 집집마다 벽도 깨끗하게 손질하고 또 마을 뒷산을 계단식으로 해서 감나무도 심고, 어쨌든 잘 가꾼 마을로 보시고는 일선에서는 기차를 세워서 그 마을로 내려가서 보셨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 한참 후에 마을에 가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 마을을 모델로 삼으셔서 그 마을을 그림을 그리고 길도 있는 대로 그리면서 1970년 4월 22일 청와대에서 전국지방장관회의를 개최를 해서 지시도 하고, 보고도 받고 하는 그 회의 말미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청도군의 마을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런 마을을 봤다. 이 마을이 그렇게 된 것은 정부에서 지원한 것도 아니고 주민 스스로가 잘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가꾸려고 해서 변화가 됐더라, 그렇다면 그 산골의 조그마한 마을도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스스로 정부나 자치단체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주민들 힘으로 하는 것을 보면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쳐서 한다면 어느 마을인들 적어도 그렇게 다듬어진 잘 가꾼 마을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정부 보고 지원해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고 해도 좋고 그런 마을을 새마을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런 운동을 농촌에 한다면 새마을운동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전국 시도지사들한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을 제창한 날이라고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데 그간에도 새마을제창일이라고 이야기는 했는데 법적으로는 인정을 못 받았는데 2011년 국회에서 법률로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 재정을 했습니다. 완전히 국가기념일이 되었는데 그게 새마을운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렇다면 그 마을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방법, 즉 방법이 문제인데 그 방법을 그냥 하라고 하면 잘 하겠나,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냐하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실 5. 16후에 재건국민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했습니다. 각 마을에 재건마을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해서 잘사는 마을이라는 표시는 안했지만 어쨌든 근대화된 마을을 만든다는 목표로 재건마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할 것 같다가 슬그머니 끝나버려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재건국민운동도 해체하고 이런 경험에서 봤을 때 새마을운동도 그냥 하라고 하면 농민들이 하겠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농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티브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결과 시멘트가 많이 생산해 있는 것을 농촌에 다 주자고 해서 71년도에 전국 3만3개의 마을에 시멘트를 공급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농촌의 실정으로는 시멘트로 무엇을 할 거냐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고 정부에서 시멘트를 준다고 하니까 초창기에는 그냥 나눠 갖는 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때는 6.25전쟁 이후 미국에서 원조를 주면 마을에서는 나눠 갖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마을에 공짜로 시멘트가 왔으니까 나눠 갖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마을에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없고 마차도 들어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마을 어귀에 그냥 시멘트를 놓고 가면 비나 오게 되면 큰일이고, 덮어놓고 저녁이면 아낙네들이 시멘트가 굉장히 귀할 때니까 조금 가져다가 부뚜막도 바르고 그런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시멘트를 마을에 주니까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주민들이 논의하게끔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71년 7월경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정부에서 농민들과 함께 한다는 협력적 차원에서 밀어줘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내무부에 지역개발담당관을 부국장급으로 신설을 하고 그 밑에 과장급으로 세 개의 담당관을 둡니다. 농촌개발담당관, 도시개발담당관, 주택개발담당관을 두고 새마을을 앞으로 추진하는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또 평가를 해서 정부가 할 수 있는 뒷받침해 줘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역개발담당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하고 그것을 농촌에 주어서 이런 사업은 이렇게 해야 된다. 나눠 갖으면 마을발전이 안되니까 마을발전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주민들이 논의를 하게하고 또 이장이 아닌 새마을지도자를 만들어서 주민들이 뽑게 하고, 그리고 어떻게 일을 추진할 것인가, 정부의 지원이라는 것은 꼭 필요한 것만 지원해 주지 다 지원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것만 지원해 주되 나머지는 주민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민 스스로가 해라. 그래서 예를 들어 마을안길을 내는데 콘크리트 작업을 한다고 하면 콘크리트 시멘트는 지원을 해 주니까 그렇다면 콘크리트를 하는데 필요한 자갈과 모래는 주민들이 스스로 나와 하천에 가서 캐 와라, 기술은 면에서 직원이 나가서 지도해 줄 테니까 그것에 맞춰서 하고 또 어느 마을에는 기술 익힌 사람이 지도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그 모든 사항을 마을총회에서 논의하고 결정하는 그런 틀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결과 대개가 첫 시작이 마을안길 가꾸기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마을안길 사업이 하나의 새마을 가꾸기 사업의 제일 처음 시작이 되면서 남녀노소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 지게지고 또 부녀자들은 모래를 함지박에 넣어 머리에 이고 오고, 학생들은 주머니에 넣어오고 그런 식으로 마을주민들이 총동원하는 체제로 일을 해서 마을을 가꾸는 사업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주민들이 좋다는 생각을 했고, 부녀자들은 부녀자를 위한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마을 공동우물, 그때는 동네마을에 우물 하나있는데 그것이 돌에 얼기설기한 우물이니까 위생적으로도 그렇고 거기에서 빨래하고 하니까 얼마나 불편하고 비위생적 입니까. 그러니까 부녀자들이 공동우물을 제대로 하나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우물을 제대로 파고 거기에 시멘트 관 넣고 깨끗하게 주변을 정리해서 공동빨래터도 만드니까 부녀자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할 만하다고 느끼면서 불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71년 하반기에서부터 72년 초에 전국에 마을마다 활발히 새마을사업을 했습니다. 그해 72년 11월 20일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참석을 해서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전남 광주에서 개최를 했습니다. 대통령께서 직접 나오셔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국가발전에 있어서 새마을운동의 중요성과 새마을운동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전까지는 마을에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만 하셨는데 새마을운동의 큰 철학과 방향과 비전을 그때 발표를 합니다. 그리고 새마을지도자를 격려하고 사명감과 자부심을 심어주시고, 새마을에 대해서 추가로 지원하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때부터 새마을을 평면적으로 똑같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수마을 우수지원원칙이라는 잘한 마을은 더 지원하고, 잘하지 않은 곳은 놔두라는 대원칙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이라고 해서 기초마을은 아예 지원하지 않고, 자조마을은 적게, 자립마을에 대해서는 추가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톤을 추가로 지원해 주는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기초 환경 개선사업을 하던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마을이 발전하는데 꼭 필요한 시설로 발전을 합니다. 그때는 비가 오면 하천 둑이 무너지고 농경지가 쓸려나가고, 학생들이 학교도 못가는 상황이다 보니까 다리를 놔야 된다는 식으로 발전을 해 나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떤 변화가 생기냐하면 종전에는 마을의 부녀자분들이 마을일에 대해서 발언권을 갖고 또 남자 분들과 같이 참석해서 회의를 하고, 작업을 같이 하고, 또 부녀지도자라고 해서 대등하게 남자와 마을일을 본다는 것은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그 문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똑같이 회의도 참석하고 발언도 하고 일도 같이 하고 부녀지도자가 같이 마을일을 이끌고 하니까 부녀지도자들이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을의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일부터 없애기 시작 했습니다. 잘살기 위해서는 절약하고,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녀자들이 오히려 앞장을 섰습니다. 당시 농한기면 남자들이 화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 화투하다 빚을 지는 일이 많았는데, 화투를 전부 거둬 불살랐습니다. 또 그때만하더라도 농촌에 미신이 있었습니다. 터주가리라고 해서 짚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빌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다 불태우는 정신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합리적이고 낭비적인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는 쌀 한 톨이 굉장히 귀중할 때인데, 저축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돈이 없어서 저축을 할 수는 없고, 매 끼니마다 밥할 때 세 숟가락만큼 저축을 하자고 해서 부엌마다 좀도리(절미)라고 하는 조그만 통을 갖다놓고 쌀 세 숟가락을 퍼고 한 달을 모아 그것을 팔아 마을기금을 저축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마을길이 넓어져 리어카가 나가고 마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재배하던 옥수수, 참외, 오이 등 농작물을 재배하고 먹고 남으면 동네에서 나눠먹었는데, 길이 넓어지면서부터는 남은 농작물을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 마을이 잘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74년에는 도시근로자 가정소득보다 농촌가정소득이 앞섭니다. 그렇게 되니까 농촌이 굉장히 살기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쌀밥 먹는 게 큰 소망인데, 통일벼라고 하는 녹색혁명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 IR 67이라고 하는 벼를 갖다가 우리나라에 품종 정착을 시킨 것이 통일벼인데 그것이 다수확품종입니다. 통일벼는 종전 벼 생산보다 3분의 1일은 증산이 되고, 그래 가지고 정부에서도 이중고가제로 시중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농가소득이 확 올라가게 되고, 그것이 우리나라 GDP가 북한보다 앞서는 그런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도시근로자소득보다는 앞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게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농촌이 나아졌다는 것 이상으로 60년대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산업화를 추구했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판로가 취약하기 때문에 사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농가소득이 올라가면서 국내 시장기반이 형성이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그때 라디오가 럭키금성, 그때 우리로서는 대단한 것입니다. 판로가 있어야 발전하는데 소득이 없어 살 사람이 없으니까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농촌에서 소득이 올라가고, 남의 집 눈치 보면서 라디오를 들었던 농민들이 이제 금성라디오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생기니까 너도 나도 금성라디오를 샀습니다. 전국 농촌으로 판로가 생기니까 회사로서는 굉장한 기회가 된 것입니다. 한 예이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의 공산품의 판로가 어느 정도 확보가 되니까 우리 산업화와 공업화가 적극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만하더라도 사실 우리나라 품질이 국제적으로 보면 굉장히 열악한 상태여서 해외에 내다 판다는 것은 극히 한정적이었고, 그때 유일하게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한 게 첫 시초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쨌든 농촌새마을운동이 산업화에 기여를 했다는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운동이 산업화 발전에 기여를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1974년에 오일쇼크를 만났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타결하느냐 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농촌에서도 스스로 잘살기 운동을 하는데 왜 공장에서는 안 되겠느냐, 공장도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꼭 정부지원으로 하지 말고 스스로 극복하도록 공장새마을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기업주들, 근로자들의 생각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기업은 기업주만의 회사가 아니라 근로자들 거나 다름없다 해서 기업주는 근로자를 가족처럼 또 근로자는 기업을 가정처럼 내 집처럼 생각하라는 구호를 가지고 공장새마을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런 결과 노사협조, 노사 간에 싸우지 말고, 가족끼리 싸우면 되겠느냐 가족끼리 힘을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내용이었고, 둘째 어쨌든 농촌에서 좀도리(절미) 쌀을 가지고도 저축을 했는데 공장에서도 절약해야 될 것 아니냐 해서 생산비, 원자재를 조금이라도 아끼자는 운동을 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농촌은 아무 것도 없던 데에서 길도 내고 다리도 놓고 했던 식으로 직원들이 공장산업인력들이 머리를 짜내서 생산품의 품질을 개선하면 앞으로 해외에도 수출할 수 있고,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해서 QC quality control 운동을 전개해서 각 분야별로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공장새마을운동으로 확산을 시켜 나갔습니다. 그런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일쇼크를 슬기롭게 극복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제부총리를 하시던 태완선 부총리를 공장새마을운동본부장으로 위촉을 합니다. 이분이 공장새마을운동에 앞장서서 전국을 다니시면서 애를 썼는데 그러다보니까 농민과 산업현장에 있는 사람만 새마을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사회각 부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같이 해서 궁극적으로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사회지도층한테도 1974년부터는 새마을교육을 시킵니다. 정부의 장관, 기업회장,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이런 분들 다 새마을교육을 실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새마을지도자와 똑같이 새마을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새마을운동이 이런 것이구나, 우리도 참여를 해야 되겠다 해서 각 직장까지 새마을운동을 하게 하는 운동이 전개가 됩니다. 그러니까 농촌, 공장, 각 직장 그래서 각 직장마다 새마을지도자로 총무과장 이런 사람들이 새마을지도자처럼 활동을 해서 직장 나름대로 새마을정신에 입각한 활동을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또 어떤 것이 되냐면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만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공장과 각 직장도 새마을도 하니까 지역도 도시새마을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산업화가 되다 보니까 농민주민들이 도시로 오게 되면서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게 되고, 도시화라는 현상이 우리나라에 생기게 됩니다. 농촌에 살던 사람이 도시와가지고 도시에서 사는 방법을 모르니까 농촌에서 살던 식으로 살려고 하다보니까 질서도 없고, 교통질서도 없고, 남을 배려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또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가려서 하다보니까 친절하게 지내야 될 텐데, 도시사람이라는 게 워낙 그렇지 않고, 도시라는 곳은 자리만 뜨면 나를 누가 알겠느냐, 그러니까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고 자기 집 근처 아니면 몰래 갖다 쓰레기도 버리고, 도시에 휴지가 나뒹굴어져 있어도 나 몰라라 하고 이런 도시화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우리 사회에 당면하기 시작한 게 7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그래서 도시새마을운동이 생깁니다. 소위 친절, 질서, 청결 이런 운동이었는데 매월 1일은 새마을청소의 날일이라고 해서 모두 나와서 거리를 청소하고 이러다보니까 이것이 범국민적인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이 된 것입니다. 결과는 물리적으로 농촌이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이 되었고 공장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직장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도시가 깨끗해지고 이런 등등의 가시적인 현상도 있지만 우리 국민의 정신에 뭔가 하면 된다. 또 이뤄놓은 성과가 남을 위한 것보다는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내 직장도 도움이 되고, 내 마을도 이롭고 하니까 결국 나라전체가 잘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인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중에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86아시안게임도 치르고, 88올림픽도 치루는 과정 중에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88올림픽 때 인천직할시장을 했는데 그때 당시에 성공적으로 올림픽을 개최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86아시안게임 할 때 북한에서 테러분자가 와서 김포공항 쓰레기통에 폭탄을 해 놔서 폭발이 되었는데 하여튼 아시안게임이고 88올림픽을 치룰 수 있겠느냐 했는데 기적적으로,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국민 정신이 새마을을 통해서 훈련이 됐고, 계발된 정신이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자신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또 도전정신, 어려운 여건이지만 하면 된다는 발전적인 도전을 하는 국민의 뜻을 키웠고, 또 하나는 같이 하니까 되더라하는 협동정신의 바탕을 둔 국민의지의 결집이라는 소중한 정신적 인프라를 구축해 주었다고 봅니다. 우리 국민정신이 계발되어서 새마을정신이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체는 우리국민에게 정신개혁, 정신혁명을 일으키는 하나의 국민운동이었다는 것이 가장 소중한 우리의 인프라이고 또 이것은 우리가 이뤄놓은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에 잘 보존하고 더 발전시켜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셨나요?
답. 처음에 마을총회를 하면 무언가를 주는 줄 아는 분도 있었고, 해 봐야 될게 뭐가 된다고 회의를 하냐며 잘 나오지도 않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코 쉽게 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해하게끔 행정공무원 또 행정의 협력이 크다고 봅니다. 흔히 새마을운동은 관주도의 운동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지만 외형으로 보면 그런 생각을 할런지도 모릅니다. 왜냐 하면 정부는 그냥 내버려두고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한 것 같은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엄밀히 얘기하면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주고 또 주민이 하는데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또 발전하는 단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이런 것에 대한 어드바이스 자문을 해 주고, 이런 것은 행정이 해 주어야 합니다. 주민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안하니까 그러니까 엄격히 얘기하면 정부와 주민이 협력해서 한 운동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했느냐, 물론 설득은 했지만 이 일을 한 결과를 가지고 보니까 반대를 한 것은 잘못했구나, 반대를 했다면 이런 것을 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을 본인도 느끼고 주변사람도 말은 안 해도 당신 그때 반대했던 거에 우리가 쫓아갔더라면 우리가 달라질 수 있겠느냐 하니까 더 이상은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반대를 하거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을길 내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사실 농민은 땅 한 평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땅과 농경지를 마을에다가 거저 내놓고 길 닦으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민들이 마을을 위해서 내놓아달라고 하고, 또 마을길을 내면 마을이 발전이 되고 당신네 집 들어가는 곳도 차가 다니고 리어카가 다니고 경운기가 다니면 얼마나 좋으냐 하며 설득하고 그러다가도 안 되면 군수나 면장한테 가서 설득을 해 달라고 합니다. 저도 부탁을 받은 날은 아침 일찍 아니면 저녁 늦게 가서 만나서 새마을에 대한 얘기하고 설득해서 그 이튿날 작업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러나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마을을 위해서 내가 협력해야만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나 내 자손이 떳떳하지 않겠느냐 하는 하나의 명분도 있고, 실리적으로 마을길이 넓혀진다고 했을 때 자기 경작지라든지 편리하다는 것도 본인이 느꼈고, 때에 따라서는 마을 분들이 우리가 돈으로 줄 수는 없어도 농사일하는데 하루 공짜로 해 주겠다고 하는 마을도 있었습니다. 주민이 스스로 하려고 하는 그런 것을 보니까 설득 아닌 동의를 한 것입니다. 또 초창기에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정말 마을발전, 마을을 위해서 한다면 돈을 많이 줘서 금방 소득이 올라가는 그런 사업을 해 줘야지 마을길하고 빨래터, 공동우물 이런 겉치레만 하냐, 특히 지붕개량 할 때도 얘기를 많이 했는데 가시적이고 전시적인 것을 하느냐라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에 불이 붙는데 있어서는 가시적이고, 쉽고, 아주 까다롭고, 어려운 것은 농민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니까 쉽고 성과가 금방 느낄 수 있는 이런 것을 해야만 정신계발을 하는데 가장 쉽고, 또 효과가 빠르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정신계발 운동이기 때문에 전시적이고 가시적이고 즉각 효과가 나오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발전이 떨어져서 지원 못 받은 마을들이 옆 마을은 잘해서 지원받으니까 오기가 생겨서 더 잘해서 지원받는 다고 빚이라도 져서 한다고 분에 넘치게 사업을 한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잘살게 한다하더니 마을을 오히려 못 살게 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적으로 본 분들도 있지만, 마을이 승격이 되면서 정부에서 더 지원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잘살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비판하는 분들 중에 이런 분도 있었습니다. ‘농촌 망쳤다, 옛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초가집 다 내리고 슬레이트 양철지붕으로 바꾸냐, 오래된 한국농촌의 전통문화를 버렸다’고 얘기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또 하나는 예전에는 농촌에서 농산물 남으면 이웃끼리 나누어 먹었는데 갖다 내다 팔다보니까 아무래도 그때보다는 인심이 작아졌습니다. 통일벼를 가지고 농가소득이 올라갈 수 있는 간접적인 그렇게 부정적인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농민들하고 정부가 협력을 해서 타계해 나가는 어떻게 보면 아주 좋은 정권(government)을 운영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문. 개도국에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수하는 이유는?
답.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외국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근래뿐만 아니라 70년대에도 외국 사람들이 와서 많이 봤는데,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외국에서 깊은 관심을 갖은 것은 우리나라가 단기간 내에 선진국문턱에도 가고 민주화도 이룩한 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진귀한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못사는 나라 소위 개발도상국 이런 곳에서 봤을 때는 자기네가 잘살 수 있는 모델이라고 하는 것은 미국을 모델로 할 수도 없고 일본을 모델로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들은 미국전쟁을 겪고 식민지하에 있었던 나라들이 아니기 때문에 바탕이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은 36년이나 식민지로 있었고, 전쟁도 겪었고, 폐허에 있었던 나라로 식민지하에서 내전으로 인해서 못살고 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자기들 나라하고 비슷하니까 요즘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우리가 실제로 본받을 모델이 한국 같은 나라 아니냐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근래에 오바마 대통령이나 유엔사무총장이 그런 나라에 갈 때마다 한국을 예를 들고, 지금은 아프리카 회의가 있는데 아프리카의 총장, 장관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이 발전한 것도 알게 되고 이런 과정 중에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들이 직접적인 동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나, 중국, 몽골, 이런 나라가 사실 한국을 봤을 때 여건으로 보면 자원이나 기후로 보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데 우리보다 훨씬 못삽니다. 한국이 잘사는 것을 호기심을 갖고 봐야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미국을 비롯해서 선진국 내지 국제개발기구들에서도 그분들이 한국발전에 원조를 주고 개발을 하려고 시도를 했던 기관들이었는데 그런데서 봤을 때 한국이 단기간 내에 민주화도 이룩하고 경제발전을 한 가장 중요한 핵심정책이 뭐냐, 외국에서 본받을만한 모델이 될 만한 정권(government) 뭐가 있을 것 아니냐, 이런 데서 호기심을 갖고 연구를 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이 아마 최근에 해외에서 새마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국내에서 요인으로 보면 우리가 2만 불 선진국문턱에 가고 경제규모도 세계 10위권으로 들고 하면서 우리나라도 품격에 맞는 세계기여를 해야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세계에 기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해야 될 거냐, 이미 ODA(공적개발원조)규모를 늘리는 것은 시작을 했지만 규모로 봐서는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가의 ODA(공적개발원조)자금을 지원하는 것에는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선진국이 하고 있는 그 규모는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받는 나라가 정말 고맙고 마음속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ODA(공적개발원조)가 뭐겠느냐 규모는 작지만 실제로 유용하게 자기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모델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냐 해서 이명박 대통령께서 그 점을 강조하시고 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줘서 원조 받는 사람이 정말 무릎 꿇고 고맙다고 하는 그런 원조를 해 줘야지 받고도 욕하고 비난하는 그런 원조는 필요하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해외새마을에 대해서 정부에서도 정책으로 농촌개발에 있어서 한국이 성공한 모델이 새마을운동이기 때문에 그 모델을 앞으로 ODA(공적개발원조) 지원하는 나라에 전수하자해서 지금 정부의 정책이고 새마을입장으로 보아서는 과거의 새마을운동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농촌을 잘살게 하는 가난을 물리친다고 하는 게 그때 가장 중요한 이슈이고 그런 방향으로 추진을 했고 그것이 산업화를 하는데 있어서 큰 힘이 되어 오늘날 경제발전을 해서 2만 불로 선진국문턱에 왔는데 그렇다면 지금 새마을운동이 필요 없느냐, 이쯤에서 새마을운동을 완료할 것이냐, 아니면 앞으로도 새마을운동을 계속 할 것이냐에 대한 변화의 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새마을운동이 가난을 물리치는 운동이라고 하는 게 우리 국민의 머릿속에 있는데 이제 2만 불로 잘살게 되었고, 농촌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는데 농촌은 이제 인구가 300만도 안됩니다. 이런 상황이 초창기와는 전혀 다르고 또 하나는 과거같이 일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마을도로를 뚫고 하는 그런 사업은 이제 맞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국민의식 중에 과거에는 가난을 물리치려고 하니까 좀도리(절미)와 같이 먹을 밥숟가락을 떠놓는 식으로 쌀을 모으고 근검절약하고 공장 내 새마을운동에서도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말하자면 그때 우리나라상황에 맞는 그런 새마을운동을 했는데, 오늘날 지금 지식정보사회에 그런 운동이 맞지 않습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모습도 달라졌고, 지향하는 목표도 달라졌고, 하는 모습도 많이 달라졌는데 한다면 변화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하느냐, 우리나라 현 시점에 놓여있는 이 상황에서 새마을운동에 기본정신, 정신계발, 국민의 의식개혁을 통해서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그 정신과 목표에는 지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소득도 2만 불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최소한 3만 불이나 4만 불은 되어야 선진국이 되는데 경제가 안일하게 해서 그렇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정신을 가지고 가발 팔러 다녔던 그 정신을 오히려 현재에 맞는 정신으로 발전을 시켜서 더 도전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원도 없고, 여건도 나쁜 나라가 노력을 해야 선진국이 되지 지금 이 상태에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GDP 2만 불, 3만 불 됐다고 선진국대접 받지도 못하고 인정도 못 받으니까 그에 상응한 국민과 국가의 품격이 갖추어져야 대접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 냉정하게 선진국의 기준을 놓고 봤을 때 우리국민들의 의식이나 행태가 과연 그러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법질서의 준법의식이라든지 질서에 대한 관념이라든지 남을 배려하는 그런 생각이라든지 글로벌화 되었는데 대인관계에 대한 매너라든지 하여튼 우리주변에 고쳐야 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도시새마을운동을 했던 그것을 현 상황에 대입을 해서 품격을 높이기 운동 그래서 소위 나라 브랜드를 높여야 됩니다. 제가 강의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카타르가 국민소득 5만 불인데 카타르를 지금 선진국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만한 품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도 그에 대한 대응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2만 불 시대에도 사회간격이 벌어지다보니까 잘살게 됐는데도 OECD 자살률 1위가 되고, 또 옛날에 비해서 가정도 살기가 많이 좋아졌는데도 이혼율이 1위가 되는 것은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사회에 욕구불만에 찬 사람이 많아서 배 아픈 사람이 이 사회에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가면 살맛나고 행복한 나라가 되겠습니까. 지금 선진국도 몸살을 앓고 있는데 선진국으로 가되 선진국이 겪고 있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뭔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복지정책만가지고는 절대 다 덮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복지정책을 써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고난 DNA가 있기 때문에 잘 개발시키면 미리 예방시킬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공생발전이라고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과 함께 생태계가 발전하는 식으로 함께 해야 된다고 하는 취지가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새마을운동의 한 방향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새마을운동을 우리만가지고는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세계에 알림으로 해서 우리의 국위도 높이고, 우리가 원조 받아서 이만큼 일어섰다면 세계에 기여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우리의 국격이 인정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새마을로 기여를 하자, 그것이 뉴(New)새마을운동이라고 해서 변화의 한계선에서 새로운 새마을운동으로 해서 자꾸 환경변화에 발전시킨다면 새마을운동이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앞으로 시대변화에 따라서 콘텐츠를 자꾸 바꿔 가면서 모체는 70년대에 했던 새마을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게 새마을운동의 방향이고 그래서 뉴(New)새마을운동이라고 해서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있었던 점은?
답. 전체로 보면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일선에 군수할 때부터 정말 마을이 달라지고 하는 데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또 나라가 발전하는데 새마을운동이 큰 원동력이 됐다고 하는데 데에서 새마을과 제가 인연이라면 인연이 깊었다는 한사람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나라발전에 큰 원동력이 됐고, 기여를 한 새마을운동이 국민들에게 잊힌 것 같은 현상, 그리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새마을운동을 우리가 소중하게 성취시켜 놓은 것을 정치이념적인 시각에 비추어서 폄하하는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도 우리 국민 중에는 아직 까지도 있다는 것이 아쉽게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지속발전 할 수 있는 방향은?
답. 과거 새마을운동에는 학교새마을운동이라고 해서 학생들도 새마을운동에 당연히 참여하는 것으로 됐고 젊은이들도 같이 참여를 했는데 새마을운동이 과거의 새마을운동으로 되다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비쳐지고 또 지금은 할게 뭐있냐는 생각을 서로 갖게 되면서 매우 아쉽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뉴(new)새마을운동을 해야 되는 바탕위에서 말씀을 드리면 새마을운동은 나이 많은 구세대나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을 바꿔서 앞으로 더 많이 살고 나라를 발전시켜야 될 젊은 세대가 새마을운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70년대에 나이 드신 새마을지도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앞으로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하게 사는데 지도자 같은 그런 자세로 새마을운동을 발전 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젊은이들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금년에 YSM포럼이라고 새로운 포럼을 창설해서 이분들이 선도적인 새마을일군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회도 만들고 또 교육도 할 계획입니다.
문. 그동안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와 미래는?
답.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일부 비판을 한분들도 아직 있기는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성공한 운동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거의 공통이라고 봅니다.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그렇고 국내에서도 광복 60주년 또 새마을 40주년을 기해서 국내유력지에서 여론조사를 한 결과에도 한결같이 새마을운동이 1위로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 정책이었다는 평가를 한 것을 보면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마을을 박물관에 보존하는 보물로 둘 것인가 아니면 원동력이 되어서 앞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발전 창출해 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아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인데 저는 박물관에 보물로 쌓아두기보다는 귀중한 자산으로 정신적 인프라를 발전시키는데 우리국민들이 새로운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희망입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보시고 또 소중한 자산이니까 내용에 대한 것을 아신다면 두고두고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좀 더 발전시켜야 되겠다는 것에 공감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이 이전을 하게 된 배경은?
답. 1972년 새마을운동을 처음 시작 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교육시설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고양 농협대학에서 교육을 처음 시작 했습니다. 그때는 독농가 지도자 교육이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수원에 농촌 지도자연합회 회관이 있는데 농협대학에서 그쪽으로 옮겨 옴으로 해서 새마을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 됐습니다. 처음에는 농촌에 있는 새마을지도자를 교육을 하다가 1974년부터는 사회지도층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시작을 해서 정부의 장관, 기업체사장, 각계 지도자 되는 분들을 연수원에서 새마을지도자와 똑같은 과정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는데 큰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연세 드신 많은 분들이 새마을교육하면 수원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을 생각합니다. 당시 농촌지도자연합회 건물을 빌려서 썼는데 우선 교육시설로도 여러 가지가 불편합니다. 9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도 없이 전부 걸어서 올라가고 내려가야 하고 장소도 좁고 해서 교육에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연수원을 새로 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교육을 계속 시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새마을교육하면 수원 새마을연수원을 기억할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그때 김준 원장이 새마을교육을 거의 개발하다시피 했고 교관들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서 교육을 진행을 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거기에서 교육을 받으면 원장이하 교관그분들의 철두철미한 자세와 준비, 헌신적인 근무에 감명을 받아서 새마을운동에 효과를 내는데 굉장히 도움이 됐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1979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후에 새마을운동이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과연 새마을 운동이 앞으로 지속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회의도 생길정도로 큰 변화를 맞이했을 때입니다. 그때 내무장관을 하시던 구자춘 씨가 새마을운동이 여러 가지로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당시 새마을담당관을 하던 저를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변화에도 계속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교육을 꾸준히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때 새마을운동을 하면 김준 원장이 굉장히 개척도 하신분이고 교육도 실제 하신분이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생각하신 새마을운동을 교육으로 연결 짓는데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직답을 드리지 않고 김준 원장님과 상의를 해서 다시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고 나와서 김준 원장과 상의를 했더니 그분 말씀이 “이렇게 어려울 때는 새마을교육을 계속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해서 그분과 같이 구자춘 장관을 뵈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는 새마을지도자교육을 꾸준히 하면 언젠가 다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교육을 할 수 있는 새마을연수원을 하나 짓도록 해 주시면 좋겠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동의를 하셔서 특별교부세를 경기도에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지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12.12사건이 생겨서 구자춘장관은 떠나시고 그리고 합천 의장을 하시던 김종환 씨가 내무부장관으로 오셨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연수원 짓겠다고 말씀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 분이 하루는 제가 장관실에 들어갔더니 새마을운동을 앞으로 계속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해서 사실은 장관님 오시기 전에 새마을연수원을 짓도록 먼저 구자춘 전 장관께서 해 주셔서 교부세가 경기도에 나가있고 연수원을 짓도록 밀어주시면 큰 기틀이 마련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새마을지도자들이 사기가 많이 떨어졌는데 장관님께서 새마을사업을 하는 현장을 방문하셔서 격려해 주시면 지도자 사기가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장관님께서 그러자고 해서 1월에 강원도로 해서 경상북도 충청남도 새마을 현장을 쭉 돌았습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이 그 어려운 시기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방을 한번 돌고 오시더니 장관님이 새마을연수원 짓는 후보지를 물색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가까운 곳부터 몇 곳을 물색을 했는데 그때 내무부 차관이 그분 모시고 후보지를 몇 군데 가봤는데 그때는 처음 차관님과 저와 가서 본 것으로는 지금 용인 구갈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산이 있는데 괜찮아서 장관님께 건의를 드렸더니 거기는 아니라고 해서 장관님이 시간 있을 때 같이 나가서 보자고 헬기를 내라고 해서 우리가 봤던 곳을 쭉 보시고는 곧 도시가 된다며 교육시설로는 부족하다면서 다시 헬기로 둘러보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를 지정하셨는데 그때 사실 제 생각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산골짜기에 집을 짓겠냐하는 생각에 여긴 앞으로 시설이 되면 우선 강사구하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 어렵겠다고 했더니 백년대개를 보고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여기로 정해졌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장관자리를 떠나시고 저도 경기도 부지사로 자리를 옮기고 그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께서 되신 후에 새마을중앙회로 조직을 만들고 연수원도 지가 재를 만들고 연수원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83년에 새마을운동 시작한지 13년 만에 새마을연수원이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고 새마을교육을 하도록 기틀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새마을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어쨌든 새마을교육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만드는 데는 김준원장이나 구자춘 장관, 김종한 장관 이런 분들이 주춧돌을 놔두시고 전두환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계속 하도록 뒷받침을 해 주어서 큰 시설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문. 새마을연수원 교육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당시 전경환 씨가 회장, 본부장,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틀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 기틀은 그때 기금도 만들고 이런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됐고, 또 새마을조직을 민간조직으로 바꾸기 위해서 새마을중앙회, 시도지구, 이런 조직을 만든 것도 그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시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유신체제를 선포한 이후에 시작은 새마을운동이 먼저 되었지만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차(cross)가 되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체제를 하기 위해서 새마을운동을 했다는 정치적으로 평가를 하다보니까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신 후에 새마을운동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제가 보기에는 잘못 이해한 부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한 예가 새마을교육뿐만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께서 기틀을 잡기 전까지의 과도기에는 새마을교육도 물론이고 새마을에 관계되는 예산을 국회에서 확보하는데도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살아났지만 어쨌든 80년 예산을 79년 연말에 통과시키기까지는 굉장히 어려운 시련을 겪기도 했고, 과도기에 정치적인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로 인한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5공화국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오히려 새마을분야가 넓어져서 70년대 새마을과 다른 오해도 샀고, 국민들이 보기에 저렇게 새마을이 너무 퍼져서는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시각으로 볼 정도로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오늘날 생활체육회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새마을중앙회의 한 단체였습니다. 배드민턴, 조기축구 각종 생활체육이 새마을의 한 부분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무슨 새마을운동이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범위도 굉장히 넓어지고 정부의 지원도 대폭적으로 이루어지고 해서 제2의 새마을이 활성화되는 시기가 아마 87년까지 기간이라고 봅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국가발전에 미친 영향은?
답. 새마을운동은 아시다시피 정신혁명운동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고 해서 농촌에 초가지붕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하는 가시적인 사업이 새마을운동으로 비추었지만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가장 요체는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개발시켜서 열심히 스스로 일하고 또 일하는 것을 봄으로서 내가 해 낼 수 있구나 하는 소위 “나는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키워내서 스스로 잘살기운동을 할 수 있는 정신개혁운동이 새마을운동의 본체입니다. 이 새마을정신을 갖게 하는 소위 momentum(탄력, 가속도)이 뭐냐면 저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새마을교육을 통해서 그런 것을 알게 하고 당신이 아는 것에서부터 자기 스스로 자기 것으로 만들게 하는 하나의 의식의 변화과정을 교육과정에서 시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변화된 것을 가슴에 담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고, 실천운동이 될 수 있는 일련의 과정을 교육을 통해서 자기 가슴에 담고 머리에서 느끼게 해 주고 또 손과 발로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 새마을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으로 끝나면 이것은 아무 성과가 없으니까 바로 자기가 사는 고장에 가서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서 성취하게 만들어 성취를 통해서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감을 갖게 하고, 일어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하고, 거기에서 나도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남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자기 한 일을 통해서 느끼게 해 주는 하나의 피드백(feedback)이 되도록 하는 이것이 바로 새마을교육입니다. 그러니까 새마을교육은 정신변화가 일어나게 하고, 행동을 하게하고, 그것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초창기의 새마을교육도 그랬고 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새마을교육을 통해 꾸준히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동시에 지금도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커리큘럼이나 과정도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제가 새마을교육 때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마을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알려준다거나 또는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 주는 그런 목적의 교육이 아니라 연수원에 들어와서 강의를 통하든 뭐를 통하든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해서 자기를 한번 성찰해 보는 또 자기가 새마을지도자라고 했을 때 내 역할을 다 하고 있는지 자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 강의를 통해서든 교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든 다른 사람을 보면서든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평이하게 해서는 그런 계발이 안 되고, 성찰하는 분위기가 안 생깁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기독교인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가톨릭 신자가 피정을 가서 자기 믿음에 대한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그런 계기를 갖는다든지 불교에서도 기도하러 가서 삼천 배를 하든 백팔 배를 하던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남보다 좀 더 괴롭고, 힘들고 그것을 체험함으로 해서 그런 게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새마을교육도 편하고 쉽게 하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힘들고 또 인내심을 가져야 되는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그래서 새마을교육은 아침6시부터 일어나서 자기반성을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하고, 국민체조도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이게 바로 고행이고 이런 걸 경험함으로 해서 단 1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게끔 일과가 짜입니다. 밤10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을 소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의식의 변화,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두 번째로는 연수원에 온 분들은 다 강사이고 연수생입니다. 다 강사와 연수원의 역할을 다합니다. 분임토의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입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느끼게끔 기회를 주고 또 토론을 통해서 자기 의견을 발표할 수 있게 하고, 또 상대방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추도록 해서 그야말로 아주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루어짐으로 해서 자기의 의지와 정신을 자기 스스로 계발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단순히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 하겠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결의하고 다짐해서 노트에 적게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사는 마을에 가서 실천을 하게끔 하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새마을교육을 받으면서 자기가 결의하고 다짐했던 내용을 가지고 서로가 토론을 하게하고 분임토의 해서 결의한 것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새마을교육의 특징이고 새마을교육이 다른 교육과 달리 정신적인 변화를 통해서 행동으로 옮기자는 요체입니다. 1972년부터 실시된 새마을교육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맥이고 패턴입니다. 그런 식의 새마을교육이 이제는 변해야 되지 않느냐고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평가를 해 본다면 단기간 내에 하나의 의식과 태도의 변화를 가질 수 있는 교육으로 이것 이상이 있겠나, 특히 새마을과정에서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에는 과거부터 성공사례발표라는 게 있습니다. 고난을 이겨내면서 잘살기운동을 실천해서 성공을 거둔 새마을지도자의 생생한 사례를 발표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해서 진부하고 식상하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여기로 교육 온 지도자들도 뭔가 교감이 되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정신적인 변화, momentum(탄력, 가속도)를 만드는데 상당히 기여를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내용이나 방식은 70년대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그때는 새마을 가꾸기로 가시적인 사업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으로 비췄지만 지금은 그런 사업보다는 이 시대에 맞는 또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의 국민운동으로서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앞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차원에서의 새마을운동이기 때문에 가시적인이고 물량적인 사업이 아니라 교육과 캠페인 실천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또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단순히 그렇게 만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에서 실천운동으로 우리가 그린마을이라든지 또는 스마트마을, 해피마을 이렇게 해서 지역사회, 도시 같으면 300 내지 500세대를 단위로 한 지역에 그런 운동을 전개해서 마을의 특성을 살리는 마을이 되도록 그런 사업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린마을 같으면 한 마을 녹색생활화운동으로 전기나 가스 요금을 절약하는 운동을 전개해서 고지서가 나왔을 때 전달과 비교되는 그래프를 통해 많이 썼으면 더 줄여야 겠다는 절약운동이라든지 또 우리가 옷이나 가구, 쓰레기 등을 처리하는데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되고 온실가스가 배출되는데 이것을 다시 재활용하고 재생한다면 그만큼 온실가스도 줄이고 에너지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팔면 소득도 됩니다. 이번에도 자원재활용운동으로 광화문에서 새마을지도자들이 힘을 합쳐서 겨울옷 만 벌을 모아 노숙자 이런 분들한테 전달을 했는데 하여튼 재활용 활용과 음식쓰레기 처리문제, 자동차 카플, 자전거 타기 등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항목 5~6가지를 정해놓고 실천해서 잘한 마을에 대해서는 지원도 하고 사기도 높이고, 소위 새마을방식으로 녹색새마을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가 GDP는 2만 불을 넘었다고 하지만 의식과 행동은 아직도 아날로그 식에 머문 행동이 상당히 많습니다. 법질서 지키기 문제만 하더라도 자기 필요할 때는 법이지만 조금 뭐하다면 법을 어기는 것을 아주 우습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게 소위 글로벌스탠더드(세계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맞는 선진국 형인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면에 부족한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사는 사회에 있어서 서로가 지켜야 될 여러 가지 매너라든지 이런 등등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모여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는 평가가 되는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개선해야 될 점이 굉장히 많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디에서 보니까 서울에 글로벌센터가 있고 거기에 외국 사람이 센터 소장을 하는데 그 사람한테 서울의 글로벌스탠더드를 봤을 때 평가를 해 달라고 하니까 ‘서울은 턱시도 입고 운동화 신은 격입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사실 우리가 한번 반성해야 될 부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바로 소위 품격을 지키는데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금 보편적 복지로 나눔 문화 등 등 해서 이 사회가 갈등, 격차 이런 데서 오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물론 정부복지정책도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만가지고는 우리국민들이 행복한 사회,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그런 사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눔과 기부문화, 또 다문화가정이라든지, 탈북주민들을 아우르는 사회의 간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국민스스로가 하자, 요즘 용어는 많이 나오지만 어쨌든 모든 것을 자기 생활주변에서 실천하는 Happy Korea 운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네 번째가 새마을운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새마을운동으로 알려지고 특히 최빈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곧 빈곤을 퇴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델이라고 해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많이 배우려고 하고 우리도 전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한국에서 외국에 원조를 하는데 가장 좋은 모델로 전수할 필요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