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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뭐 우리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당시 우리 사회는 정말 살기 어려운 그러한 사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새마을에서 제창한 바와 같이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이 외침이 국민적 공감을 얻은 이유는 아주 아시아적 빈곤, 이것으로부터 어떻게 탈피 할 것이냐 하는 여기에서부터 아마 공감대를 얻은 것 같고 그 다음에 이 잘 살아보자 하는 얘기는 아주 순박한 얘기입니다. 왜냐면 부모님이 딸이 시집보낼 때 너 가서 잘 살아라 그러자나요. 거기엔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어요. 우리가 잘살아 보자 하는 의미 속에는 사람답게 산아 본다든지, 아니면 자녀입장에선 부모에 대한 자녀노릇도 하다든지 또 우리 마을은 마을답게 좀 공동체생활이 영유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다든지,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여봐라 하고 살아본다든지, 뭐 이러한 종합적인 의미에 잘 살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마 새마을 이라는 것과 묘합이 된걸로 생각이 되요.
문. 당시에 그러면 아시아 지역이 어느 정도가 되었나요? 비교한다면
답. 그 당시 수치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필리핀이라든지, 월남이라든지 현재는 몽골이라든지 뭐 이런 나라가 전부 우리나라보다도 더 GNP가 높은 나라들 아니에요? 우리는 어떤 점에서 괴로웠냐면 그 국제적인 개방이라는 것이 국민정서 면에서 봤을 때 아주 덜 되어 있었고 또 농업 국가인데 농업이라는 것이 쌀과 보리 미맥 중심의 영농체제란 말이야. 그러니까 논에 짖는 것이 쌀이고 밭에 짓는 것이 보린데, 근데 보리는 가을에 심었다가 4월 달에 해서 거두어 드리면 끝나고 그리고 모심고 나면 겨우내 할 일이 없고 그러니까 춘곤기니 보릿고개니 지금은 뭐 사전에서 사라질 정도가 되었지만 아주 그때 절감한 그러한 생활의 궁핍상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아시아적 빈곤이라는 것은 아시아 지역에 공통적으로 만연된 빈곤이다. 이렇게 봐도 과언이 아니죠.
문. 동남아 쪽이 훨씬 났겠네요.
답. 첫째는 기후 조건면에서 우리처럼 그 겨울에 지내기 어려운 것도 없고, 또 여름에 그 사람들은 상해의 나라니까 더운 기후에 적응이 잘되는데 우리는 여름이 되면 하지 중심이 되고 전염병이 창궐해서 그때 5대 전염병이라는 것이 무서워요. 그러니까 바로 그 전염병이 창궐하면 학질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 마을에 어린이들이 반 이상 그냥 다 죽어나가는 이러니까 그러니까 영향이 좋지 않죠, 보건 상태 좋지 않죠, 경제 사정 좋지 안죠, 위생조건 좋지 않죠. 그러니까 아시아적 빈곤이란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죠.
문. 신년사를 보면 마을을 자조, 자립, 기초 나눴는데 기준이 어떤 건가요?
답. 근데 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아주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느껴지는 건 뭐냐면 그분은 사범학교를 나온 분 아니에요? 그다음에 만주군관이라든가 육군사관학교 다 거친 분이어가지고 그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특이해요. 첫째 지도자를 하려면 지도자의 성장 기반을 알아야 하는데 그분이 내가 알기에는 사형제인가 그렇죠? 막낸데 근데 그 아버님의 교훈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아버님은 무관시험에 합격했다가 결국 나라가 경술 합방되는 바람에 그래서 인제 꿈이 깨졌는 그런 분이라는 걸 보면 역시 부모님들의 가정교육도 상당히 전통문화적인면에서 상당히 상위 그룹에 속하지 않았나, 그렇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가풍을 통해서 다져진 그분의 인격 그다음에 사범교육을 통해서 얻은 것, 또 어떤 사람들은 일제시대니까 일본식 사범 교육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일본 사람들 사범교육이라는 것도 인간 교육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이분이 마을을 정리할 때도 반드시 거기엔 원식을 중시 했는데 첫째는 마을 자체가 발전하기 위해서 자원 동력이 있느냐 자원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한 가구당 얼마씩 부담해서 다리를 놓고 할 적엔 쌀 한가마라도 낼 수 있느냐? 이런 얘기 쉽게 할 수 있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마을에 다리를 놓자든지 마을 사업을 하는데 하자하는 협동능력이 있느냐? 특히 우리는 반상제도의 유습이 있어가지고 그게 잘 안되쟈나요. 그담에 대 성촌이 많아가지고 화합이 잘 안되쟈나요. 그러니까 협동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요. 나머지는 반상이라는 신분 초월하고 대성촌에서 대성 외에 잡성도 차별 받지 않고 그 다음에 저 외딴 집에 별도로 사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함께 어우러진다고 하는 이거를 주민화합 차원에서 협동을 한 것이고 그다음 세 번째 항목은 그러면 누가 이걸 리드 할 것이냐? 누가 지도자가 될꺼냐 말이죠. 마을 자체에 누가 그러한 일을 끌어 나갈 지도자가 있느냐? 하는
그래서 그러한 세 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그러한 조건이 충족 되있는 마을하고 부분적으로 충족이 되지 않는 마을, 그다음에 기대 가능성이 없는 마을, 기초, 자조, 자립 이렇게 구분하게 된 것이죠.
문. 구체적인 이 세부항목이 있나요? 예를 들면 제가 알리론 140만원 이상의...
답. 고건 고 후에 새마을운동이 진행이 되면서 소득 분석이 된단 말이야. 무얼 해서 그 마을은 얼마에 이르느냐 이래 가지고 인제 그 단계를 자연마을이라든지, 복지 마을이라든지 이렇게 더 넓혔고, 마을의 환경개선과 전체적인 내용도 고단화 시켰죠. 예를 들어 도로를 농로 개선 차원에서 하는 것을 트럭이 들어 올 수 있는 걸로 한다든지 아니면 공동경영의 창구를 줄 수 있다든지, 그다음에 자연수를 펌핑 앞에서 먹던 것을 간이 상수도를 만들 수 있다든지 마을 회관을 어떻게 진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문화 시설을 갖추어 나가면서 그 지역의 소득 증기 기반을 확충해 나갈 수 있는 단계를 높인 것이죠. 초기에는 새마을에 덤벼 들 수 있느냐? 이런 의욕을 유도하기 위해서 한 것이죠.
문. 초반에 기초, 자립, 자조, 마을 어떻게 나눠졌나요?
답. 그 당시 내 기억으로는 군이 지금은 시가 많지만 그 군들 137개군인가 그렇게 되요. 그런데 그 군들마다 그 세 가지를 놓고 해보니까 당최 가망성이 없어. 그러니까 현지 분석보고 올라오는 거 보면 가망성이 있다는 군보단 어렵다는 데가 더 많단 말이야. 그러니까 군수 단위로 파악했을 적에 마을이라는 것은 3만 여개 되지만 면 단위로 내려가고 군 단위 10여개 면이 있고 면에 10여개 마을이 있쟈나요. 근데 군단위로 사람 구하기 쉽지만 구체적인 마을 단위 왔을 때에 말이야 애먹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 당시에 그 3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는 얘기는 그렇게 쉽게 못 했죠. 그래서 주로 이렇게 큰 도로와 접해 있거나 아니면 교통이 비교적 좋거나 그래서 이촌향도를 덜한 곳일수록 가능성에 있죠. 그러나 오지로 갈 수록에 더 어렵다. 사실은 새마을은 오지에서부터 해야 하는 건데, 그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인데,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격려할 것인가해서 시멘트를 준다든지, 철근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그 동기 유발 차원에서 보면 되요. 교육적인 방법은 아닐거라고 난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문. 경제 원리를 도입했다는 게 굉장히 마을마다 성공 요인 중 하나
답. 우수마을 우선지원, 성적 좋은 데를 먼저 지원한다는, 근데 만약에 성적 나쁜데 지원해주면 거지근성이라고 하나 나쁜 말로 하면 가만히 있어 주는데 뭘 떠드냔말이요. 안되거든 그러니까 그때 참 우리한번 발 벗고 해보자하는 일하는 것을 그렇게 즐겁게 했던 때가 아마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시기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해요.
문. 결국엔 나중엔 기초, 자조, 자립이 70년대 말에는 어떻게 발전을 했나요?
답. 지금도 우리가 오일 쇼크를 겪고 있습니다만 내 기억에는 74년도가 그때 오일 쇼크 1차적으로 온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안 나옵니다만 만약에 석유 값이 올라간다면 자동차 운전하는 분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선 아스팔트도 그렇고 심지어 농촌에서는 비닐 바가지 있쟈나요. 이런 거 전부 생필품에 가격변동이 와요. 근데 그런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그런데 인제 70년에 새마을이 제창이 되어 가지고 본격적으로 71년도부터 시작이 된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2년 동안에 얼마나 그 성장이 많이 된가 하니 농촌에 농가 호당 평균 소득액수가 도시근로자의 평균소득 액수보다 떠졌단 말이야. 그건 엄청난 변화죠. 그러니까 결국 그러한 오일 쇼크도 이겨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소득 수준이 높아지니까 사람마다 한사람 한 통장 갖기 운동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러다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그 경험을 노하우 삼아서 자기들이 못한다고 믿었던 다리 놓는 것도 해보니까 됐고 그러니까 점점 마을 개선 사업이라든가 이런 것이 점점 고단화 되어가고 있는 그러니까 거기서 자립마을이 느는데 어떻게 늘었느냐면 그것이 기초마을이 상대적으로 자꾸 없어져요. 고것이 자조로 가고 자조마을이 자꾸 자립마을로 가고 되고 그러니까 마을 발전이 되다 보니까 나중에 기초 마을이 없어지고 자조 마을이 극소화 되고 인제 자립마을이 되니까 그럼 다 자립마을로 끝날 것 아니야? 그러니까 자연마을, 복지마을 다시 올라가는 것이죠. 계단 오르는 식으로.
문. 목표를 계속 설정해서 인제
답. 밑에 기초 자조 점점 없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마을의 발전규모라든가, 여기하고 큰 관계가 있다고 봐야죠.
문.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어떤 걸로 보나요?
답. 성공요인은 사람들이 마음가짐을 바꿨다고 하는 정신개혁이라고 합니다만 근데 정신 혁명하면 너무 어려운 말 같기도 하고 혁명소리가 들어가면 뉘앙스도 좋지 않고 그런데, 마을을 고쳐 가졌다고 하는 이건데 새마을 교육이 굉장히 주요했다고 봐요. 왜 그러냐면 과거의 교육은 알고 있는 사람이, 지식을 갖은 사람이 알려줬던 말이야. 근데 새마을 교육은 생활 현장에서 어떤 교육을 했느냐 하면 경험을 전달해주는 매체로 교육이 이뤄 졌어요. 그 중앙회에서 고대광실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한 내용의 새마을 교육을 듣고 나니까 눈물이나. 왜냐면 자기 부모한테 어렴풋이 들은 것은 있지만은 저런 고생이 바로 이런 성공의 모태인 줄 몰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남에게서 도움을 받아서 발전한다가 아니고 발전할 수 있는 에너지는 나한테 있다. 그러니까 내가 깨달면 그 에너지는 나로부터 나오니 그래서 나라는 인간을 새로 건설해서 새로 건설된 사람끼리 힘을 합하면 그것이 바로 협동논리죠. 그래서 공동 목표를 세우고 전진하면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하면 된다. 그런데서 나온 것이죠. 그러니까 논문 쓰려면 인간 개혁이라고 애기해야 되겠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자각을 바탕으로 해서 자기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인식하기 시작함으로 시작을 해서 아 나에게도 능력이 있다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새마을 성공에 커다란 요인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문. 아무래도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고 나서 위기라면 위기고, 정체성 이라면 정체성인데 그때의 새마을 운동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답. 근데 그 가장 큰 저기가 뭐냐면 아무리 세종대왕 같은 시대가 와도 우리가 드라마를 봐도 그렇습니다만 여야 간 이랄까. 찬성 반대는 늘 있잖아요. 근데 79년 시해 사건을 나는 그때, 나는 새마을 국제회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경주에 현지답사 가고 있었거든. 거기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아주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고 있는 걸 봤습니다만 그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뭐냐면 장례 모실 때까지는 세상에 조용했어요. 다들 그 아까운 분 돌아가셨다 했는데 근데 장례모신 이후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데 여는 여대로 야는 야대로 그냥 뭐, 각축적인 새롭게 시작되는 거예요. 근데 그때 가장 안타까운 건 뭐냐면 사회 전반적으로 하극상 현상이 났다는 것을 가장 마음 아프게 느껴져요. 하극상 현상은 뭐냐면 바로 정권을 잡기 위해선 군중동원이 가능해야 하고 군중이 동원 되어야 표를 많이 얻고 그러면 그 군중의 대상이 누구냐? 바로 격차 의식에서 불만을 갖은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노동현장에선 근로자들을 동원하는 방법을 통해서 기업주에 대한 노사 분쟁을 부추기는 이런 하극상 현상이 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 동원해가지고 교수들을 의용 교수로 몬다든지 하는, 학교에 저항하는, 이렇게 하극상 현상이 나오고, 이러니까 데모현상이라는 것은 노동자, 학생, 근로자, 이런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게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인제 사회적인 윤리가 그냥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한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어요. 학생들도 보면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뀌어선 교수에 대한 존경의 태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아 이게 정말 학문의 장이냐 아니면 학문을 상품화해서 거래하는 흥정의 장이냐 하는 이러한 비참한 생각도 하게 했는데 그때 가장 어려웠던 것이 그것이고. 그러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뭐냐면 비행기 테이크 오프하기 전까지 어렵잖아요. 그러나 일정한 10,000피트라던가 올라가고 그러면 안전 고도를 유지하면 엔진이 껴져도 급락을 하진 않거든요. 이렇게 서서히 내려 올 수 있는 여유가 있어. 그 여유 시간에 새로운 발전력을 찾게 되면 다시 고도 안전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근데 그동안에 다져진 힘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마을 정신이라고 봐요. 왜 그러느냐. 그 당시에 300만 새마을 지도자라고 말을 해요. 마을지도자, 직장지도자, 부녀지도자, 남자지도자 많잖아요. 왜 그러한 새마을 정신이 그것을 지탱했느냐 하면 새마을 지도자들은 보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을을 위해서 한번 잘살아 봐야 되겠다. 내가 함 봉사해야 되겠다. 신념을 가지고 뛰어든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바뀌어도 또 급료 조건 있는 데는 월급 안 나오면 그만 떠나고 사라져야겠다. 하지만 이건 급료하고 관계없어요. 어떤 상황이 벌이질 적에 새마을정신이라는 봉사 정신이 종교의 힘보다 더 강했던 것으로 느껴져요. 그러니까 그것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느껴지고 또 조직이 방대 했잖아요. 리, 동 단위까지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치하는 분들이 그때에 한편으로 경원하면서도 그 조직을 이용해야겠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우리가 정치 논리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불 꺼진 상태에서 늘 대기 중인 이러한 분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도 새마을의 기치를 새로 들고 나오면 다 털고 나올 사람 엄청 많죠. 근데 이제 특히 내가 새마을 중앙회장할 때 구체적으로 파악해봤더니 300만 새마을 지도자가 아니라 297만이예요. 297만 지도자 중에 여성 지도자가 270만 명 그러니까 여성 지도자는 뭐냐. 살림살이하는 데 가장은 남편이여, 그러니까 이분은 주부여. 그러니까 직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주부로써 여가시간을 새마을에 받친 분들이야. 그러니까 그분들은 새마을에 봉사활동 한다고 하고선 다소 지장은 있었겠지만 가계에 큰 지장 있는 게 아니야. 더욱 새마을 지도자 하고선 아들, 딸들에게 할 말도 있고 또 한 가지 이웃에 떳떳하고 보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 여성 지도자들의 그 역할이라는 것은 상당히 켰고 지금도 아마 잠재적 역량으로서는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보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이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든지 그런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요?
답. 그런 게 없어요. 왜냐면 한때 전두환 대통령 말기 이후부터 어떤 형태가 생겼냐 하면 그 지방자치제가 되고서부터 그 후가 되겠습니다만 새마을 지도자시니까 주민들한테 인기도 있고 또 득표가능성도 있으니까, 구의원, 시의원, 도의원 그쪽으로 살살 꼬셔 내내요. 그러다보니까 이 새마을지도자 중에서 그쪽으로 간분들 꽤 많았습니다. 꽤 많았는데 이제 두 가지 중에서 평가 할 수 있어요. 하나는 새마을 지도자하기 때문에 내가 인기 있고 당선 가능성 있다. 고로 나는 간다. 이러 한 생각을 가진 분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대통령 시해 이후 올림픽, 노 대통령 이후에 새마을이 하강세에 있으니까. 이걸 지키긴 위해선 새마을지도자들이 의회 진출을 해서 예산확보나 지원 사업에 힘을 갖도록 하자. 이래 가지고 한 쪽으론 그쪽으로 보내는 이러한 분위기였어요. 다행이도 그때 제일 많을 때는 전국에서 지역에 자치 단체 의원까지 당선된 분들을 보면 아마 내가 알기에 1000명이상 넘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제 그분들이 가서 역할도 많이 해줬고 분위기를 끌고 나가는 데 있어서도 주민 동원 능력이기 때문에 앞장 설 수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80년도 들어서면서 인제 민주도로 바뀌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미가.
답. 그때 민주도, 관주도 하는데, 이 새마을운동이 그냥 어떠한 임의집단이 취미로 하는 집단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국가의 사활에 관한 운동이라고 이렇게 보면 그래서 말단 세포에 해당하는 마을 단위에 건재성을 전제로 해서 나라의 건강을 지탱해나가는 운동이라고 보면 여기에는 국가에서 완전한 민간 주도로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왜냐면 새마을운동을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향약운동하고 맥락이 가까워요. 향약운동이라는 그것도 국가지원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면 퇴계선생이 예안에서 고궐운동을 했고 율곡선생이 해수, 석담, 서원, 파주 이런데서 했고 정한강 선생 안중복 선생 이런 분들이 자기 고향에서 했단 말이에요. 근대 국가에서 돈을 받은 건 아니에요. 그럼 뭐를 받았냐? 향약이라고 하는 그 소학이라든가 여기 출판되는 것은 국가에서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교재 교원은 국가에서 해줬단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민간 주도로 됐을 때 새마을중앙회장이였는데 뭐 예산이 형편없이 깎이죠. 그래서 그때 내 기억으로는 18억 정도 밖에 안 돼요. 왜 그러냐면 민주화 바람이 부니까 이 단체도 있어야 하고 저 단체도 있어야 되니까 새마을만 있어야 되는 거냐. 깎아 내렸단 말이죠. 그래서 18억마저도 많다고 특히 야당 위원들은 그것도 많다고 깎으려고 한단 말이야. 그런데 국회에 10번 나갔어요. 그것 때문에. 또 이제 국가에서 돈을 받으면 받은 만큼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국회에 나가서 답변을 해야 되요. 그때 신문에 난걸 지금도 쉽겠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300만 새마을 지도자들이 돈을 타기 위해서 지금 국회에서 이러는 거 아니다. 300만 새마을 지도자들이 활동을 해서 우리 국민 전체 지하에서 분출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엄청 많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퍼기 위해선 펌푸를 매설하고선 바가지 물을 부어야 펌핑이 되지 않느냐? 바가지 물을 요구하는 것이지 새마을이 운영, 경영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을 꾀어 달라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가지 물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교육의 일부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럼 전통적으로 국민교육은 국가에서 사는 것인데 그러니까 명분이 떳떳하고 그래서 바가지 물만 주면 퍼내는 건 우리가 하겠단 말이야. 그랬더니 지금은 어느 당 총재로 되있습니다만 야당 그런 분들이 바가지 물 너무 크단 말이야. 그럼 거기서 퍼 갈수 있는 양이 얼마인주 아십니까? 30억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300억 이런 것도 맘만 먹으면 쉽습니다. 그러나 18억은 명분 유지상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만 그 당시 상황은 참 어렵긴 어려웠어요. 특히 80여개 대학에 있는 교수들이 아주 저항에 부딪혀선 어떤 지역에선 애들이 와, 학생들이 와서가지고 대문에다가 못을 박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때 참 저는 중앙에서 이것을 맡고 있으면서 아주 어떻게 이것을 핸들링 해야 될 것인가 때문에 굉장히 애를 많이 썼습니다만
문. 고민이 많았겠네요.
답. 그러나 국내에서까지 의용이 뭐냐, 논의가 제기되는 이렇게 했었는데 그러나 이것이, 이것을 빙자해서 출세를 한다든지 돈을 준다든지, 이러면 의용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지 않느냐, 뭐 이렇게 다시 가닥을 찾으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는데 차원은 상당히 내려앉은 상태에서 찾은 거죠.
문. 또 한 번의 위기가 청문회 때 이미지가 많이 실추가 되지 않습니까? 그 이후 새마을지도자도 갈등을 겪었는데 여론조사를 보면 지속되어야 한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내용이?
답. 청문회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청문회는 정치적인 이유가 많았고. 그런데 인제 새마을은 그 당시 교묘하게도 전두환의 계시되는 분이 새마을 중앙회장을 맡았거든요. 근데 이분이 새마을에 대해서 열정은 있었지만 어떤 그 노하우라든가 아니면 거기에 대한 식견이 축적된 분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경영이랄까 규모 확대 면에 너무 치중하다보니까, 결국 부작용이 나고 그 부작용이 비리로까지 연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참 그 새마을운동의 존폐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국무총리 산하에 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새마을을 어떻게 할 것이냐? 바르게살기 어떻게 할 것이냐? 해가지고 모여가지고선 그거를 참 오랜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지역적으로 순회를 하면서 공천을 하자 그래서 인제 도 단위로 가는 데 호남지역은 서로 안 가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자원을 해서 호남지역 갔어요. 호남지역에 가지고 선 전주라든가 광주 다니면서 이 새마을이 없어져야 되느냐, 있느냐, 하느냐. 하는 걸 가지고 논의를 했었는데 근데 그 어떻게 발언하느냐에 따라서 아 다르고 어 다른 거 아니겠어요. 근데 이 전주, 광주 할 거 없이 전폭적으로 새마을은 지속되야 한다는 공천의 결과가 그렇게 나오고 그래서 새마을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기보다는 현상 유지 차원에서 유지가 되어가는 상태가 됐는데, 새마을중앙회 있던 사람이 바뀌고 그래서 누구를 할 거냐? 청백리로 이름난 김수학씨가 갔잖아요. 근데 김수학씨가 들어갔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 된 다음에 맨날 어째서 내무관료 출신들로 하느냐? 이거 관주도 아니냐 말이여, 그래서 갑자기 내가 지명되가지고 간 이유가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난 그때 이 새마을 살리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사기를 어떻게 현제 수준 이하로 내려가지 않게 붙들 것이냐 이건데. 그러면 300만이라는 새마을지도자의 사기를 어떻게 붙들 것이냐? 옛말에 동사서법이라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 윤락녀를 구해내려면 너 자신이 윤락녀가 되라 이거예요. 그런데 여기다 완장 차고 가서 너 이리 나와 이러면 야 너는 어미 애비 잘 만나서 그렇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반응이 나와 그러나 이 완장 떼고 자기 자신이 그 윤락녀 있는데 같이 들어가서 자면서 같은 생황을 어느 수준에서 할 거냐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지만 야 우리 이렇게 살다간 우리 미래가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청산할 수 있는 마음 좀 가져보면 어떠냐? 이래보면 그 사람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우리 용기를 내자 이렇게 해서 구해내는 것을 동사 같은 일을 하면서 포섭하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동사서법이라 그래. 그런데 그러한 중앙회에 그러한 사건이 나고 난 뒤에 새마을지도자 어디가 고갤 들고 다닐 수가 없이 됐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신문에서도 그냥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이 맑다 이랬게 됐단 말이에요. 참 큰일 났어요. 그래서 그때 연구회회장을 하고 그다음에 중앙회 회장을 되었는데 그서 인제 물 연구하는 분을 찾아가가기고 이 윗물이 맡아야 아랫물이 맑다 그러는데 양짝에다 한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란 말이야. 한강을 놓고 할 적에 내가 이렇게 물었어요. 여기 지금 조끔만 도랑이 흘러가는데 말이에요. 여기 사람이 여기서 오줌물 깔렸단 말이에요. 그럼 벌써 지린내가 나고 할 꺼 아니에요. 그럼 이물이 어디까지 더러우냐 했더니, 3M이상 안 간다고 하더라고 3M이상 안 간다고. 내 그래서 윗물은 흐려도 아랫물은 안 흐를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밑에 얘기하면서 이 새마을은 정상에 섰다고 다 망가지는 게 아니지 아니냐 말이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가지고 있는 거 아니냔 말이야. 두 번째는 동사서법을 해야겠단 말이에요. 아니 새마을중앙회장이라는 사람이 누구 편에 설거냐, 이거야 300만 새마을 지도자 들 중에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한 820명 정도 됐어요. 그 사람들은 불가피 하지. 왜냐면 지회 이 행정을 맡으니까. 취직자리니까. 이 새마을중앙회장도 월급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내가 고민한 것이 내가 거기서 월급을 받고 820명 행정요원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월급을 안 받고 새마을지도자 편에 설 것인지. 바로 이 위기 극복은 이제 이쪽 세대였단 말이야. 그래서 그 이해부 내무장관 할 적에 낙점이 됐다고 가야 한다고 해서 가는데 나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이거지. 그래 무슨 조건이오? 하나는 명예직으로 하겠다 말이야. 두 번째는 월급을 책정까지 안하는 월급 없이 하겠다 이거지 거야. 그게 될까요? 이래 아니 안 될게 뭐가 있냔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학교 사표내지 않고, 왜냐면 학교 수업을 빠지면 되니까. 그러고 거기가선 월급을 안 받고 그러고선 각 시군마다 다니면서 우리 한번 뭉칩시다. 그래서 동사 선포라는 것이 다소 효과가 있지 않나. 그리고선 같이 하다가 욕진일부일당 우리가 할 발짝 더 나가기 위해선 한 동으로 서자 맨날 앞사람 보면 뒤통수 밖에 안보여 한 덤 봐야 앞에 보이니까 그리고 만사성패 위기니라. 모든 일이 성공했든 실패든 내 책임으로 여기자 말이야. 그래서 지금도 각지회가면 붙어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렇게 해서 했더니 분위기가 좋아 진거 같다고들 얘기 하대요.
문. 그때 여론조사 같은 거 하지 않았나요?
답.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여론조사 안했어요. 근데 수시로 신문사라든지 여러 곳에서 여론 조사하는데 외국이라든지 이런 걸 보면 우선 여론 조사의 주축이 두 가지가 있습디다. 하나는 뭐냐면 지도자 중에 어떤 지도자가 바람직하냐 할 적에 이승만 대통령부터 쭉 나와서 김구선생 다 나와요. 그런 항목이 있고 또 하나는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국민운동이 뭐냐 새마을이 들어가요. 그래서 꼭 박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상당한 1, 2등 상당한 차이에서 격차를 가지고 1위로 나오고 아마 중앙회기록 다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지금도 압도적으로 이게 나와요. 이걸 보면 새마을운동이 비록 정치적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그러나 마을 단위에서 순수한 마을 주민이 참여해서 마을을 일으켰다고 하면 이점에서 보면 그건 정치 바람이 들어올 일이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아마 자손들에게 이어져서 지금 38년 됐는데 다 중년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금 네티즌을 상대로 해도 새마을운동이 나온단 말이죠. 전 그걸 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가정에서 이렇게 조상으로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가 잠재의식에 들어 있고 다른 이유는 38세대면 해외 나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오고 유학을 하고 해외가 취업을 하고 엄청난 해외경험한 사람이 많아요. 근데 해외 나가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른 나라사람들이 새마을을 물어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많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 새마을 좀 가르쳐달라고 묻는데 답변을 못하겠다. 이런 거 보면 해외에서 반응이 이렇구나. 그래서 네티즌 잠재의식을 새마을을 그밖에 하나 더 얘길 들자면 지금도요 중국에서 올림픽을 합니다만 그 후진타오 같은 사람은 85%의 가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이냐? 그래서 농촌 건설운동이라고 하는데 벤치마킹을 새마을로 하자. 그래가지고 그분들이 초기에 내놓은 거 보면 한국 돈으로 50조를 내놓겠다. 그래서 이것이 새마을에 관한 얘기에요. 그래서 내가 그동안 북경대학에 초청도 받아서 강의도 해줬고 그 다음에 농업의 선진지역이라는 윤현성 거기도 갔다 왔고, 또 이짝에 공자고향 국보, 또 상해 부시장이 단장이 돼서 온 사람들도 나한테 새마을 알려달라고 해서 그래서 저 사람들이 새마을을 어떻게 흡수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지만은 이제 그러한 것을 보면 바로 한국의 새마을 중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냐 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고비에 테이크 업을 어떻게 하느냐 그걸 배우려 하는 것이지 지금 새마을운동 38년 돼가지고 이렇게 지금 도시가 되고 했다. 이걸 보려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착각 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새마을 하면 그 때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이겨낸 것이냐? 하는 노하우는 우리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현상만 유지하고 복지마을이다 이렇게 얘기만 해주는 이러한 모습은 조금 삼가야 되지 않을까?
문. 복지 모델로써 가치를 더 부각시키는
답. 그렇죠. 모델이 굴러온 과정 그것이 중요 한거죠. 그래서 우리가 고속도로 건설이 참 잘됐고 지하철이 잘됐다고 애기를 하죠. 근데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보수비가 상당히 많다는 얘기 많잖아요. 그건 왜냐면 일본이나 이런 나라에 비해서 보수비가 많이 드는 것은 뭐냐면 외형적인 고속도로 연장이라는 것은 서로 비견될 수 있습니다만 바로 고속도로 밑에는 지층이 다르잖아요. 암반도 있고 지층도 있잖아요. 근데 그때 그 지층에 따라서 고속도로 건설할 때 두께가 달라요. 그런데 그냥 일률적으로 해놓으니까 요절도가 심해져가지고 보수해야 되는 이런 거. 그러니까 고속도로의 노하우는 고속도로를 몇 10,000Km로 만들었다 이게 아니고 진흙 구덩이에 고속도로 어떻게 하느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마을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한국보다 뒤진 나라에서 새마을을 요구하는 것이지 우리보다 앞서간 나라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은 같은 건물을 져도 균형이 왜 생기느냐 이런 걸 묻는 것이지 아니 2층, 3층 지을 줄 모르겠어요.
문. 그러면 새마을운동의 국제화 같은 게 가치 같은 게 어떻게
답. 새마을을 국제화 하려면요 몽고의 모델, 그 몽골에 갔다 온 사람들이 제일 이상한 것이 뭐냐면 음식이 맞지 않고 관광거리가 없고, 뭐 이런 얘기를 해요. 그렇게 가서 보면요 볼게 없어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 물어봐도 단군을 아느냐 이렇게 물어가지고 아는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 말고는 그러면 너 무식하게 단군도 모르냐 이런 말 안통해요. 그러나 세계 어느 사람에게든지 칭기즈칸 아느냐 모른다하면 이 무식한 놈 이렇게 되요. 그러면 몽골이 반사막에 있는 나라지만 그렇게 위대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자존심이라는 것은 대단해요. 그건 눈에 안보이죠. 그러니까 몽고 사람 볼 때는 그 칭기즈칸이라고 역사와 적합 된 그 모습을 봐야 되요. 또 칭기즈칸 1620년대 사람 아니겠어요.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700~800년 전 사람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일보 양보해서 그 몽골을 보러 간다면 700년 전을 보러 간다. 이런 생각을 가져가면 볼게 엄청 많죠. 그러니까 호필연 이후엔 온 나라니까 거긴 중국이고 호필연 이전에 몽고 비사가 씌여진 거기는 지금 거기란 말이에요. 지금 가서 보면 우리가 발견할 게 많아요. 그래서 난 7년 동안에 뭐를 주로 봤냐면 천막만 그거 있잖아요. 개로 그것만 봤는데 거기엔 우리나라의 주역이랑 역학 가지고 풀지 않으면 안 될 오묘한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고 우주의 논리가 여기 담겨 있어요. 해서 그걸 가지고 석가래도 세어보고 원이 어떻고 전부해가지고 나 나름대로 결론을 냈는데 몽고 사람 중에서 그걸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하냐? 해가지고 하루촉한인가 이분이 돌아가셨지만 몽골, 내 몽골 사람인데 대만에 있는 학자에요. 근데 그분은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하고, 몽골말 잘하고, 중국어도 잘하고 아주 대단한 분이예요. 그분을 찾아갔어요. 물어 물어가지고. 그래 내가 몽골에 결에 대해서 결론이 이렇게 나왔다. 맞느냐? 이래가지고 했더니 한 30분간 맞다 이거에요.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쓴거에요. 그래서 이 책을 썼는데 이 우리의 텐트는 그냥 아무대나 치면 되는 거죠. 그 게르는 방향이 반드시 남쪽으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게르에 들어가면 부모님 자는 침대, 어린이 자는 침대, 그 다음에 사냥한데 필요한 도구, 농사 지는 데 필요한 도구 두는 자리, 물통 놓는 자리, 겨울에 양 보호하는 자리, 그 다음에 불교 국가 아니에요? 부처 놓는 자리. 아주 정해져 있어요. 그리고 석가래가 전부 몇 개냐면 72개에요. 72라는 건 뭐냐면 우리나라에 기후로 봐가지고 기후하잖아요. 기라는 것은 15일을 얘기하는 것이고 후라는 것은 5일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가 3개모이면 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후라 그래. 15일마다 입춘, 우수, 경첩, 춘분 하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15일 만큼 나오죠? 12월이 24개월이니까 그러면 바로 72라는 게 뭐냐면 72곱하기 5해 보세요. 그러면 360이 나오죠? 그럼 몽골이 1년 달력이 360일이야. 그걸 태음력이라고 해요. 우리나라 음력은 357.또는 58일 이걸 태양태음력 절충형이고 365일은 태양력이라고 하고. 그래서 태양력 365일하고 태음력 360하고 절충한 것이 우리의 음력이야. 그래서 그것을 태양태음력이라고 하는 것 이예요. 그래서 몽골의 설날하고 우리의 설날이 달라. 그래 인제 거기 보면 우리가 5일장 갖다 오잖아요. 거기는 5일장 갔다 오면 남쪽에서부터 수건하나가 석가래 하나 건너가. 거기 이렇게 보면 달력이 거기 있어, 그래서 달력을 보면 몇 월 몇 파순이 다 나와요. 그뿐만 아니라 방향도 다 나오죠. 그래서 그 오묘함 이라는 것은 아주 알고 보면 아주그냥 감탄할 내용인데 근데 그거를 써서 저쪽에 기증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몽골말로해가지고 대력을 했지만은 한권도 안 팔려, 난 보너스 다 들여서 1,600만원 들여서 자비 출판을 2,000만원 들였더니. 괜히 그때 만들어 놓고선 몇 개월 묵혔죠. 그랬더니 몽고하고 우리하고 국교가 이루어져 그랬더니 몽고에 갔더니 붐이 나더라고 그래서 인제 기업인들 간다 길래 우리의 새마을의 경험을 보내주자. 당신 책 좀 사죠. 그래서 책에다가 한 페이지를 다시 무슨 회사, 그 다음 밑에는 우리는 새마을 이렇게 해서 가난을 이겨냈습니다. 이 경험을 선물해 드립니다. 이래가지고 했더니 회사마다 50부, 100부, 200부 사줘. 그래가지고 다 팔았지. 인제 그렇게 해서 들어온 돈은 인쇄소 주고. 책은 내가가지고 있다가 몽골 대통령을 우리학교서 단국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주려고 초청을 했어요. 그때 전세 비행기 와가지고 다 실러 보냈죠. 그랬더니 이분이 이거 자기네가 국민 필독서를 만들겠다고, 그래서 아주 그때부터 친해졌고, 그것이 난 줄 적에 국회라든가 정부에만 소중하지 말고, 부인회 단체, 상공인 단체, 지방, 거기 도로를 아이마크라고 해요. 21개가 있어요. 18개에 광역도하고 3개 직할시거든요. 그래서 21개 골고루 내보내가지고 참고하도록 해주시오. 뭐 어떻게 내보냈는지 모르지만 그랬더니 몽골에 가면 방상도 나오고 인터뷰도 나오고
문. 새마을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가닥 잡아서 가야 할지
답. 우선 1차적으로 정치인이고 관료고 일반인이든 마찬가지로 정치적 논리로 새마을에 접근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정치적 측면에선 조장을 해줄지 언정 어떤 관여라든가, 이용하려고 하면 새마을 망해요. 우리가 이미 경험했잖아요. 그래서 그 새마을이라는 것은 지도자들의 순박하고 순수하고 봉사정신 있는데 그걸 그대로 잘 가꿔야지. 거기다 정치논리란 바람을 넣어 주가지고 사람을 무너트리면 안 되거든요. 그거 이용하는 국가 자산입니다. 그런 점을 서로가 조심을 해야 될 것 같고 두 번째는 이젠 새마을운동을 품격을 높여서 고품격화 운동을 좀 다시 한 번 되고 보는 이런걸 해야 되요.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새마을운동하면 구질구질한 청소나 하고 뒷골목이나 쓰고 남들이 안보는 지체 부 자유자 보조나 해주고, 심부름이나 해주고, 그건 다 해야 되요. 그러나 그걸 하면서도 거기다 플러스 알파, 해가지고 이제는 품격을 높여야죠.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우리 사회상 사고 성향하고 지금하고 엄청나게 다르잖아요. 사이버 시대로 바뀌었어요. 그러면 현 사회풍토에 맞는 이러한 품격을 향상시켜가지고 맞는걸 해야 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변화해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하나있어요. 그건 뭐냐면 윤리의 불가변적 측면이에요. 윤리라는 것은 가변적 측면이 있고 불가변적 측면이 있는데, 옛날에 윤리도덕하면 부모님에게 효도하라 예를 들면 아침저녁으로 나갔다 오겠습니다. 갔다 왔습니다. 그 다음에 이부자리 깔아 드리고 따뜻하냐, 안 따뜻하냐. 이게 효의 시초라고 봤잖아요. 근데 지금은 직장 따로 다니니 그게 안 돼요. 그러니까 고개 윤리적인 가변적 측면이에요. 시대에 따라 바뀌어. 그러나 자녀로써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이거는 영원히 불가변적이 거예요. 그러니까 이부자리를 깔아 들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도 자주 전화해서 안부 드리라는 것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 정신 이거는 바꿔서는 안 되는 거죠, 바뀔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 지금도 아무리 개인주의가 발달이 됐고 존중돼야 한다고 하지만은 그러나 패륜아는 법이 용서하지 않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불가변적 측면. 그래서 요걸 고품격화 하는, 그래서 효 문화라든지 아니면 인생교육을 한다든지 그래서 우리의 환경을 우리가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관리해 나가는 그리고 사이버 문화면에서 패륜적이고 반도덕적인 것을 우리가 스스로 없애나간다든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인제 국내적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좀 더 품격이 높은 시민 상으로 가꾸어 나가는 이러한 차원에서 새마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인제 그러한 가운데 보면 우리가 노령화 사회는 바람하지 않죠. 그러나 고령화 사회는 괜찮아요. 건강한 노인만은 건 괜찮아. 그러니까 인제 노령화 사회로 가되 우리는 고령화라고 하는 이런 점에서 노인 건강까지 실버 사회를 어떻게 끌어갈 것이냐 이러한 것까지 생각을 해가면서 새마을운동의 패턴 변화를 추구했으면 국내적인 문제입니다만 그것도 내가 드린 자료입니다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참고해 주시길 바라고, 그다음에 인제 또 하나 세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이 뭐냐면 우리가 계속 슬픈 영화 보면 눈물이 나고 눈물을 흐리며 영화를 보면 와 잘됐다 이랬는데 이제 거의 영화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 없잖아요. 또 그런 걸 원하지도 않고. 우리의 감정 패턴이 엄청나게 달라져 있어. 그러면 이 달라졌다는 것은 뭐냐면 우리의 생활이라든지 감정 패턴이라든지 엄청나게 바뀌었다는 얘긴데 어떻게 보면 이 국제화 됐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러면 과거의 눈물과 좋다는 감동으로 연결되냐 하면 핍박, 무슨 가난, 구속, 지배 무슨 이런 거 때문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과거에는 퇴계니 율곡이니 하는 분들이 개인적인 국제 선생이 되었지만 이제는 국민이 바로 국제 사회에 스승다운 국민상이 되기 위한 그래서 그중에 하나를 여러 가지 분야를 그중에 하나를 새마을이라고 하는 이러한 아티클 하나 가지고 서 그래서 우리도 국자사회 속에 이 문제만큼은 이 분야만큼, 선생님이 될 수 있단 말이야. 좀 이 단계를 올라가면서 국제 사회를 올라 보는 이래가지고 국민들의 자존심도 격상시키는데 새마을이 한 몫 해야 하지 않겠나. 그 다음에 하나 더 한다면 우리는 남북통일이라는 문제가 언제 해결 될지 모르겠지만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남북통일이 왔을 적에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많이 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순기능적인 것도 있지만 역기능 적인 것도 엄청나게 많아요. 그래서 통일의 기쁨보다는 통일 이후에 불거지는 역기능 때문에 더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죠. 뭐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민주화 자체를 싫어하는 여론도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국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급작스런 변화에 적응 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도리어 발전적인 변화지만 고통을 느낄 때감 많아요. 그러면 그런 걸 완충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집단이 누군가 말이에요? 그러나 이 기업이라든지 사회단체는 자기 목적 때문에 그런 게 안돼요. 봉사단체만이 가능해요. 그래서 이 새마을운동은 특히 남북통일에 있어서 이 남북에 반세기 격절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심각해요. 인간적으로 왜냐면 거기 남한 사람들 500만이 지금 천만 이상으로 하자나요. 그 500만이 눈물 없이 온 사람이 없어. 빼겼던 지, 쫓겼던 지 이래가지고 온 사람들 아니에요. 그래서 한을 품은 사람들 아니에요. 그리고 거기에 가족이 다 온 분도 있지만 노부모라든가 가족 일부 남겨 놓고 왔는데 그분이 거기서 제대로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는 얘기를 직접, 간접적으로 이어져 왔나요. 이래가지고 또 원한이 생겼죠. 그 다음에 자기네 농초, 가업, 누가 빼어 갔느냐? 자기네 선조의 산소는 어떻게 됐느냐. 황무지가 됐을 적에 이거 조상에 대한 죄악감을 뭘로 씻을 거냐 위로 받을 길이 없어요. 그러면 그 때 우리 형, 우리 부모들 누가 죽였냐? 다 알게 되요. 거기가면 그러면 아무리 도덕군자처럼 여기서 살아 왔다 하더라도, 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고 풍요롭게 살아 왔다 하더라도 그러한 혈육에 대한 감정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면 저 놈이 우리 아버지 때려 죽였다는데 가만히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걸 하려면 지금부터 새마을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기엔 월남하고 있는 이북오도 쯤 있잖아요. 이 사람들 중에 천만이상가족이니까 오백만 다 연령이 높았지만 오백만은 그 아래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 분들이 애향심을 가지고 그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 조율 좀 했으면 좋겠고. 또 두 번째 집단은 이 탈북이라든지 또 해외에 중국 같은데 친북적인 사람들이 있고 아닌 사람 있습니다만 이런 사람들 교민을 잘 교육을 시켜가지고 싸움이 벌어질 적엔 중국에 있는 동포가 싸움을 말릴 명분이 가장 좋잖아요. 그런 것도 한번 생각해보고 그다음에 인제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여기서 가면 저쪽에 사람들하고 남쪽에 사람들하고 자본주의 풍토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거 않겠어요. 그러면 그 풍토에 적응하는데 그 갭을 어떻게 제거 시켜 줄 것이냐 하는 이러한 적응 훈련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가 그래 그런 사람들 시켜가지고 이건 이렇게 적응하는 것이다. 또 IT문화에는 이걸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그라고 인제 마지막에 하나는 뭐냐면 동서독에서 특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 노동에 질적 평가 면에서 동독 사람이 서독에 같은 노동을 해도 임금에 70%60%밖에 못 받는다잖아요. 여기서 좌절감 느끼고 격차감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끼고 차등의식을 느끼고 기분 나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자본주의에 적응 할 수 있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시킬 것이며 적응 할 것이며 또 한국에 그런 풍토 속에 존재하는 이 사업체에 어떻게 적용을 할 것이냐 하는 이러한 사전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적응을 가급적이면 가볍게 할 수 있는 이러한 몇 가지가 준비되어야 될 걸로 알고 있어요. 새마을운동이 가장 좋아 그게. 새마을운동이. 그래가지고 이북오도 정도 보면 새마을 지도자로써, 거기 있어요. 거기 굉장히 봉사 정신이 강해요. 그러니까 그중에서도 원한이라는가 이런 것들 안 가진 분들 많이 있거든. 그런 분들이 나도 이북 고향 버리고 나왔지만 야 지금 와서 아버지한테 잔악하게 했다고 해서 또 때려죽이면 또 이놈이 니 아들한테 어떻게 할 꺼냐? 그래서 동사서법이요. 같은 이북에 고통을 느낀 사람이 중간에 서야지. 제주도 사람이 경상도, 전라도 있는데 가서 너 왜 싸워 이럼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