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0년 4월 22일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 선포한 날인데, 1969년도 5월 달에 고속도로를 타고 청주 인터체인지(IC) 들어가다 보면 플라타너스가 울창하게 있었습니다. 당시 같이 갔던 사람들이 선배님들이었는데 그 분들이 프랑스 및 미국 갔다 온 이야기로 자랑을 하기에‘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라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나무도 없고, 풀도 없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 플라타너스가 얼마나 멋있습니까.’라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만든 노래가‘좋아졌네’라는 노래입니다. 그것이 제가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청주를 가면서 보았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면서 ‘이리보아도 좋아졌고, 저리보아도 좋아 졌소’가 시작이 되어‘좋아졌네, 좋아졌어’그 노래를 작곡했고, 방송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4월 22일에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김준 원장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김준 원장이 하는 얘기가 박정희 대통령께서 덴마크가 잘사는 나라가 된 것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덴마크의 국민운동(a national movement)에 음악과 체육이 들어가 있다면서 우리도 음악을 넣어야 하는데 새마을 음악은 누구를 시켜서 할 거냐고 묻자 김준 원장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우물 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텔레비전을 보셨는지 머리 빡빡 깎고 기타들고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김준 원장이 알아듣고는 저를 불렀습니다. 그래서‘좋아졌네’라는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고 그 노래 때문에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고양에 있는 독농가연수원에서는 농촌에서 농사를 잘 짓는 사람들을 모셔다 지도자교육을 시켰는데, 그곳에서 저는 지도자들에게‘좋아졌네’라는 노래를 가르치면서 새마을운동을 하게 된 동기 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나 분위기는?
답.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노래를 하라고 하면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노래하라고 하면 안합니다. 그것이 애로사항이었습니다. 입교 첫날 첫 시간에 강당에 모이자마자 노래하자고 하면 노래를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시 시도했던 것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우리 모두 다 같이 손뼉을 짝! 짝!’이 노래를 부르게 하니까 모두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왜 노래를 못하고 주춤했는가에 대해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 보니까 우리 노래 역사 중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창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에 학교 다닐 때나 중학교 다닐 때 해방되고 6.25때까지도 성악가라는 사람을 보면 잘한다고 추앙하고 박수치고 좋아만했지, 노래를 직접 부르라고 하면 안 불렀습니다. 그래서 독창을 잘했고, 중창도 알았고, 합창도 다 알았는데 요즘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창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가제창, 애국가 제창, 사가제창, 군가제창이라고 하는데 제창이라는 것은 한곳에 단합이라는 것입니다. 곡조가 틀리건 음이 높고 낮건 다 같이 새마을노래를 제창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창을 시키니까 노인들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부른 노래가‘좋아졌네’가 아니라 군밤타령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5000천 역사 중 천 년 전의 대중가요입니다. ‘쾌지나 칭칭나네’노래도 천 년 전에 경상도에서 불린 노래입니다. 군밤타령은 노래를 부르면 혼자 안 부릅니다. 주고받고 또 다 같이 코러스 넣고 하는 이런 전통이 있었는데 일제 36년 때문에 전통이 깨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단합이 잘 되니까 일본의 농촌이 가난할 때 불렀던 뽕짝을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옆에 있는 중국대륙이나 세계를 지배했던 칭기즈 칸의 후예인 금나라나 원나라가 한국을 찾아와서 남한산성에서 항복문서 받고, 여자들 을 씨받이 하겠다고 다 데리고 가고, 1년에 한번 원나라에 조공하라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는데 이것을 역사학자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우리나라가 오천년 역사에서 외세의 침략을 수십 번 받았는데 왜 한국을 지배하지 못 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단일민족, 말과 글과 소리가 같은,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똑같은 단일민족인데, 이 사람들을 지배하려면 한국 사람보다 머리가 좋거나 잘나야 되는데 자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한국을 지배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총독부도 안두고 그냥 갔다고 하는데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게 예를 들면 청나라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남을 나라인데 한국에 와서 우호동맹만 맺고 그냥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모래알 모양으로 찢어지고 개인주의, 집단주의가 된 것이 일본사람들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단합이 잘되니까 일본식의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저는 새마을운동을 할 때 노래를 혼자 부르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찬송가를 부르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데, 설교중심으로 떠드는 교회는 안 됩니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가 잘 융합이 된 교회가 잘 됩니다. 그러듯이 새마을도 노래를 독창하지 말고 제창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연세대학교 음대 1기생으로 작곡과에서 성악을 했는데, 성악 하는 사람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폼을 잡고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러면 밑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은 위축이 됩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소리가 있고 소리 중에서도 즐거움을 주라고 만든 게 노래인데 즐겁게 부를 수 있는 것을 우렁차게 겁을 주면서 부르는 게 싫었습니다. 음악이 생활화가 되어야지 독창하는 곳에 가서 잘한다고 박수치고 이런 것이 새마을에 있으면 안 됩니다. 새마을은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이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고 같이 불러야 우리 민족이 다시 단합이 되고 정서가 함양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자장가 부르듯이 정서가 같이 어우러져야지 끝과 끝이 다르고, 너는 너, 나는 나 이러면 안 됩니다. 이런 문화를 창작하기 위해서 제가 건전가요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건전가요라는 말을 제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 하면 건전이라는 말을 쓰면 흑백논리가 됩니다. 건전이 있으면 불건전한 것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건전을 붙이면 벌써 불건전이 생각이 나는데 이런 이분법에 의해서 사고방식이 발달되면 융통성이 없어집니다.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보면 우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으로 움켜진 하나의 융통성입니다. 극과 극으로 가는 사람들, 톱니바퀴처럼 논리적으로 떠드는 사람들이 융통해 질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이 준비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의 노래는 독창하면 안 되고 제창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것은 제가 대한민국 1호로 공개방송을 했는데 대학교를 가든지 군대를 가든지 공장에 가든지 처음 가면 초면인데 제가 노래를 통해서 30~40분 동안 단합을 시켜 놓으면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300~400명 어떤 때는 천명 이 모이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뭉치면 천만금이 아니라 금덩어리를 안은 듯 한 기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리밭이라는 노래는 제창을 하면 뒤에 가서 옛 생각이 나올 때부터는 천지개벽하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게 제창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국가 부르는 것을 보면 단상에 있는 사람이나 밑에 있는 사람이나 얼굴을 보면 전부 송장 놓고 부르는 듯이 부릅니다. 만약 남북이 통일되어서 평양에 들어갔다고 하면 태극기를 흔들 텐데, 그때 제일 많이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일 것입니다. 그때 흥이 있고 생기 있게 불러야하는데 조용히 무표정한 얼굴로 부르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TV를 끄고 싶습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눈은 아래를 보고 목소리도 밑으로 깔고 부릅니다. 그 이유가 음악가들이 국민들에게 첫인상을 그렇게 주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TV에 젊은이들이 나와서 웃기기도 하고 해서 많이 밝아졌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하면 잔망스럽다고 욕했습니다. 이게 어른들의 생각입니다. 제가 심지어 6.25세대들 전우들을 만나서 덕수궁을 지나가는데 어떤 남녀가 키스하는 것을 봤다면 당신들 전부 '저놈들 대낮에 무슨' 이런 생각을 할 텐데 그런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 손자나 딸이 앉아있으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것이니 그럴 때 당신이 카메라가 있으면 저놈들 사진이나 한 장 찍어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당신이 팔자가 좋아지지 대낮에 젊은 놈들 뭐야 이렇게 하니까 선생들이 욕먹는다는 것입니다. 새마을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저는요 음악을 하면서 배운 게 뭐냐 하면요 낙(樂)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낙이 뭘까, 저는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연세대학교 들어가서 공부할 때부터 내가 내는 소리가 표정을 가지고 하듯 비디오가 즐거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 세대를 보면 즐거운 게 하나도 없고, 찡그리고 궁상맞고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 사는 게 이렇게 사는 게 아닌 데라는 생각을 갖고 음악대학에 갔습니다. 제가 음악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무엇이 못나서 음악학교에 가나라며 많이 싸웠는데, 사람이 돈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얼굴도 웃고 즐겁게 살아야한다면서 음악대학교에 갔습니다. 음악을 하면서도 음악의 표정, 음악의 소리가 즐겁지 않으면 배우지 않고 부르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는데, 지금도 듣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듣는데 예를 들어 버스를 탔는데 목이 멘 이별가가나오고 개인 신세타령, 집단 신세타령, 사주팔자 나쁜 것, 술 한 잔 먹고 노래하는 등 다들 술집노래입니다. 가정집에서 나온 노래나 가사, 또는 공장이나 학원 또는 농촌에서 나온 노래, 아니면 군대에서 나온 노래는 부르지 않습니다. 연수원에서도 그 안에서만‘좋아졌네’노래를 부르지 밖에 나가면 안 부릅니다. 그것이 왜냐 하면 24시간 중에 8시간 일하는 시간은 가정에서 혜택을 받으니까 집안에서, 8시간은 학교에서 공부하니까 선생님에 따라, 학교, 집 외에 밖에만 나가면 전부 술집 노래입니다. 그것을 팔아먹고 돈을 버는 게 방송국입니다. 거기에서 밤무대에서 오만가지 소리, 밥 벌어먹는 것을 국제적인 용어로 연예인이라고 합니다. 문화예술이 아닙니다.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창달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문화예술이 창달 안 되고 민족이 연예오락이 창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와대 파티 등 장관 파티에 가면 사회자부터 술집에서부터 빌어먹는 노래가 박수를 받고 돈을 벌고 뜨는데 이런 것을 또 우리는 웰빙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문화생활이 좋아졌다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너희들은 아직도 5등, 7등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야만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가나 소리 지르고 떠들고 귀가 찢어지도록 사운드를 높이는 이러한 노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좋은 노래를, 표준의 사운드를 가르치려고 하니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극복했습니다. 욕먹는 즐거움, 기다리는 즐거움, 지금도 저는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면 참는 즐거움, 극복하는 즐거움, 지나가다 쓰레기가 있으면 줍는 즐거움, 책을 읽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등 이 모든 게 새마을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건강관리도 잘하는 것입니다. 물론 운동도 해야 하지만 감정자체가 사람이 만나서 얼굴이 찡그러진 사람은 재수 없는 상이라고 합니다. 말할 때도 사람 똑바로 안 쳐다보고 옆으로 힐끗 쳐다보는 것도 재수 없는 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조심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은 국회의원 나가면 안 되고 지도자 되면 큰일 납니다. 집안이 망합니다. 왜냐 하면 그 사람의 생각에는 부정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새마을지도자들한테 당부하는 것은 Positive Mind를 가져라, 기다리는 즐거움, 욕먹는 즐거움을 가져야하는데 말이 쉽지 하려면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 보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새마을을 하면서 애로사항이었다면 각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게 힘들었는데 그래도 꾸준히 방송이든 어디든 새마을 노래를 부르고 했더니 새마을화가 되었습니다. 노래는 음악생활이 아니라 생활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새마을에 그것을 도입한 것입니다. 새마을이 새마을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습관 되어 온 것을 고치려고 하니까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노래하다말고 집어치워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네가 건전하면 얼마나 건전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건전하지는 않지만 건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라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건전하지는 않지만 건전하려고 노력한다고 대답하니까 그때 서야 조용해지고 그렇게 새마을운동은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찡그리지 말고 That's my pleasure, 나의 낙이다. 기다리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으로 극복해서 지금 까지도 제 생활도 그렇게 극복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생을 많이 하면 고생한 만큼 돌아옵니다. 그것이 하늘이 내린 하나의 룰이라고 봐도 되는데, 고생을 하나도 안 해 본 사람은 그 사람 행복의 무게가 적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 본 사람은 자기에게 오는 행복을 굉장히 귀중하게 다룹니다. 새마을도 제가 볼 때 출발할 때 대통령이 선언하고 국가에서 전부 지원하고 했는데 저는 그런 것을 한 사람이 아니고 지도자들 교육하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 의식을 바꾸려고 하니까 정말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육을 하다보니까 문제점이 많으면서도 하나하나 극복해 가면서 좋아졌던 것이 좋아졌네라는 노래가 생일축하 노래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생일에 '좋아졌네 할머니가 좋아졌어' 이렇게 생일축하 노래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듣고 얼마나 보람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일본에 있는 교포들을 위해서 8.15 광복절 날 갔는데 일본 동경에서 역사적으로 제일 오래 된 극장인 국제극장이라고 있는데 좌석이 5,200석입니다. 우리나라의 광화문에 있는 우남회관은 4천석 밖에 안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50~60년 전에 그런 큰 극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교포들이 8.15광복절날 다모였습니다. 그곳에서‘좋아졌네’를 불렀는데 다 따라했습니다. 오천여 명이 후렴부분인 ‘우물가에 물을 깃는 순이 얼굴이 하하’는 못하니까‘좋아졌네 좋아졌어 이리보아도 좋아졌고 저리보아도 좋아졌네’는 다 따라했습니다. 그때 제가 감격이 대단했습니다. 그곳에서 좋아져네 노래를 가르쳐 주고 좋다 박수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새마을문화 창달을 위해서는 박수, 구호, 새마을노래, 새마을율동, 새마을동작 이 모든 게 생활에 들어와 있어야 됩니다. 그때 제가 좋다 박수를 수출용이라고 만들었는데, 좋다 박수를 한· 일축구전을 할 때 사용했습니다. 한때 나이든 사람들은 예를 들어 한· 일축구전을 하게 될 때 한국에 와서 축구를 하면 일본 국가를 먼저 부르고 우리국가를 나중에 부르는 것이 의식인데 일본 동경에서 축구를 하는데 일본인들이 자기들 국가를 먼저 불렀습니다. 그 사건이 커져 난리가 났었습니다. 한번은 동대문 운동장에 삼만 명이 들어가는데 한국의 축구팬들이 호주머니에 소주병과 박카스 병을 들고 들어와서 일본 놈들 까죽이겠다고 난리가 났다면서 저보고 군중을 휘어잡는 일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제가 관중이 꽉 차있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마이크에 대고 새마을 좋다 박수를 가르쳤습니다. 이게 히트가 된 것입니다. 본부석에 앉아있던 일본 교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박성준이라는 부단장이 저를 보더니 마이크 하나잡고 기타들고 관중들을 휘어잡으니까 놀란 것입니다. 그때 좋다 박수를 어떻게 가르쳤냐면 예를 들어 만약 차범근이 일본선수들에 의해 넘어지면 혼자 성질내지 말고 일본 선수들한테 대고‘아~’하고 소리를 지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시작할 때 누가 좋아하지도 않고 따라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아~’소리 지르고 박수한번 치고‘죽여’라고 하면서 가르쳤더니 처음에는 안 따라하더니 몇 사람이 따라하니까 좋다고 하면서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불이 붙어서‘아침부터 죽여, 저녁까지 죽여, 하루 종일 죽여’이렇게 됐는데, 그게 1절입니다. 2절은‘월요일부터 죽여, 일요일까지 죽여, 일주일 내내 죽여’이고, 3절은‘첫날부터 죽여, 월말까지 죽여, 한 달 내내 죽여’, 4절은‘정월부터 죽여, 연말까지 죽여, 1년 내내 죽여’, 5절은‘날 때부터 죽여, 죽을 때 까지 죽여, 평생죽여’그렇게 독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골인, 저녁까지 골인’그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소리 지르면서 박수치고‘아침부터 골인, 저녁까지 골인’노래를 부르면서 성질나 있는 관중을 30~40분 만에 잡은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박성준 부단장이 저를 일본으로 초청해서 78년도에 처음으로 국제극장에 가서 교포들에게 ‘좋아졌네’를 가르쳤습니다. 보람을 느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좋아졌네’가 생일 축하노래가 되고, ‘좋아졌네’를 부르고 나서 좋다 박수를 꼭 치게 되고, 좋다 박수를 치면서‘다’부분이 내려가는 사람은 기가 죽은 사람이고 기가 산 사람은 좋다하면서 소리가 올라가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손까지 올라갑니다. 지금도 교포들이 모이면 ‘좋아졌네’가 18번입니다. 새마을노래가 생활화가 되고 어느 자리에서든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지 어떤 의식 때만 부르면 안 됩니다. 새마을노래는 그렇게 보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제가 학교 다닐 적에는 불평도 많고 불만도 많았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금보다 귀하다고 느낀 것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두 번째로 identify(확인)를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내 신분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증 받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제가 1차로 받은 게 세례 받으면서 identify(확인)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장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듯이 새마을의 동지가 되는 인칭을 받은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불만도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부터는 그 불만이 전부 금덩어리였습니다.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했던 것이 정말 많았는데 그것을 참는 즐거움과 인내가 생긴 것입니다. 그 전에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성질을 내야 직성이 풀렸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부터는 마치 소가 쟁기를 끌고 서서히 끌고 가면서도 할일은 다하듯이 급한 것도 있지만, 새마을운동을 하루 이틀 할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 안 되면 내일하고, 내일 안 되면 다음에 하듯이 급하지 않고 서서히 운동한 게 새마을운동입니다. 지도자들이 성질 급하게 명령조로 말하지 않고 주민들에게 부탁하고 말투가 달라졌고 그게 전부 새마을운동을 통해 얻어진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저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얻은 것은 엄청난 인내심이 생긴 것입니다. 우선 먹는 음식 절대 남기지 않고, 또 약속은 꼭 지키고 지나가다가 쓰레기 보면 꼭 줍고, 저는 요즘 강화군 서도면 범도 라는 작전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선착장까지 걸어 나올 때 쓰레기봉투를 꼭 들고 나옵니다. 제 별명이 쓰레기할아버지입니다. 이것을 6년을 하니까 들켰습니다. 지나가던 차가 제 옆으로 지나가면 꼭 섰습니다. 할아버지 타세요라고 해도 제가 안타니까 지금은 손짓만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쓰레기를 주우면 깨끗해지고 좋은데 관광 온 사람들이 쓰레기만 남기고 간다고 동네사람들이 아주 싫어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새마을시민이 되고 새마을동지가 되려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지금 제게 생활화가 된 것입니다. 시간 잘 지키고 제때 밥 먹고 음식 버리지 말고 혹시나 남은 음식이 있으면 꼭 싸가지고 와서 먹고, 그리고 생선이나 고기를 먹을 때 농사지은 분이나 어부들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먹습니다. 제가 노래 부르면서 쓰레기를 줍다 가다보면 농협이 있는데 농협에서는 커피를 공짜로 줍니다. 커피마시면서 잠시 휴식도 취하고 다시 또 쓰레기 줍고 이런 인생의 맛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을 통해서 음식물을 절대 버리지 않고, 쓰레기를 꼭 줍고, 뿐만 아니라 어느 파티에 갔다 온 뒤 파티 연 사람들에게 꼭 전화해서 잘 먹고 잘 놀았다고 꼭 전화해 줍니다. 이런 것을 모두 새마을운동하면서 배웠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하나의 상식입니다. 큰 가치가 아닌 가장 생활 속에 있는 상식적인 가치들을 고마워 할 줄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저는 국민들이 아닌 새마을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로 하지 말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즉 이불개고, 유리 닦기 등 운동도 할겸 작은 것부터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청소도 실천을 해야 됩니다. 제가 일본에서 느낀 것은 일본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 쓸고, 유리 닦고, 청소하는 게 매일 일과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깨끗합니다.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집수리를 매일합니다. 우리나라는 1년에 한두 번 집수리를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매일 더러운 것 있으면 닦고 페인트칠하고 그런 것을 보면서 이것을 새마을에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닦고, 매일 쓸고, 매일 칠하고 이것이 실천이고 이것이 운동입니다. 저도 저녁 먹고 시간이 나면 마당에 있는 풀들 정리하고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기 좋고, 또 벽에 벌레가 죽어있으면 닦고 흰 페인트로 칠해 놓으면 깨끗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새마을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새마을운동은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면 운동해서 좋고 건강해서 좋고 팔자가 좋아집니다. 제가 지금 이빨이 많이 빠져있는데 주위에서는 이빨을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내에게는 이빨 하는데 5~600백 정도가 들어가는데 이 돈을 다른 곳에 쓰려고 한다, 지금 이빨이 몇 개 없다고 해도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다른 좋은 곳에 쓴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도 새마을 정신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 이빨이 좀 빠지면 어떻고 얼굴이 좀 찌그러지면 어떻습니까. 새마을 동지들한테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하라는 말을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사무실도 이사할 때부터 제가 청소하고 제가 닦고 다 했습니다. 돈을 들이면 몇 백만 원 나가는 것인데 하루에 다 하려고 하면 못하는데 시간을 넉넉히 두고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