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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학교 새마을운동이 정확하게 어떤 운동인가요?
답. 학교새마을운동, 그런데 학교에서는 새마을교육이지 왜 새마을운동이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교육도 했지만 새마을운동을 실제로 했어요. 새마을정신이 자조, 근면, 협동이거든요. 그런데 제 스스로에게 그 자조 정신과 근면 정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새마을에 뜻을 가지고,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그 무렵에 새마을바람이, 신바람이 불었는데 연수를 시켰어요. 일주일에 월요일 날 가면 금요일까지 연수를 하는데 그 연수에 참여하면서 새마을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운동내용은 학생교육을, 새마을정신을 갖게 하는 것과 그 다음에 지금은 환경보호지만 그때는 자연보호라고 했어요. 자연보호 운동, 그 다음에 봉사활동, 봉사활동도 자연보호 운동 중에 하나겠지만. 새마을청소, 또 물자절약, 또 모아가지고 이웃 돕는 것. 그런 일들을 했지요.
문. 참여 당시 선생님의 심정은 어떠셨어요?
답. 저의 마음은 아주 불탔지요. 왜 그런가 하면 새마을 연수를 여자가 집에서 살림을 하는데, 일주일간 가게 되면 다 안 가려고 해요. 나는 새마을운동 가면 사표 낸다는 여자 선생님도 실제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새마을연수에 차출이 되면 한 달 전부터 기분이 좋아요. 새마을연수 가는 게. 그러니까 새마을을 좋아하는 그런 기질이나 그런 게 있었다고 봐요.
문. 당시 학교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의 분위기와 주변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답. 학교는요, 학교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새마을이 학교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이야기도 있고. 별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런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서. 그 분위기가 열심히 하면 알아주고, 또 성과가 있고 또 상도 받고. 근데 그때 새마을이 활성화 된 거는 아무래도 평가를 일 년에 두 번 씩 했거든요, 새마을평가. 그 분위기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모든 활동에는 평가를 잘 하면, 그 평가를 할 때 정확하게 해주고 또 알아주고 그렇게 하면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봐요.
정부는 참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줬는데, 일단 새마을 담당 부서를 만들어주고 관을 만들어 주고, 학교 안에도 새마을부 라는 부를 두어서 부장이 있고 또 새마을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새마을 교사가 돼서 새마을에 관련된 업무를 하게 되었지요. 그 분위기가 너무나 좋은 거지요. 그거는. 사람이 아니고 조직 자체를 그런 걸 만들어 줬기 때문에.
문. 주로 추진 하셨던 학교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 내용은 조금 전에 앨범 보셨지요? 76년도, 77년도. 76년도에는 주로 제가 학교새마을 어머니회를 조직해가지고, 그 어머니회를 조직을 맨 처음에 하고 조직을 해놓고 가만히 놔두면 활성화가 안 되기 때문에 화합을 시키기 위해서 화합의 단계라 해서 연수를 함께. 그때는 선진지 견학이라 해가지고 경제교육을 겸해 가지고 산업시찰을 많이 갔어요. 거기 가보면 굉장히 놀라워요.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모습이. 그걸 봄으로써 굉장히 변화된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아, 이렇게 하면 우리도 잘살게 되겠구나 하는 그런 정신이 어머니들 마음속에 생기고.
그 다음에는 그 어머니회를 조직한 다음에 또 자기계발을 해야 돼요. 그때는 경제교육을 많이 시켰어요. 새마을교사들 경제 교육을 시켜가지고 우리나라가 지금 현재 경제성장률이 어떻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전과 비교해서 어떻다, 이런 경제 교사도 따로 있었어요. 그런 것을 어머니들에게 경제뿐만이 아니라 환경도 했는데. 콩나물을 어떻게 기르느냐. 잘못 기르는 것, 약을 쳐 기르는 것도 이제 연수를 받고 해서. 아마도 지금도 그런 일을 계속 해도 조금 더 옛날일이다 라고 생각이 안들만큼, 그런 앞서가는 일들을 학부모들에게 교육을 시켰지요.
유달영 박사 같으신 분도 그때 새마을에 제가 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그만둔 다음에도 저희 어머니회 오셔서 강의도 하시고 해서 자기계발을 시키고, 그 계발시키는 일 가운데 하나가 창도 하고, 그다음에 서예, 또 분재, 그런 반도 운영을 하고 꽃꽂이 분재. 그래서 어머니들이 학교에 부담 없이 오고 또 학교 와서 자기계발이 되고. 미술, 그림도 그리고, 그림 그려서 전시도 하고. 물건도 만들기도 하고. 수공예품 같은 거 만들어가지고 팔아서, 팔면 수익금 생기면 장학금주고. 그렇게 어머니들이 참여함으로써 보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문.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사업들이 추진이 되었는지요?
답.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제가 한 일 가운데 조금 전에 보셨다시피, 수공예 반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 수공예반을 만드는데 지금 만들어진 작품도 저기에 있는데. 저런 걸 만들어 가지고 어느 시기에 자기들이 나가서 팔기도 하고 예쁜 거, 휴지통 저런 거 만드니까 그땐 없었거든요. 만들면 택시 이렇게 세우면 택시 운전사가 사주고 하면 막 기뻐하고.
그 다음에 못사는 사람이 많았어요. 학생들이. 영등포여중이라 해도. 그렇게 해서 이제 영등포 미용학원 원장을 불러서 희망하는 학생에게 미용 연수를 시켰어요. 그러니까 기술자가 생겨났지요. 그래서 미장원을 만들어가지고 학교 안에. 밖에서 70원인가 그렇게 깎는데 학교에서는 30원에 깎아주고. 그러면 자기가 깎는 것은 자기가 수입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일들도 하고 그랬죠.
문. 자연보호활동이나 사회봉사 활동은 어떻게 추진이 되었는지요?
답. 그렇게 매번 하지는 않고, 예를 들어서 추석이라던가. 대게 추석이라던가 그런 때에 모금을 해요. 쌀을 그때 가져오게 했어요. 한 홉이라던가. 그럼 예를 들면 봉투에 가져와라 하면 전교생이 다 가져오면 몇 천 명이니까 많잖아요. 그럼 그걸 잘 나누어 주고. 그 다음 자연 보호는 정기적으로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그 학교 주변에 있는 산에 가서 활동을 하는데. 선생님들과 함께 관악산에 가서도 하고, 그렇게 자연보호 활동을 연간 방학 외에는 토요일 마다 했지요. 반마다 돌아가면서. 청소도, 아침청소도 하고. 토요일에는 오후에 가서 하고. 지금은 상상을 못할 일을 했어요.
국군장병한테 떡 해가지고 찾아가고, 학부모하고 함께 가고. 학부모들이 작품 전시회해서 돈을 모으면 그 돈으로 봉사를 여러 곳에 했지요. 제가 남부기 때문에 영등포역 주변에 학교에 있었어요. 대방여중이라던가, 또 영등포여중이라던가. 근데 영등포는 못사는 사람들이 그쪽 편에 가면 있어요. 그 방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그런데 가서 이렇게 좀 조용하게 도와드렸지요.
학교에서는 무슨 그런 수익 내는 일은 크게 없어요. 다 정신적인 거고. 그런 거죠. 근데 그만큼이라도 한 예는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걸 누가해요. 본부에서 하라 할 수도 없는 거구. 본인이 하면 자발적으로 하는 거죠.
문. 어머니회에서 전시회 수익을 장학금으로 전달 된 배경을 말씀해주세요.
답. 장학금 준 종이를 이만큼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 어디 있을 거예요. 오늘 못 찾았거든요. 학생들이 어려우면 어려운 애들이 그 돈 받는 것을 참 부끄러워해요. 모르게 줘야하고 그랬는데. 이제 일을 하면 자기가 떳떳하잖아요. 그래서 무언가 자기가 노력하는 학생을 주로 줬어요. 매점을 운영해서 매점 수익금에서도 장학금을 주는데 그것도 다른 학교는 안줘요. 제가 있는 학교는 제가 그 업무를 담당하고, 또 매점도 새마을부서에 있으니까 그렇게 줬는데. 장학금은 어떻게 줬다기 보담도 가난한 학생들을 주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줬어요. 그래서 부끄러워하고, 또 일을 하고 있는 학생들. 예를 들어서 미용을 했다던가. 그런 학생들에게는 미용을 해서 조금밖에 못 벌어도 그 아이들이 학비 될 만큼 그렇게 장학금을 즐겁게 줬어요. 자존심 상하지 않게. 배려해서.
문. 학교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답. 자조, 근면은 자기 개인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협동은 참 평교사 입장에서는 어려워요. 그리고 새마을주임이라는 제도, 지금은 그걸 부장이라고 하는데, 부장이라도 그 사람이 새마을을 하고 싶어서 부장이 된 게 아니라 나이가 들고 부장 레벨이 되니까 해도, 그새마을부장 자체도 새마을을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런 부장 밑에서, 저같이 새마을을 열심히 하는 사람의 고충이 있지요. 말하기 곤란한 고충들이 많지요.
저는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산업체에 취직을 해서 고등학교, 대학을 야간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서울에는 서울대학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학교 안에. 그런 사람들은 제가 생각하는 새마을이나 이런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데. 그런 사람들이 뭐 남에게 피곤하게 뭐하는데 저렇게 하느냐. 직접 담당 부장한테 그런 얘기 듣고 하면 서운하지요. 그러니까 협동이 어려운 거예요. 참 두 명이나 지금 우리가 인성교육을 하는데도 다섯 명만 같이 모으면 우리 서울시 전체를 다 커버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러니까 그런 협동 이라는 게 참 수준이, 협동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있어야하는데 제가 평교사니까 그런 것이 없을 때 하니까 어려움이 좀 있었어요.
문. 어려움은 어떻게 해서 극복을 하셨는지?
답. 꾸준히 하고 진정을 가지고, 하고 또 남에게 피해를 안주면서 하고. 예를 들면 제가 방과 후에나 일요일에 나가서 아이들하고 그런 수공예반 운영하는 거 교장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그 아이하고 저하고만 아는 거예요. 그런데도 한 교실 같은 곳에서 하잖아요. 그게요 보통시간에는 애들이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데 저게 다 공휴일이나 일요일에 한 거예요. 그러니깐 저는 그것을 뭔가 왜 그렇게 열심히 하게 됐는가, 그게 뭔가 귀신에 씌었나 새마을 귀신이 씌였나 할 정도로 그렇게. 저보고 돌았다고 할 정도로 했으니까.
문. 학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답. 일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 성취감이나 열매가 맺히면 그때 기쁨이 항상 있지요. 학생들이 장학금 받고 좋아하고, 또 학생들이 물건을 팔아서 또 가져와서 자기가 팔았다고 좋아하고. 그게 별건 아니지만 그 아이들도 지금 모두 다 잘 살 거 같아요. 그런 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게 보람이고. 그 후에 제가 열심히 살고, 지금 일흔이 넘었는데도 새마을운동을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다 보람이고.
또 제가 한 새마을운동을 저렇게 일 년 마다 지금 만들었잖아요. 자료를. 만든 것 저것을 볼 때 보람을 느끼고. 또 어떤 경우에 저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굉장히 놀라워 할 때. 놀라워하고 그러면서 제가 앞길이 모두 잘 열렸어요. 새마을 운동을 잘했기 때문에. 혼자 달려 일등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도 할 수 없는 거 하니까. 훈장도 타고. 선생으로서, 교사로서 평교사로서 훈장, 포상타기 쉽지 않아요.
문. 훈장에 대해서 잠깐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 저는 훈장도 탄 게 있어요. 훈장은 다른 걸로 탔는데. 새마을로는 포상을 탔어요. 나이도 어리고 교사시절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일을 쭉 하다 보면 자신감이 생겨요. 그렇게 학교 새마을운동을 확실하게 정착을 시키려면 교장이 신념을 가져야된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교장 연수를 제안을 해서 그것이 채택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에 가가지고 전국에 만 이천~삼백 몇 개 학교에 교장, 초․중․고등학교 교장 연수를 다 시켰어요. 교재를 써가지고 저기 교재 있는데요. 그리고 연수생 명단도 지금 가지고 있지요.
문. 연수한 교육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요?
답. 내용은 두 가지를 시켰어요. 하나는 학교새마을 어머니회를 운영하고, 어머니들을 위해서. 학생들을 위해서는 수련을 하라, 학생수련을. 그런데 그때는 수련이라는 말도 없었을 때. 지금은 수련을 참 많이 하고 있지만. 아주 선구적인 일을 했죠. 학생들에게. 학생수련을 하는 것은 그 일정이 일주일 단위로 우리가 새마을연수 받으러 가서 배운 것처럼 학생들에게 맞는 수련을 시켰는데 그 내용이 아주 좋은 겁니다.
문. 그 내용에 대해서 짧게 만이라도 설명해 주시겠어요?
답. 맨 처음에 한 반 내지 두 반씩을 강당에서, 장소는 학교 형편에 따라 시키는데. 입교식을 해요. 입교식을 하면 선서라고 하면서 입교식을 하고 그 다음에 프로그램을 정해가지고 토론도 하고, 새마을이라던가, 인성이라던가, 정신이라던가, 또 습관이라던가, 그런 것을 기르는 것을 했죠. 그러니까 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자기 주변을 정리정돈하고. 그러니까 어른들이 하는 새마을운동을 학생들에게 적합하게 축소해가지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프로그램을 짜가지고 교과같이 해보는데 학교 형편에 따라가지고 가감을 해라. 모형을 하나 만들어 주는데. 일반 학교에서는 업무도 많고 하니까 이런 거 하나 가져가면 선생님들이 힘들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규약이라던가. 어머니회는 온갖 걸 다 만들어 가지고, 양식도 만들고, 가정통신문도 만들어서 다 예시를 해서 주고. 학생들도 그 수련하는 방법 연수 시키는 거 다 해서 줬지요. 근데 많이 했어요, 가서.
연수를 하면 연수를 했다는 보고를, 경우에 따라 자랑하고 싶어도 보내고, 또 알아달라고도 보내고 그런 걸 받았죠. 교장선생님이 연수 가셔가지고. 그러니까 제가 새마을 연수를, 어머니회를 운영하고 가서 이렇게 하면 이 교장선생님이 용강초등학교 교장인데 어머니회를 조직해가지고 이제 본부에 연수를 데리고 오는 거예요. 이렇게 (액자에) 넣어가지고 저한테. 이런 게 편지도 오고 많이 왔죠. 그때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절대 버리지 않고 놔 둔거예요.
문. 그자부심이 어떠셨는지?
답. 어떻게 해서 그런 자부심이 생겼느냐. 그런데 일을 하고 성취를 자꾸 하면 자부심도 생기고. 제가 일생을 어릴 때부터 자조적인 삶을 살았어요. 중학교도 집 형편상, 딸이 여덟 명이예요. 제가 다섯째 딸이니까 저한테 좋은 게 못 돌아오잖아요. 그러니까 제 스스로 그렇게 산업체 취직을 해서 야간으로 고등학교도 다니고, 대학도 다녔으니까. 그때부터 벌써 성취감이 있었고. 아 열심히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그런 게 있었어요.
문. 학교 새마을운동 전과 후, 바뀐 점이 무엇이 있나요?
답. 그때 학교라 하면 학부모들이 학교 오기를 두려워해요. 여러 이유인데, 우선 촌지 문제 같은 것. 근데 제가 가는 학교의 어머니들은 거기에서 자유로웠어요. 그런 게 있고. 또 어머니들 간에도, 지금도 어머니들을 만나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새마을선생님하고 새마을. 저보고 새마을선생이래요, 저는 국어선생인데. 새마을선생님하고 그때 활동했던 게 제일 행복했다고 그래요.
근데 어머니들이 학교 오면 학교를 많이 이해하게 되고,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어서 선생님들과 학교간의 굉장히 학생교육에 활력을 줘요, 어쨌거나.
우리학교 경우에는 어머니들이 서로 잘하니까. 또 어머니들이 장충체육관에 모여가지고 합창대회를 했어요. 그러니까 다 참여는 못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는 학교에서 어머니회가 조직 되서 장충체육관에서 하면 거기에서 합창해서 등수도 뽑지만, 또 장기자랑도 할 수 있어요. 근데 저희 학교는 원맨쇼 같은 장기자랑을 하나 했는데, 엄마들이 싹 가서 뭐 뒤집어쓰면 피아노가 되요. 그래가지고 장갑을 이렇게 끼면 흰 장갑, 검은 장갑을 끼면 건반이 돼서 로빈이 어머니라고 춤을 잘 추고 원맨쇼를 잘 하는 사람이 그 장충체육관에 무언극을 한번 했어요. 그래서 일등을 했는데 그러니까 우리학교에, 다른 학교 엄마들 가운데 샘도 나고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끼리 자매결연을 맺자고 그래요. 어머니회끼리. 그래서 자매결연을 맺어가지고 또 서로 주고받으면서 국립묘지도 참배하고, 육영수 여사 생가도 가고, 그런 일을 학교를 떠나서도 좀 했어요.
그러면 그 엄마들 전부 다 우리 학교 오고, 우리학교 와서 도서실에서 강연회도 개최하고, 또 발표도 하고 어머니회 운영했던 거 또 그쪽 학교도 가서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또 교장선생님들끼리도 너무 친해졌어요. 삼성중학교하고 했는데. 근데 가만히 보니까 삼성중학교 어머니 회장이 아마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그런 분이었던 거 같아요. 옷도 그렇게 새마을, 걸스카웃복 같은 그런 옷을 입고 그렇게 해서 이제 뭐 밖에서도 활동을 하시고 그랬어요. 학교를 떠나서도 하게 됐어요.
문. 새마을운동 관련해서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답. 진정성을 가지고 꾸준히 해야 돼요 꾸준히.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습관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꿈에도 새마을운동을 하게 돼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제안하고 싶어요. 남을 배려하는 것,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그런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나를 경영하는 지혜를 갖는 것. 그다음에 일과 관련해서는 일을 정열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 그렇게 제안을 하는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단계를 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혹은 일주일에 한번 씩 모여서. 그렇게 습관을, 좋은 습관, 그러니까 남, 나, 일과 관련해서 남의 입장을 생각한다던가, 밝은 표정을 짓는다던가, 또 일은 우선순위를 정해서 한다던가. 정 주제령이라던가 좋은 인물들에 대한 그런 창의적인 것을 이렇게 서로 나누면서, 어렵지 않게 지금 우리가 많이 하고 있는데 내가 그거를 한번 내가 이 마이크 때문에 잘 못하겠네.
제가 이런 책이 많이 모여 있는데요, 오늘을 위해서 이런 책을 만든 게 아니에요. 민족의 스승 도산 안창호,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제가 초중학교 일 학년 때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을 좋아해가지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또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우리 집이 행복해졌어요. 이런 새마을운동. 그때 뭐 소득증대나 물질적인 새마을운동 잘 사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적으로 잘사는 것과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게 있는데, 근데 참 잘 살고 있잖아요. 잘 살고 내가 생각해도 천당같이 좋은 곳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사람답게 살려면 행복해야 되고 그렇거든요.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에게 봉사를 더 많이 하고 그런 교육을 동지들을 모아서 지금 현재 하고 있어요, 저는. 그런 일에 모두 동참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때를 대비해서 돈만 있어가지고는 좋은 국가가 안 되니까. 사실은 우리나라가 희망이 너무 많아요. 희망이 아주 무궁무진해요. 신바람 정신도 있고. 일본이나 중국이 옆에서 좋은 나라들이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그 사이에서 우리가 아주 잘 할 수 있는 그런 계기. 그러니까 중국이 저렇게 잘 살아지고 있는 것은 우리 집 옆에 고속도로가 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걸 대비해서.
문. 젊은 세대나 새마을운동을 겪지 않은 세대가 잘 따라오나요?
답.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는 것은 새마을이라고 이름을 말하지 않고 해요. 그렇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지금도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하지요. 내가 지금 하는 운동이 새마을운동이다. 그리고 이용태 박사님이 삼보컴퓨터를 설립하고 두루넷 데이컴을 만드신 분하고 2009년부터 이거를 하고 있거든요. 하는데, 아 그때 어머니회나 학교새마을을 할 때 요거 1-3-10모델과 1-1-6 실천단계 이걸 알았으면 우리나라가 정말 달라졌을 거라고 아까워하는데.
이 회장님은 지금 80세가 넘었는데요, 저보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그냥 꾸준히 하자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인성교육 실천 추진단도 있고 또 행파인성교육지원단도 있고 거기에 제가 단장도 하고, 고문도 하고, 제가 그걸 만들고 그렇게 해서.
전에 새마을교장연수 시키듯이 지금도 하는데, 내 지금 소원이 전국에 전에처럼 새마을운동 새마을본부에서 그걸 시킨 것처럼, 이 교장들을 성남새마을연수원에 나오게 해서 이 프로그램을 한번 한다면 우리나라가 아주 달라질 거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제가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문. 향후 새마을운동의 계승되고 발전되는 모델이 어떤 거이라고 생각하세요?
답. 지금 연수를 12만 명 이상 시켰거든요. 그런데 이제 양적으로 12만 명보다 질적으로 이것을 6단계. 6단계는 뭔가 하면, 맨 처음에 이야기 하나를 읽어요. 그다음에 줄거리를 파악하고, 그다음에는 그 사이에 있는 교훈을 찾아요. 교훈을 찾은 다음에 그 이야기와 관련된 경험을 나누어요. 경험을 나눈 다음에 결심을 해요. 아, 내가 이런 습관을 하나 가지겠다. 하고. 그다음에 실천을 한 다음에 한 달 후에 그 실천을 한 걸 반성을 하고 그렇게 가족끼리 하는 건데. 지금 한 2만세대 이상 한다는데 서울에는 어려워요. 서울에도 한 3만 명 이상 어머니 교육을 시켰어요. 시켰는데. 제가 이제 11월 2일, 3일에 광주 가서 하고 또 11월 26일에는 충청도에 가서도 다섯 명을 말뚝을 박는 거예요. 진짜 말뚝을. 박는 다섯 명씩을 이렇게 모아서 키우고 있는데, 연말까지 55명의 지도자를 말뚝 박을 지도자를 제가 교육 시키고 있어요.
교육부 장관이 신념을 가지고 하면 알 수도 있고, 그다음에 이제 그런 것을 잘 지금까지 연결이 잘 안되니까, 다 헛짓 하고 있다고 봐요 저는. 안되니까. 이제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죽어라고 하는 거예요. 열심히. 10년, 20년 하는 거예요.
저는 남한산성 같은데 박정희대통령 살아계실 때 이연산 선생님한테 민족의 도장을 하나 세워주고, 민족혼 교육을 시키라고 했잖아요. 저도 남한산성에 그런 집을 하나 지어가지고 그 교육을 계속시키는 목표와 꿈을 가지고, 돈도 모으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로 조직했어요.
근데 우선 서울에서는 청소년인성문화원, 사단법인으로 허가가 났고, 또 이용태 박사님은 퇴계학연구원 이사장님이고 숙명여대 재단 이사장님이시고, 박약회 회장님이거든요. 박약회를 통해서도. 잡지도 큰 거 내가 갖고 있는데 그거 보시면, 이거 다 끝난 다음에 한번 보세요. 자료들. 그러니까 이거를 잘 확산해서 저는 새마을과 이것이 연결이 되면 너무 좋겠어요. 새마을본부에서 정말 할 일이예요, 이게.
네트워크를 형성해가지고 꾸준히 해야 되요. 그다음에 그 70년대 새마을이 나왔을 때처럼. 지금 인성이 말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고 위험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필요한데 이것이 그때 새마을운동처럼 이렇게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