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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예산고등학교가 새마을운동 전국 최우수학교로 선정된 동기와 배경은?
답. 저희 예산고등학교가 1975년에 새마을교육 전국 최우수학교로 선정이 되어서 문교부장관께서 표창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모든 교육을 새마을교육으로 통합을 했습니다. 학생생활지도, 학력신장, 올바른 인성교육 이러한 모든 것이 새마을교육으로 다 통합이 됐습니다. 그래서 전국 새마을우수학교로 대통령께 보고를 드리면 어떠냐고 해서 국무회의에서 상의가 되어 1976년부터 1년간 준비를 해서 1977년 9월 9일 대통령께 새마을교육 성공사례를 보고 드리게 되었습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답. 당시 우리학교는 설립된 지 불과 10년 안팎인 역사가 아주 짧은 학교였습니다. 학교를 설립한 동기가 예산에는 오랜 전통의 예산농업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역사회에서는 농업학교에서 인재육성은 잘 안 되지 않느냐면서 인문계고등학교설립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부께서 당시 예산고등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전답 500석 지기를 정부에 내놓았습니다. 1966년에 예덕학원을 설립해서 예산고등학교 또 병설, 예산동중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설립하고 보니까 여기 학교부지가 암반으로 된 바위산입니다. 그래서 학생, 교직원 모두가 화합하고 협동해서 빨리 좋은 학교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으로 노력해야만 되지 않느냐 해서 우리학교에서는 새마을 운동정신을 가지고 학교육성을 했습니다.
문. 학교환경의 공원화 조성 및 자연보호 운동에 앞장서게 된 계기는?
답. 중․고등학교시절에 어떠한 환경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사색하고 철학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암반을 깨고 바위를 깨고 나무를 심고 가꾸었는데 그 당시 주위에서 모두 ‘불가능 하다, 어떻게 바위에서 나무가 자라느냐’ 그랬는데,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말씀대로 ‘사람이 신념과 열성을 기울인다면 못할 일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전주 임업시험장에 가서 기술과장한테 바위 위에 나무를 심어서 키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바위를 폭발해서 뚫고 거기에다가 굵은 돌을 넣어서 흙을 넣고 심는데 표토보다는 20센티 높여 심어야 합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곳에 나무를 울창하게 가꾸어서 남들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산지역에 공원이 없어서 우리학교 10만평에 각종 나무를 심어 전국에서 나무수종이 제일 많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대개 어떤 학교든지 백송, 신암에 추사고택에 백송이 한주 있는데 우리학교는 백송이 열주가 있습니다. 당시 제가 수원임업시험장에 가서 백송 묘목을 갔다 심어서 자라나도록 했습니다. 전국에서 나무 수종이 제일 많은 학교이고 이렇게 잘 가꾸는 것은 학생들에게 정서순화, 사색의 장으로서 우리가 공원화를 한 것입니다. 또 초창기 학생들이 정서불안으로 안정을 못해서 문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했더니 어느 교육심리학자가 학교에 조류를 키워서 각종 조류를 사육해 보라고해서 공작새, 백조, 꿩, 금계 등해서 20여종의 조류를 길렀고, 인근에 있는 많은 학교에도 분양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환경을 공원화하게 되고 조류사육을 해서 학생들의 정서순화를 도모했습니다.
문. 당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주셨나요?
답. 그 당시에 장학금제도라는 게 아주 미비했습니다. 제가 본교에 교장으로 오기 전에 충청남도 교육국에서 사회교육을 담당해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선 교원을 10년하고 도에서 사회교육을 담당하다가 할아버지가 세우신 학교에 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도비장학생이라고 해서 학교에 한두 명밖에 장학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들이 많아서 우리학교는 설립자인 조부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재학생 10%에 해당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문. 장학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점을 해결하기 위해 하신 일은?
답. 학비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니까 해결이 되었는데, 인근에 있는 서천, 보령, 홍성, 서산, 태안, 당진, 아산, 공주 해서 약 10개 군에서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집에서 몇 명의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을 했지만, 학생 수가 10명을 넘어서니까 도저히 감당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숙사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에 기숙사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사대에서 공부할 때 영국의 이튼 캠브리지 기숙사제도를 들은 적이 있어서 영국 이튼학교에 가 기숙사제도를 보고 와‘예덕사’라고 하는 기숙사를 건립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예덕사에서 침식하고 또 장학금을 받아서 열심히 공부해서 동량재가 되어라’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 당시 계셨던 사감선생님이나 지도하셨던 선생님이 지금은 다 대학교수로 가 계십니다. 우리 충남에서는 국가지도자가 제일 많이 배출된 학교입니다. 예를 들면 교문 오실 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검사장, 중수부장, 고검장, 법원장 이러한 법조계 인사들이 많고, 또 KBS에 상오수성 상임위원, 이일구 예능국장이 있습니다. 예덕 예산고등학교라고 쓴 교문 명패가 이일구 예능 국장이 쓴 것입니다. 또 서울시 방재본부장, 육군본부작전국장을 비롯한 군 장성들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예덕사에서 공부한 학생들입니다.
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숙사에 대한 생각은?
답. 대통령께서도 훈장수여를 하고 저하고 수상자, 대통령각하, 경호 실장, 비서실장, 총무처장관, 문교부장관, 대법원장, 국무총리와 같이 오찬을 합니다. 오찬 하시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있다가 후면에 보시면 알 테지만 대통령께서 ‘내가 사립학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겠다. 그동안 내가 본 사립학교는 상당히 불신을 했다. 그런데 예산고등학교를 보고 정말로 이러한 훌륭한 사학이 있구나, 그래서 앞으로 사립학교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겠다.’고 웃으시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기념관을 세워준 학교가 없습니다. 우리 학교 전에 농고, 실고, 기계공고가 대통령께 보고가 되었는데 대개 격려금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학생들을 예덕사에서 방학에 생활관으로 운영해서 충효교육을 바탕으로 예덕 수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련활동을 할 수 있는 생활관을 지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대통령께서 슬라이드를 보시고 먼저 하시는 말씀이 ‘내가 보니까 강당이 없더라, 강당을 세워주마’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희학교에 강당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하는 말씀이 ‘경제적으로 1억이 들고 어려우니까(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 대통령께서 말씀을 하셔도 사양을 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기분이 좋으니까 교장이 원하면 뭐든지 다해 주겠다고 하면서 도와줄게 뭐냐고 말씀 하셨지만 제가 사양을 하고 생활관과 협동관을 대통령께 지어주십사 해서 건립을 했습니다.
문. 학생들의 올바른 국가관정립을 위한 교육방법은?
답. 우리가 지금도 예덕수련을 합니다. 방학 때, 그렇지 않으면 고등학교 1학년을 입학하면 4월이나 5월에 예덕수련교육을 2박 3일간 실시를 합니다. 학생들의 중학교까지의 생활을 보면 주로 피동적으로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여왔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부터는 이제 교육이념의 교훈대로 ‘내 갈 길은 내 힘으로, 내 인생은 내가 하기에 달려있는 것’으로 고등학교부터는 내가 정말로 자립하고 창조하고 개척해서 내 앞날은 내가 개척하도록 하는 그 정신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달라집니다. 그래서 바른 국가관을 정립하고 또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행을 바탕으로 한 예 ․ 덕 ․ 체 ․ 기 교육을 2박 3일간 수련시킵니다. 밤에 산행도 하고 행군, 참배도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아주 성과가 있다고, 1976년에 문교부에서 장학지도를 나온 장학관들께서 전국에 발표를 해 달라고도 했습니다. 남자고등학교로서는 생활관운영을 처음으로 시작한 학교이고, 그 정신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덕산에 윤봉길의사사당인 충의사가 있는데, 그 당시인 1970년대 초만 해도 문화공보부에서 지원을 안 할 때입니다. 우리자체로 지역에 생사하기 때문에 우리학교학생, 우리학교밴드부가 지원을 해서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기념일에 우리학생들이 덕산까지 왕복행군으로 가서 의거기념행사를 저희학교에서 했습니다. 그때 곽상훈 국회의장이 윤봉길의사 기념 사업회 회장입니다. 곽상훈 의장님께서 저희학교에 여러 번 오셔서 고맙다고 말씀을 하시고 감사패도 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정부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충의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께서 4월 28일에 아산에 있는 현충사 충무공탄신 기념행사를 하시고 다음 날 충의사에 오셔서 행사를 하셨습니다. 초창기에는 예산고등학교에서 그 행사를 주관해서 해 왔습니다.
문. 여러 자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였는데 그 계기는?
답. 우리 사학은 공립학교와는 달리 사학의 자주성, 독창성, 물론 공공성이 있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의 교육이념에 따라서 사학의 독창성이나 자주성을 가진 특수교육을 해야 합니다. 제가 이튼학교를 보고 기숙사를 세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영국에 가면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는 이튼의 승리다’라는 이야기를 지금도 합니다. 그렇듯이 사학에서는 영재, 이 나라의 동량재를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공립학교에서 못하는 그러한 교육을 예덕수련교육이라든가, 지역사회의 공원화조성이라든가, 이러한 환경조성뿐만 아니라 교육에 있어서도 기숙사에서도 영재교육을 했고, 특히 지금까지 문교부나 도교육청에서 그것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 영어과교사연수회입니다. 당시 1970년대 초만 해도 영어교사가 부족해서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선생님들, 예를 들면 농업이나 과학, 물리, 화학 이런 쪽은 자원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수학은 교사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사범대학에 연수과정을 두어서 3개월 강습을 시켜서 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전공한 사람들도 영어교사를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외국교육을 할 수 있는데 일선학교에서 영어과 교육에 대한 문제가 참으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립학교에는 피스코(peace corps)를 배정을 안했습니다. 피스코(peace corps)이라는 것은 ‘평화봉사단원’을 말하는데 제가 한국 평화봉사단 단장을 찾아가서 ‘내가 경영하는 예산고등학교, 예산동중학교에 피스코(peace corps)를 배정해 달라’고 했더니 사학은 줄 수가 없다고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없느냐, 우리학교에 영어선생님이 중고등학교해서 10명이다. 우리학교에 피스코(peace corps)를 배정해 주면 내가 예산 근교에 있는 영어과선생님들 연수를 맡아서 시키겠다.’고 하니까 평화봉사단 단장이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봉사단 다시 들어오는 팀에 미국에서 영어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 훌륭한 분이셨던 알랜버거라는 영어선생님을 배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학생과 교사들 연수를 맡아서 하고 이틀간은 약속대로 제가 예산 근교에 있는 영어선생님들 20명을 희망하는 분만 그때는 시설이 부족해서 교장실을 내주고 워크숍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성과가 참으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에 보고가 되어서 충청남도 교육청에서 예산고등학교에서 도내교사를 연수를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국가재정이 어렵고 할 때여서 저희가 도내 영어과선생님들, 영어를 전공하지 않은 제2과정 출신들 또 영어선생님들 중에서도 희망하는 선생님들을 매년 50명씩 저희 학교에서 연수를 시켰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했냐면 평화봉사단 한명이 한국영어선생님 5명과 1조가 되어서 여자선생님들은 여자 피스코(peace corps)가 남자선생님들은 남자 피스코(peace corps)가 해서 10일간 한글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영어로만 생활하는 것입니다. 연수 시작할 때 그분들의 의견을 듣고 수준을 평가해 보고 10일 후 퇴소할 때 평가를 해 보면 상당한 발전이 있고 심지어 제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이제부터는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 수업을 하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어교사연수회가 예산고등학교식연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수학, 다른 학과도 그런 방법으로 연수를 했습니다. 그 후에 정부에서 저한테 ‘문교부에 와서 일을 해라’라고 해서 몇 번 사양을 했는데 부득이 와서 일을 하라고 해서 문교부 장학관으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등교육개혁, 대학개혁사업을 하는 일을 했고 그다음에 국립공주전문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후에 편수국장으로 가서는 교육과정 개편을 다했습니다. 그때 영어교과서의 문제점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학교에 알랜버거라는 영어선생님이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영어교과서를 검토했는데 1,200여 곳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영어가 아니라 한국영어입니다. 지금 일일이 예를 들기는 어렵습니다만 알랜버거가 대한민국은 영어가 아니다. 그때 영어교과서는 검인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국정으로 바꿨습니다. 알랜버거라는 선생님의 덕분에, 그리고 영어교육의 중대성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어서 박대통령께서 교육문화비서실에 영어 교육담당비서를 임용하는 그러한 큰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때 영어교과서가 생활영어로 바뀌게 됐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1, 2학년 영어만 하면 회화 웬만한 것은 다 할 수가 있습니다.
문. 당시 대통령님과의 대화내용은?
답. 그 당시 나온 대로 하면 저희가 경제기획원장관실에서 보고를 드립니다. 보고를 드리게 되면 거기에는 국무위원, 주요 국가인사들이 다 참석하기 때문에 행사가 상당히 길어집니다. 왜냐 하면 충청남도 교육감이 예산고등학교장에 교육성공 사례를 보고하면 대통령께서 보고한 사람에게 질의를 합니다. 그리고 안 되면 저한테 묻습니다. 그러면 그 시간이 상당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날 제 기억으로는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에 오찬 대화가 끝난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 당시에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많은 것이 있지만 제가 제일 감명 깊게 말씀을 들은 것은 저희 학교의 교훈입니다. ‘내 갈 길은 내 힘으로’ 자립하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 개척하는 사람을 기른다고 했더니 대통령께서 ‘내가 많은 학교의 보고서도 받고 가보기도 했지만 교훈이 이렇게 훌륭한 학교는 내가 처음 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추진하시던 새마을 운동의 기본정신이 자립 ․ 자조 ․ 근면 ․ 협동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저희학교의 교육이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오찬이 끝난 후에 비서실장, 비서관들께서 “참으로 오늘 대통령께서 기분이 좋으신 날”이라고 하면서 강당을 지어주시겠다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꼭 방문을 하겠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대통령께서 강당을 지어주신다고 하였는데, 행사를 하기 전에 일주일간 예비훈련을 합니다. 그때에 수석비서관께서 ‘강당을 지어주신다고 할 거다. 그것은 절대 사양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 장학금을 받아라, 그러면 불우한 학생들에게 매년 몇 명씩 장학금을 줄 수 있지 않느냐’라고 해서 저는 사양했습니다. 장학금은 우리학교 자체로 많이 주고 있으니까 이왕이면 오랜 역사, 후대에도 남을 수 있는 대통령 기념관, 협동관을 건립해 주시면 우리학교에서 하는 교육의 특색인 예덕수련활동을 더욱 충실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몇 차례에 그러지 말고 강당을 지으라고 해서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김정겸 비서실장께서“각하 교장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시죠”라고 해서 협동관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자연보호운동입니다. 9월 9일 전날 대통령께서 구미에 가셔서 산에 올라갔더니 너무 더럽고 지저분하고, 병 깨진 것 오물을 보더니 ‘이것은 안 되지 않느냐, 예산고등학교는 새집도 지어주고 새도 키우고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 학교냐 이제는 자연보호운동을 해야겠다’ 그 당시 소관이 내무부장관인데 내무부장관한테 지시를 하셔서 저희학교를 발단으로 해서 자연보호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말씀드린 것이 특색으로 제가 기억을 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학생,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제가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예산고등학교 예덕학원 이사장직도 물론 하고 있습니다만 그 외에 청양도립대학을 설립해서 운영하다가 퇴임한 후에 예촌(백승탁 호)교육문화재단을 설립을 해서 졸업생 중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졸업생들이 매월 문화재단에 기금을 보내고, 제 가족들도 매월 기금을 보냅니다. 그 기금으로 도내에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별도로 주고 있고 교육문화재단에서 충남 교육청과 협의를 해서 교장연수, 교감연수, 정책세미나 이러한 우리나라교육발전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오늘날 참으로 많은 국민이 우려하는 교권이 추락되어서 교실이 붕괴된다고 하는데 이러면 이 나라에 미래가 없습니다. 교육이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교육을 위해서 몸 바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