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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3년 1월1일 당시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자조․근면․협동의 새마을정신 하에 전 국민이 동참해야 된다는 특별건의 사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73년 10월에 수출 진흥확대회의 때 대통령께서 공장새마을운동을 전개하라는 특별 분부가 계셨고, 그에 따라서 74년도에 공장새마을운동의 기본구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1977년에 대한상공회의소 경제4단체가 주관을 하는 공장새마을운동 추진본부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게 본 교수가 동참하면서부터 공장새마을운동에 깊게 관여를 하게 된 기본 동기가 되겠습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와 사람들의 분위기는?
답.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새마을운동이 영혼의 불길처럼 타올랐기 때문에 그게 편성되어서 ‘새마을’자만 붙으면 안되는 게 없을 정도로 그런 분위기였고, 일반적인 농촌이 되었든 도시, 직장, 공장이 되었건 열성을 가지고 국민들이 동참을 했습니다. 지금 같은 분위기서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접목할 수 있었고 그 당시에 내건 슬로건은 기업 잘되기, 잘살기 등 이였습니다. 또, 복리증진을 통한 종업원에게 복리후생에 대한 문제가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에 종업원들도 쉽게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학교를 못 다니던 종업원들을 위해 야간 특별학급을 만들었던 것이 공장새마을의 큰 불씨중의 하나라고 저는 여겨집니다. 당시 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또, 중학교만 졸업하고 온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 공장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야간특별학급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일합섬 같은 곳에서는 저녁 5시에 근무가 끝나고 나면 전 직원들이 한일여자실업학교라는 학교에 나갔습니다. 즉, 공장에 근무를 하면서 밤에는 고등학교과정을 이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자만 붙으면 좋은 것이 라는 것을 모든 국민 또는 공장근로자들 그렇게 순 기능으로 만 기억을 했기 때문에 불씨만 붙여준다면 쉽게 동참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공장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근본 핵심은 기업이란 곳은 생산성 향상, 품질향상, 원가절감을 통해서 기업체질을 강화하고 수익성을 증진시키는데 있습니다. 수익이 올라갔을 때 비로소 근로자들의 임금이 향상되고 복지가 증진되고 더불어 국가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 연계체제로 공장새마을운동의 주축은 생산성향상, 품질향상, 원가절감, 그리고 복리후생의 증진이 주 테마였습니다. 기업이 추구하는 목표인 그 생산성향상, 생산성향상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부적으로는 생산관리를 잘해서 제조시간을 단축하고 생산량을 많도록 하고 그와 동시에 불량을 없애고 품질을 좋게 하고 아울러 불량이 안 나오고 생산성이 높아지면 원가가 절감됩니다. 원가가 절감되면 가격을 낮추어서 국민들에게, 소비자에게 안가(安價)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고 당시에 수출드라이버정책을 썼는데 수출을 하지 않으면 못산다는 우리경제에서 수출의 큰 한류를 찾습니다. 그것에 테마를 맞춘 것이고 거기에서 얻어진 성과는 근로자들의 임금향상, 복리후생 증진과 작업장의 환경 개선 등, 이런 곳에서 반대급부(反對給付)로 돌아오기 때문에 경영자도 근로자도 싫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기업환경은 지금과 달라서 70년대까지 만하더라도 굉장히 열악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얻어진 성과들이 바로 근로자들(종업원들)에게 피부로 느껴지고 또 새로운 경영기법, 공장관리기법을 가지고 운영한 결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품질이 좋아지는 것을 경영자도 눈으로 확인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동참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당시에는 국가 경제도 열악했고 임금수준도 낮았습니다. 낮은 이유는 벌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생산성이 높아지고 품질이 좋아지고 원가가 절감된 상태에서 수출이 증진되다 보니까 임금상승률이 높아지고 복리후생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참이 쉬웠다는 것이고 어려움은 없었는데 다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까 범국가적인 운동이 정권차원에서 움직여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움찔움찔 브레이크가 걸리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새마을운동과 기업체정화운동은 기업 자율적으로 하라’는 정부의 지시나 권고의 사항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공장새마을이라는 말도 기업체정화운동이라는 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박정희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시절까지는 새마을운동에 발맞추어 공장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이 들어서면서부터 기업체 정화운동, 바르게살기운동이라는 다른 국민운동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공존했습니다. 그러다가 93년도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터 그런 운동들은‘기업 스스로가 하도록 자율에 맡겨라’하면서부터 기업에서는 공장새마을운동도 기업정화운동도 사실은 안하게 된 상태로 흘러들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는?
답.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시작당시 74년도를 기준으로 해서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에 어려운 국민소득의 수준과 근로자의 민도(民度)에 맞춰서 어프로치(approach)했던 사항을 국민소득이 2백 불에서 천불, 천오백 불, 심지어 만 불을 지향하면서부터 그 초점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학문적으로 말을 한다면 사람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행동과학적인 측면에서 조사․연구되어서 움직여져야 될 것인데 먹을 것만 조금 낮게 준다고 작업환경문제만 개선한다고 근로자가 성실히 일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 시행착오가 지금은 크게 느껴집니다. 과거에 70년대 초기만하더라도 어려운 시기에 약간의 포상금을 건다든가 인센티브를 걸어준다면 근로자들(종업원들)이 열심히 뛰었습니다만 지금은 그 얼마만 가지고는 오히려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뿐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학문적으로 말해서 내가 하고 싶어야 일을 하기 때문에 내 욕구충족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항을 그 당시에 공장새마을운동추진에서는 접목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의 시행착오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을 아쉬운 점은?
답. 정부차원에서는 공장새마을운동 추진본부에 민간자율기관으로 넘겨주었습니다. 민간자율이라는 이름은 달았지만 사실은 정부차원에서 상공부입니다. 상공부에서 큰 줄기는 직접관여를 했습니다. 즉 관주도형이었습니다. 관에서 정말 빠져주고 민간자율기구로 좀 더 열성 있게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또 말뿐인 인센티브와 공장새마을육성자금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업육성자금에 비하면 뭐 자금도 아니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육성자금이었고 인센티브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에서는 그 운동에 동참하기가 싫어졌던 것입니다. 오히려 무역관계로 따진다면 수출을 하면 수출1달러당 원화로 얼마 씩 인센티브가 들어왔는데 반면에 공장새마을운동 잘했다고 하면 이름만 번지르르하고 상장하나 주었을 뿐 기업의 내실적인 큰 득이 없었습니다. 기업에서는 초창기10년까지는 기업 내부적으로 잘되는 맛으로 뛰었었고 기업의 수준이 올라가다 보니까 오히려 기업에서 덕보다는 실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고 관주도형 정부피아르(PR)형의 행사위주에 전진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당시에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수출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고 농사로서는 보리농사와 쌀농사인데 공장을 하면 사시사철 밤낮 주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품질 좋고, 값싸고, 생산이 높은 물건을 만을 수 들 수 있다면 이것은 곧 국가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새마을운동의 기본이념처럼 저도 거기에 동참을 한다면 이것이어야말로 애국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예전에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가 또는 공산군에 맞서서 항거하다가 먼저 가신 분들이 애국자였다면 지금 이 시대에 국가가 잘되고 민족이 잘되는 국민운동에 선봉을 서는 그 사람들이 애국자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뛰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봐주는 것이 국민운동이 성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 결과로 1990년대까지 만하더라도 저는 기업체 현장을 뛰어다녔습니다. 그 덕으로 정부에서는 84년 3월20일 제11회 상공회의 날 겸 공장새마을운동추진대회에서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그것이 보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라가 잘되는 일에 기업이 잘되는 일에 선봉에서서 열심히 뛰었다는 자체는 일종의 선구자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산업과학의 전문지식을 국가를 위해서 기업을 위해서 공유한다는 것은 꼭 애국하는 길이 아니냐, 그래서 저도 혼자서 애국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큰 자부심으로 갖고 있습니다.
문. 당시 정부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 및 산업체 경영자와 근로자의 분위기는?
답. 정부에서 큰 계획 밑그림은 그려주었습니다. 상공부가 주관부서입니다마는 기업내부로 본다면 기업이 잘되는 일이고 경영관리, 공장관리를 해야 되고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상황인데 공무원들의 수준은 거기에서는 조금 버거웠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경영자는 초기단계에서는 기업이 잘되고 생산성 향상, 품질향상, 원가절감에 기여하기 때문에 크게 동참을 했습니다. 근로자도 그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복리증진과 임금향상 등등이 피부로 와 닿았기 때문에 정말로 동참을 잘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이 지나고 난 이후에 국민의 민도(民度)도 근로자(종업원)의 수준도 높아졌지만 그것보다도 우리국민의 부(富)가 근로자(종업원)의 임금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국민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공장새마을뿐 아니라 모든 다른 국민운동도 돈 때문에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항을 미처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일을 하고 싶어야 일을 하는데 그 수준 포인트를 잘 못 쟀기 때문에 오히려 활성화되지 못하고 침체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침체의 근본원인은 정권차원에서 국민운동을 전개한 것이고 정권이 바뀜과 동시에 새마을운동의 맥이 순간순간 끊어졌기 때문에 93년도에 들어와서 공장새마을운동도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이 추진될 수 있었던 동기는?
답. 73년도가 제3차경제개발계획의 시작하는 연도였습니다. 그때는 정부차원에서 수출드라이버정책인데 그때 직장이 됐든, 농촌이 됐든, 공장이 됐든 새마을노래가 항상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서 30분 먼저 일하고 내 공장주변을 청소하고 내 스스로 환경을 깨끗이 하는 그런 운동이 초기단계 공장새마을에서도 농촌새마을운동과 비슷하게 움직여졌습니다. 또 상공부에서는 품질을 좋게 만들어야 수출을 잘한다는 정신 하에 73년도에 공업진흥청에서 품질관리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75년도에는 제1회전국공장새마을 산표준화 및 품질관리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즉 품질관리운동이 산업사회에 크게 뻗쳤습니다. 그 전개하는 방법은 새마을운동에 자조근면협동의 정신 상태에서 기술적으로 품질관리의 기법을 적용해서 그 당시에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했던 공장의 획기적인 품질혁신의 변화를 일으켜 준 것도 당시 70년대 공장새마을운동 시작 시에 과학적인 관리법의 효과였다고 생각을 듭니다. 저도 상공부 케이에스(KS)심의회 심의 위원으로 품질관리 전문위원으로 30여년을 관계했지만 오히려 70년대에서 80년대 까지가 그 효과가 가장 컸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은?
답. 당시 공장새마을 운동의 추진애로사항과 문제점을 본교수가 대한상공회의소 공장새마을운동본부의 연구용역을 맞아서 90년대 공장새마을운동이라는 연구보고서를 하나 만든 게 있습니다. 보고서에 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마는 80년대까지를 지나오면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추진애로사항을 요약하면 근로자들의 참여의식부족과 경영청의 이해 및 관심부족, 그리고 효과적인 추진기법을 찾지 못해서 추진방향이 불투명하고 교육 자료에 부족과 공장새마을지도자의 신분보장이 미흡하고 추진예산이 부족했다는 것을 당시에 분석이 되었습니다. 또 공장새마을운동 추진 상의 공통문제점이라고 한다면 세부적으로는 그 기업의 업종이나 규모나 경의 방침이나 생산방식에 따라서 업종별로 공정별로 천차만별이겠지만 국내업계에 공통문제점을 요약한다면 대략 열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공장새마을운동의 본질과 기본이념, 그리고 그 추진목표와 일을 잘못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업경영활동과 공장새마을운동과의 연계가 불충분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공장새마을운동실천사항과 기업경영의 추진목표가 유류되었다는 것이며, 넷째는 계속적인 동기부여실현을 위한 교육훈련으로서의 공장새마을교육의 허실화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당시 일원화된 공장새마을분임조활동의 활성과 추진기반이 빈약했다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공장새마을지도자의 육성과 우수지도자 및 분임조에 대한 인센티브가 미흡했다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공장새마을운동의 학성심화를 위한 홍보활동이 미흡했으며, 여덟 번째는 공장새마을운동의 내실화를 제어하는 형식적인 행사위주의 활동으로 전략했으며, 아홉 번째는 공장관리의 효율화를 위한 관계전문친모교육의 강화와 여타 사업 기술 활동과의 연계관계가 미흡했고, 끝으로 열 번째는 범국민운동으로서의 새마을운동을 정점으로 한 한국적인 산업합리화 운동인 공장새마을운동과 연계된 제반 전문산업합리화와 또, 그 역할과 기능, 그 실천목표 등에 분담 조정 평가기구 및 기능이 부지했다는 것을 손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문. 공장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공장새마을운동을 크게 보면 73년도부터 93년도까지 20년 기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기업이라면 공장이라면 정말 영세했고 가내수공업형태였습니다. 공장 같은 규모를 가졌다면 60년대 울산공업단지라고 지칭하는 울산 화학콤플렉스. 그리고 70년대 창원기계공단에 있는 공장들은 규모를 갖춘 공장입니다마는 그 외 지역에 있는 공장들은 가내수공업입니다. 예를 들면 봉재나 가발, 전자조립 등등 노동집약적으로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졌는데 90년대 이후 새마을이후로 생각해 본다면 공장이 대형화하고 되고 자동화, 로봇화, IT화되면서부터 전자동화 형태로 발전을 했고 규모도 커진 것이 세계적으로 어깨를 겨눌 수 있는 공장으로 크게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비단 이것은 공장새마을운동의 덕이라기보다는 기업 내부적으로 그렇게 키워나가지 않으면 국제 경쟁 속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됐고 공장새마을의 역할이라면 근로자들에게 자조 근면 협동하는 정신으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해서 새로운 경영관리와 공장관리 기법을 습득하는 데서부터 플러스요인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연구소가 만들어진 계기는?
답. 전두환 대통령의 재임 시에 각 대학에 새마을연구를 하라는 권고사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주대학교에서도 공장새마을연구소를 설립했고 그 초대소장으로 제가 역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각 대학에 새마을 또는 공장새마을연구소가 산지 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만해도 공장새마을운동이 활성화 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빛을 봐 왔습니다만, 제 기억으로는 노태우대통령 재임 시부터 기업정화운동, 바르게살기운동과 마찰음을 가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고 73년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그러한 기업체의 운동을 기업스스로에게 맡기라는 통에 공장새마을도 기업체 정화운동, 사회정화운동도 오히려 이름을 감추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희가 생각할 때 1973년도 공장새마을운동추진본부가 기능을 잃으면서부터 공장새마을의 이름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새마을운동은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하나의 큰 국민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마을운동은 영원히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시대정신을 져버린 국민운동이 없다면 그 국가는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새마을정신에 입각한 작은 각 분야별 전문새마을운동, 예를 들면 공장새마을운동도 다시 제기되어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왜, 시대정신이 없고는 그 나라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국민운동이 아니겠는가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