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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2년도에 학교를 설립하고 그때부터 새마을운동도 시작이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가난을 극복하는 운동이고, 가난한 사람이 잘사는 생활인이 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을 도입해야 되겠다고 학교 스스로가 선택한 운동이었고, 동시에 교육활동이었습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와 주변에 분위기는?
답. 저희 학교는 그 당시 학생수가 200~300명에 불과한 조그마한 규모의 학교였고, 주야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정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못가는 학생들이 오는 학교가 전수학교요, 고등공민학교였습니다. 그 당시 그런 학교로 출발을 했는데 모두가 가난을 극복하자는 염원이 일심으로 단결되어 있어서 새마을운동을 하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이었기 때문에 잘살아 보자는 것에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고 반대 없이 일심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학생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그 당시 새마을운동을 부르고 구호를 우렁차게 외치니까 동네사람들이 애들을 공부나 시키지 새마을운동을 왜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항의질문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새마을운동이 명실 공히 국민운동으로 승화되면서 우리학교도 지역사회에서 사랑을 받게 되고 신뢰를 받게 되면서 학교도 나날이 발전의 단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학교는 일반 정규 중고등학교에 비해서는 열악한 환경을 가진 학생들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을 극복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무언의 공통분모가 형성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학교에서 꿈을 꾸고 노래했던 것이 콩나물을 키우는 운동을 하고 그다음에 저축운동을 전개를 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겠으며 당시 10원, 50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래서 1원, 5원 등 푼푼이 모아서 저축을 했고, 학교에 새마을금고도 만들었습니다. 새마을운동으로서 나도 모르게 대한민국에 선구적인 위치에 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 소득증대사업과 자연보호활동은 어떻게 추진하셨나요?
답. 당시 우리학교는 천예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부 푸른 산이고 농촌 농토이고 지금도 학교주변에는 농지가 있고 푸른 산이 있는 환경입니다마는 자연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우리학교 생활의 하나로 공통분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환경도 열심히 가꾸고 저축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소득증대라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 소득증대를 하겠습니다까. 제일 적은 자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콩나물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학교가 콩나물 학교로 이름이 났는데 콩나물사업을 통한 소득증대로 저축을 하고 학교의 기반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문. 사회봉사활동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 전수학교에 전자과가 있었는데 TV나 라디오를 무상으로 고쳐주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소득증대라고 하는 것은 저축을 통해 하는 것이 곧 소득증대라고 할 수 있고, 말하자 면 가난히 사람이 잘사는 길은 근검절약이라고 생각해서 푼푼이 돈 모으는 정신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또 생산증대에 비해 학교 주변에 푸른 산과 농지가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소, 염소, 닭을 키우는 사업을 하면서 오늘의 학교규모로 발전이 된 것입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어려움을 가상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마는 어려움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모두가 학교장을 중심으로 혼연일체가 되어서 화합하고 단합했는데 당시 학생들의 가정이 다 어려웠고 학교선생님들도 어려운 가정에서 독학을 하다시피해서 입신양명이 된 교사들이었기 때문에 새마을정신에 이의 없이 호응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 협동 ․ 단결이 잘 되었던 학교였습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서울시청이나 지역구청, 유명 인사들이 우리 학교를 많이 찾아와서 격려하였습니다. 전 직원, 전 학생이 일사분란하게 아무런 말썽 없이 협동단결이 잘되어 교육도 성공으로 이끌어나가고 지역사회에 봉사활동도 잘하니까 그런 점에서 유명한 학교로 하루하루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지도자로서 자부심이 있다면?
답. 누가 알아주고 평가를 받기 위해서 새마을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80년대에 정부로부터 새마을 협동장이라는 훈장을 받았습니다.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를 하는 잠실체육관에서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통령님으로부터 직접 친수를 받았으니까 엄청난 영광입니다.
문. 학교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저희학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에 최고로 가는 통일시범학교입니다. 전국에 만천여개 초중고가 있지만 유일하게 정부로부터 지정을 받고 통일관을 운영하는 학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기반이 새마을운동의 화합과 협동의 힘이 오늘의 국제학교를 만들어 냈고, 오늘의 유명한 생활과학고등학교를 만들어 낸 것으로 자랑스럽고 남이 우러러 보는 학교의 위상을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자부심을 갖습니다.
문. 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성공사례 발표할 때 내용은?
답. 10여년 가까이 우리학교가 걸어오면서 쌓아온 실적, 거기에 대한 내용, 협동단결의 새마을 정신이 오늘의 우리학교를 만들어 냈다는 내용들에 대해 새마을지도자들 앞에서 사례로 발표를 했습니다. 콩나물도 키우고 염소, 소도 키우면서 저축도 하고 매달 한 번씩 경로잔치 활동도 하고, 경로사상을 지역에 홍보하는 내용들을 전국 지도자 앞에서 사례로 발표를 한 것입니다.
문. 새마을수련활동은 어떻게 하셨었나요?
답. 그때는 강당도 없고 홀도 없었는데 교실에서 운동장에 들어서려면 ‘어떠한 시련과 곤궁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청소년 이외에는 이 門(문)을 들어설 수 없다’는 정신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고 해서 현수막을 걸어놓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협동 ․ 단결이 되어야 하는데 저희가 당시 강당이 없고 운동장밖에 없었습니다. 전체를 모으려면 운동장 밖에 없는데 운동장에 그냥 들어오면 의미가 없으니까‘어떠한 시련과 곤궁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청소년 이외에는 이 門(문)을 들어설 수 없다’라고 적혀있는 현수막을 만들었습니다. 현수막에 적혀있는 정신을 가지고 수련원(운동장)에 들어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밑에 보시면 수련원이라고 적혀있는데 수련원 자체가 운동장(체육장)입니다. 저 문을 들어설 때 마음의 정리를 시켜주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왜 집에 가지 않고 여기서 자고, 촛불을 켜고 이런 행사를 치루느냐’라고 했겠지만 새마을지도자를 만들기 위해서 수련을 시키는 것이었고 유명 인사를 초청해서 특강도 하고 학생들이 소감문발표도 하고 그런 가운데 학생들이 단결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허벌판에서 가난히 학생들이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 떳떳이 사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그 당시에는 정신적인 긍지감을 심어주어서 자부심(Pride)을 갖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학교의 경쟁력이 높아져서 성적이 되지 않아 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저희 학교는 새마을운동을 통일교육과 접목시켜서 새마을운동이 성공하면 궁극적으로 국력의 바탕이 통일을 앞당긴다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온 국민이 새마을정신으로 무장화 된다면 남북의 통일도 시간적으로 빠르게 진행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학교는 오늘날 통일학교로서 그 위상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학교생활에 임하고 있는 것이 교직원모두의 긍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콩나물의 합창
사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의 모태였던 동광실업전수학교, 산과 논밭으로 둘러싸인 구로구 궁동의 변두리에 둥지를 틀었던 이 학교는 어렵고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꿈과 미래를 심어주었던 희망의 학교였다. 인근주민들로부터 콩나물 학교, 은행학교, 기술학교, 산지기학교라 불리며 교사들의 넘치는 애정과 관심으로 불우청소년들에게 자립의 터전이 되어 주었던 학교, 아무 것도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오늘의 사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로 거듭 나기까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교사와 학생의 뜨거운 땀방울은 교정 곳곳에 배어있다. 거친 들판처럼 그 누구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했던 그곳, 밝은 미래를 꿈꾸며 교사와 학생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새마을운동의 기초아래 걸어온 숱한 시간들 속엔 가난과 좌절을 극복하고 자립과 번영을 꿈꾸며 달려온 그들만의 뜨거운 땀과 눈물이 담겨있다. 그리고 꿈이 있고 미래가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온몸을 던진 사람이 있었으니 학교설립자이자 초대교장이었던 조동래 이사장. 일본 조부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불우청소년들이 가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사회의 필요한 역군이 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고심 끝에 그는 1972년 무인가 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게 되고 빚 때문에 공사가 중단되어 잡음이 그칠 날 없어 폐교직전에 놓였던 학교였지만 교사와 학생들이 합심해 맨손으로 학교를 재건했다. 특히 마을길이자 학교진입로였던 좁은 논두렁길을 교사와 학생 나아가 주민들까지 나서서 포장한 것은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렇게 일군 학교에서 교사들은 민주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교무실부터 화장실까지 솔선수범하며 청소를 했다. 그러던 중 학교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던 일이 있었으니 어느 날 숙직근무를 하게 된 학교장, 깊은 밤 학교를 순찰하던 그는 교실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게 되고, 놀라 다가가보니 한 학생이 빈 교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는 것은 안전관리 학칙 상 허용될 수 없는 일, 그러나 따로 갈 곳이 없었던 학생은 교실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해 달라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학칙도 학칙이지만 학생의 딱한 사정을 저버릴 수 없었던 교장, 고학도의 간절한 호소를 뿌리칠 수 없어 교장은 결국 학생을 숙직실로 데려가 잠을 청하게 해 주었다. 잠자리를 봐주고 학생이 잠들자 교장은 이내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되고 일정한 거처가 없는 학생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학교장은 교직원들이 분담해서 학생들을 기숙시키는 것도 독려했었다. 그러나 박봉의 교사들 입장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거처가 없는 학생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필요했고, 그것은 학교를 이끌어가는 교장의 입장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고심을 거듭하며 학생들의 기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중 드디어 1977년 11월 한 육성회장의 도움으로 110평 대지에 15개의 방이 있는 무료숙소가 탄생하게 되고, 갈 곳 없는 학생들에게 무료숙소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 결과 학생들의 자립 자활의 초석이 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나갔다. 한편 학생들에게 가난을 이기고 자립의 기회를 만들어 준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새마을금고운영. 1978년 3월 학교장은 전교생에게 1인당 200원씩 출자를 해 총 17만 원으로 저축을 시작하게 했다. 그 결과 17만 원에서 시작된 마을금고가 1981년에는 1억 7천만 원을 돌파, 학생 1인당 33만 원의 소득을 올리게 되고 천배로 늘어난 저축기금덕분에 은행학교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학교 안은 늘 활기가 넘쳤고 밝은 미소와 환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학교의 졸업식 또한 이색적이었다. 학생들의 뜻 깊은 졸업식이 끝나면 마을 노인들을 초대해 경로잔치를 열어 주었다. 학교에서 정성껏 마련한 갖가지 선물과 푸짐한 음식들, 학교는 학생들만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주민들도 함께 하는 하나의 지역공동체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인들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정과 흥겨운 잔치는 미담(美談)을 만들어 가는 학교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이렇듯 배우며 봉사하는 정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온 학교는 새마을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78년 5월 학교새마을추진위원회를 발족하게 된다. 이 기구를 통해 마을주민과 학생, 교직원대표들은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함께 모여 논의를 했고 계획을 추진시켰다. 이로서 새마을운동을 확대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입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되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예산부족으로 엄두도 못 냈던 운동장 확장공사를 벌여 1,800평의 운동장이 만들어졌고, 땅을 파내 인공호수를 만들었고, 돌무더기를 쌓아 사색동산을 꾸몄다. 학교를 아담한 공원처럼 변모시킨 땀의 결실로 새마을화보에 학교교정이 게재되는 가하면 학생들의 각종 참고 교재에도 소개돼 학생들의 사기가 더욱 충만해 졌다. 또한 학교진입로와 함께 1.4km 마을길에 보안등을 설치했고, 6년 동안 연간 540만 원을 마을을 위해 봉사했으며, 학교의 모든 운영은 새마을운동과 직결되었기에 새마을운영위원회를 통해 운영방침을 세부적으로 의논하며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교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학교장은 노인대학의 학장을 맡아 경로사상과 충효정신을 고취시켰고, 노인들이 거리질서 캠페인과 새마을청소에 앞장서도록 격려했다. 이렇듯 안팎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새마을활동들을 통해 학교는 꿈과 희망, 그리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훌륭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의 물결을 타고 수업이 끝나면 교직원과 학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렇게 새마을운동을 펼쳐나갔다. 한편 학생들은 매주 두 번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500포의 비료를 사서 학교인근 산에 뿌려 수목을 가꾸고 오물을 수거하고 산불을 끄는 등 임야를 푸른 산으로 바꾸는 자연보호운동에도 앞장서왔다. 또한 학교는 훌륭한 산업역군을 배출시키기 위해 학생들 개개인 1인1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자립의 능력을 심어주었다. 특히 전자과 교사와 학생 50명이 가전제품 무료수리 봉사단을 조직, TV, 라디오, 전기밥솥 등 수많은 가전제품들을 수리해 주었으며, 이러한 봉사활동은 학생 및 시민들의 물자절약과 소비절약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학교밴드부의 활동도 활발하여 밴드 부를 주축으로 시민들에게 건전가요를 보급하기 해도 했다, 또한 내 직장, 내 마을을 위한 미생방역활동은 물론 가로수에게 까지도 수시로 방충소독약을 살포하는 등 나무사랑에도 큰 몫을 했다. 한편 학생들은 산간벽지학생들을 서울로 초청, 이들에게 견문을 넓혀 주는 등 도시와 농촌간의 뜨거운 교류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명량하고 쾌적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학교밴드의 경편음악과 함께 걸스카우트 여학생들은 버스의 질서안내를 도왔고, 남학생들은 교통정리를 하며 거리 질서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투철한 봉사정신을 기반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온 학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게 되는데, 비료와 방부제가 투입된 콩나물이 시판되어 국민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자 학교는 국민보건에 이바지하고 소득도 올릴 수 있는 콩나물개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콩나물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지하 30m의 암반을 뚫은 생수로 콩나물을 키우기 4개월여 번번이 실패를 했지만 끈질긴 집념과 노력 끝에 마침내 무공해 콩나물을 재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콩나물 재배에 성공하게 되자 학생들의 사기는 진작되고 새마을운동의 열기도 더욱 뜨거워졌다. 싱싱하고 맛좋은 무공해콩나물은 교직원과 학생, 이웃주민들 사이로 입소문이 퍼져나갔고 그 인기에 힘입어 대량재배를 통해 시판에 나서게 된다. 학교의 명예를 걸고 키운 무공해콩나물을 들고 교감 황정숙 선생과 학생들은 시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시장의 상태를 모르는 상황이었던지라 판매는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했다. 콩나물을 생산․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학교의 발전과 불우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보겠다는 포부는 냉랭한 반응 속에서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러나 그대로 쓰러질 수만은 없었다. 학생들과 교사는 메가폰을 들고 주택가를 누비며 다녔고, 무거운 콩나물 수레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쉬지 않고 홍보했다. 수없이 발품을 팔며 다닌 결과 마침내 학교에서 만든 콩나물이 맛좋은 무공해콩나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사방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리듯 콩나물 주문이 폭주해 1980년 10월 500만 원을 투자하여 콩나물운반화물차까지 구입하게 되었고,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과 삼림식품 대우그룹 등 50여 곳에 정기적인 납품을 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이로서 무공해콩나물은 학교새마을 주요 소득사업으로 기반을 잡게 되었고,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이 획기적인 사업은 급기야 신문에 까지 보도 되며 일명 콩나물 학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콩나물은 학교의 명예와 영광, 번영을 합친 새마을소득에 대들보가 되었다. 새마을정신으로 키운 콩나물 소득금으로 전교생에게 실험․실습비를 전액 완전 면제해 주는 학교가 되었고, 나아가 육성회비와 수업료까지도 완전 면제해 줌으로서 가난한 학생들이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자립자활복지학교로 발돋움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으로 일궈낸 기적의 학교,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해 준 희망의 학교,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묵묵히 봉사해 온 노력으로 드디어 1980년 12월 조동래 교장은 정부로부터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받게 된다. 새마을운동을 바탕으로 하면 된다는 신념과 함께 귀한 땀방울로 얻어낸 수많은 결실, 장차 통일조국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통일의 불씨의 지피며 오늘의 사서울생활과학고를 있게 한 새마을운동은 21세기 산업역군을 만들어 낼 원동력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