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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우리나라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1년이고, 당시 저는 미국 유학중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사업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국에 건너가 미국에서 사회사업의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을 한 것이 1977년입니다. 1977년에 귀국해서 서울대학교의 조교수로 바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때 신임교수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수원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 가서 일주일동안 새마을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새마을연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갔습니다. 교육을 받으러 갈 때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자진해서 한다기보다는 한번 가서 가볍게 들어보자는 기분으로 갔는데, 사실 일주일간의 교육이 상당히 인텐시브(Intensive)한 교육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정신을 직장이나 개인생활에 실천하도록 부여받고 돌아와 제 개인적으로도 새마을운동 실천에 깊이 참여를 했지만, 제가 새마을운동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는 이러한 교육의 덕분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당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인구문제와 가족계획사업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서 저 출산 고령화시대가 되어서 다자녀. 즉, 애를 많이 낳는 것을 권장하는 시대이지만, 당시에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한 가정에 평균 자녀수가 6.1명까지 갔으니까 지금의 1.2명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구를 억제하느냐 해서 산하제한이 아닌 가족계획을 통해서 애를 못 낳는 사람들에게는 애를 낳게 하고, 애를 많이 낳는 사람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애를 적게 낳게 하는 운동이 국가의 중요한 역점사업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업자체도 새마을운동의 중요한 프로그램의 하나였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농촌에서는 한 가정에 평균 자녀수가 6명 내지 7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많던 시절에 자녀를 적게 낳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농촌의 주민들에게 인구문제의 심각성과 가족계획의 필요성, 또 모자보건의 관점에서 어머니들이 많은 출산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건강에 문제가 있고, 또 많은 자녀를 낳게 되면 자녀들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농촌의 가족계획사업을 보급을 해야 하고,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 대한가족계획협회라는 가족계획의 홍보기관이 있는데 지금은 인구보건복지협회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가족계획협회가 가족계획운동을 보급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특히 농촌지역과 도시영세민 지역의 가족계획문제가 심각하니까 가족계획운동을 보급시키는 방안이 없겠는가라고 해서 제가 자문위원이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시범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시범사업은 유엔이 재정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유엔의 기관이 UNFPA(United Fund For Population Activities)라고 유엔인구활동기금이라는 곳에서 50만 불정도 왔는데 당시(70년대 말)로서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아 우리나라 거의 전국의 농촌지역과 서울의 30여 곳 되는 영세민지역(지금의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가족계획사업을 보급했습니다. 가족계획사업을 보급하려면 보급에 필요한 가족계획요원이 필요했는데, 그 가족계획요원으로 누가 적합한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공무원 조직의 보건소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민간자원봉사자로서의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새마을부녀회장들을 가족계획홍보요원으로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당시 가족계획사업을 보급하려면 홍보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TV, 라디오, 잡지, 신문 등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홍보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대인홍보가 있었습니다. 대인홍보(Interpersonal Communication)는 일대일로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농촌사람들에게는 TV나 라디오, 신문 같은 것을 통해서 대중홍보는 하지만, 그래도 주민들 하나하나가 가족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녀회장들이 변화매개자(소위 Change Agent) 역할을 하면서 어머니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시켜 가족계획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가족계획어머니회라는 조직이 옛날부터 있기는 했지만, 가족계획어머니회가 나중에 전부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새마을부녀회장들은 과거에 보면 가족계획어머니회라고 하는 단체의 회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새마을운동과 가족계획운동을 접목시키는 훈련을 해서 홍보요원으로서 활용을 했는데, 정말로 엄청난 효과가 났습니다. 우리가 3년간의 프로젝트를 하다보니까 실제로 당시 유배우가임여성으로 15세부터 44세 이르는 여성들 중에서 결혼을 한 상태에서 가족계획을 실천하는 것을 가족계획실천율이라고 하는데, 가족계획실천율이 농촌의 경우에는 20%밖에 안됐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 다섯 명중에 하나만 피임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피임을 할 필요 없이 단산을 해야 되는데, 실제 단산과 피임을 한 사람이 다섯 명 중에 한명밖에 안될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도시의 소위 지식층이나 중· 상층의 사람들은 실천률이 60%정도 갔는데, 농촌은 10%수준 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들을 3년 동안 40~50% 수준까지 끌어올리자고 해서 새마을부녀회장들을 홍보요원으로서 교육을 시켜서 전국에 홍보를 했습니다. 3년 뒤에 다시 조사를 해 보니까 가족계획실천률이 놀랍게도 10%의 수준에서 약 35%까지 적어도 25%는 개선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엔에 이렇게 실적이 있다고 보고서를 내니까 유엔에서 평가단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5명 정도의 평가단이 한국을 와서 일주일간 전국의 농촌과 도시의 영세지역을 전부 돌아봤습니다. 그 사람들도 실제로 가족계획운동이‘새마을운동을 통해서 활발히 잘되고 있구나’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을 했고, 이렇게 될 바에야 계속해서 여러 가지 다른 프로젝트도 해 보자라고 해서 유엔의 계속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그러한 모델이 아프리카나 아세아의 여러 나라들, 당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 인구문제가 심각한 나라들, 가족계획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들에게 하나의 픽스트(Fixed)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뉴얼(Manual)로 만들어져서 각국에 보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 국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알려져 있지만 특히 가족계획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마을운동에 관여한 것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사업 즉, 사회복지를 전공을 했기 때문에 사회복지사업에 참여를 했습니다. 사회복지 중에서 저는 지역사회복지 쪽으로 전공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낙후된 지역을 어떻게 하면 사회경제적으로 조건을 향상시키느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농촌과 도시의 영세민지역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농촌이나 도시 말할 것 없이 가족계획사업 같이 보건 쪽의 사업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환경개선, 주거문제, 또는 소득의 향상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다 보니까 가족계획뿐만 아니라 새마을과 지역사회개발을 연결시키는 연구에 제가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교에 새마을연구소가 다 만들어 졌습니다. 물론 정부에서 상당한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서울대학교의 경우에도 본부 건물 4층에 새마을종합연구소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 소장은 사회학의 원로이신 이만갑 교수님이 소장을 하시고, 아마 농과대학의 이질현 교수님이 부소장을 하고, 저는 30대 중반에 아주 젊은 교수로서 농과대학 쪽이 아니고 사회과학 쪽에서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사회개발이라든지 농촌도시의 지역개발 문제에 전공한 교수가 거의 저밖에 없을 정도였고, 제 자랑 같지만 당시 제가 최초의 한국의 사회복지학 박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저를 불러서 ‘최 교수, 이러한 연구를 해 보자’라고 해서 서울대학교 새마을종합연구소에서 제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까지 한 10년 가까이 새마을운동에 관한 연구가 수없이 행해 졌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상에 학문 연구에서 보면 새마을운동만큼 연구 실적이 많은 분야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당시에는 정부가 새마을운동 연구회를 대개 교수 4인 1조로 연구팀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연간 전국의 대학교에 연구프로젝트를 주다 보니까 한 프로젝트에 4명의 교수가 참여하게 되고 ,예를 들어 천개 프로젝트가 나가면 전국의 4천명의 학자가 새마을에 관한 연구를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새마을연구를 지원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세미나에서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고, 해당분야의 학술지, 저널에 싣기도 했지만 이러한 것들을 서울대학교에서 집대성해 보자고 했습니다. 1971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70년대 말까지 있었던 모든 새마을운동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해서 책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야만이 후학들이 새마을운동에 관해서 연구를 할 때 어디에 가서 참고문헌을 찾을 것인가, 또 앞으로 무슨 연구를 해야 될 것인가, 고민 아닌 고민을 할 텐데, 그 작업을 한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로 서울대학교 새마을운동 종합연구소에서 제가 깊이 참여했던 것 하나는 국제심포지엄을 한번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특히,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관심이 대단히 많으니까 새마을운동을 조금 국제화시키자는 기운이 80년대에 상당히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전두환 대통령 정권하였는데, 그때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갖는 세계 석학들을 특히, 지역사회개발 이런 데는 선진국의 교수들도 오고 후진국의 교수들도 오고해서 지금 생각에 그 국제심포지움에 정확치는 않습니다만 한 20여명 정도의 외국의 학자들이 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약 3일간에 걸쳐서 논문(Paper)도 발표하고 토의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문으로 된 것과 국문으로 된 두 권의 책이 나와 있는데, 아마 새마을운동본부에 그 책이 비치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세미나를 통해서 저희들이 평가하기로는 새마을운동의 중요성이 전 세계적으로 인식됐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포지엄에서 저도 개인적으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새마을운동과 사회사업의 전문적인 기술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관한 연구발표를 해서 그때 논문(Paper)에 대해서 참여했던 학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새마을운동 관련연구에 제가 참여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새마을운동에서 제가 했던 활동 중 중요한 것이 앞서 제가 농촌과 도시영세민지역에서 새마을부녀회장들에게 가족계획요원으로서의 교육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것 외에도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을 상대로 남녀 구분 없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사회사업과 지역사회개발을 접목시켜 새마을지도자들의 교육을 담당 했습니다. 그 다음에 외국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져서 특히, 아세아지역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좀 배워야겠다는 것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외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은 우리가 교육을 시켜줘야 했는데, 물론 우리가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 이런 나라들을 방문해서 관계공무원들도 만나고 민간지도자들도 만나서 우리의 경험을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고 싶다고 해서 각 나라마다 공무원과 민간 농촌지도자들 중심으로 한국으로 보내면 인텐시브트레이닝(Intensive Training)을 해 주겠다는 업무협약(MOU체결)을 맺었습니다. 아세아의 모든 나라들, 남미의 국가, 나중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공무원들과 민간지도자들이 새마을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 한국에 왔고, 그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을 해야 했습니다. 제가 새마을교육에 깊이 관여를 해서 그 사람들의 교육을 맡아서 했던 것이 새마을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여러 가지 새마을운동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관여를 하면서 특별히 어려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당시에는 정부로부터 새마을운동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를 하는데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보람된 일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제 전공이 지역사회개발과 지역사회복지다보니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프로그램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우리가 학자로서 책을 통해서 배웠던 여러 가지 이론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새로 나온다거나 하는 것에 있어 오히려 그러한 경험들이 제 교육에도 많이 활용되어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면서는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잘 전개되고 있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도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무래도 정부의 최고위층이 역사라는 운동이라는 데서 당시 정치적으로 문제들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새마을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적인 이해는 여야 할 것 없이 그 자체를 가지고 문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재미있었던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당시 새마을운동 부녀회장으로 실명을 거론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분인데 실명을 거론하기는 곤란하고, 그분이 전라북도 어느 마을의 부녀회장이고, 전국적인 새마을운동의 지도자로서 국내에 새마을연수에서 성공사례로 발표되고 외국에 까지도 파견될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 언론정보학과에서 이 사람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사례를 교과서에 싣겠다고 해서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케이스(case)를 알려줬습니다. 처음에는 국문으로 된 것을 그대로 줘서 그분들이 영어로 번역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영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번역이 되었는지, 사실에 충실한지, 검토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역된 책을 보니까 큰 오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오류가 무엇이냐면 그 부녀회장분이 가족계획보급을 하고 다니는 것을 남편이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부녀회장이 어떤 어머니에게 피임을 권고해서 난관수술을 받게 해 애를 못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아이가 두 명이었고, 그 중에 아들 한명이 죽게 되니까 그 농촌에서 부녀회장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것이 동네에서 시끄럽게 되었고, 부녀회장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였는데도 부부싸움도중 남편이 부녀회장에게 손찌검을 했나 봅니다. 그 상황이 죽도록 맞았다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영문번역으로는 맞아서 죽었다고 잘못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오류를 바로 잡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외국 사람들이 볼 때 한국 사람들은 무식하게 부인을 때린다고 할 것 같아서 ‘부부간에 심한 언쟁이 있었다’로 바꾸어서 줬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부녀회장 어머니에게도 그런 사정 얘기를 하면서 내가 이렇게 번역을 해서 줬다고 하니까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때 커다란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느낀 자부심이 있다면?
답.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얘기했습니다만, 제 전공이 사회사업, 오늘날에는 사회복지라고 부르는데 특히, 지역문제를 다룹니다. 그때만 해도 새마을운동이 농촌중심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주로 농과대학교수님들과 사범대학 쪽에서 많이 참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과학의 사회학이나 인류학 쪽의 교수들도 일부 참여했고, 경제학 쪽에서도 참여한 분들이 계셨는데 사회사업과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들은 당시 교수 자체도 드물었었지만 참여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새마을운동에 참여를 해서 사회복지, 사회사업에서 지역사회개발 새마을운동에 어떻게 하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많이 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새마을운동의 지도자가 아닌 스텝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 제 제자들, 후배들 중 사회복지, 사회사업을 전공한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대거 일하게 되는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평가가 되겠지만, 사실 저는 새마을운동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한국이 개발도상국가로서 농촌도 어렵고, 도시도 어려운 시절에 그야말로 잘살아 보자라는 마음으로 마을 가꾸기 운동을 시작했고, 그때는 우리가 소득을 증대, 환경 개선, 보건 개선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새마을운동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발전을 이룩해서 초창기에 행했던 지역사회개발식의 새마을운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지금은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비정부기구) 활동 들, 소비자보호운동이라든지 환경개선운동이라든지 그 외 여러 가지 생활운동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특히 최근에 자원봉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저는 우리 한국의 자원봉사운동이 활발하게 된 계기가 초창기에는 YMCA나 YWCA, 적십자 운동이 굉장히 많은 공헌을 했고, 그 다음에 공헌을 많이 한 것으로 새마을운동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실 새마을운동의 지도자들이나 요원들을 보면 자원봉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그 사람들이 대표적인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오늘날에는 자원봉사운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돼 있는데, 사실 농촌이나 도시 저소득층지역의 경우를 보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들이 실제로 새마을운동에도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때에 따라서 새마을지도자로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실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자원봉사운동에 참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이 현대에 맞는 여러 가지 생활 개선운동이나 의식운동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몫이 조금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마을운동이 앞장서지 않더라도 앞에 말씀드린 대로 이미 여러 생활영역에서 소비자운동이라든지, 생활개선운동, 자원봉사 등 여러 분야에서 새마을운동이 불을 지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히 평가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는 외국에서의 새마을운동입니다. 요즘은 국내의 새마을운동의 활동보다는 외국의 새마을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지 자세히 모릅니다마는 외국에 새마을운동을 많이 보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특히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에 새마을운동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이 성공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의 지원과 민간의 참여, 그 중에서 특히 지도자들을 육성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앞에 제가 가족계획사업에 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만 당시 가족계획도 보건복지부, 정부가 시책으로서 적극 지원을 했고, 또 가족계획연구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가족계획연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계획에 대한 연구를 하고 거기에서 새마을운동을 곁들여 연구를 하게 되고, 그것을 가족계획협회라는 곳이 실제로 홍보하고 실천에 옮기는 그러한 정부와 연구기관과 홍보실천기관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가족계획의 사업도 발전했고 새마을운동도 발전을 했는데 아마 우리가 새마을운동의 모델을 외국에 보급시킬 때 그 나라의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 민간의 전문기관들의 연구와 실천할 수 있는 것과 교육을 우리가 많이 보급을 해 준다면 세계적으로 새마을운동의 길이 기억되리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