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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답. 그때 내가 1970년에 청와대 들어갔는데 71년 겨울일거야. 전국에 우리나라 마을이 3만3천개 있어요. 그때 시멘트가 그 이전만 해도 없었는데 가운데서 시멘트가 나오니까. 시멘트가 참 귀할 때입니다. 그때 만해도. 그걸 300포대든가? 큰 마을 적은마을 할 것 없이 전국마을에다가 300포대 주면서 농촌에선 그게 귀해서 한 대 베기 한 대 두 대 사가지고 와서 창고에 쥐구멍 떼우거나, 부엌에 솥갓에 연기나는 거만 꿀 정돈데, 한 부락에 300포대씩 갔으니 대단한 거지. 밤에 훔칠 사람도 있겠지. 그렇지만 절대 개인이 나누지 마라. 그 대신에 이걸 가지고 이런대 쓸 수 있고 저런대 쓸 수 있다. 그게 이제 길 넓힌다든가, 다리 놓는다거나, 공동 우물 깨끗하게 한다든가, 그런데 이걸 쓸 수 있다. 그러니까 겨울에 전부다 나눠 줘가지고 내년 봄에 할 일이 없으니까. 이른 봄에 누가 결정하느냐? 마을에서 10명 정도 개발 위원들을 뽑아가지고 그래서 너들끼리 해봐라. 그래 시작한 거지.

문. 처음엔 시멘트를 다 똑같이 나눠 준건가요?
답. 그것도 이상한거야 지금 보면 똑 같이 부락마다 줬어요. 그거를

문. 성과마다 다르게 줬다는데
답. 아 그거는 그렇구나. 첫해 그리 해보니까 3분지1은 놀랍게 그걸 가지고 마 우리말로 천지개벽 있지, 부락사람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길을 닦고 날리 짓 했어. 중간이 3분지1, 별로 그냥 조금 하다 만개 3분지1. 이래가지고 제일 잘하는 마을을 자조마을, 자립마을, 무슨 마을, 이자부터 하는 마을 해가지고 그게 잘하는 마을에만 내년에 준다. 이랬거든? 그러니까 안 그렇겠어요? 내년에 주고 우리는 안준다하니까 고마 불이 더 붙어 버렸어요. 그게 오래 안 갔어요. 차별 대우 한다는 것이. 그렇지 그게 아마 73년 74년부터는 그 차이가 없어졌을 거야.

문. 선생님께서 유학을 언제 가셨던가요?
답. 1953년에 휴전이 됐어. 6.25전쟁이 근데 잿더미가 다 되고 정리가 없을 땐데. 미국이 한국에 대한 대한민국의 복구, 망가진 걸 고쳐야 되겠다. 지원 사업이 시작 된거야 53년, 4년경에, 그게 구체적으로 된게 1955인데 제일 먼저 교육이요. 그래서 대학에 그때는 농업이 형편 없니까, 농과대학 병나면 고쳐야 되니까, 서울대 이대, 그 다음 서울 공대. 그 세 대학이 미국에서 특별히 지원 자금이 나왔어. 그런데 내가 나이 좀 어릴 때죠, 조교로 있을 땐데 내가 영어를 조금 교수보다도 조금 하니까 내가 1차로 걸려가지고 1955년에 미국가게 됐는데, 그땐 김포공항이 없었어요, 여의도가 임시공항입니다. 국제공항이 여의도인데 지금처럼 안 되고, 완전히 땅바닥인데 그땐 코리아 에어라인 없고 노스웨스트만 있을 때 55년에 갔어요. 그러니까 상당히 빨린 간 거죠.

문. 그 당시 일단 경제 이론이라는 게 농업을 발전시키고 그다음 공업발전을 하자 그게 전통이론인데 한국 새마을운동 거꾸로 됐네요.
답. 제가 농업경제입니다. 농촌 출신으로 미국에 가서 농업경제학을 석사학위 박사학위 하면서 내가 잊지 못하는 게 저 가난한 한국 농촌은 어떻게 하면 발전하고 우리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느냐 이리 봤는데 그때 후진국의 경제발전이론으로 봤을 때 한국처럼 이렇게 가난한 농업국이 공산품을 수출해서 공업국이 된다는 건 글 한자 찾아보질 못했어. 전부 책이 뭐냐 하면 농업국이니까 농업부터 발전 시켜서 그래하라 하거든요. 내가 미국서 공부하면서 내가 농업을 잘 알거든. 6.25 사변에 어마나 망가지고 우리나라가 어떻다는 걸 다 아는데, 여기에서 농촌에 무슨 저축이 생겨가지고 그 돈을 가지고 수출을 하고 그래 안돼요. 근데 우리는 어떻게 해냈죠. 그 당시에도 60년대 군사 혁명이 나가지고, 농업가지고 안되겠거든. 그렇다고 무슨 재간으로 공업을 합니까. 그 당시에 그렇지만 그 길밖에 없으니까. 수출할게 없으니까 그래서 부산에 합판공장 그게 제일 먼저 수출 많이 됐어. 두 번째는 가발입니다. 가발. 그때는 그 가발머리를 어디서 사가지고 왔는지 지금도 몰라요. 인도에서 가져왔는지. 가발 가지고 와서 여기 눈썹하고 내가 미국 있을 때 보면 미국여자들이 가발을 세 개 가진 답니다. 외출할 때 쓰는 거 하고 집안에 있을 때 쓰는 거 하고 손님 올 때 하고 그중에 하나는 전부다 한국 가발이에요. 두 번째가 가발, 합판, 세 번째가 런닝셔츠 안에 속셔츠 만들고, 그래가지고 1968년에 수출총액이 7억 달러 밖에 안 됩니다. 7억 달러가 그래도 생겼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기름을 수입했어요. 가스를 수입하구요. 그랬지 우리나라가 돈이 없으니까 기름도 가스도 없으니까 산을 베껴서 군불 떼고 연료하고 공장에도 산에 나무 베껴가지고 전부 민둥산이 완전히 다 돼버렸어. 1950년에 남한에 전부 빨간 산이 되버렸어요. 그럴 때 그대로 이래가지고 오늘이 된 겁니다.

문. 그러면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창인가요?
답. 내가 보기엔 이야기는 많겠죠. 내가 대통령한테 했다 뭐다 자기자랑 하겠죠. 그러면 대통령이 모르느냐하면 그 분이 농촌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어른까지 농촌에서 자랐으니까 내가 말할 게 없어요. 전부 다 알고 있었어요. 역사적으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 나서 1961년인가 제일 처음에 농업협동조합중앙회를 갔어요. 그거 있습니다. 거길 보면 농촌에 우리가 잘 살길은 지 할 일 지가 하고 조금 부지런해야 되겠고 그러고 마을에 힘을 합쳐서, 그게 부지런하자 근면이고 자기 할 일 자기가 하자는 거는 자조고 농촌에서 혼자서 하면 안 되거든 마을사람 협력해야지. 그 소리를 61년도 농협중앙회에 가서 제일 먼저 대통령 연설에서 나옵니다. 그분은 그거를 혁명 초기부터 가난한 줄 알고, 공업도 안 되는 줄 알고, 지하자원도 없고, 뭘 가지고 그래도 사람 밖에 없다. 우리는 지하자원 없으니까 그러면 사람은 무엇이 중요하냐? 과학 기술이 선진국이 돼있거나 안 그러면 생활신조가 남달리 우수한 생활신조를 가진 국민이 되거나. 그거 밖에 더 있어요? 근데 그때로 봐서는 대학도 별로 없는데 과학 기술 그건 거짓말이고 마지막 길이 뭐냐면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신조 안 된다는 것도 해내자. 우리도 할 수 없다는 자신감. 그 당시 만해도 우리나라는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역전의식이라고 했어요. 역전은 할 수 없다. 그게 제일 듣기 싫은 소리에요. 너희 코리아 역전은 할 수 없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리더는 그런 생각하는 국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국민을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이런 데에서 새마을이 시작된 겁니다. 어렵지만은 해내자. 되니까 우리도 해내자 이리 되는 거 아닙니까? 누가 철학자가 연설한다고 그 소리되면 누가 못해요 다 되지. 그러니까 우리는 그거를 한두 사람이 행동한 게 아니라 그때 국민의 7할이 농촌인데 농촌이 그 시멘트 받아가지고 각자가 아. 우리도 할 수 있다. 그게 우리나라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문. 그래서 아마 새마을운동이 번지게 된 모양이죠?
답.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가 시킨다고 움직입니까? 세상이. 그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은 뭔가 한이 맺혀 있었어요. 그 한이 뭐냐면 왜 우리는 이리 가난하나 이게 하나고, 그담에 6.25 전쟁에 우리는 아무 죄도 없는데 북한이 넘어와 가지고 잿더미를 다 만들었나. 가난의 한, 전쟁의 한, 그게 그 당시에 지구상에서는 한국과 같이 한 맺힌 별로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사람이 굉장히 코너에 몰려서 어려워지면 그대로 손들거나, 뭔가 몸부림치는 거, 그거라고 봅니다. 이게 일종에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이 남아 있는 겁니다.

문.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새마을운동에 애착이 대단했겠네요.
답. 그것 밖에 더 있었겠어요? 어디를 믿고 얘기를 하겠어요? 지금 같으면 삼성IT산업, 현대 자동차, 무슨 냉장고, 조선소 이런 걸 가지고 희망이라도 갖지만, 아무 것도 없는데서 뭘 가지고 국가의 지도자는 뭔가 되는 게 있어야 되지. 그런 게 대단하죠. 안 되는 것에서 된다는 것처럼 대단한 게 없는거야.

문.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굉장히 많이 챙겼죠?
답. 뿐만 아니라요. 지방 초독순시하면 내가 여러 번 따라 당겼는데 경상북도 사진도 있는데, 경상북도에도 초독순시, 연 초 되면, 지방을 순시하면, 헬리콥터 오라 해가지고 헬리콥터타고 헬리콥터 조종사 옆에 경상북도 지도자 옆에다 놓고 요쪽으로 가보자 저쪽으로 가보자 몇 시간을 돌아다닙니다. 그래가지고 경상북도 어딘가 정월 2월 달쯤이지, 막 온 동네가 지붕을 뜯어 고친다고 난리가 쳤어요. 그러니까 위에서 딱 보고 저 동네 내려가자 이거야. 겨울철이니까 가까운 논에 내려가면 되거든 논에 내려가지고 나 뒤따라갔는데 지붕위에서 고치는 동네사람들이 전부 놀라 가지고 전부 이러고 있는데 그냥 하라고 그래서 쭉하는 거 보고. 또 헬리콥터 다고 또 가고, 또 가고, 좌우지간 그분은 이 새마을을.

문. 지도자 양성이나 마을 조직에서 새마을이 성공요인 어디에 있나요?
답. 성공요인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요새 와서 우리나라의 이 역사적으로 유교문화가 있다는 거 유교 문화에서는 이상한 얘기지만 뭐 있냐하면 옛날부터 유교문화에는 과거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그 집 아들은 출세했다 이런 얘기가 있거든. 그러니까 유교문화가 중국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요새 베트남까지 요 국민들은 세계 다른 후진국하고 어디가 다르냐 하면 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부모가 희생을 합니다. 다른 나라도 그런가 하고 아닙니다. 나도 농촌에서 내 부모와 내 형님이 내 공부시킨다고 희생해서 오늘날에 내가 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유교문화가 되가지고 그래도 해방이후에 이승만 대통령 때는 경제 건설은 못했지만 초등학교가 전국 시골에 우리 면 같으면 내 있을 땐 하난데 남북 중간해가지고 4개까지 생겼어 중학교도 생기고, 농촌에 자라는 젊은 사람이 학교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거 이게 제일 큰 성공이라고 봅니다. 농촌은 초가집이고 호롱불이지만 전부 글을 읽을 줄 안다. 공부를 해서 그러니까 아까 내가 말한 별수 없는 거 아닌가? 우리나라 잘되려면. 그래서 대통령이 새마을운동하자 이러면 이게 옳은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야 되겠다. 대통령이 위대한 그것도 아니고, 우리 국민이 수준이 높았어요. 가난하다 하는 것은 세계에서 아프리카 국민처럼 가난한데 사람이 달라요. 왜 사람이 다르냐면 교육이야 지금도 교육 때문에 날리지만 왜 이렇게 클 수 있었나하면 우리는 몇 천 년 동안 받아온 문화가 유교입니다. 유교문화는 사람은 다 이 다음에 부자 되고, 잘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는데 부자 되고 잘살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를 많이 해야 잘 산다는 게 하나의 믿음 신앙이 있거든요 이게 굉장한 겁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일종의 의식개혁운동?
답. 그렇지. 그게 지식수준이 높으니까 그게 되지요. 지금 까만데 가서 그런 소리 해봐야 안 먹혀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는 리더가 그런 소리를 하면 금방 않아 듣습니다. 옳다싶으면 옳게 엉터리 소리를 하면 그건 안 되는 거야.

문. 초기에 매월 정기적으로 새마을 브리핑도 하고 이런 식으로 됐었나요?
박정희 대통령이 보고도 받고 했다는데요.
답. 아 그걸 내가 책을 한번 써 볼까하는데 그 제목을 박정희 대통령과 브리핑 행정. 아시겠죠. 이조 5백년에 브리핑 행정 있었어요? 이승만 박사 세대 때도 내가 알기론 브리핑 행정 없었어요. 이 브리핑 행정이 5.16군사 혁명 60년대 그때 군인사회에서 이게 나온 거 같아요. 내가 통계를 내보니까 50년대 6.25 전쟁이 휴전이 들어가고 나서 60년까지 7년 동안에 우리나라 군인들 장교가 몇 만 명이 전부 미국에 유학 갔다 왔어요. 생각해보시오. 그 당시에 비행기가 여의도에서 출발 할 땐데 누가 가겠어요? 그 당시에 국인들밖에 없어요. 군인들 장교가 거기 가서 공부 안 했다고 치자. 그래도 전장의 원리는 뭐냐면 적에 제대로 손해를 끼치고 우리는 최소의 희생을 입어야 한다. 이게 경제 원리입니다. 이윤은 최대로 올리고 비용은 최소해야한다. 이게 합리주의요. 이게 우리나라에는 학교나 기업에 쓰기 보담도 군인들이 미국 가서 배워가 와가지고 정부의 관리실장이다 뭐다 해가지고 대통령이 그런 분이고.

문. 이게 새마을 하고 어떻게?
답. 그 브리핑을 하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중앙 부서가 브리핑을 하지요. 그 다음에 도에 초독순시에 전부 브리핑을 합니다. 차트 요래 만들어가지고 한 10장쯤 해가지고 요렇게 하는데 그 문제를 만들어 이래 하거든요. 거서 도로를 매년 하니까, 이게 이때 도청할 때 군수가 옵니다. 그럼 군수가 그걸 배워요. 자기들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러면 군수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브리핑 식으로 이래 하며는 면장이 군에 갈 때 그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가지고 가요. 이게 어디 까지 가느냐하면 70년대에 시멘트를 나눠 주니까. 전국의 마을에 진형마다 회의를 하다 보니까 장소가 없거든요. 그래서 마을에 마을 회관이라는 게 생겼어요. 74년, 5년에 그러니까 내가 그때 전국에 돌아다니고 나는 마을에 개인 집에 안가요. 마을회관에서 문 열어보면 마을 회관에 브리핑 차트가 있어요. 나는 다른 사람한테 안 물어 봐요. 차트 보면 농가가 몇 집이고 주작물이 뭐 몇 평이고 작년도 소득이 얼마고 앞으로 뭘까 소득을 올린다. 거기 다 있다니까요. 그게 한군데가 아니라 마을까지 갔다니까요. 그것이 얼마나 박혔겠어요. 우리 사고방식이 그건 혁명이에요. 내가 언젠가 글을 쓸라고 하는데 그게 만약에 대통령 이런 사람이 효율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문제 해결 방안 1, 방안2, 방안3, 이러가 해놓고는 우리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방한 2를 택하겠습니다. 그 대통령의 재갈을 바랍니다. 그때 기준이 뭐냐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생산성이 보다 높은 거, 보다 효율적인 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는. 그러면 각 장관, 도지사, 군수, 면서기가 다 알고 있는 거라, 박정희 대통령한테 브리핑할 때는 효율이 보다 높은 거, 생산아 보다 높은 거해야 대통령이 재갈을 한다. 하는 거 딱 알거든. 아니까 브리핑 만든다고 그 전에 2,3일 전에 밤에 잠을 안자요. 이 사람들이. 그게 안 틀리려고. 그게 얼마나 과학적인 겁니까? 그게 오늘 날의 대한미국을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지도자를 잘 육성해서 성공 요인이 될 수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게 그거부터 시작해요. 첫해 네가 30포대 했지요? 30포대 시멘트를 마을 단위에 줄 때, 누가 이장이 혼자서 결정하지 말고 마을에 개발위원회를 만들어서 10명 정도로 해서 결정해라 했을 때,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은 여태까지의 이장을 한 사람은 이장은 수당이 나오잖아요. 그 당시에 추수되면 쌀을 한되면 한되 두되 모아 주거든. 받는 게 있는기라. 월급을. 근데 박통은 다 알고 있는 기라. 그럼 보다 보수를 받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마을 사람 뭐하냐면 니는 쌀 몇마 받쟈나. 니 혼자 해라. 이게 있을 까봐. 구장은 구장, 이장은 말고, 새로 마을에서 지도자를 창출해라. 그게 아주 중요한 성공요인이라. 그 집안에 구장이다 하면 조끔 관료성이 있지. 면회 출입도 하고, 니 이래라. 저래라. 이러는데 그거 빼고 마을에서 누가 이런 일에 새마을지도자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마을마다 다른 거라 그 마을에 옛날부터 마을을 위해서 좋아하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근데 남여를 뽑았다는 게 대다한 거야. 왜냐면 농업부문에 일반 정부사업은 전부 들판에 저수지 만들거나, 경지정리 산업하거나, 뭐 농업기계 이러긴데 새마을 산업은 지붕 고친다. 부엌 고친다. 이런 거거든 변소 고친다. 이게 남자 할 일이 아니고 여자 할 일이죠. 거기에 처음부터 여자 지도자가 나왔어요. 유심히 여자 지도자들의 교육수준을 보면 이거 정치 모임 같으면 서울에서 여자 대학을 나왔다. 그래서 유명하다. 그 사람이 우리 면에 여자 지도자다. 그렇지만 이거는 마을에 아주 더러운 일 하는 거거든요. 여자의 교육 수준하고 관계없었어요. 그런 일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학교야 갔든, 안 갔든. 그런 사람이 여자 지도자가 나왔다는 거 나는 굉장히 합니다. 그래서 3만 3천개 마을에 3만 3천명의 여자 지도자가 나왔고, 3만 3천명의 남자 지도자가 나왔어. 그러면 이게 6만6천명의 농촌 지도자인데 이게 선거 때만 이용해 먹는 지도자가 아니라 마을에 모든 일을 우리가 끌고 나와야 되요. 그런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조금 해보다가 이거 수지 안 맞거든. 나 못하겠다. 이러고 어떤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10년 이상했어요. 보수도 없이 마을을 위해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80년에 청와대 그만 두고 농협에 있으면서 내가 글을 써야 되겠다. 전국에 새마을지도자들 저렇게 역사 기록에 없으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린다. 그래서 나는 책으로 쓰기 시작해가지고 내가 노란 책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경제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해가지고 그거 일부러 새마을 지도자 중에 특별히 유명한 지도자만 매달 월간 경제 동향보고에 올라와서 대통령과 장관들 앞에서 자기 성공사례를 발표했고 그 잘하는 효과가 좋은 사람은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의 교재, 성공사례를 발표했어요.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는 교재가 없습니다. 교과서라는 게 없어요. 있었다면 전국의 6만6천명 뛰어난 새마을 지도자들이 와가지고 자기 성공사례를 발표했어요. 대게 아침에는 두 세 사람, 오후에 두 세 사람 정도, 그 다음에 하루 종일 그걸 듣거든. 우리 마을은 이래 생겼고 그래가지고 이 어려운데 이거 해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런 소리를 자꾸 듣다보면 사람이 좀 달라집니다. 그래서 고거를 딱 이용해 가지고 저녁에는 저녁 먹었다고 잠자는 게 아니라, 그 그때는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 방도 좁았으니까 한 방에 15명이서 잡니다. 그러니까 15명이 팀이 되가지고 밤에 저녁 먹고 가서 지 방에 가지고 분임토의라는 게 그 거 참 분임토의, 아까 말한 브리핑, 그 분임토의 그건 굉장히 발전된 교육 방법입니다. 그룹 디스커션. 아직도 그룹 디스커션이라는 게 선진 교육 방법이죠. 한국에는 새마을운동 때 가장 선진된 교육방법이 도입됐어요. 그래서 그룹 디스커션을 하면 그걸 매일 하다보면 서로 통할 수도 있고 저 사람하고 나하고 이야기도 되고, 사람이라는 게 전 부 어른이니까 친구가 되요. 그래가지고 연수원 1주일간 토의 한 거를 그 전날에 자기가 리포트를 써가지고 마지막 날엔 제1반, 제2반, 15분씩 발표합니다. 그거를 가지고 하는 거죠. 프린트를 해서. 그 당시 1970년대부터 굉장히 새마을교육이 근대화됐다 할까요. 앞서간 교육 방법이었어요.

문. 새마을운동이 지역에서도 지도자혼자 결정 안하지 않습니까?
답. 그게 내가 이야기 하면 청중 다 아시겠지만 선거가 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바람이 내려옵니다. 선거 때 되면. 어느 당에 찍어라 하면 구장이 우리 동네는 저사람 찍어라. 그러면 다 무조건 가서 찍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때는 농촌이 완전 핫바지지요. 서울 사람 맘대로 하면 따라가는 게 농촌인데 요새는 농촌사람이 그리 서울사람 찍었다고 따라 찍어요? 지금 농민들이 다 알고 찍고요. 그럼 언제부터 그랬냐 하면 새마을사업입니다. 그게 마을회관에 남녀노소 모여가지고 거수하고 한사람이 오래하면 가서 잠자야 되겠다. 머 쓸데없는 소리 많이 하노. 요점만 얘기해라. 거기서 교육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농민들도 요새는 딱 요점만 말해가지고 예스 노 그리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민주주의 훈련이지 민주주의는 교과서 이렇다 저렇다 그거 가지고 안 된 다말이야. 그래서 난 새마을운동이라는 게 난 정치학은 아니지만 엄청난 한국 민주주의에 기초가 됐어요. 그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 대통령 아니라고 하지만 대통령은 아니지만 대통령 있을 때 민주주의가 제일 기초가 됐다. 그게 우리 대학 다니는 우리는 그런 걸 배우는데 농민이 그런 걸 어디서 배워요. 그 사람들은 실천을 했어요. 그걸 가지고.

문. 그리고 이 새마을운동이 기존 여자들 항상 조용히 있어야 되고 집안이 망한다 하고 앞에 안나 섰지 않습니까? 새마을 기점으로 평등사상이 이런 것들이 독립된 거 아닌가?
답. 좋은 말씀이구요. 그 당시만 해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날뛰면 그 집안 망한다. 이게 한국에 유교만이 아니라 내가 보면 말이죠. 무슬림, 심지어 무슬림 종교는 여자는 학교를 가면 안돼요. 여자는 배워도 안 되고 여자는 외출도 안돼요. 사람 취급 안하는 게 그 시댄데 한국도 약간 그런 게 있었지. 이게 말 가지고 됩니까? 남녀평등을 해라 뭐 어째라 하는데, 새마을 바람에요. 아까 말했듯이 여자 지도자가 전부 일군이라 나와서 이걸 하니까 꼼짝 못해요. 그러면서 기왕 나와서 하니까 무당하고 점쟁이가 농촌에 있는지 지금 물어 보시오. 지금 무당하고 점쟁이가 서울에 많은 지, 농촌에 많은 지,

문. 어디가 많아요?
답. 내가 볼 땐 서울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지금 농민이 무당한테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농민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무당이나 점쟁이 점치라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오히려 서울에 국회의원 부인이 우리 남편 선거에 나가면 될런지, 안될런지 점쟁이한테 가지. 내말이 거짓말인지 물어보세요. 내말이 완전히 거꾸로 됐다니까,

문. 농촌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답. 몇 천 년 동안에 우리가 말하는 그런 근대적인 믿음, 미신, 요새 미신이 어디 있어요? 도에나 있지. 그게 누가 가서 연설을 했어요? 해봤지, 그게 뭐냐면 마을에 왜 들어가는데 옛날에 여기 귀신 탄다고 들어갈 때 돌 던져두던 거 있죠. 그게 몇 백 년, 몇 십 년 가면 돌산이 되는데 새마을운동하다 보니까 마을안길을 넓혀야 되기니 그게 걸거 치거든. 에잇 이거 치워 버려라 이거야. 그거 오히려 광장이 되고 돌 던지는 사람 요새 없잖아요. 괜히 기분에 하나 던지지. 결국은 지붕 고쳤다. 길을 뚫렸다. 물질적인 것만 아니라 사고방식, 그게 근대화인데 어떤 면에서는 근데 농업국가에서는 농촌이 근대화 돼야지요. 도에서 몇 사람 근대화되면 뭐합니까?

문.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시면서 그때에 제일 큰 변화가 어떤 건지 얘기 좀 해주시죠.
답. 내가 볼 때 새마을 운동이라는 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새마을 사업, 새마을 정신. 내가 볼 때 새마을 사업은 경제학적으로 보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있어요. 75년 72년 그때 클라이막스고 길 닦고 우짜고 그거는 어느 단계에 가버리면 할 게 없거든. 그래서 새마을 사업을 계속하면 안됩니다. 사업은, 그런데 뭐시냐 하면 새마을 정신. 그런 부지런하자, 제 할 일 자기가 하자, 질서도 지키고 협력할 거는 협력하자, 이런 거는 선진국이 될수록 그런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새마을 사업의 실천에서 확인을 한 새마을 정신은 역사적으로 남을거다. 난 이래 생각을 했어요. 근데 인제 80년대 들어오면서 새마을 사업은 할 수가 없게 돼있어요. 길도 자꾸 닦으면 안 되잖아요. 들판에서 농사져가지고 소득을 올려야지. 그러면 인제 들판에서 농사를 잘 지어가지고 공동철 해가지고 돈벌이 하자 하는 것은 농협에서 해야 하는 거예요. 지금 농협에서 단위조합이 하고 있죠. 그러니까 무의미 한건 아니라 70년대 농민들이 그리 단합됐으니까 단위조합이 득을 본거죠. 그래서 단위 조합이 굉장히 발전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때문에. 내가 알기로 새마을운동 전에 한 면에 단위조합 직원이 8명인데 70년대 새마을운동 하고 나니까 20명으로 늘었어요. 직장이 지금 면사무소 별거 아닙니다. 단위조합 그게 큰 역할로 하니까 정부에서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새마을 사업인데, 글쎄 그거는 인제 가만 보니까 도해서 해야 될 것 같다. 그랬어요 현재로 봐서는 농촌에 한 마을에 100호가 있으면 예를 들면 젊은 후계자가 있는 집이 10집 10%가 안됩니다. 20~30%는 노인들 남녀 둘이만 있습니다. 얘들 도회지로 다 가버리고 나머지도 20%는 다 죽고 노인 혼자서 살거나, 할머니 혼자서 살거나 이런 상황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대신에 사람은 경기도 하고 서울로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문. 이제 도시로
답. 그렇죠. 그럼 이제 도외지에 예를 들면 말이죠. 푸른 숲을 가꾸게 하자. 놀이터 가서 어지럽히지 말자. 또 길에 나무도 심고 화초도 가꿔서 모든 사람이 볼 때 참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자. 이게 무슨 정당하고 관계됩니까? 이게 뭐하고 관계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Globalization 전 세계 사람이 한국에 구경도 오고 다 모여들고 나중에 남북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 여기 와서 돈 많다고만 놀랄게 아니라 멋지게 해 놓은 걸로 놀라게. 그렇다면 국민이 뭔가 그런 거는 해 놔야 할 걸 그걸, 너무 농촌, 농촌 하면 그건 이상해집니다.

문. 그러면 아직도 새마을운동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답. 어떤 사람은 그거 말, 새마을 기분이 나빠서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뭔가 국민운동이 필요 없다. 이런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지금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내가 열심히 보는데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했잖아요. 패하니까 1975년에 월남에서 4만5천명이 개죽음을 했어요. 입장을 바꿔 보시오. 미국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허하겠어요. 거기 가서 우리 얘들 4만5천명이 죽어 버렸다. 이럴 때 국민정신이 필요해요. 그걸 주도한 게 내가 볼 때 타임즈인데, 타임즈에서 뭘 분석 했냐면 전 직원을 동원 시켜가지고 현재 미국 사람을 국민정신에 어디가 병인지, 그럼 우리 타임지가 끌고 나가자. 그래서 분석을 해보니까 애국심 부족이다. 애국심이 모자라니까 우리만 잘살면 되지 뭐 하러 아시아 가서 개죽음 하느냐. 치워 버려라. 우리만 잘 살면 된다. 이래 된거야. 그래서 내가 쭉 읽어 보니까, 왜 애국심이 적으냐? 미국 사람이 편하고 잘사니까, 애국심이라는 건 군대에 간 국인하고 시골 농사꾼만 애국심이 있지. 다른 사람 애국심이 없데 미국 사람이. 이래 되겠냐? 이래가지고 그럼 어떻게 하면 애국심을 일으키느냐? 거기 또 나와요. 인내력이 있어야 되고, 희생 좀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 뭐 때문에 인내를 하고, 뭐 때문에 희생을 해야 하느냐? 그럼 종교 믿는 사람은 종교에 거기가 그럼 좋고, 그게 아닐 때는 USA를 위해서, 미국을 위해서 내가 참아야 되겠다. 미국을 위해서 내가 그 정도는 희생해야 되겠다. 그게 그렇잖아요.

문. 그 새마을 정신도 지금 그렇게 필요하다는?
답. 영국은 말이죠? 영국은 노동운동이 노동당하고 보수당하고 두 개 아닙니까? 그래 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려고 너무 심하게 절세 하니까. 세금 다 뺏기고 하니까. 굴뚝에 연기가 껴졌어요. 1970년대 선진국 제1등 국가 영국이 굴뚝에 연기가 껴져 있으니 어떻게 하냔 말이야. 거기서 나온 게 대처수상입니다. 대처수상은 부잣집이 아니고 그로세리 여잔데, 딸인데 어떻게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을 나왔는데 그 양반이 국회에 총리로 나올 때 자기 슬로건이 근면, 자립, 의무를 내세웠어요. 그게 70년대인데 난 그걸 타임즈를 청와대에서 읽으면서 콧대 높은 영국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베꼈나? 그럴 턱이 없는데 이래 쫙 읽어보니까. 그게 왕실 영국이 전 지구촌을 식민지로 만들 때에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이념이 근면, 자립, 의무랍니다. 그게 뭐냐면 그면, 자립, 의무 전부 자기하고 싸우는 거에요. 영국 국민들이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자유 달라, 평등 달라 했다가 나라 망했다 이거야. 이제는 뭐가 필요하느냐? 내 할일 내가 하자. 그게 대처 수상이야. 그때 그걸 읽고 그 때부터 느꼈어. 새마을 정신은 영원히 안 죽을 거다. 나라가 어려워지면 국민한테 호소할 것은 국민이오. 남한테 호소하지 말고 우리 각자 제 할 일 합시다. 난 그것밖에 없다고 봐요. 때가 온다 이거야 그런 몇 가지를 쭉 이레 요새가 아니고 청와대 있을 때부터 이 새마을정신은 죽지 않는다. 이다음에 대통령이 몇인가 나오고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이거 거꾸로 갈 대통령은 안 나올 거다. 내 이래 봤어요. 그 후에 정권이 지금 얼마나 바뀌었어요? 근데 오늘 또 이런 인터뷰하고 이게 이유가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정신에, 그러니까 지금도 시멘트 줘가지고 길 닦아라. 그게 아니라 그런 국민 우리 사고방식에 우리 이런 점이 약한 점 있다면 그걸 강화하는 국민운동은 모르겠어요. 누가 대통령이 나와도 강조할거예요. 나라를 위해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각자가 해야지. 어떻게 대통령 혼자서 다 하노?

문. 앞으로도 계속 새마을정신은 어떤지 간에 기본적인 정신인거네요.
답. 그래서 옛날에 이념 나도 젊을 때는 공산주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땐 책이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 공산주의 책 마르크스나 레닌의 공산주의 계급투쟁.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 전부 국가나 지배계급의 잘못이다. 이래되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이거야 내 할 일도 해야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는 내할 일도 해야 한다. 나도 어째야 한다. 그게 빠졌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망하게 돼있어요. 그럼 공산주의가 망하면 자본주의가 돌아올 거 아닙니까? 자본주의 돌아오면 그 좋은 예가 중국입니다. 중국이 모택동이 때 그 계급투쟁 갈라먹고 우짜고 했겠지 해보니까 형편없거든. 돌아오니까 중국이 정신교육이 필요하거든. 정신 교육이 필요한데 공산당 간부가 같은 공산당 간부에게 교육하긴 좀 안 좋거든 지도 같이 옛날에 떠들어 놓고선 이젠 거꾸로 얘기해 안 되니까, 한국에서 데려갑니다. 정신교육에 그래서 옛날에 수원에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에 원장은 정경환 씨 지금 6년째 불려갑니다. 거기 가서 농민한테 교육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중앙, 지방 공무원들에게 한국에는 새마을 이런 정신 자립갱생으로 이거 한다. 6년째 했어요.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별수 없구나. 공산주의도 하고 되돌아오면 또 이걸 요구하는 구나 그러나 이거는 참 건전한 자본주의 정신이다. 새마을 정신은 자유민주주의이고 경제는 시장경제 그걸 건전하게 오래오래 번영하려면 국민들이 이 정신을 간직하고 생활화해야지 이제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뭐한다고 잘사는데 부지런히 할꺼고 좀 써버리자 니 혼자해라 난 나대로 산다. 그래가지고 나라가 잘 돌아 갈란지 두고볼 일이예요.

문. 이게 인제 40년 가까이 되면서 평가 중 부정적인 견해도 있지 않습니까?
답. 통치 철학인데 내가 반성을 해보면 난 정치적으론 굉장히 보수주의입니다. 그걸 보면 요새로 말하면 내 할 일부터 해야 되겠다. 그런 건데 그런 사람 보니 답답하겠죠. 틀렸다고 보기보단 저거 말이지 지금 급한데 어서 갈라먹어야 되겠는데 우리 경제학에서는 나 미국에서 공부를 했는데 미국 또 한때는 공평히 갈라 먹는 게 굉장히 쎈 데, 미국에 내 긴 이야기는 않겠는데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갈라먹을 게 있을 때 갈라먹어야지. 갈라 먹을 게 얼마 없을 곳에서 갈라먹기부터 해버리면 아무것도 없다 이거야. 그러니깐 갈라먹자는 소리는 나중에 해라. 좀 모이거든 갈라먹자고 해야지 초장부터 퍼 들어가지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갈라먹겠습니다. 박수치고 대통령이 되면 뭐하겠단 말이야? 가난함 속에서도 인기 끌겠다고 갈라먹는 거를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보는 데가 남미입니다. 남미. 라틴 아메리카 그 라틴 아메리카는 정치가들이 그게 인기주의라는 거죠.

문. 그게 민간이 아니라 관에서 주도를 한거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선생님이 보시기엔 이 새마을 운동이라는 게.
답. 내가 보기엔 이게 정치 같으면 정치 쇼하려고 지가 장례식 칠한다. 그리 되선 안 돼죠. 그래서 나는 이제 새마을운동이 정치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참 말다 못 하겠지만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새마을연수원 졸업한 사람이 한 구내에 50명 될 때까지는 사후 지후를 갔어요, 그러니까 한 50명 될 때는 모아 놓고 딴거 안합니다. 개인 전부 고백하게 그러면 전부다 자기가 후회합니다. 내가 별로 한일이 없습니다. 요새 내가 하고 싶어도 맘 데로 안 됩니다. 좋습니다. 해야 좋은데 100명에서 200명이 넘어 버리니까, 그 큰 자리도 문제고 그리 되니까 회장 뽑아야 되고 그럼 사람이라는 게 내가 인제 회장되어야 되야되겠다. 그리니깐 뭐냐면 너 나한테 표찍어라 제찍어라 뭐 이렇게 하니깐 아하 이게 사람 안모여야 되겠다. 내 거기까지도 통제했고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에 졸업한 졸업생 이름이 다 있지요. 그거 절대 국회의원한테 주지마라. 주고나면 고거한테 너 나한테 표찍어라 하면 그게 정치되는 거야. 그 정도로 나는 사사건건이 이건 정치하곤 다르다.

문. 정치에서 배제를 시키고 이게 순수한 민간 운동으로
답. 이게 정치가 될 이유가 없단 말이야. 사람이 부지런하자. 니는 왜 니할 일 안 하노? 니는 왜 지역 사회 좋은 일에 협조를 안 하노? 그게 무슨 정치입니까? 그 소리 했다고 지금 여당이다, 야당이다. 그럼 야당은 뭐하는 겁니까? 놀아라! 낭비해라! 근데도 까지 마라 그게 야당이야?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근데 이게 박통이 했으니까 정치가가 했으니까 정치야. 나는 특별 보좌관으로 구분하려고 그때부터 내가 지금도 그때 참 잘 했구나. 그게 여태까지 살아남는 게 정치였다는 증거가 한 개도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는 겁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답. 사람들 마다 다른데 어떻게 평가 하냐면 경제 발전을 비행기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것을 봅니다. 모든 나라가 경제 발전을 봉건사회 때 100년 동안에, 200년 동안에 활주로에서 뜨지 못하다가 비행기가 활주로 뜨는 것을 테이크 오프라고 랍니다. 그게 인제 근대화인데, 영국의 비행기는 근대화할 때 부드럽게 떠올랐고, 독일은 히틀러가 막하니까 이렇게 빨리 떴고, 일본은 일본 나름의 군국주의 뭐 있어가지고 이렇게 올랐지만 대게는 경제는 이렇게 오르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함 보시오. 1인당 국민 소득이 73년에, 72년에 100달러, 120달러하다가 이게 80년, 90년 할 때 수직으로 오릅니다. 수직으로. 이거를 압축발전인가 뭐 희한한 말들이 많은데 아무튼 대한민국이라는 비행기는 70년대, 80년대, 90년 올림픽 할 때 수직으로 올라왔어요. 그게 경제학적으로 성명이 되느냐? 안됩니다. 그거 뭘 가지고 설명이 되느냐? ALL CUT PRESSING, 영어로 3000천만 우리 국민이 전부 한 덩어리 됐어요. 이걸 반대하는 사람만 형무소 들어가 있었지, 그 이외에 사람은 비행기 띄우자 하고 전부 힘을 합치니까. 비행기가 수직으로 올라가 버렸어요. 이거 기적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책에 딱 써놨어요. 이거는 전례 없는 기적이다. 왜 한국 비행기는 70년대 와서 수직으로 올라갔냐? 누가 뭐라고 욕해도 그게 사실이라. 비행기 뜬 것이. 이게 나중에 해석을 해보면 수요공급, 경제원론 가지곤 그렇게 안 된다고요. 뭔가 이게 웃기는 일이 생겼다 이거야. 이게 웃기는 일이 뭐냐면 전부가 달라붙었다. 잘해보자. 비행기 한번 띄어보자. 수출, 수출하고 그게 뭐 때문에 반대를 해요?

문. 비행기를 수직 상승하는데 새마을운동이 밑받침 됐다 이거죠?
답. 그게 새마을운동이죠. 밑받침 됐죠. 그거 이외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함 물어 보시오. 모든 경제학자들 함 물어보시오. 이상하다, 어떻게 이래 올라갔노? 그게 단축 된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래서 이제 제일 중요한 거는 그때 그 당시에 압축해서 단축을 시켜가지고 현대 자동차도 키웠고 재벌이지만은 조선업도 발달하고 그게 재벌입니다. 그게 재벌을 그때 키웠기 때문에 80년대 중국이 난데없이 노동 집약적인 양말이다. 손수건이다. 전 세계를 할 때 우리나라 중소기업 다 망했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왜 이리 되느냐? 그때 재벌들 키어 놓은 것 가지고 지금 이래 되가지고 2만 달러다 카고 애들 해외로 보내고 여행도하고 하죠. 그때 그리 안했더라면 지금 중국한테 잡혔어요. 참만 다행이요. 역사적으로 보면 그걸 고맙다고 생각해야 돼. 그러니까 새마을 업적에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행동을 계속할 순 없지만 버려선 안 된다. 그런 일 있었다 하는 걸 남겨 놓자. 필요하면 사람이 안 해보다가 옛날에 한번 해본 건 해보기 쉽거든, 내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