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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초창기 때 각 대학교에 새마을 연구소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나요?
답. 그거는 그 당시에 정부에 지원을 문교부를 통해서 전국의 대학에 새마을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권장했어요. 그러다 보니깐 전국에 대학 새마을연구소가 없는 대학이 없었어요. 전국에 다 생겼죠. 대학교 새마을연구회도 회원이 1500명이 넘었어요. 완전히 대학 교수들만 구성되고 1년에 두 차례 씩 학 술대회도 갖고, 그것도 끼지도 못해요. 시원찮은 논문은 잘된 것만 선별해서 학술대회을 하고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작고하고 나서 정부가 바뀌고 나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사실은 점점 축소되다가 나중엔 이게 어용단체로 몰렸어요. 그러니깐 각 대학에 새마을연구소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지금 아마 찾아보기 힘들거에요. 서울대학교를 비롯해서 새마을 연구소가 거의 다 없어졌어요. 우리 경희대학은 밝은 사회 연구소가 그대로 그냥 있는데 다른 대학은 거의 다 없어지고 다 어떻게 됐냐면 지역사회 개발 연구소라고 되어있는 게 그 전신이 새마을연구소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문. 그러면 그 당시 새마을운동의 이론적인 배경은
답. 그 당시엔 71년에 새마을운동을 시작을 하면서 전 공무원들이 의식개혁을 한다고 정부차원에서 새마을교육을 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교수들이 거기가 교육을 받고 나니까. 교수들이 주축이 돼서 이론적 연구를 해야 되겠다. 하는 의도에서 새마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늘기 시작하죠. 근데 제가 알기론 거기서 농과대학 교수님들, 교육학 하신 교수님들 나중에 경제학 한 교수님들이 개입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 당시 주류가 농촌 봉사 계몽입니다. 그런데 근로봉사 못 사니까는, 학생들이 나가 여름에 일손 돕고 이런 걸로 시작을 하는데 그런 게 돈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돈도 문교부를 통해서 지원비가 대학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게 활성화되기 시작하죠. 거기에 학도호국단 중앙 지도요원이란 명칭으로 교수들이 참여를 해요 그러다 이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학 새마을교수들이 새마을 학이라는 것을 발전시켜야 되지 않느냐? 하는 의도에서 각 대학에 새마을 연구하는 것을 문교부에 얘기를 해서 문교부에서 정식으로 아마 내가 알기론 연구소 설립하는 안이 내려옵니다. 전국에 각 대학에, 그래서 설립하라고 했는데, 근데 우리 대학에도 설립하라고 했는데 여긴 밝은 사회 문제 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곧 새마을운동 연구하는 연구소다 우리는 이 말을 고수해가지고 새마을연구소 따로 안 만들고 그것이 새마을연구소하고 같은 맥락의 일을 했어요. 그러나 다 서울대학을 비롯한 전국의 각 공사립대학을 보면 대학 새마을연구소가 다 생깁니다. 그래가지고 전국에 회원이 1700명 까지 확보가 되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 정관에 보면 애당초에 교육학 한분, 농업경제하신 분, 이런 분들로 구성된 이사진이 구성이 돼서, 우리 정관에도 초창기에 했던 이사들은 그대로 그 명단이 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작고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연구비가 점점 줄고 없어 졌어요. 없어지다 보니깐 또 하나는 바뀌니깐 어용 단체로 몰리기 시작을 합니다. 새마을이. 그러니까 각 대학의 새마을연구소가 거의 다 자취를 감춘 상태,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대학교 새마을연구에 참여하는 회원들 되는 분들은 1세대 새마을 연구를 하고 거기에 헌신을 한 원로 명예교수들이예요. 그분들이 주축이 되고 있는 상태 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 젊은 세대 교수들 개입을 하도록 종용을 하는데 안 하려고 그래요. 왜냐면 이 학회에 들어오면 연구비 나오는 것도 없고 지금 현재 우리는 그 당시에 연구비 나오는 것을 안 쓰고 절약을 했다가 그걸 기금으로 만들어서, 그리고 새마을 중앙회에서도 1년에 한 번씩 많은 예산은 못줘도 천만씩 지원을 해줬어요. 연구보조비로 그러던 것이 그것이 지금 아마 김수학 회장님까지 하고 물러나고부터 그게 끊어 졌어요. 그러니깐 그 다음에 지금 광운대학에 가 이사장 하시는 강문규 회장님 하고 그 다음 이수성 회장 이렇게 되니깐 우리 대학새마을 연구소는 사실 보조비도 그때부터 끊어져요. 그러니까 순전히 저희는 기금가지고 그 이자 나오는 것 가지고 저희는 순전히 살림을 꾸려옵니다. 총회를 하고 학술회의도 하고 1년에 한번하고 있어요.
문. 그럼 그 당시에 봉사활동은?
답. 전국적으로 했죠. 그리고 대학새마을 교수들이 중앙지도요원으로 돼서 방학 때면 정부에서 파견을 시켜서 전국을 다니면서 실태조사를 하고 문제점이 있는 거 발굴해서 보고하고 정부에 저도 그 당시에 중앙지도 요원으로 활동을 했으니까요.
문. 대학생 봉사활동대도 있었나요?
답. 각 대학에 다 있었죠. 저희도 우리대학에 경희대학에서 밝은 사회문제 연구 소장 일하게 된 것도 학생 서클 지도 교수 두 개, 제일 큰 의료봉사 팀하고 일반 봉사하는 바인 서클하고 의대 서스클럽하고 두 개 지도를 했는데, 그거로 인해서 총장님이 저를 밝은사회연구소장를 하라고 해서 80년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문. 전국적인 규모는 어느정도
답. 대규모죠. 왜냐면 각 대학에 처음에 근로봉사를 하다가 조금 발전 단계로 가니까 의료 봉사로 들어갔거든요. 의과대에 지원금이 엄청 나왔습니다. 제가 또 의대 농촌 봉사 지도교수를 맡았어요. 우리 대학에선. 그러니깐 주말 봉사도 했고 일요일 날 2일 봉사를 나갔습니다. 강원도 원성으로 학생들 데리고 의과대학에 본과 3학년하고 그다음에 간호학과 이렇게 가지고 병원에서 의사 지원이 되고 기초학교 교실에 선생님이 지도 교수로 일 일간씩 봉사 나가고 방학 때면 2주간 나가요,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엔 서스하고 바인이 있으니깐 여름방학 때 두 군대 봉가 갔다 나가면 끝나죠. 그런 식으로 그 당시엔 대단히 활성화가 됐어요.
그러니깐 정부에서 예산을 내주면서 학교에서도 내도록 학교가 50프로 부담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대학에서도 막대한 돈을 지불 해줬어요. 그거 운영하는데 그리고 의료원에서 약품 지원 아끼지 않고, 그러니까는 의료봉사 써클이 15개까지 생겼어요. 왜냐면 그걸하면 총장님이 표창 하니깐 너나 할 것 없이 다 만들어서 의과대학이 15개까지 생겼어요. 우리 한의대 있잖아요. 치과 대학 있잖아요. 그러다 치과대학에 코닥클럽이라고 치과진료 팀에 지도교수를 또 만들어 3개를 제가 근 33년 경희대학 지도교수하다 정년 될 때 제자들한테 넘겨줬죠.
문.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다 농촌 봉사활동 하고 그랬겠군요.
답. 그 당시엔 계열에 개입을 못하면 대우를 못 받았어요. 그리고 교수들도 각 대학에 실적 위주로 하다보니깐 진급도 빨라지니깐 모두가 동참을 했죠.
문. 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점은?
답. 그 당시에 농촌계발, 결국은 새마을운동하면서 집 개량하고 그러니깐 농과대학 교수님들이 많이 개입을 했죠. 왜냐면 농번기에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었잖아요. 그거 안배하는 거 어떻게 하면 농사 짖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그다음에 구획정리, 그다음에 주택개량, 그다음에 상수도 하수도, 지금 보면 농촌에 상수도 하수도 다 정리 됐잖아요. 그전에는 서울도 안됐는데요. 그러니깐 초창기 논문은 거기에 뒷받침하는 연구로 연 2천 4~5백편 돼요. 대학새마을운동에서 나간 논문들이 그땐 그것이 바로바로 적용이 됐어요. 그 당시엔 내무부가 그대로 연결이 돼서 했습니다.
문. 청와대와 연결이 돼서 바로 실천이 되는 거네요.
답. 그분들 하고 대학에 교수님하고 상당히 유대가 잘 됐어요. 그리고 문교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교수들 관리는 잘했습니다. 그다음에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 지방하는 것은 내무부가 관여해서 아주 일사분란 했어요. 지금도 그와 같은 게 정립되면 아마 또 다른 제2의 새마을운동, 물론 전임 새마을중앙회 회장님 들어오면서 21세기 되면서 제 2의 새마을하고 의식개혁하고 하는 운동 펴고 있는데 사실은 근면, 자조, 협동 위주에서 지금도 벗어난다고 생각안합니다. 결국은 의식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어요.
문. 80년대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시고 학회의 주테마는 뭐였나요?
답. 결국은 그것을 존속해서 계속 발전해야 된다는 테마를 그러니깐 중앙에 우리 교수님들 원로들이 모여서 정책방향을 늘 의논해서 세웁니다. 세워서 각 대학에 연구비 신청 내라고 할 때 그것이 문교부에서 직접 주는 게 아니라 대학 새마을연구소로 얘기를 해서 여기서 나눠줬어요. 그러니깐 테마를 내려주고 심사를 해서 거기에 맞는 연구소만 연구를 지원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중앙지도 위원해서 학회 안에 이사진 주축이 되선 학술 팀이 조성 되선 심사하고 철저히 했어요. 그러나 가급적 거기 관여 했던 교수님들은 팀원을 구성해서 단독 너 혼자 이거 해라 이게 아니라 5명이고 6명이고 7명이고 팀원을 구성하고 연구를 개발 하도록 각 대학의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어요.
문. 논문이 상부에 보고가 됐나요?
답. 박정희 대통령 있을 땐 그랬죠. 그러니까 우수한 교수님들 훈장까지 내려주고 그랬잖아요. 도중에 다 없어 졌지만. 그전엔 새마을 초창기엔 했던 교수님들은 정부가 상당히 관여를 하고 예의 관찰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했는데 행정부에 있던 분들은 그 후에 장관이고 다 하셨잖아요.
문. 이론적인 배경을 여기서 많이 만들었나봐요?
답. 그게 절대적으로. 제가 알기론 1세대 교수님들은 그 당시엔 사실은 암행어사까지 했어요. 내가 그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방에 나가서 어디 잘 못됐느냐, 잘못된 거 이렇게 해서 보고 올리면 재깍 재깍. 대통령이 다 다닐 수 없잖아요. 그러나 그 당시에 조건이 뭐냐면 잘못된 거 야단치고 자르면 우리 보고 안한다. 조건이 개혁해가기 위해선.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깜짝 깜짝 놀랄 만한 보도들 많이 나왔잖아요. 어떻게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는데 경기도 광주에 있는 보건소에 먼지가 있다는 이런 얘기가 나왔냐구요. 다니고 와서 보고해드리면 영부인을 통해서 대통령한테 보고가 됐으니까. 개선했죠. 그 1세대 교수님들은 대단했습니다.
문. 지금도 연락하고
답. 완전히 누가 시켜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분들은 그냥 누가 시켜서 자릴 줄라고 해도 안하고. 이진용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결국은 학장도 못하고 정년 됐잖아요. 새마을연구소 소장은 했는데 서울대학에 뭐 의용이다 뭐다 그거 또 들축거리고 심의한 교수들이 같은 직장 내에도 있어서. 애를 먹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저희 대학에선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제가 왜냐면 연구소장을 거의 17년간 했으니까요. 계속 이 연구소는 발전해서 지금 결국은 경희대학교에 일종에 비전을 제시하는 연구소로 지금 유공조 교수가 밝은 사회 연구소 소장을 하죠. 이젠 새마을 하곤 거긴 관계가 없이 분리된 상태예요. 저만 우리대학의 세 교수가 새마을에 관여를 하고 있죠.
문. 요즘에 새마을이 변해야 한다면 어떤 테마가 나올까요.
답. 결국은 지금 새마을운동 하는데 이제 어느 정도 잘살고 그러니까 이게 협조가 안 이루지는 데 거기 있잖아요. 개인주의가 발달을 하고, 불편하고 힘든 일 안하려고 하고, 그 당시에는 힘든 일 이런 게 없었어요. 무조건 헌신적으로 사명감 가지고 했는데 그것이 시대가 이러고 사회가 개인주의 발달하다 보니깐 지금 새마을 하는데도 젊은 교수들 관여안하는 게 솔직히 말하면 돈 안 생기니까 안하는 거예요. 그리고 국가가 발전하다보니까 대학의 교수님들 연구비 신청해서 어떤 프로젝트 액수가 보통 커진 게 아닙니다. 이쪽에선 아직도 그런 식 가지곤 우리가 접근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연구소에서도 지금 이자 가지고 겨우 하는 거 한 테마 9명이서 했는데 200만원 줬어요. 200만원 받고 안하려고 해요. 사명감이 없으면, 그래도 그전에는 그 정도 연구비라도 아주 감지덕지 했는데 지금은 그건 연구비에 속하는 게 아니니까. 일반 대학 21세기 프로젝트에 보면 억대가 넘으니깐 웬만한 건 개입도 안하려고 들어요. 제가 보기엔 그러니까는 결국은 의식개혁 해야 돼요. 도덕회복운동 해야되고, 너무 아래부터 다 없애 버리고, 민주화라는 그것도 좋은데, 그 미명아래 가만히 보면 아래부터 다 없앴어요. 이게 참 회복하기 힘들 거예요.
문. 앞으로도 새마을운동이 계속 의식 걔혁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답. 이유가 있다면 그 기본 정신을 살려가야 국가 발전에 그 기틀이 될 테니까. 그런데 대통령이 바뀌고 이러면 자꾸만 그 운동이 바뀌잖아요. 뭡니까. 새마을운동에서 전두환 대통령 온 다음에 정의사회구현 했잖아요. 그 다음에 바르게살기 이거 다 같은 얘기입니다. 정의사회라는 것도 한문으로 바꾸면 “바르게 살자”라는 거든요. 그게 다른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정의 사회구현도 연구논청에 밝은사회문제 연구소에서 나왔던 연구논청 5집에 보면 이게 다. 똑같이 있습니다. 고거 갔다가 그대로 써 제가 그때 다니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담화문 1호 발표한 거 보면 그대로 예요. 그리고 그 후에 와서는 또 바꿨잖아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핀 운동이 다 틀려요. 그러나 근본 목적은 나라 잘되자 거든요. 그러니까 이론은 제시를 하는데 실천을 안 해. 그러니까 정부가 처음 구상한 것은 좋았는데, 그 이론이 나빠서 실패한건 아니에요. 그게 따라 주지 않아서 그렇지. 그러니까 실천할 수 있는 가능한 의식개혁을 내새워야지. 딱 내세우고 당사자들이 실천 안하는데 이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 새마을운동, 지금 새마을지도자들 전국에 보세요. 그분들 하는 분들 뭐가 돈이 생겨서 하는 겁니까. 헌신적으로 사명감 가지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지도자들 격려해 줘야 돼요. 근데 그것이 안 되니까는 이게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동안 새마을중앙회가 피어온 것은 아마 각 시도에 회관 짓고, 결국은 자립하려고 무진 애를 쓴 거 같아요.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민간단체로써 새마을운동중앙회를 거친 지방 조직 우리나라의 민간단체로선 이만큼 탄탄하게 되어있는 데 별로 없을 거예요. 그건 뭐 다시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아직도 이거는 있어요. 근데 이게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문. 의식 개혁운동 면에서 필요하다는 얘기죠?
답. 우리도 중국에 농업국하고 처음에 연결돼서 대학 새마을 교수님들이 겨의 10년 째 다녀요.
그런데 이젠 그 사람들 초청할 땐 우리가 자기 돈을 내서 그걸 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초청하면 그 사람들은 다 먹여 주는데 그 사람들은 정부 돈으로 메겨 주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돈 안 쓰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초청하면 어디 나올 데가 없으니깐, 우리 주머니를 털어서 했어요. 근데 이 교수님들이 정년퇴직 하고 나니깐. 연금 받거나 자식들에게 의존돼있으니까 그것도 부담된단 말이야. 한번 중국 팀들이 우리가 7명가면 그들도 7명 오는데 오려면 그 돈을 대주려면 1인당 150만원 뭐 이렇게 해야 가능하니까는 거기선 계속 하자는 데 못하겠다. 그래가지고 작년도에 거기 국경에서 중앙대회에서 초청해서 우리가 갔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번 가을에도 또 지금 아마 또 연락이 올 거라고 하는데, 이번 총회하는데 이명적 학장님께서, 하여튼 그때 가서 보자고 그랬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 우리가 초청을 해줘야 돼요. 근데 그거 나올 때가 없으니깐. 우리 주머닐 털어야 되니깐, 이게 상당히 부담이 되니깐. 모두들 힘들어서들. 사실은 중국에도 회관 하나 지어 논대가 하나 있습니다. 중국에 농촌에 그리고 거기 잘살도록 바꿔 놨는데. 작년에 보니까 길 다 닦고 과수 개량해서 아주 잘돼있어요. 거기도 지도자들이 바뀌니까 다 바뀌었더라고요. 물론 돌로 비석해서 해 놓은 게 있어요. 이름까지 새겨서 그건 깨트려버릴 수 없으니까 다 바뀌었더라고요.
문. 중국에서 연수도 많이 오고 그래서 적극 적이라는데
답. 그 사람들은 돈이 많으니까 가능해요. 새마을중앙연수원에 와서 교육받고 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새 교수님들이 가서 강의도 하고 있고. 그런데 여기선 가능한데 삼발적으로 다 따로 따로 각 대학이 다 자매 맺은 대학에 가서 하고, 이러다 보니 우리 대학새마을 연구회는 농악회라는 것이 정부기관이에요. 거기하고 유대가 돼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10년째 거기가면 농악회 우리나라로 말하면 농림부 차관이 농악회 회관을 맡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갔더니 차관님을 물러나서 명예회장으로 있는데 다들 만나보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은 그걸 추진하면서 목표가 뭐냐면 국가 발전이에요. 그래서 처음엔 저희하고 접촉했던 사무총장이라는 그 분이 교육과 과학을 겸비해서 운동을 펴서 잘살게 해야겠다. 그래서 과기 흥천운동이라고 붙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갈리고 나고 또 갔더니, 그걸 또 바꿨더라고요. 처음엔 상진기업으로 했다가, 그 과기흥촌 운동으로 했다가, 그 사람이 바뀌니까 지금은 또 명칭을 바뀌었어요. 그게 뭐냐면 국가 발전 모토라고 해서 해놨는데, 결국은 뭐냐면 국가 발전 모토라고 해서 해 놨는데 결국은 뭐냐면 우리 새마을운동의 태동하고 일치하는 거에요. 근데 지도자가 바뀌니까 바꿔놨는데 그 사람들이 모토는 무조건 국가 잘사는 거 위주로, 월남도 지금 연관된 걸로 아는데 이진흥 교수도 캄보디아하고 노상 가서 정부 순회부들하고 얘길해서 교육시켜주고 오면 새마을연수원에 와서 교육받고 가고 그러잖아요.
문.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이유가 있나요?
답. 잘살아야 되니깐, 그리고 의식 개혁, 그 당시 의식 개혁이라는 말을 안 쓰고 나라를 잘살면서 바꾸어야 된다는 것으로 되는 바람에 결국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살 수 있게 만드느냐? 결국은 의식주 해결이었거든요.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러니까는 우리 조영식 총장이 썼던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에 보면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면 잘 살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깐 나태해서 우린 안 돼, 이런 시절이기 때문에 그걸 바꾸어 놓으면 우리도 가능하다. 그러니깐 우선 나도 노력하면 그만한 대가가 온다. 한 게 새마을운동이에요. 시초에. 그러니깐 마을 단위로 지원을 한 거 아닙니까. 정부가 원래는 이렇게 관이하면, 우리 조영식 총장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말씀할 때 관 주도로 가면 오래 명맥을 못 갑니다. 민간 주도로 돌려야지 하는 걸 누누이 말씀 드렸던 거예요. 이분이, 그랬는데 그래도 박대통령 살아 계실 때 관주도로 했거든요. 왜냐면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깐 그 당시에는, 왜 재정이 지원이 돼야하니깐. 마을 다녀 보면 어르신들 있어서 반대하고 그래도 마을 단위 젊은이들이 가가지곤 결국은 길도 바꾸고, 우선 도량부터 개량하고 이러는데 들어가는 건 뭐예요. 세면이고 뭐고 들어야 되는데 돈 없잖아요. 그러니깐 정부가 지원한 거예요. 무조건 그러니깐 사람들이 나와서 걸인들이 나와서 공사를 했고 그러니깐 개량이 되기 시작해, 하다보니까 뭐 되기 시작하니깐 농사도 같이 갈라서 같이 나누고, 그러니깐 못 살고 이런 얘기 안 나올 수 있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는 70년대 사실은 의식적으로 안하면 하면 안 된다 이런 것이 모든 국민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것이 사실 계속 지속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죠.
문. 직장 공장 넓게 퍼져 나갔잖아요.
답. 그것도 수원 새마을연수원에 가서 모든 관직이고 지도자고 다 들어가 교육받게 했잖아요. 하면서 교육을 받으면서 바꾸다 보니까 농촌 새마을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가니깐 이거 이래서 안 된다. 도시 새마을 해야 된다. 도시 새마을 시작하다보니깐 직장 새마을 해야 된다. 그런데 사실은 직장 새마을 하고 그전에 대한 가족회 운동 60년 필 때 하던 것이 어머니 회 조직이거든요. 이것이 나중엔 부녀 새마을회로 발전한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는 여성들이 나서서 하니깐 결국은 직장 새마을 있죠. 농촌 새마을 있죠. 부녀 새마을 있죠. 금고 나중엔 금고까지. 농촌 국민들 모두 의식 개혁해야 한다. 그래서 마을금고가 생겨 버리잖아요. 그 단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 고장 새마을 아마 마을문고가 제일 나중에 생겼을 거예요. 공장 새마을이 거 앞서 있고 이렇게 5개부서가 움직이다. 하고 막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 그만 그렇게 된거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 나서서 헌신적으로 한 분들은 희생정신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박진환 학장님들 같은 분들 동국대학의 이명동 학장님 동국대학의 명예교수지만, 이진홍 교수, 동아대학의 부총장 하고 정년하신 신해우 부총장님, 홍익대학의 기래현 교수, 성균관대학에 손직수 학장 대학원장 한분, 한양대 전부 이런 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됐어요. 그러니깐 그분들이 지금 대학새마을 회 멤버로써 떨어져 나갈 수가 없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개인 모임처럼 되었어요.
문. 그만큼 자기 확신이 있어서 열정을 갖는 거죠.
답. 이번 총회도 한남대학 총장님 있거든요. 어제도 왔는데 그분은 뭘 좀 움직여 보려고 그분도 상당히 협조 많이 했죠. 행정학 전공하고 새마을 하신 분들인데, 그러니깐 이런 분들이 꽁꽁 뭉쳤기 때문에 헤질 수가 없어요.
문. 개인적으로 고건 전 총리와 같이 일해보신적은?
답. 저는 개인적으론 안했죠. 그 당시엔 새마을담당관 하실 때는 이병동 학장님하고, 박진환 학장님 고 몇 분이 관여를 했어요.
문. 청와대 담당과 내무부 담당관 교수님이 유기적인 관계를 어떻게 맺었나요?
답. 그 당시에는 거의 같은 멤버로 모임들을 가졌죠. 지금은 새마을중앙연수원에 원장으로 계시다가 물러나신 분, 이창수 원장 같은 분이 내무부 담당관 했던 분이거든요. 그래 그런 분들하고 유대를 가지고 노상 머리 짜고 아이디어 짜서 보고해서 올리고들 하신 분들이에요. 그러니깐 그 분들하고 만나면 서로 미안하다고 그러죠. 자기네는 총리하고 뭐다 해서 했는데, 그 전에 새마을연구소가 저쪽 김포공항 나가는 화곡동 에 있을 때 잠깐 들렸다는 데 그 뒤에 대통령 출마하시는 분들 다 들리셨죠. 그 분들 만나면 미안하다고, 그 당시엔 같은 동지 하셨던 분들이니깐 교수님들이 그러니깐 그런 거 보면 그 당시에는 상당히 팀웍이 잘 됐어죠. 오너가 강력한 방향설정을 해놓고 거기에 맞춰 가려니깐, 살아 남으려니깐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지금도 어떤 강력한 리더가 중심 잡아가지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이러면 똑같은 상태가 될 꺼에요.
문. 각자의 역할이 달랐겠네요
답. 아니 그렇게 해가지고 되면 보고된 것들이 대통령이 듣고 그렇게 하면 하달이 청와대에서 통해서 내무부로 통하지 않겠어요. 나중엔 대학교수 새마을회가 학술연구한 건 문교부로 연결이 되고, 그 당시에는 문교부하고 내무부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진 걸로 알고 있어요. 대학은 왜냐면 학도국단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그전에는 학도국단이 있어가지고 도중에 데모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학사지도 담당관 그거 했던 분들이 관청에 있던 분들로 다 출세했으니까요. 대구에 국회의원 한나라당 당선 되신 분들 그분들도 그 예전에 담당관 했던 분들 아닙니까, 정종책 학장도 그렇고. 청와대 담당관도 그렇고.
문.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나요?
답. 박정희 대통령이 총장님한테 내렸던 게 있어요. 제가 밝은 사회연구소장을 하는데 저 총장님이 문서를 줬는데 뭐냐면 도시락 못 싸오는 사람들이 많아잖아요. 점심 못 먹는 그러니까 여기서 학원 운동을 폈거든요. 그게 밝은 사회운동인데 그 전에 잘살기 운동을 할 때 넉넉한 자녀 두 개 싸와서 나누어 먹어라 그거예요. 그 운동을 했어요. 50년대 말 60년대 초. 그런데 나중에 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저거 할 때 청와대. 새마을운동 시작 전에 노상 드나 들었거든요. 자꾸만 불러서 대담하고. 그런데 그런 얘기를 했더니 우리가 이렇게 학생들한테 해서 성공을 했단 말이야. 그 양반 시해되기 직전에, 우리가 그거 피고 학원 가족운동을 폈거든요. 밝은사회 운동. 그 잘 살고 운동을 핀다 해서 보고를 올라갔더니 그것을 정부에서 사람들이 와있었잖아요. 대학에 기관에 거기서 보고서 올라갔는데 그 보고서 대통령이 보고서 뭐라면 전국 초중고대학에 실시 그랬는데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게 사장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마 그런 가족 운동, 잘살기 운동은 대통령 각하는 전심전력하는 아주 머릿속에 각인 된 게 그거 였어요. 자나 깨나 아마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 총장이 그러더라고요. 그러곤 박수성이 그거 복사한 거 제가 가지고 있어요. 박대통령은 자나 깨나 전 국민의 의식주 해결하고 근데 그게 곧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원로 이분들 아주 대단했습니다. 우리 같은 교수님들끼리 만나기 힘들었어요.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의 역사나 뭐나 남기고 싶은게 있다면?
답. 뭐 하나도 잘 못된 거 없죠. 지난번에 조선일보에서도 조사한 거 김대중 대통령 넘어올 때 나온 거 있잖아요. 오직 우리 국민한테 영향을 미친 건 새마을운동이라는 거. 근데 그이 새마을운동이 뭐냐면 ‘우리는 나태하고 안 돼’하고 모든 국민들이 이렇게 폭 가라앉았던 것을 깨우쳐준 운동이거든요. 결국은 아 우리도 참여하고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어 하는 자신감을 줬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깐 우리가 자라날 때 보면 쌀밥 그렇게 쉽게 먹을 수 있었어요. 지금 요즘 우리 학생들은 이해를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오늘도 점심에 모임이 있어서 나갔다가 왔는데 학교관계 때문에 그런데 그전에 신발 없어서 고무신 달면 안 사주니까. 학교 다닐 때 들고 맨발로 갔단 말이야. 정문 갈 때 신발로 저도 그랬어요. 운동화 아버지가 사다준 거. 닳으면 안 되니깐. 친구는 안보는 데 맨발로 다녀요. 벗고 다니고 정문 가서 신었어요. 왜 그거 오래 신어야 되니까. 그리고 대를 물려 옷을 입었잖아요. 제가 장난이 아니고 차남이었거든요. 새 옷을 입어본 역사가 없어요. 근데 요새 부모들이 애 옷 사주면 애들이 순순히 따라 옷 입어요. 지들 마음대로 사 입지. 그리고 옷을 학교 가서 잊어 먹고 찾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이게 보통 잘못 된 게 아니에요. 완전히 나태하고 “우리는 안 돼! 하던 민족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개념을 바꿔놨단 말이야. 사실은 새마을운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