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가난한 농촌을 어떻게 하면 부흥시키고 어떻게 하면 가난한 우리나라를 잘살게 하느냐.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덴마크에서 했던 경험을 통해서 배운 거지요. 첫째가 국민들의 의식구조 개혁입니다. 가치관의 변화를 시키는 것 사고방식 행동방식을 생각양식을 패턴을 바꿔야한다. 그다음엔 두 번째 자기 인격이나 생각이나 행동이나 바뀌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돈을 벌어야 나라가 달라진단 말이여. 소득증대 사업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명제였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부흥하는 역사 속에서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돼.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역시 두 가지야. 정신교육, 기술교육, 정신교육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더불어 살고 협동해서 살고 남을 배려하고 살고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함께 산다고 하는 그런 정신적인 인성교육을 말하는 것이고, 또 기술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버냐 이거여,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벌어야지. 공업을 하거나 농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돈을 벌어야 그 나라가 잘 살나다고 마음만 고쳐먹었다고 공자님같이 안방에 앉았다고 돼는 게 아니야.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두 가지를 보급을 시키자. 두 가지를 어떻게 보급을 시키냐. 교육을 통해서 보급을 한다 이거야. 그래서 교육이 정신교육 프로그램과 기술교육 프로그램을 가졌어요. 기술교육은 정신교육은 우리 짐작할 수 있는 정직하자. 거짓말 하지 말자. 자기 책임의식을 갖자. 남한테 의지하지말자.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기술교육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냔 말이여. 버는데 막연하다고. 민족자본이 형성된 것도 아니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암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돈을 버냐 이거여.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움직이는데 물리적인 인센티브랄까, 물리적으로 나타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그래서 마음먹은 것이 전기가 안 도는데는 전기 놓고 우물이 없는 데는 우물을 파주고 그 다음에 빨래터 없이 냇가에서 빨래하는 데는 빨래 잘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든지. 요즘은 세탁기 다 됐지만 그 시절에는. 이런 것을 하고 그 다음에 지붕이 썩어서 썩은 물이 북북 내려 노은 것을 지붕을 개량해서 함석이나, 기와나, 슬레이트나 이런 걸로 올리게 한다든지. 이런 환경사업, 소득증대 사업, 이게 노력을 해서 힘을 합쳐보니까 눈에 달라지거든 동네가. 그것을 가지고 자꾸 촉매 작용을 한 것으로 시작을 했어요. 근데 그때 우리가 중공업 정책을 쓸 때 대통령께서 공업을 일으키고 이 공장을 많이 짓고 이럴려면/ (배터리 교체)
당시 대통령께서 우리나라의 산업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시멘트였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와 기술협력을 해서 시멘트 공장을 세우고 또 일본하고 관계에서 하여튼 외국하고 관련해서 시멘트 공장을 많이 세웠어요, 근데 공업 발전이 시멘트 공장에서 생산하는 시멘트 생산률이 미쳐 따라가지 못하니까 시멘트가 과잉 생산돼서 제고가 엄청나게 많이 남았어요. 이때 국가에서 돈을 데서 공장을 지었으니까. 시멘트 남은 것을 국가에서 처리를 해줘야 하거든. 국가에서 빛을 고놈으로 이렇게 대처를 해서 사준단 말이여. 그래서 새마을운동에 써 먹자. 그래가지고 저하고 의논하고 우리들끼리 해서 우리나라에 그때 당시 이동 행정부락이 3만개가 있었습니다. 3만개, 자연부락이 5만개. 자연부락하고 이동부락이란 뭐냐. 무슨 면 무슨 리, 그건 이동 부락이라고. 그러고 그리 안에 어떤 동네가 양지마을, 서롱골 마을, 뒷마을, 이런 것이 자연부락이여, 어떤 것은 자연부락 5개가 하나 붙어서 리가 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리가 하나가 둘로 쪼개서 1리, 2리 나눠진 것도 있어. 근데 하튼 행정구역 말하는 리가 3만개가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10%로를 고르자. 그 중에 지시를 내려서 잠재적 지도자. 또롱 또롱한 사람이 있다든지. 주민들이 괜찮게 생긴 수준으로 봐서 괜찮은 동네 좀 깨이려는 동네 3만개 중에서 3천개를 골랐어. 골라서 3천개의 부락에다가 시멘트 200포씩을 대통령 하사품이라고 해서 무료로 줬어요. 너희들 마음대로 써라. 동네 발전을 위해서 맘대로 써라. 엄청난 시멘트를 써먹은 거죠. 그래 놓고는 나보고 한번 시찰을 다녀오라 이거여. 그래서 나뿐 만 아니라 청와대 몇 사람이 나갔어요. 나가서 보니까, 어떤 부락은 대통령하사품이다 한 쪽에다 쌓아 놓고 벌벌 떨어. 잘못 쌓아 노니까 비가 많아 버리니까 변해버려 또 어떤 부락은 자기가 책임지기도 힘들고 싸놓을 데도 없으니까. 200포대를 두포 3포씩 나눠줘 나눠져 버렸어. 집집마다. 그 동네는 가보니까 자기 집 장독도 고치고 토방도 고치고 그런데 써먹어 버렸어. 또 어떤 부락은 지도자가 있어가지고 여기에 물과 모래와 자갈과 노동력만 합치만 뭐 된다. 그래서 마을 회관도 짓고 동네 다리도 놓고. 별것 다 했어. 그래서 그런 부락을 또 골라 골라서 그때 돈으로 100만원 요즘엔 4~5천 될꺼야. 100만원씩 또 대통령 하사품이라고 지원을 해줬어. 그래서 그런 마을들을 해마다 학교에 학년처럼 만들어줬어요. 작년에 3000개를 뽑은 다음엔 나머지 중에 3000개를 또 뽑아. 그 다음에 또 뽑아. 그 다음에 또 뽑아서 시멘트 200포대씩 주는 거야. 철근, 철골 0.5톤씩을 그것을 주면 다리 놓는데 철근을 넣어서 써라 해서 장마철에 개울물이 범람하면 애들이 학교를 못 갔다고 근데 다리도 놓고 마을 회간도 짓고 하튼 이런데다가 시멘트를 많이 보내 줬어요. 그렇게 해서 지붕을 고치고 지붕을 개량하고 다리를 놓고 전기가 안 들어 간데 전기가 들어가게 하고 그다음엔 생산을 증대하게 하기 위해서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를 맨 처음엔 온실을 만들었어요. 비닐로. 비닐을 수입해다가 온실 만들어서 묘목을, 농작물 묘목을 키워가지고 이른 봄에 끄집어 내서 키워가지고 생산을 다른 자연생산보다 한 달 또는 20일 앞당겨서 생산하게 하다든지.
문. 비닐하우스는 누가 처음 시작했나요?
답. 비닐하우스는 팀이 조직돼지. 다른 한편으로 보면 맨 처음 내가 대통령께 주장한 것이 대통령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새마을을 모르고 농촌을 모른다. 이거 교육시켜야 한다고 보고를 했어요. 대통령 특명으로 청와대 전 직원, 전 보좌관, 경호실 간부들을 청와대 뒷뜰에 잔디밭이 있어요. 잔디 밭 밑에가 강당이 있어요. 강당이 방공호처럼 만들어 진 것이에요. 거기서 3~4백명을 다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 교육을 시켰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때 한태영 교수, 류달영 박사 그 당시에 유명한 강사를 모셔다 하겠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싹 긋고 류태영 선생으로 하여금 하라고. 그래서 외부 강사를 데려오지 않고 정부 수석 비서관이 한 말씀 하고. 그리고 그때 국립 영화 제작소에서 만든 정책 홍보영화를 잠깐 보고 내가 한 시간 가량 강연를 했어요. 그것이 그냥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어요. 청와대 비서관들한테, 보좌관들한테 그래서 딱 끝나고 내 사무실로 오니, 오후 5시야. 조금 있으니까 전화 따르릉 와서 받으니까. 육영수 여사 영 부인실에서 왔어. 영부인이 그때 나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나은실 그때 나은실 보좌관이 강의를 들었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다 이거예요. 그래서 오늘 저녁 바쁘시지 않으면 본관에 들어오셔서 낮에 강연한 것을 고대로 나한테 해달라 이거예요. 그래서 올라 본관에 갔더니 대통령 내외분 이렇게 네 사람이 마중하더라고. 그래가지고는 낮에 한데로 하래. 조한 두어 시간 얘기했는데 그때 박근혜 양은 서강대학 2학년에 다녔는데 기말 시험인가 중간시험 준비한다고 도중에 들어가고 박근영 양도 들어가고 대통령 내외만 앉아서 밤 11시반까지 있었어요. 그래서 쭉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 다음엔 전 장관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했어요. 대통령 주제 국무회의가 한 달에 한번 청와대에서 있고 나머지는 국무총리실에서 했어요. 청와대에서 하는데 그때 김종필 씨가 국무총리 더라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앉고 장관들이 쭉 앉은 자리에서 또 한 시간 반동안 강연을 했어요.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전을 제시를 한거예요. 퍼센테이션을 한가요. 그 다음엔 육영수여사가 장차관들 부인들을 전부 양지회라고 사회봉사단체를 만들었는데 남산에 그때 당시 어린이회관, 국립도서관이 어린이 회관이요. 거기다 전부다 모아 놓고 또 두시간 동안 강연하고 지도층 인사부터 교육을 시작해서 온 국민이 달라지기 합니다. 청와대부터 달라져야 한다. 장차관부터 달라져야 한다. 장차관 부인부터 달라져야 한다. 막 이런 것으로 교육이 막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저는 정신이 없었어요. 아침 집에서 6시에 출근하면 보통 11시 넘어서 퇴근할 정도로 매일 아주 숨도 못 쉬게 이럴 정도로 일을 하면서 했어요.
강의만 한 게 아니라 기획을 해야죠. 그 다음엔 지식층 인사들을 끌어 올려며 교수들을 해야한다. 문교부에다 이 얘기를 해서 교수 새마을운동이라고 해서 교수들을 끓어내서 또 조직을 한 겁니다. 그 다음엔 이것이 성공적으로 끓어 나가니까 새마을이란 건 본래 뉴, 새, 마을, 커뮤니티 그 말이거든 근데 이것이 상징적인 용어가 되가지고 은행 새마을운동, 군 새마을운동, 부녀 새마을운동, 도시 새마을운동, 농촌 새마을운동, 공장 새마을운동 새마을자 다 붙였어. 아주 그냥. 공직자 새마을운동. 그래가지곤 전부 모토가 뭐냐. 근면, 자조, 협동 정신으로 잘살아보자. 요개 새마을운동으로 나중에 정리를 하게되요. 그러면 근면, 자조, 협동, 정신으로 잘 살아보자. 공장에서는 노사간의 문제 노동자들을 배려하는 사용주가 바로 사주가 고용자들한테 말하자면 사용자들한테 배려를 하게 되고 사용자들은 어떻게든지 수입을 많이 올라가게 한다. 전기를 절약하고 물을 절약하고 생산성을 높이고 로스를 없애게 하고 생산할 때 그래서 그러기 전에 이번에 이익 나온 것을 3등분해서 3분에 1은 경영자가 가져가고 3분에 1은 사원들의 복지를 쓰고 3분에 1은 노동자들 월급을 올려 줬어요. 나는 요거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 333운동인가요?
답. 그렇지. 그래가지고는 노동자들이 자기한테 이익이 있거든 노력해서. 죽어라고 노력해서 생산성 높이면 사장만 배부르면 재미가 없는데 자기한테도 돌아오고. 막이게 복지시설을 해서 식당도 만들고 탁구장도 만들가면서 그래가지고 노사 간 문제가 해결이 된 겁니다, 그때. 학교에서도 또 학교 어머니들을 모아서 학교 어머니와 학교와 선생이 3자가 협동을 잘 이루어야 교육이 된다. 그래서 어머니들 교육을 시키고 또 사회 교육을 시키고 선생들 교육시키고 그래서 함 학교 군에서도 그러고 새마을 자 안 붙은데가 없어요. 그렇게 이어나고 농촌 새마을운동 그 중에서 그런 새마을운동이 공장 새마을운동, 직장 새마을운동, 부녀 새마을운동 뭐 그냥. 뭐든 분야가 조직적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다음으로 농촌 새마을운동은 아까 말한데로 정신교육과 기술교육 기술교육과 환경교육 그래서 환경운동에다가 기술운동으로 이렇게 해서 농촌에 협동조합을 만들게 하고 서로 협동을 해서 협동조합공판장을 만들게 되고 거기서 나온 이익들은 농민들이 가져가게 되고 공동으로 과수원을 경영한다든지 마을에서 공동으로 밤나무를 심는 다든지 공동으로 돈을 모아가지고 도종공장을 만들어 거기서 이익은 그 동네 다 떨어지니까. 읍내에 도정공장에가서 도정을 하면 쌀 얼마씩 떼 주쟈나요. 그런걸 하지마. 일어나는 게 수천가지가 나와요. 그래가지고 보글보글 일어난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여기 새마을 자가 약방에 감초처럼 도박한 사람은 새마을정신으로 도박 막읍 시다. 도박만 하면 고발을 하고 새마을정신이야. 또 버스에 줄타면 이리 밀고하면 새마을 정신으로 줄서자. 그냥 모든 것에 새마을 자를 붙여서 먹혀들어갔다고 이게. 이것은 말하자면 최고 지도자가 관심을 가지고 일으킨 거예요. 이런 운동이 그때 당시 비판이 많았어요. 모던토함 영어로 말하면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는 운동으로 농민이 스스로 하게 해야지. 왜 지시해서 하냐. 전 전공이 농촌 사회학이니까. 학문적으로 세계적으로 내가 논문을 많이 발표했습니다만 그 동네, 마을, 농촌 수준에 따라서 달라요. 너무 의식구조도 없고 의욕도 없고 하는데는 하향식, 위에서 지시 내려가지고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농민의 지도자들이 의식도 있고 깨우치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통해서 일으켜야 되요. 밑에서 정부에서 지원을 해야 돼. 어떤 데는 반반이야. 샌드위치 개혁이야. 처음에는 위에서 내린 것처럼 하다가 조금 일어날 때면 정부에선 뒤로 빠지고 민간에게 넘겨주는 이런 패러다임이 있어요. 그래야지 말하기 좋게 민주주의가 말이야 위에서 지시만 한다. 난 지금도 똑같다고 봐요. 지금도 어떤 부락이나 어떤 분야, 어떤 섹션은 강압적으로 지도자가 끌고 나가야 하는 데가 있고 어떤 데는 뒤에서 밀어줘 그 사람들로 하야금 하게 하고 이렇게 사회운동의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된 줄로 아닙니다. 그때 새마을운동때 그걸 써먹었어요. 그래서 마을도 기초마을 시멘트 주는, 복지 마을, 선지 마을, 개량 마을, 마을 이름들을 지은 것은 즉 1학년, 2학년, 3학년이야 말하자면. 1학년을 잘 마치면 2학년으로 넘어가서 복지 마을이다. 자립마을이다. 무슨 마을이다. 이름을 붙여서 거기에 맞게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는 이렇게 해서 그때 당시 부음을 크게 일으켜서 그것이 국가 발전에 기여를 하게 된 것은 가령 국가에서 길을 낸다. 길을 낸다고 하면 마을에 길을 내려면 이사람 논두렁 저사람 밭두렁 들어가야 돼. 고것을 전부 잣대로 그려가지고 보상해주면 국가에서 돈도 없고 공사비도 없고 근데 그때는 새마을 정신으로 해서 전부 기부하게 만들었다니까. 그래서 자기 땅 50평, 30평 그래서 마을까지 길을 쭉 내버렸어. 기부야. 그렇게 기부한 받은 사람은 여러 사람 모여가지고 박수 짝짝 치게 하고 많이 기부한 사람은 대통령이 불러다 악수하고 훈장주고 이러다 격려해주고 이런 분위기를 통해서 사회가 달라지기 시작하고 그때 정신교육이 엄청나게 됐습니다. 이것이 경제 발전에 산업발전에 기여한 점이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보고 그때 당시 야당들도 정부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후세에 그것에 높게 평가한 것은 그래서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한 1, 2년 하다가 내가 외국에 공부하러 또 나갔어요. 나간 뒤에 정치적으로 이용을 했어요. 이거를 워낙 국민들이 칭찬하고 좋아하고 따라하고 경제 발전을 하니까 집권 연장하는데 써먹었어요. 그 증거가 있어요. 새마을운동은 유신의 도장이다. 유신이라는 것은 집권 연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유신 정책이거든요. 유신의 도장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선언이예요.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썼어요. 이게. 그 다음에 전두환 대통령 시절, 전규환 회장할 때 얼마나 정치적으로 활용을 했어요. 그래서 국민들이 안타깝게 생각한 게 있고 그 나머지 오늘까지 법으로 추진 됐기 때문에 새마을운동 없애지 않고 있는데 이거야 말로 진짜 새마을운동을 그때 당시에는 그런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시대적 변화와 경제적 변화와 국민들 의식의 변화에 맞게 새로운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켜서 경제 발전과 사회발전과 이런 것을 바꿔 나가는 큰 운동으로 다시 재탄생해야 된다고 봅니다. 요즘 사회신문을 보세요. 어린 아이들이 성폭행하려 포르노영화보고 시험한다고 했다하질 않나 사람을 잡아다 죽이지 않나 사기를 치지 않나 별이 있는데 이런 정신운동이 제대로 정착을 하게 되면 그게 없어집니다. 분위기 속에서 싹틀려고 한 사람도 오글라들어 이게. 근데 이것을 정권이 이명박 정권이 관심을 가지고 또 깨우치는 국민들이 뜻이 있는 지도자들이 나서서 진짜 새마을운동 이름은 새마을이라고 안 해도 좋아요. 하튼 그런 정신운동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게 요즘인줄 압니다.
문. 요즘에 더 필요하다는 얘기시죠. 새마을운동이 40년 가량 되었는데 제일 큰 성과는?
답. 새마을운동의 제일 큰 성과라고 하면 서너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포기하고 체념하고 의욕이 없고 이런 사람한테 의욕을 넣어주고 생기를 넣어주고 용기를 넣어주고 도전 정신을 넣어줬다. 나도 하면 된다. 그때 무식했어요. 너무 의식이 없으니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고 밀어 붙였다고 근데 그 시절엔 그게 먹혀 들어갈 때가 됐고 그 말이 적정했어요. 그러니까 의욕을 넣어줬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달려들어 보니까 달라진다. 두 번째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바꿨습니다. 그 동안에는 나 혼자만 잘 먹고 살고 하면 된다 하는 것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 공동체의식을 넣어 줬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초창기에는 마을 단위로 했어요. 그 다음에는 바로 1년 후부터는 지역단위로 했어요. 마을단위가지고 너무 안 된단 말이죠. 지역 단위로 해야 협동 조합도 만들고 상부상조하고 나가기 때문에 요즘에는 전국단위 군 단위, 도 단위 늘어지지만 말하자면 생활권이 공동체 권이 넓어졌다. 그런 나머지 요즘 매스컴 통해서 모두 하나가 돼서 전국이, 세계가 하나가 되는 정도로 돼있는데 이런 공동체 의식을 많이 개발을 했다. 세 번째 경제 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내 것을 내고 서라도 네시간 내 노동 한 푼 보상 안 받고 했거든요, 내 땅을 내 놓고 내가 기부하고 이런 정신이 경제 발전에 크게 상충 역할을 했다. 그 다음 네 번째 이것을 통해 각 층에 확산이 됐다. 새마을이 농촌을 위해서 시작을 했는데 군인과 직장과 부녀와 모든 분야에 확산이 되고 나가서 전국적인 하나의 네트워크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굉장히 높게 평가를 하고 저 개발 국가에서 이걸 수입하려고 제가 60개국을 순회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수단정부도 22년 전에 저를 초청해서 했고 중국에서도 96년도에 인민대회 정당에 저를 초청해서 강연을 시켰고 전국에 지도자들 다 모아 놓고 북한에서도 98년에 저를 초청해서 농촌을 다니면서 정책 하려다가 그건 안 받아 주더라고 자본주의 냄새가 너무 두껍다고 그리고 필리핀 대만 안간 데가 없습니다. 제가 가면요. 오늘 한국이 엄청나게 잘 사는데 그 얘기 말고 70년대 어려웠던 한국의 상황을 얘기해달라. 거기서 어떻게 빠져 나왔고 어떻게 발전 시켰는가. 이구 도성이여. 개발 도상국가 가보면 다 그래요. 70년대 얘기를 해 달래요. 지금 얘기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배울 것도 없고 인수할 것도 없단 말야. 70년대 우리의 경험이 아주 그 사람들한테는 말이요. 이런 것을 더 발전 시켰으면 세계 각 국가의 발전도상국에 지도국가가 돼서 세계적인 지도국가로 발 메김을 했을 턴데 도중에 우물우물 줄어든 것이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 앞으로 새마을운동의 방향은?
답.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은 시민운동입니다. 민관 합동시민운동이요. 새마을운동이. 현재 우리나라에 시민단체가 수 만개입니다. 시민운동 잔체가 우리나라에 수만 개가 있어요. 그 중에는 정치적으로 이용을 해볼까 해서 태어나선 안 될 시민운동도 있고 어떤건 있다가 없어진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요. 어찌 됬든 새마을운동이 일어날 당시 거의 없었어요. 지금은 많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것을 나는 시민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서 민관 합동으로 연합회 운동으로 서로 공통점, 시민운동 단체 특수 분야들이 많아요. 특색들이 다르기 때문에 정신적인 운동단체로 하나 묶어가지고 이거 끌고 나가는 운동으로 해야 한다. 거기에 민관 합동이요. 공무원도 똑같이 그 운동을 해야 한단 말이여. 그렇게 나가야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시대적 상황에 맞는 운동으로 새로운 운동으로 핵심을 봐야 한다.
문. 시멘트를 나눌 때 균등하게 해주자. 또는 차등화 하자는 말도 있던데
답. 급작스럽게 나온 얘기여, 이게 뭤을 해야겠는데 그러던 차에 박정희 대통령께 상공부 장관이 보고하기를 우리가 엄청난 국가에서 융자해서 시멘트 공장을 세웠는데 다른 공장들이 산업발전해야 시멘트가 필요하거든. 다리를 놓는 다든지, 집짓는 다든지, 블록를 짓는 다든지. 그게 따라가지 못하고 시멘트가 앞선단 말이여. 재고량이 너무 많아가지고 시멘트 공장 생산을 중단해야 한단 그 말이여. 팔지도 않고 그러니 국가에서 인수해줘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말이 나왔을 때. 새마을에 연계를 시켜서 박정희 대통령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저를 불러다 지급을 한거에요.
3만개의 부락을 한해 3천개의 부락을 골라서 200포대씩 주었어. 한 부락이, 한 이동부락이 평균 백 세대에서 2백 세대입니다. 그런게 한부락이 평균 백을 본다면 200포대를 줬거든요. 그러면 한집에 두 포대 인가 그렇게 주고 그 다음해에 다시 또 3천개, 그다음에 3천개 해마다, 그걸 기초 부락이라고 했어요. 기초 부락으로 선정되면 시멘트 200포대에 철근 0.5톤. 그 다음에 3천개중에 3백개를 골랐어요. 골라서 돈을 100만원을 현찰로 줬어요. 그 다음에는 5백만원을 줬어요.
문. 차별화된 것이 굉장히 자극이 많이 됐겠네요?
답. 차별화된 자극이 많이 됐고 또 발전하지 못한 부락 주민들을 버스에다 실어다 잘된 부락 선진 부락을 견학을 시켰어요. 여기도 사진을 다 기록을 만들었어요. 내 기록 보전을 여기소 하고 있지만 기록을 보면 형편없는 동네가 이렇게 잘돼있다. 그럼 뭐시냐. 주민들이 합동 단결을 해서 주민을 중심으로 노력했다. 이것을 배워 와서 확산 시키는 역할을 엄청나게 했고 또 그걸 매스컴에 비춰주기 위해서 청와대 불러다가 대통령께서 목에다 훈장 걸어주고 악수해주고 점심 대접하고 그러고 고향에 가면 금의환향을 하는거야. 나도 대통령한테 악수 한번 하겠다. 경쟁을 일으켰어요. 뿐만 아니라 선생들도 학교에 참여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이어 났어요.
문. 그리고 나서 1971년도에 첫 평가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는 어떤 분위기 였나요.
답. 평가회를 한게 아니라 맨 처음에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민관조직과 관리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조직은 새마을운동 추진 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협의회에서 새마을에 관련된 것이 농림부, 산자부, 내무부, 그다음에 지방도청, 문교부 관련된 몇 개 부처에 차관들로 하여금 회의를 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항시 협의를 해서 서로 협력 사업을 논의하고 그다음에 시도에 하면 그렇게 협의가 생겨요. 시도 시군에 그렇게 만들었고 또 국무회의에서 반드시 매월 보고를 하게 했어요. 각 장관들이 어떻게 했다 하도록 그러니까 경쟁을 해서 새마을운동 촉진하는데 모든 부처가 나서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게 됐지요. 그 다음에 민간조직으로는 아까 말 한대로 교수 새마을운동, 교수들을 조직했어요. 그 다엔 민관과 관이 합동으로 해서 평가회를 만들었어요. 그래야 이 부락이 중앙 평가 가 있어가지고 어느 부락이 잘 했냐, 어느 부락이 잘 못했냐, 기여를 많이 했냐, 평가를 해서 대통령이 그 장관한테는 특별히 점수를 많이 줘서 영정을 시킨다든지 잘 못한 군수들은 모가지 뗀다든지 정신없이 온 신경이 다가 있었지
문. 박정희 대통령이 애착이 굉장히 많았겠네요.
답.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전에 몰랐지요. 몰랐는데 첫 번째 만난 것이 비서관들한테 교육한 뒤에 5시간을 함께 있었는데 정말로 농촌을 대해서 걱정을 하더라고요. 밤 11시 반까지 함께 있어어.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말이여. 그리고 농민들 걱정하고 농민들 얘기를 자세히 얘기를 하니까. 이제까지 아무도 류 선생처럼 직접 얘기한사람이 없데요. 내가 어디까지 얘기를 했냐면 내 농촌에 살 때 박하를 제배를 해서 박하기름을 빼면 한 초롱에 얼마 씩 팔았습니다. 전국적으로 박하를 심었는데 아주 문전 옥탑에도 박하를 심었어. 근데 어느 해 두 번짼가 셋째 해요. 국제 박하 기름 값이 떨어졌다고 정부에서 사가질 않는 거야. 그래서 뵈서 내버렸다고 문전 옥탑에다가 뵈서 내 버렸어. 대통령께서는 이것을 볼 때 농촌 진흥촌이나 농촌지도소 미친 놈이 심으라고 왜 안샀냐 모르지만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못돼서 이런다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얼굴이 실룩실룩하더라고 농촌 진흥청 책임이 아니라고 국민들이 알기를 대통령이 다 시켜 놓고 지금 안했다고 말한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더라고.
문.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만큼 새마을운동을 챙겼나요?
답. 에피소드가 많죠. 새마을 부락 시찰을 하고 그 생각을 하고 시간을 내고 활동을 하는데 거의 내 생각에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볼 때 그 때 당시에 40%는 할애를 하데 대통령이 생각해야 할게 많거든요. 국제관계, 정치관계, 교육관계, 공장관계 많이 있쟈나요. 새마을운동에다가 40%를 배려 한걸로 정확한 통계나 측정하는 방법은 없지만 그때 난 육감으로 그렇게 느꼈어요.
문. 그만큼 대통령이 신경을 쓰니까 안갈 수가 없겠네요.
답. 지도자가 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에 따라서 사회가 변해버려요. 지도자가 꼭 시키고 꼭 이거 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 관심을 가지고 앉기만 해도 알아서 한다니까 이게.
문. 매월 경제 동향이나
답. 새마을보고죠. 국무회의도 새마을. 거의 절반씩 또 뭐 회의에서도. 그리고 또 지시를 내려서 그 체크하라 상공회의소 회의, 도지사 회의 대통령이 안 가쟈나요. 거기서 뭐했냐 하면 그러면 새마을에 관한 얘기를 했다 보고가 올라오게 거기서 한다니까. 최고 영도자가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나는 사회변화와 국가와 모든 지역에서 변화라는 것은 엄청 나게 달라진다는 이겁니다.
문. 그만큼 애착 같았던 에피소드가 있나요?
답. 있죠. 내가 가난한 농촌에서 밥도 굶고 쓰러지면서 고악을 하면서 지냈다니까 자기 얘기가 자기는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일반 대학을 못가고 제대로 교육을 못하고 군인에 들어 갔되요. 여기까지 말이 터지니까. 어디까지 얘기를 했냐면 집사람하고 영부인하고 결혼을 하는데 얼마나 하시를 당했데요. 나중에 가보라고 그래서 가봤어요. 육영수 여사 살던 동네를 대통령 살더 집도 가보고 구미에 가봤는데 맨날 술만 먹고 아주 괴로웠다고 고것도 실토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워낙 깔보고 가난하고 나라도 그렇다 이거예요. 나라도 부자나라가 가난한 희망도 없고 우리나라 깔보고 만나주지도 않고 대통령들이 우리가 잘살아야 된데 무조건. 내가 잘나야지 조건을 갖춰야지 상대방이 대우를 해준다, 이거야. 우리나라 농촌이 지금 우리나라 안에서도 대우가 그러니 농촌이 일어나서 대접을 받는 말하자면 인격적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그 얘기를 아주 자세히 실감을 느꼈어요.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의 40년을 평가한다면?
답.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기여를 했다는 것은 새마을운동 자체가 농촌을 얼마나 발전 시켰냐. 이게 아니라, 전체 국민의식 또는 국민운동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서 발전 상승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지금도 새마을운동과 같은 그런 정신운동이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구심체가 이루어 졌을 때 민관 합동입니다. 선진국 대열로 들어가는 속도를 굉장히 빨리 들어 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