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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 가꾸기를 하게 된 동기가 어떻게 되십니까?
답. 저는 바로 여기입니다 여기. 이집 집 자리에 70년도에 공기 생활을 마치고 여기 사는데, 750평 중심지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땅이, 집터가. 이발소, 목욕탕, 떡 방앗간 이 세 가지를 경영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43년 되었는데 요 정도 가지고 사는데 구애는 안 받아요. 그냥 편안하게 살고 구경하러 다니고 여행하러 다니고 그랬는데, 그때 면장이 김두락이라는 사람이 작년에 고인이 되었는데 매일 같이 놀면서 친구가 되어서 놀았다고. 그러다가 하루는 나한테, 기계면에서 한 사람을 누구 선정해가지고 도에 지도자 양성하는데 보내야 하는데, 전국 견학을 시키는데 한 번 가라 이거에요. 나야 그냥 먹고 살고 맨날 앉아가 놀고 그러는데 갈 필요 없다 해서 거부를 했는데, 그 거부를 꿋꿋이 못 받아주고 할 수 없이 가게 되었다고요. 그래서 대구 도청에 가니까 각 읍 면에서 한 사람씩 모여 있는데서 선발되어서 갔어요. 나와서 설명을 하는데, 지금 여러분을 데리고 4박 5일간 전국 순회를 하는데 내가 사는 고장하고 가는 데 하고 비교도 해보고, 푸르고 잘 된 산, 헐벗은 산, 경상북도에서 목적은 산림 녹화를 하기 위해서 지도자 양성을 시킨다 해가지고 우리를 뽑았어요. 그래서 잘 보라 해가지고 갔는데 시퍼런 모자를 하나 주시데, 푸른 경북하는 모자를. 지금 이 사진에 나와요. 이 모자를 씌워가지고 버스 8대에다 태워서 전국 순회를 하는데, 경상북도에서 출발해서 경상 군에 가서 말입니다, 경상 시장, 군수가 나와서 맞이해요, 우리를. 맞이하고 잘 다녀오라고 하고 음료수 실어주고 또 청도가면 청도군에서 나와요. 이거를 전국을 다 돌아다녔다고. 버스 타고 4박 5일하면 안 가보는데 없지. 전부 다, 나중엔 갈데없으니까, 땅굴에도 다 가고, 포항 와서 다시 포항 시찰하고 공업단지 전부 다, 5일 하니까 다 했다고요. 그래서 이제 돌아왔는데, 가는데 마다 군수, 시장 나와서 전부 환영하고 기념품 주고 가요. 근데 그걸 내 주위에서 아는데 나는 그 당시 그걸 모르고, 그래서 이제 마치고 대구에 가면 달성 공원이라고 있어요. 달성 공원 밑에 지하 회의실이 있어요. 그 지하 회의실에 다 들어가서 여러분 다 잘 다녀왔냐고 하고 해산을 하는데, 내 고향에 가서 하고 싶은 게 있고 뭐 하려면 하다가 뭔가 어려운 게 있고 힘이 들면 도에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제 가는데 마다 기념품 받고 대접 잘 받고 구경 잘하고 생각해보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느냐, 촌백성에 나이 그때 나 41살입니다. 지금 내가 84인데 41살 때니까 41살 먹은 젊은 놈이 뭣 때문에 밥 먹이고 구경시키고 부담 없이 기념품 주고 집에 가라 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서 여러 가지로 생각 많이 했어요. 여행 중에도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거는, 받는 게 있으면 줄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대접을 받았는데 내가 뭔가 한 번 해봐야겠다, 경상북도의 목적은 산림녹화다, 산림녹화인데, 산림녹화는 묘목 심고 산에 나무 심고 그거 키워서 녹화 시킨다는 건 말이 안 돼. 전혀 자신이 없다고요. 그래서 몇날 며칠 생각을 했는데, 여행 다니면서도. 내가 이거 안 되겠다, 기계면을 한 번 개발을 해봐야겠다, 해가지고 이제 그 개발 계획을 세웠어요.

문. 기계면 개발 계획을 만드셨는데 어떤 계획인가요?
답. 그 당시는 포항시가 아니고 영일군 기계면입니다. 영일군 기계면인데, 기계면이 36개 동이에요. 그렇게 컸어요. 36개 동에 그 당시에 초가지붕이 말을 못해요, 90% 이상이 초가지붕이고 개화 집이라 하는 거는 한 동네 하나 둘 있을 동 말 동 하고, 동네 차가 하나 들어가서 차가 하나 자유로이 들어가는 동네가 별로 없다고. 이래서 농민들이 말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우리 문성동 오잖아요, 여기서도 큰 차가 동네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고가고 이고 나오고 농산물 생산 때문에 가지러 나오고 가는 거 전부 저다 나르고 여다 나르고 그런 고통을 싣고 비만 오면 지붕에서는 말이야, 빗물이 흘러서 옷을 다 버리고 구더기 생겨가지고 떨어지고 그런 형편에 이거를 내가 한 번 개발해보게 되었다 싶어요. 우선, 차가 들어가야겠다, 동네에. 차가 들어가는 동네가 50%가 안 되었어요. 36개 동에 반도 안돼요, 큰 차가 못 들어가. 그래서 여기 보면 개발 계획에 말입니다.
그래서 개발 계획을 세우면서 차가 들어가도록, 개발 계획서를 작성해 보았어요. 몇날 며칠을 걸려서 연구를 했는데, 내 나름대로 못 배운 놈이, 나는 고등학교도 못 다녔어요. 새마을 가꾸기라는 개발 계획서를 만들어서 마을 진입로 안길 넓히기를 우선해서 지게 지고 여다 나르고 이거 안하고, 농민들이 좀 편해지도록.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걸 하고 나면 지붕 개량을 해야겠다, 초가지붕을 없애야겠다, 해서 지붕을 말입니다, 그 당시에도 짚이 귀해서 소를 먹이려 해도 소 먹일 짚이 없어요, 모자라서. 그래서 지붕 개량을 해야겠다, 그리고 지게를 벗어 던져야겠다. 농민들이 지게 지기 싫어서 도시로 다 나갔다 이거야. 이거하고, 부엌 담장, 화장실을 개조해야겠다, 개조해서 생활이 좀 윤택하도록 만들어야겠다. 공통 빨래터를 만들어서 여자들이 동네에서 동네 가운데 나와서 빨래하도록 해야겠다. 이걸 생각하고, 이거를 구체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문.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가 무엇인가요?
답. 그다음에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를 만들었어요. 전국에 하나뿐입니다. 이것도 우리 집 사무실, 우리 집에다 냈어요. 그래서 지방 유지들이 모여서 회의하고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하자 하고요, 그래서 공동 빨래터랑 상담소를 만들었고, 그래서 상담소에는 뭐하느냐 말입니다, 36개동을 번갈아가면서 순회를 하고 경쟁을 시키는 거예요. 선의의 경쟁을 시키고, 또 하나는 동네 무슨 일 하려면 저절로 돈도 많이 들 거 아닙니까. 각 동네, 자기 동네 사람이 외지에 나가서 돈 번 사람, 잘 사는 사람 찾아가서 내 동네 돕기 운동, 내 마을 돕기 운동을 하자고 해서 성과가 컸습니다. 부산, 대구, 서울 어디 안 가는 데 없이 다 나가서 성공한 사람들이, 여기 지금 현래동인데, 문성동 사람이 현래동 도와달라 안한다, 너희 동네 도와라, 그래서 이런 걸 경쟁을 붙였어요. 그러니까 저절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런 걸 구상했는데, 나는 모르고 가만히 보니 내가 전에는 도에서 우리를 데리고 갈 적에 도에서 주관하니 가는 데마다 군수도 나오고 시장도 나오고 이랬다 이겁니다. 그런데 나는,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걸 만들어서 한 번 물어봤어요, 동장, 면장이 내 친구라서. 면장한테, 면장, 이거 이렇게 해서 내가 한 번 다녀오려고 하는데 어떠노, 하니까 좋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러면, 동장 회의를 한 번 붙여 달라, 견학하고 온 소감을 얘기해서 할 테니, 이렇게 됐어요.

문. 구상한 계획이 실행되고 면장과 동장들의 찬성을 받아 예비지도자를 선발하셨다고?
답. 그래서 동장 회의를 즉시 붙였어요. 그래서 동장 회의를 하는데, 여비는 부담 안 시킨다, 2박 3일을 돌아다니는데, 딱 개인이 5천원만 부담하고, 5천원도 안 낸다 하면 안된다, 전부 신청을 받아서 가는데 예를 들어서 문성동이어도, 여기에도 문성동 저기에도 문성동, 이렇게 동네가 나뉘어 있으면 나뉘어 있어도 한 사람, 이렇게 자연부락 단위로 한 사람 씩 선정을 해서 여기 다녀오자, 이렇게 된 거예요.
가서 내가 갔던 자리 반은 못 가고, 다는 안 된다, 일부는 가보자 했더니 모두가 찬성을 했다고요. 돈은 5천원. 그랬는데, 이걸 해놓고 나니 나는 갈 적에도 시장, 군수가 나오고 환영도 하고 잘 왔다하고 이랬는데, 나는 우리 동네 사람 버스 3대를 해서 태워 가면 어느 놈이 우리 동네 왜 왔냐 하고 말 할 사람도 없다 이거에요. 그래서 이건 도에 가서 부탁을 해야 되겠다 해서 도지사를 찾아갔다고요. 여기 사진하고 있어요. 도지사를 찾아가서 면장하고 나하고 이용 소방대장하고 셋이 도지사를 찾아갔다고요.

문. 경상북도 도청을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서 대통령께 보고가 들어갔다고 하셨는데요?
답. 도지사 있는데 가서 내가 도에 담당직원을 찾아갔거든, 기계면 개발 계획을 가지고 갔다고요. 이걸 딱 보더니 말입니다, 조금 있어라 이거에요. 그 날이 월요일인데, 앉아 있다 보니 한참 있다가 왔어요. 면장은 공무원 이니 여기 있고, 두 분만 날 따라가자, 해서 어디 가냐고 하니까, 가보면 안다 해서 가보니 도지사 실이에요. 41살 먹은 촌놈이, 상상도 못해요, 도지사라고 하면 하늘의 별 따는 그런 건데, 도지사가 문 열고 들어가니까 시퍼런 모자 줬던 거 인식하도록 내가 쓰고 갔거든요. 나를 탁 안아요. 끌어안으면서, 여러분 회의 중인데, 7국장 회의실에 들어갔어요, 회의 잠시 중지하고 기다리고, 이분하고 나하고 이야기를 하는 걸 좀 들으시오, 여러분 청와대에 전화 좀 넣으시오 하는 거예요. 그때 공고 실장이 이상전이라고 있어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서울에. 그 사람, 공고 실장한테 청와대 전화하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아까 회의하는 거 때문에 전화하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전화하는 것을 한참 옆에서 들어보니, 대통령 나왔습니다, 하니까, 각하, 영일군 기계면에서 드디어 불이 붙었습니다, 하는 겁니다. 나는 아침에 갈 적에 (버스타고) 산에 불난 것도 없었는데, 드디어 불이 붙었습니다, 하니 나는 깜짝 놀랐다고요. 그래서 속으로 놀라면서 가만히 들어보니, 그게 아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게 들리는데, 뭐든지 도와줄 것이 있으면 다 도와주라 하는 거예요, 대통령이. 그러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러니 이제 도지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전국에서 각 동네 한 사람씩 삼천명을 교육을 시켰대요. 우리 경상북도가 우리 경상북도가 제일 크니까 제일 늦었다 이거에요. 경상북도가 늦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씩, 도시 안에 동네 한 사람씩 모아서 전국 견학을 시켰는데, 아무도 반응 한 사람이 없었는데, 반응이 왔다 이거예요. 그래서 각하가, 뭐든지 도와주라는데, 뭘 도와줄까요, 이러는 거예요. 우리가 도지사 만나는 것만도 하늘의 별따긴데, 대통령한테 앉혀놓고 전화해서 바꿔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때부터 걱정이 태산 같아 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도지사한테 이걸 가지고, 어디 어디 몇 군데 가려 하는데 거기에 면장 까지는 필요 없고 동의 반장이라도 한 사람씩 나와서 기다려 달라고, 며칟날 간다, 이거를 예약, 말 좀 해 달라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하시고 저는 갈 데를 알려줬어요. 그래서 다음에 갈 곳 청도 신도리라고 하는 데도, 우리가 길나들이니까, 전국으로 가려하면 거기서 해서 여기로 돌아야 하니까, 그래서 신청을 하고 돌아와서 집에 오니 잠이 안와요. 걱정이 되어서. 도지사만 해도 그런데 대통령한테서 보고가 되어 버렸으니, 도지사 얘기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지도자 양성을 하는데 스스로 일어나서 하도록 기다리지, 억지로 권하지 말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거기에 전국에서 내가 나타났다, 이겁니다.

문. 2박 3일로 비교견학을 다녀오시고 시작하게 된 건가요?
답. 그래서 인제 와서 시찰을 안 갔겠습니까, 시찰을 해서 돌아와서는 동네에 145명을 버스에 세대에 태워서 전국을 2박 3일 하고 왔다고. 오면서, 가면서 버스를 타면서 우리 셋이서 교대로 타는 거예요. 1번 버스 탔다, 2번 버스 탔다, 3번 버스 탔다 교대로 타면서 우리 돌아가서는 잘해보자, 우리 동네 한 번 개발해보자, 이렇게 하고 왔는데 금방 될 거 같은데 집에 탁 들어갔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안 되는 거야. 하려고 안 쓰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한 동네 두 동네 먼저 시작을 시켜서 거기에 그 효과가 나오면 따라 갈 거다, 견적을 부치자, 해서 붙인 것이 대곡 1동하는 동네가 있어요. 그 동네는 평지고, 동네가 직결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서너 군데부터 해가지고 확 바꿔놓으면 따라 할 거다, 하고 처음에 밥만 먹으면 거기가고 회의를 여러 번 붙이는데도 안돼요. 할 듯, 할듯하면서도 내려가면 안하고, 모레가면 안하고. 그래서 그 동네 실패를 하고, 이건 안 되겠다, 동네의 여건이 문제가 아니고 하겠다하는 의욕이 있어야 하겠다, 동민들이 해야 하지 그렇게 안하면 누가 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문선동을 선정했어요. 여기 저 사진에 나옵니다.

문. 대곡리에서 실패 후 문성동으로 재시작하는데 마을 길부터 넓히신 건가요?
답. 초가지붕이 95%, 개화 집 두 군데 밖에 없고 전부다 초가집. 그것도 다 쓰러져 가는 그런 집. 문선동 같은 데는 여기서 비료 같은 거 아까 오다 보던 다리 있죠, 거기까지 가서 지고 들어가고 지고 나오고 그렇게 해야 이렇게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잘만하면 뭐가 되겠다, 하고 갔단 말이야. 그래서 문선동에 가서 설득을 하는데, 며칠 걸려서 성공을 했어요. 성공을 해서 여기서부터 문선동 가는 게 800m가 되는데다가 자동차가 싹 들어가는 길을 만들었는데, 처음부터 길만 만들어놓으면 나머지는 한다 해서 길만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정사정해서 논들어가고 밭들어가는 동네, 길을 딱 얻었다 이겁니다. 몇날 며칠 설득을 해서. 딱 얻어놓고 새끼줄을 딱 쳤어요. 하루 딱 하고 이틀 만에 내가 도에 올라갔다고. 도에 올라가, 가니까 시퍼런 모자 쓰고 가니까 금방 알거든. 어찌 왔느냐, 이러니 이래서 왔다, 이랬더니 도지사 실에 금방 데려가요. 도지사가요, 깜짝 놀라요. 이 길을, 동네 주민들을 착수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럼 온 목적이 뭐냐, 내가 도지사님 뭐든지 도와준다 했는데 돈달라 금달라 안합니다. 기계면에 출장을 한 번 오셔서, 기계면민들 사기를 돋아주면, 또 다음에 나머지 일을 합니다. 사기 좀 도와달라고 하니까, 그 자리에 즉시 앉아서 공고 실장 서울에 있다는 그 사람, 내가 있다 줄서 줄 테니까 서울에 있는 공고 실장한테 내 일정이 어찌 되느냐, 그때 공고 실장이 요새 같으면 비서실장인데, 도에 도지사 비서실장인데, 내일 어떠냐, 모레 어떠냐 하니까 내일도 안 되고 모레도 안 되고 3일 만에 오기로 했어요.

문. 그렇게 해서 경북 도지사가 문성리에 새마을 상담소에 방문한건가요?
답. 도지사가 3일 만에 왔어요. 와서 문선동 가보니까, 새끼줄 쫙 쳐놓고 오면서 보니 동민들이 일을 하고 있거든. 또 도지사 온다 하니까 동네 유지들 다 나오고 안 나오던 동민들도 나오고, 해서 새끼줄을 쫙 쳐서 일 하니까 도지사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도지사 얘기가, 이거는 말이야, 내가 여기 왔더니 참말로 고맙다, 그래서 여기에 왔으니 뭔가 해주고 가야겠는데 뭘 해줘야 하겠냐 이거야. 그래서 내가, 여기 오다가 뭐 타고 왔나, 고속타로 왔지요, 그러면 안보이겠네. 여기 사람들 생활권이 그 당시는 안광, 포항, 경주가 생활권인데, 여기서 거기를 가려고 하면 장날 장보러 가도 기계 촌 아까 그 큰 길 거랑(개울가)을 건너가야해요. 가는데 비가 30M가 와서 못가. 엎어내고, 돈 주고 엎혀서 가고 그런 자린데, 그 얘기를 하니까 이따 같이 가보자, 하는 거야. 도지사가 기계면민들, 동민들 이래주고(격려해주고) 말입니다. 여기 와서 우리 상담소에 왔어요. 상담소에 오니까 우리집에 또 들어왔다고, 한 집이니까. 우리 식구들한테, 아이고 남편 뒷바라지 잘해줘서 고맙다하면서 지갑 들어서는 돈 2만 천원 밖에 없다고 하면서 주고, 그래가면서 저기 저 다리에 노는데 거기 갔다고. 길에 유지들이 따라 갔다고. 다리 이름이 달성 다린데, 다리를 놓는데 폭이 136 미터로 굉장히 길어요. 근데 그 다리가, 땅은 월성군 땅이고, 여기 우리는 영일군이고, 군이 다르다 이거야. 그래서 이 다리 때문에 우리가 장도 못 보러 가고 비만 오면 학교고 뭐고 다 못 다닌다, 이러니까, 이 다리를 놔야 하는데, 여기 땅이 월성군 땅이고 여기는 영일군이라 못 놓고 있어서, 숙원 사업이, 숙원이 그거다, 길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지사가, 그 때 박준모 라는 군수가 있었어요. 참 머리가 좋은 군수. 내가 돈은 박군수 줄 테니까, 이 월성군 땅에, 다리는 박군수가 놔라, 그래서 다리를 놓아줘서 사기를 도와줬다고요. 그 다음 일은 저절로 돼요.

문. 새마을 지도자들이 추진했던 사업들
답. 동네마다 경쟁을 붙인다. 새마을 지도자들이 각 군 상담소에서 나와서, 아이고 오늘 문선동에서는 지붕 개량하는데 얼마나 했다, 여기서는 얼마나 했다, 여기는 이렇게 하니까 좋더라 이렇게 하면서 그 다음에는 지붕개량을 해요. 초가지붕 개량이 참 힘들어. 내가 서울을 아홉 번 다녔어, 아홉 번. 지붕 개량을요, 돈이 어디 있어요. 슬레이트가 아무리 헌 슬레이트라도. 조건이, 3년 만에 다 갚는다, 가지고 갈 적에 3분의 1, 중간에 3분의 1, 마지막에 3분의 1해서 3회에 걸쳐 다 갚을 테니, 외상을 좀 달라, 하니까 미친놈이래, 미친놈. 그거를요, 서울을 내가 9번을 다녔어요, 9번을. 9번 가니까 뭐라고 하냐면, 나는 또 설명이 우리 동네도 좋아지고 너희는 슬레이트 많이 팔아서 좋아지고, 전국에 파급되면 감당 못한단 말이야. 슬레이트 공장 차려야 할 거야, 이래서 해 달라 해서 이제 했는데, 처음에 갔더니, 돌았다, 미쳤다, 미친놈이다, 사기꾼이다, 저러면서 사기 친다, 이거를 귀담아 듣고 계속 다녔다고. 그저 내려갔다 올라가고 또 해서 아홉 번 만에 가니까, 참 끈질기단 말이야. 욕을 그만큼 얻어먹고도 끈질기니까, 한 번 해보자 말이야, 했는데, 우리가 요구하는 것도 들어 달라 이거야. 물건 외상 줄 테니까, 외상 재정 보증을 서 달라 이거야. 나는 그때 머리에 퍼뜩, 좋다, 군수 뭐야, 군수, 뭐 도지사한테 가서 재정 보증 서 달라 하면 되겠다 싶어, 좋다 이렇게 됐어. 나 할게요, 이렇게 하니 누구를 하려 하느냐, 하니까 영일군이니 군수한테, 라고 하니 군수는 안 된대요. 왜 안돼요, 하니까 공무원은 관공서하고는 안한다, 돈 받아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그럼 도지사도 안 되고.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니까 36개 동장 전부 인감 증명 떼서 재정 보증 앉아서 가져오면 되겠느냐, 하니 그 때는 된대요. 요새는 한 사람 보증 앉는 것도 뭣한데, 그때는 내가 먹고 살고 사기꾼이 아니라 하는 것을 이 기계면민들은 알아줬다 이겁니다. 기계면 36명 동장이 각자가 인감 증명 떼서, 보증 앉아서 내가 가지고 갔어요. 그 때는 사람이 달라져요. 단박 대하는 게 다르더라. 당장 사장실에 가자해서 사장 인사시키고요, 걱정하지마라, 얼마든지 주마,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고서는 슬레이트 가져가서 지붕 잇는 거예요.
지붕이요, 기계에서 1,600호 되는데, 이 기계 천지에 포항서 비행기를 타고 휭 서울 날아가면 밑을 내려다보면, 그저 하얗고 뻘겋고 시퍼렇고 페인트 칠해놓은 슬레이트가 있고, 기계면만이 별천지라. 이거를 이렇게 해서 1600호 넘는 지붕을 개량을 했다고. 그러니 소문이 나니, 전국 우리 도내는 물론이고 전국의 시찰단들이 수도 없이 오는 겁니다. 그러니 동네에서 여자들은 빨래터 공동 빨래터 있죠, 집이 개량하는 것은 부엌 개량, 화장실 개량, 담장 개량같은 것은 각자가 공용 사업이 아니라, 자신들 것은 자신이 하기로 하고, 이렇게 해놓으니 동네가 확 바뀌어서 참 가관인 거죠. 누구나 한 번 가봤으면 하는, 이런 형편이 되어버렸어요. 이러니 저절로 수직상승 하는 거죠. 바로 올라가서 비행기에서 본 사람도 기계는 희한한 동네다, 이렇게 됐다 이러니 말입니다.

문.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이렇게 소문이 나보니, 문화공고부에서, 촬영진을 보내서 영화를 촬영했어요. 그래서 그 때 영화를 촬영해, 주연이 나고, 그 영화 촬영하면서 그 형편에 그런 영화 촬영을 해서 지금은 그 필름이 보관되어 있어요. 근데 이 하나 꼭 알아둬야 될 건요, 어딜 가서 이런 소린 못 들을 겁니다, 구경도 못 할 거고요. 새마을 상담소, 전국에 유례가 없어요. 예가 없어요. 내가 오늘 책자를 안 가져왔는데, 새마을 인터뷰 한 게 있어요. 거기 보면요, 새마을 상담소라는 게, 참 지방 유지들이 욕 봤습니다. 기계면민들 욕 안 본 사람 없어요. 문선동네는 물론입니다. 앞 장 서서 하니까, 앞 장 서면 얼마나 욕 봐요. 욕 봤죠. (고생했죠.) 여기요, 지게를 벗어 없애야, 지게 지기 싫어서 이농민이 생기니까, 그걸, 지게를 없애려고 하면, 오토바이는 안 되고 리어카를 해야 되겠다, 해서 리어카도, 3분의 1씩 나눠주기로 하고 리어카를 공급해가지고. 리어카가 면 학교 운동장에 콱 채워, 전부 리어카였어요. 나눠주는 날. 도에서, 도 사람들한테 이야기 해놓으니까요, 공고실에서 연예인들을 기계에 보내서 기계 면민들에게 하루 위안 잔치를 해줬어요. 노래 부르고, 춤추고 하루 놀고. 그런데, 아침마다 뉴스 시간되면 말입니다, 필름이 있어요. 저 보관되어 있는데, 저 필름, 뉴스 틀면, 문성동에 모자 쓰고 나와서 이래 하는게 나와요.
대통령이 와서 말입니다, 우리가 새마을 가꾸기를 15개월을 했는데, 새마을 가꾸기에 대한 말입니다, 정부 어느 부서에 찾아도 새마을 가꾸기 사업계획서나 문서가 하나도 없어요. 이 계획서는 이석걸이(나)가 창안을 한 겁니다.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기계면만이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가 있습니다. 그 상담소 우습게 봐서는 안 되지. 돈 본인 돈 써가며 다 나와서...돈 주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래서 여기, 여기 인터뷰 했던 이 사람들한테 내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거 들어보세요. 여기 없네, 그건 뭐 그렇고.
한 두 달 되었을까, 한국 새마을 가꾸기 연구회의 정진석이라는 분한테서 상담을 했는데, 내가 아까도 얘기 했지만, 내가 메일을 하나 보냈더니 말입니다, 보내주신 메일, 잘 받았는데, 사진을 보내겠다고 해놓고 하나도 사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사진 찍어가는 것도 없고. 지금 심심하면 한 분 씩 오는데,
(봉투 찾음)
근데 모두 다 와서는 옳게 안 보고 가요. 여기 함 보세요.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 라는 거. 상담소가 있잖아요. 이게 아무데도 이런 게 없어요. 이거는 여기, 기계 아니면 구경도 못하는 겁니다. 이 역할이, 보통 역할이 아니라 이거에요.

문. 초기 기계면을 위해 새마을 가꾸기 운동하시면서 뿌듯해 하셨던 일이 무엇인가요?
답. 새마을 운동, 지상보도나 말만 들어도 남다르게 가슴이 뿌듯하다. 제가 장하나요, 내가 장하나요, 성사시킨, 40여년 전에, 저의 유일무이한 기계면 개발 계획의 씨앗이 되어 새마을 운동이 태동, 급기야 용의 불길처럼 번져, 세계화 되어가고 있음을 볼때마다 남다르게 흐뭇한 자긍심과 긍지를 가지고 80고개를 넘어 90을 바라보며 후회없는 인생의 말로를 감사히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이건, 솔직한 얘기야. 내가 감히 어디 가서 도지사를 만나며, 도지사실에 출입을 하며, 대통령을 세 번 만났는데, 육영수 여사도 한 번 만나고 했는데, 어디 가서 제가 만납니까, 촌놈이, 배운 것도 없고, 기계 여기 완전 촌놈이야. 이러니까, 나는 공부 못하고 이런데, 먼저 여기 왔던 사람이 여기 취재를 해서 갔는데, 이런 게 있었어요. 내가 한 번 읽어볼게요.
토론회를 하여 참석하신 위원장님 일련과 찍은 사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으면, 하나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여기 원장이 가서, 사진 찍다가 와버렸는데, 그리고 저로서 위원장님 일행을...2012년 10월 12일, 경북 정책 포럼회(더듬거리며 읽으심), 아 이 사람들이 왔던게, 경북 정책 포럼회라는데서 왔어요. 위원장님이 주시면 연구소에서 소중하고 가보로 보관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증빙자료, 기계면만이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새마을 가꾸기 사업 계획을 창안,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를 설치, 운영하여 그 성과가 지대하여 1971년 9월 17일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선포하기 까지, 정부는 물론 전국 누구하나 새마을 가꾸기를 입 밖에라도 낸 적이 있으면 한 번 말해보라 이거야. 대통령이 오기 전에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하는 것은 어느 부서에도 문서도 없어요. 내가 찾아내라 했거든. 없다고 어딜 뒤져봐도 없어요. 없는데 기계면만이 있었다 이거야. 위정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지도자가 명예나 보수를 바라고 한 새마을 가꾸기가 아니건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발상지 가지고 시비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고 있을 뿐, 뻔히 보면서도 선거에 표를 유식하려 하기 위함인지 방관만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위원장님, 한 깔 뽑아보세요. 이것도 새마을 운동입니다. 두서없는 글을 무리하지 않고, 무식의 수치라 여기고 너그러이 봐 달라, 이런 얘기를 했고요. 작년입니다. 금년 7월 달입니다. 7월 4일 날인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창안, 새마을 가꾸기 상담소를 설치, 새마을 운동의 씨앗을 만든 자원 지도자 이석걸이가 한다고 이걸 보냈는데, 저기서 머라고 왔느냐면, 보내주겠다 하고 안 보내줬어.

문.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선포된 당시 분위기나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시나요?
답. 전국적으로는 그 당시에,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화하라, 이렇게 됐다 이거야. 문선동처럼. 그래서 운동이 탄생한 거예요. 태동한 거예요. 그래서 그 때부터 말입니다, 각 시군의 전부 전국의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하고 이래서, 전부 견학하라고 기계에도 보내고, 그랬는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요번에도 청도 신도리 가는 기억이 있을 거예요. 있지요, 반드시 있을거야. 청도군 신도리에, 신도리가 발상지라 할 적에, 우리는 뭐 했느냐 이겁니다. 영일군이 포항시에 흡수가 되어버렸어요. 그 후에. 이제 영일군은 없어져버리고, 포항시에 흡수되는데, 그 당시에 도지사가 누구냐하면 지금 청도군수 이종군의 형이에요. 이의근이. 이의근이가 도지사 할 적에, 자기가 도지사 경상북도에서 세 분하고 가면서, 내가 떠나면서 자기 동네 대통령이 지나가다 차를 세워놓고, 비서 시켜놓고 보러갔다 왔다 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왔는데, 그걸 말입니다, 그거를 대통령이 동네 들어왔다 하고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가지고 새마을 운동 발상지라 해서 돈을 경상북도지사 마치고 가면서 돈을 45억 원을 주고 갔어요, 자기 동네에. 자기 면에, 군에. 그래서 새마을 발상지를 만들었던 거야. 그때 우리는, 정장식이라 하는 시장, 그 뒤에 시장인데, 입도 안 떼요. 입도 안 떼고 도지사 어디 갔냐면, 청와대, 청도 사람인데 이의근이가 청와대 새마을 담당으로 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만들어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새마을 운동이야. 새마을 가꾸기라는 건 말도 안 돼. 70년대, 67년도, 65년도에 우리 동네가 말입니다, 뭘 잘해서 소득증대를 해서 새마을 가꾸기를 해서 이랬다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청도에 비가 와서 동민들이 동네 가운데에 도랑(거랑: 대구사투리, 시냇가)을 내서 동네 떠내려 갈 적에 부역을 하고 나와서, 부역을 하는 과정을 대통령이 부산 내려가다가 보고, 저기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이 있느냐, 그러면서 가서 보고 오라해서 비서가 갔다 와가지고, 부역, 동네 시냇가(거랑)에 동민들이 부역하고 있다(고 했어.). 아 우리 동네에 소득을 올려서 새마을, 하고...아 그 당시에 우리나라 사천년, 오천년 역사에 말입니다, 부역안하는 동네가 어디 있어요. 돈 안 주고 여기 길에 일일이 돈 받고 다 했나? 동민들 나오라하면 부역해서 길도 만들고, 풀도 메고 다 했잖아. 그걸 가지고 새마을 운동에 앞장섰다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고, 기계면은 처음부터 문자 그대로 새마을 가꾸기 계획을 세워서 대통령한테 보고하러 간 게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보고했지. 나는 대통령한테 보고 하는 건 생각도 못했지. 그래서 그 바람에 미쳤지. 촌놈이 도지사, 대통령, 이거 말이 돼요? 나이 41살에. 그래서 병신이 되더라고요. 막 전체 다 버리고, 내가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지붕 개량한다고 돈이 말이죠, 슬레이트 값이요, 얼마나 많이 들겠어요. 돈이 1,600호가 지붕을 개량해 봐요. 그런데, 1,600호가 다해서, 착착 돈을 갚은 사람이, 100%가 갚겠냐, 이거야. 안 갚고, 중간에 일 년 하다, 이년하다 안 갚고, 이사 가면서 집 팔아버리고 가버리니까, 사는 사람 돈갚아? 안 갚지. 이거야. 이석걸이 입 하나 믿고, 도에 뭐고 다 보고가 되고, 동장들이 이석걸이 말 틀림없을 거다, 동민들 돈 안 떼어먹을 거다, 이래서 도장, 인감 찍어냈는데, 내가 너희 동네, 누가 돈을 안 냈으니 돈 내놓으라, 이렇게 해요? 회사에서 다섯 명이 와서 몇날 며칠 돌아다니면서 수금하러 다니는데 간이 없거든. 그거에요. 바로 여깁니다. 600~750평 되는 땅이요. 방앗간, 이발소, 목욕탕. 그거 정리해서 갚아주고, 한 푼도 빚을, 단 10원도 동민들한테 물어내라 한 적 없었어요. 이거는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하고, 나하고 우리 집 식구 둘만 알고 우리 아들(아이들의 사투리)도 모릅니다. 우리 집 식구는요, 병신 만들어 쉬고요, 도지사가 오더니, 떡 방앗간에 떡 국물으로 문질문질 해 놓으니까, 도지사가 딱 와서, 아이고 이 젊은 아가씨, 아줌마가 이렇게 미인이 이렇게 고생을 한다하면서, 지갑을 꺼내서 고무신 한 켤레 사 신으라 하면서 2만 천원인가 돼요. 돈이, 재수가 더럽게 없는지 내가 오늘 가진 게 이거뿐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2만 천원을 우리 집에 주고 가네요. 그 다음부터는요, 우리 집에서 떡 해서 보내고, 오늘 서울 간다 얼마 내놔라 해 주고, 그전에 까지는 일일이 간섭을 하는게, 왔냐, 뭐 안됐냐 이랬는데. 대통령, 군수는 그저 밥만 먹으면 오지라해요?. 저기 정원순씨 우리 새마을 과장 맡아서, 그때는 참말로 여기 살다시피 했어요. 그런 식으로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끝에 가서 남는 게 뭐냐 하면, 그저 내가 흐뭇한, 하나의, 이 세상에 살았다가 배우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는 것도 버린 것도 없이 이 세상에 살았다가 가져가는 김에, 앞으로 내가 2년 살지 3년 살지 몰라요. 공부 못했으니, 명예라도 하나 남기고 간다. 내가 죽고 나서 아니라고 아무리 해도, 할 래야 할 수 없는 증거 자료가 있다 이거야. 내 주위에 저걸 안 봤는데, 저 영화 필름 보면요, 뉴스에 나오는 필름이 있어요. 그 필름을 보면, 그 때 그 필름을 왜 나를 줬냐 했냐면,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와서, 우리 집에 자고 가면서, 제작하면서 해놓으니 대우를 잘 받아서 이 필름을 하나 일부러 하나 보내줬어요. 보내줬는데, 이건 이제 대강 이런게 있다 하는 거만 보여드릴게요. 한 번 보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