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답. 우리가 6.25전쟁 후에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너무 어려운 어릴 때지, 어릴 때 그래 살았지만 우리가 살다가 보니 옛날 어려웠던 생각이 나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다가 이제 우리 집 양반이 새마을운동을 먼저 그래 했어요. 하고 그때는 우리가 농사를 지으면서 뒷바라지 하고 하다가 조금 이제 나이도 들고 연륜이 되니까 조금 시간이 있잖아요. 그래가지고 혼자해가, 남자만 해가 안 된다. 또 부녀지도자도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 남편만 그러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이집에는 부인도 와가지고 하면 좋겠다. 그럴 때 그것도 내가 마음에 있으니까 하지요. 아이고 나 바빠서 못 간다 하면 되는데도 아 그러겠다. 우리가 뭐 잘사는 운동이라는데 누구라도 참여해야 안 되겠나 이래 싶어서 그래가지고 저도 참여하게 됐어요.
문. 새마을운동에 전념하다보면 집안일은 소홀해지지 않나요?
답. 더 소홀해지지요. 그러면 여자가 하는 일은 빨래라든가 우리는 바느질을 했어요. 이부자리라든가 바느질을, 우리 이층에 있습니다마는, 밤에 하고, 낮에는 나가가 합니다. 그럼 몸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그래도 그땐 젊으니까 그래도 이거 좋은 일이다, 뭐 보람 있는 일은 하면 좋은 거 아니가.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해 마을이나 지역에서는 어떻게 받아주었나요?
답. 그런데 이제 내가 가게도 했잖아요. 가게도 하면서 굉장히 바쁘거든요. 저사람 좀 이상하다. 집안일도 저만치 바쁜데 뭐 나가가지고 바깥일까지 저렇게 하는지 이렇게 해도 그런 걸 다 하나하나 들으면 못하죠. 그래도 이건, 이건 옳고 이건 나쁘고 그걸 알잖아. 그러면 좋은 일에는 다 서로 동참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남이 무슨 나쁜 말은 귀에 대고는 안하잖아요. 그래도 내가 이걸 보람 있는 일이라고 해가 첫째는 이제 애들이 그 때는 공부할 시기 아닙니까. 근데 애들한테 양해를 많이 구했죠. 애들이 많이 도와줬는기고 엄마가 나가고 하면 저그가 할 일이 많잖아요. 엄마가 다 해주면 저그 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참 도와주고 해서 가족이 다 함께 마음을 모으니까 할 수 있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여성 지도자로서 어떤 사업들을 하셨나요?
답. 처음엔 새마을이 하는 일은 이거다 하면 처음 나갔을 땐 따라했죠. 그런데 다음부터는 얼마 하다보면 연륜이 지나잖아요. 우리도 한 30년을 넘게 했거든요. 30 한 5년을 했는데 그래 하다가보면 스스로 내 할 일이 생각이 난단 말입니다. 아 이건 이래야 되겠다, 하다가보니까 아까도 자금여력을 말 했는데 어렵잖아요. 그럴 때 이제 우리가 시의회나 시장님 뵐 일도 있고, 경주는 관광지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보문쪽에다가 떡 축제를 하게 해달라고 우리 이제 총 지도자들 앞에 선 사람들이 건의를 했다고요. 하니까 그거 참 좋은 일이다. 다른데도 와가지고 하고 더군다나 경주 같은 데는 고풍스러운 음식이라도 해가 하면 좋으니까 그것도 좋다 하면서 그때는 마을단위로 줬어요. 그래가 그 기금으로 해가 경로잔치도 많이 했죠. 참 어려운 아이들 있으면 그것도 많이 돌봐줬죠. 그래, 그래 기금으로 해서 그렇게 하고 그래 하다가 보니까 그 참 인식들이 다 좋아지는 거예요. 저래 바쁘면서도 이래 와서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우리도 성금을 얼마 준다, 떡을 사준다, 이러면서 해가 기금 모아가지고 그래 기금 모은 것은 좋은 일에 써야 안 됩니까. 부모 없이 이래 갑자기 부모가 누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니고 갑자기 죽고 나면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있다고. 그런 아이들 참 다니면서 그 발굴해서 얻어다 먹이고, 쌀 포대기도 얻어다 먹이고, 또 우리가 했는 기금으로서도 뭘 주고 이래 해노니까 남자들보다 사소한 일을 더 했죠. 그래 그렇게 했습니다. 했는데 그땐 젊어서 했는데 이제 마치고 나니 이러네요.
문. 힘들었던 점은 없으셨나요?
답. 힘들지요. 가정일도 해야죠, 나가가지고 또 해야죠. 사람이라 하는 거는 노력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그 너무 많이 하면 참 고달프죠. 그리고 또 집에 오면 여자니까 여자가 할 도리는 또 해야 된단 말입니다. 우리 집 양반 저래도 굉장히 무섭습니다. 고지식하고. 그래서 이거 오늘 해야 되는데 안하면 벼락이 떨어지지. 그럴 때마다 아 이거 참 왜 여자로 태어났노 싶은 생각도 하면서 해봤지 뭐.
근데 사람이 이게 옳다 생각하고 일을 하면 끝이 나기 전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잘 없어요 사람들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들 보면. 그리고 내가 헌신적으로 하니까 밑에 회원들이 참 잘 따라줬어요. 잘 따라주고. 우리 집이 밖에 보면 가마솥이 있어요. 거기다가 경로잔치하면 국을 몇 솥씩 끓여다 방이 뜨거워 발을 못 디딜 정도로 해가지고 다 하고, 물 옛날에는 푸짐하게 먹여주면 일을 잘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농사도 짓고 하니 식량도 어렵지 않고 하니 내가 좀 많이 베풀면 사람이 좀 따르게 된다고요, 그렇게 했어요.
문.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나요?
답. 시행착오라 하면 그전엔 돈이 없으니까 못 하고, 적게 벌고, 그러면 됐거든요. 그것도 일 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고 일 년 하는 것이 아니고 연중행사로 봄 한철, 이제 관광객이 많이 온다 싶을 때, 시(市)가 또 이런 걸 하례해줘서 우리는 거기서 일 하고, 좀 수입 그 하고 그러는 그것뿐이죠.
문. 새마을운동 하시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으신지요?
답. 저 아쉬운 점이라면 그것도 연도가 있잖아요. 내가 하다가 마을회장을 내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후임을 맡겨놓을 때 열심히 안하니까 눈에 훤하잖아요, 해본 사람은. 저렇게 해서 좀 잘 하면 안 좋겠나 싶은데 회원들도 뭐 슬슬 떨어지고, 앞에 리드자가 잘 이끌어야 뭐가 잘 되잖아요. 그럴 때 좀. 남이 하는 걸 잘못한다 할 순 없잖아. 마음속으로만. 열성 있게 안하니까 그 때가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뭐 보람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가 할 때는 보람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나가면 회장님. 이름이 이제 회장님 됐어요. 할매가 회장님 됐어요. 옛날에 하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죠.
문. 어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셨나요?
답. 저는 보람을 느꼈다는 것은 내가 자녀를 키우면서 내가 열심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도 애들 그래도 뭐 다 키워가 적은 아는 그래도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큰아들은 회사라도 중역에 있고, 부모한테 걱정 안 시키고 그래도 항시 우리 엄마 아버지 고생해가 우리 이만큼 양복입고 돈 벌어 먹으니까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그럴 때가 내가 보람을 느낍니다. 내가 비록 몸은 고생했지만 그렇거든요 부모들은 자식들이 그런 말 한마디 해 줄 때. 그 새마을지도자 하고 집안일 하고 장사 하고 이러면서도 우리 이만큼 키워서 양복입고 돈 벌어먹게 해준 부모가 고맙다고 자식들이라도 엄마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게 보람이고 손자들이 오면 제일 좋은 거고 그렇죠. 다른 거 뭐 큰 욕심 있습니까, 우리가.
시에서 자리제공 해줬고, 또 동에서 이거 하는 거 다. 그땐 차가 없었어요 차가. 요즘은 차가 천지지만 뭐 하나 싫고 갈라 해도 차가 없으면 힘들어서 못 가져가잖아요. 여기서 보문하면, 보문 아시죠. 보문 그 저 요즘 엑스포 장소 있는 거기서 많이 했어요. 그랬는데 거까지 동 직원들이 실어다 주고. 또 남자지도자들도 차 있는 사람은 실어다주고. 온 동네가 서로 합심을 해서 그렇게 했어요. 그럴 때는 참 고맙게 생각을 하고. 우리는 가서 손으로 하는 것만 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떡도 직접 만들고, 찌고 팔고 그래가 내가 이제 떡 축제 할 때 했던 것들 사진을 몇 개 놔뒀어요. 고운 옷 해 입혀가. 내가 여기서 하면 비싸다고 대구까지 가서 회원들 옷 해 입히고 그래 하니 참 좋아하더라고. 그래 항시 지금도 그럽니다. 아이고 회장님 할 때 너무 재밌었다하고. 고생을 그리 시켜놔도 그래 재밌었다하고. 그렇게 했어요.
문. 그 당시 때 여자 회원들이나 지도자들이 많았었나요?
답. 우리가 그때 이 동이 향우동이 22개 통인데 21명이 됐어요. 거기다가 또 부회장이라고 해가지고 또 더 많았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회장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부회장들은 혹시나 몇 사람 이래 나오고 그래도 이래 저래 하면 우리 떡 축제를 할 때는 그거만 오는 것이 아니고 동네사람들이 팔아주러 오잖아. 우리 동네 온다고. 그러면 그 사람들 점심 다 해 먹이는 거예요. 거기서 반찬 사다가. 그래 해 먹이면 마을 잔치가 되지. 그 분위기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 지금도 우리가 시에서 단체별로 이래 한 번씩 해보는데 하면 잔치지. 그 다 맛있는 거 해 먹이고 그렇게 하지. 그래 해야 다만 얼마라도 일을 해야 되니까. 그렇게 했어요.
문. 새마을운동 이전이나 이후, 뭐가 어떻게 변한 것 같으세요?
답. 그렇죠. 아까 우리 영감님 하시는 대로, 자연보호라든가. 우리가 여기서 여름 되면 해수욕장에 사진 다 있습니다만. 청소하러 다 나갑니다. 그런 것도 하고 이러니까 하던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까지 깨끗해야 한다는 거 청소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거 그런 거 하니까 그런 거 안할 때는 지 멋대로 하다가도 눈치도 좀 보고, 이웃에서 저렇게 하는 데 우리도 좀 해야 안 되겠나. 이러니까 그야말로 새마을 운동이 잘 살기 운동이고 인간 정신 개조하는 그런 운동이 된 거죠. 앞으로 이건 옛날에 어떤 때 보니까 새마을 운동을 으시하게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런 나쁜 말은 내가 안하는데, 그렇지만 이걸 해서 나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잘 살게 되었고. 전에는 죽도 못 먹던 사람들 요즘 음식 싫어서 못 먹거든요. 버리는 게 절반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버리는 게 없어요. 잘 안 버립니다. 먹을 만큼 하고 안 버리고 이러지마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요만치도 먹다가 남으면 우리는 깨끗하면 놔뒀다가 또 먹는데 요새 젊은 사람은 그냥 버리잖아요. 낭비가 너무 많지. 이 새마을운동을 함으로 해서 낭비가 아마 적어질 겁니다. 우리 교육을 받았을 때도 그래 받았고. 그걸 하면서 스스로 터득을 하잖아요, 우리가. 그러니까 하고 난 뒤가 참 좋죠. 이익도 많죠.
문. 새마을 운동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운동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 아 그렇죠. 뿌듯하죠. 그 참 잘했다. 다른 나라에 한다고 하면 우리는 참 TV로 봐도 아이고 잘하네, 열심히 해야지 이러고 그럽니다.
문. 새마을 정신을 이어가는 후배들이나 국민들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그런데 물론 정직하게 말 하면 나보다 남을 카면 뭐 지도 안하면서 남 카는데 나보다 남한테 배려하는 정신이 더 있어야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등 조금 전에도 전화가 왔는데는 어디고카면 서울입니다. 우리가 우리 새마을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뿌리가 중요한 것이거든요. 나는 그래서 우리 종친사업을 참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고 그것도 전직 회장이 돼서 그래 하는데,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있죠, 꽃이 피죠, 열매도 맺죠, 그렇듯이 물론 새마을운동도 우리가 국가적인 거창한 그걸 해서는 그거를 하자 하지만 우리가 또 가정을 생각하면 뿌리운동도 해야 된다고 해서 새마을을 마치고는 우리 종사운동. 우리가 우리 전국에 있는 저 어른이 김해 김씨입니다. 이분들은 성씨가 뭔지 몰라도 그게 그래가 종사운동을 많이 하는데 후손된 도리로 조상을 늘 생각해야 되거든요. 그래야 어느 집 자손인지 참 어떤 집 후대인지 알 수 있잖아요 그래 그런 것도 좀 많이 했어요, 새마을운동을 마치고나서는. 그래서 오늘 여기도 종사 교육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그래 전화 오다가 끊으라 하고 다음에 한다 하고 그랬는데. 모든 일에는 죽을 때 까지 배우고 남보다 좀 더 노력하고 그래야 되고 우리가 중앙으로부터는 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경주는 문화재가 너무 건재해 있어서 집수리 하나를 제대로 못합니다. 우리도 집이 이래가 있는 것은 이게 이제 철거지구가 된다 해서 집수리도 안하니까 아주 추하게 해 놓고 살고 있죠. 근데 우리 경주만 문화재 때문에 이렇게 너무 불이익을 받는 게 그게 좀 우리가 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문. 어머님은 어떤 상을 받으셨나요?
답. 네. 나는 저기 뭐고 국무총리 표창 하나 받은 게 있어요. 뭐 상 받은 건 많아요, 많지만 그 중에 제일 큰 게 국무총리 표창 하나 받은 게 있었어요. 열심히 잘 했으니까 이거라도 하고 주시기에 아주 감사히 받았습니다.
문. 다른 사업도 하신 것이 있나요?
답. 다른 거는 별로 돈 되는 사업은 못 했고요. 맨날 봉사하는 것만 했지 나가서 일 하고 뭐 그것뿐이지. 남보다 청소는 열배 더 하고 또 아주 불쌍하고 부모 없는 애들 있으면 그건 뭐 어디 댕기면 내가 돈이 없으면 뭐 시청이나 어디나 교회나 어디 가서 이래 주는 건 다 받아다가 애들을 그거 하고. 그래서 다 크고 나면 한 사십이 넘어가 어머니 하고 찾아오는 애들. 그래도 못 와서 미안합니다. 하고 그러는데 돈 버는 다른 사업은 못 해 봤어요.
우리는 다도도 했고, 또 사람이 적으니까 이런 데는 새마을지도자는 새마을만 하라 하는 게 아니고 적십자도 나가야되고 뭐 이런 단체 많잖아요. 또 의용소방대에도 나가야되고, 뭐 부르는 데가 너무 많아요. 일 있는 데는. 그런 쪽을 많이 했죠. 국제여성이라든지 그런 쪽으로는 좀 시간을 많이 낭비 했는거지. 그래도 이제 늙어 아무도 안 오라하던데. 젊어가 일 할만 할 때는 이리 저리 댕기면서 많이 했지만.
우리 이 동이 성동, 황오동 하면 큰 동네였어요. 그랬는데 자꾸 시가지 줄어요 인구가. 줄고 이제 우리 황오동은 문화재를 해가 이 동네가 이 뒤에는 하나도 없다고요. 그 큰 동네가. 다 문화재로 뜯어 불고 그래는 성동하고 이제 합하면서 어짜든지 있으라 해도 나 인제 그만할란다 이러고 그쪽 이제 성동하고 황오동하고 합병하면서 재작년에 그만뒀어요. 그러면 뭐 근 40년 했지. 그렇게 했습니다. 뭐 별로 할 게 없어요. 크게 남자들같이 힘 써가지고 지붕을 개량한 것도 없고, 농로를 만든 것도 없고 여자들은. 그런 게 없어도 그 나름대로 상호간에 서로서로 의견도 하고. 그러다가 보면 사람도 알아지잖아요. 집안에만 있는 것 보다. 그리 하다가 이제 나이도 많고, 또 내가 아픈지가 한 6년 됩니다. 몸이 아픈지가. 내가 제대로 못 걸어 다니거든, 이래 댕기면 좀 어지러워가. 조심해서 걸어야 되고 그렇거든. 그래서 그만 뒀어요.
문. 새마을운동 하시면서 어떤 때 속이 많이 상하셨나요?
답. 근데 우리는 한다고 해 놓으면 또 비평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개중에는 자기일이나 하면 되지 이러고 이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거 뭐 귀담아 안 들어서 그렇지 그럴 때는 좀 그래도 뭐 그래라 하고 그렇게 했죠. 상해도 뭐 그런 거는 뭐 직접적으로 나를 뭐 나쁘게, 말은 그래 하지마는 곁에 와서 뭐 그러진 않잖아요. 그런 식으로 했어요.
문. 새마을운동 하셨던 것 중에 특별하게 해 주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답. 글쎄 아까 우리 또 얘기 했는데 우리가 음식을 너무 낭비합니다. 우리 앞으로는 좀 줄여서 버리는 게 좀 없었으면 합니다. 지금 아침에도 청소차가 오면 쓰레기, 음식쓰레기차 따로 하나 오고 그냥 쓰레기 차 따로 오고. 길거리에 나가면 나는 뭐 잘 안 나가니 그렇다만도 요즘 사람들이 쓸 만한 것도 그냥 버린대요. 다 버린답니다. 좀 그런 거 없이 좀 자원을 아꼈으면 싶어요. 아껴 쓰면 후손들이 좀 안 좋겠습니까. 또 지구를 깨끗이 해놓으면 후손들이 좀 안 좋겠습니까. 우야든지 오염 덜 시키고 자원 좀 절약하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나라 전체가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