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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 운동을 참여하게 된 동기가 어떻게 되세요?
답. 76년도 천안 문성동이라는 7통 지도자로 제가 처음에 위촉을 받았습니다마는 그때 당시에는 반상회라는 게 있었습니다. 반상회에 제가 또 반장을 겸하고 있는데 당시 새마을지도자가 우리 통에 없으니까 새마을지도자 겸해서 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받고 새마을을 제가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이래서 새마을을 거기서 하다 보니까 새마을의 맥을 알게 됐고요. 새마을에 해야 되는 것을 무언가를 깨닫게 되고 국가관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래서 새마을에 매력을 갖고 뛰어들게 된 게 됐고, 지금까지 온 동기입니다.

문. 그 당시에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각각 어떠했는지요?
답. 새마을하면 그때당시는 한마디로 대단했습니다. 온 국민이 새마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그런 인식을 갖고 모두가 서로 상부상조를 하고 모든 환경정비에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마을 안길 정비라든지 몇 평의 내 땅 소유도 기꺼이 내 놓는 이러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근데 이 작금에는 그러한 게 전혀 없죠. 역사에 남는 대 혁신 운동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을 하고 우리 국민이 더욱 인식을 해야 되지 않을까. 이것은 앞으로 새마을 본부에서도, 중앙회에서도 더더욱 각별히 신경 써서, 정부 측과 긴밀한 협조를 해서 새마을의 위치라는 것이 좀 더 발전을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문. 초창기에는 그래도 설마 되겠냐는 의심이나 불안은 없었는지?
답. 뭐 안되는 게 없었죠. 새마을 하면 안되는 게 없는 것이 뭐냐면 모두가 우선사업이었습니다. 정부의 시책이고 최우선 사업으로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온 국민이 그 시책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하다보면 부딪히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안 되는 어려운 과정을 겪을 때는 주민을 설득을 합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에는 지금도 현재 반상회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반상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이 반상회를 순회를 하면서 주민한테 상기를 시키고 이것은 우리가 이런 사업을 해야 만이 피부적으로 우리가 편한거다, 라는 것을 인식을 시켜서 일을 해 나갔죠.

문. 주로 어떠한 사업들을 추진하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답. 70년대부터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76년 1월 1일부터 했는데 당시에는 우선 환경사업에 주목적이, 주목적이 키포인트가 환경사업이었습니다. 환경사업을 하다보니까 마을 안길 포장이라든지 농로 포장이라든지 이런 데가 주 포인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처음으로 새마을 지도자로 한 사업이 골목 안 포장 사업이었습니다. 문성동에서 포장사업을 해서 약 300m 정도의 포장사업을 해서 주민한테 아주 칭찬이 대단해가지고 주민들이 표창을 줬습니다. 저한테, 주고 시에다가 상신해가지고 당시 박재복 시장님한테서 우수 지도자 표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충청남도에서 각 읍면동에 시멘트 1,000포씩을 주면서 당신들이 자력사업으로 한번 포장을 해봐라 라는 식으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 때에 그 1,000포씩을 갖다가 일부는 저희들이 자체적으로 모래 시멘트 섞어서 포장을 하고요. 일부는 우리 노력으로 100%다 안 되기 때문에 시멘트하고 레미콘하고 교환을 해서 포장을 한 이런 일도 있습니다.

문. 시멘트로 도로포장을 하실 때 어려웠던 점이 없으셨나요?
답. 네 그 주민하고 직접 했거든요. 주민하고 직접 한 사업은 폭이 2m 50정도에 길이가 한 300m 됩니다. 여기 저 동남 동쪽에 황룡사 길이라는 길인데 이것을 주민들 동원을 했죠. 주민동원을 하는데 이게 어려움을 겪은 게 안 나오는 겁니다. 그것도 약 2,3개월 동안 주민 설득을 해가지고 결론은 100%가 다 나왔습니다. 100%, 이래서 주민하고 합동일체로 일을 해낸 적이 있습니다.

문. 시행착오들은 없으셨나요?
답. 네 시행착오도 많죠. 일을 했는데 다음 해에 보니까 장맛비로 손실이 되고, 어느 부분은 전문지식이 없다보니까 어느 부분은 얇고 어느 부분은 두껍고, 요즘말로 하면 불균형하죠. 이래 되가지고 주민한테 좋은 호응은 못 받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1,000포 나오는 데서 보완을 했습니다.

문. 도로 포장 말고 다른 사업은 어떤 게 있었나요?
답. 다른 사업이요? 다른 사업은 제가 서두에도 말씀드렸는데 제가 천안시 원성동에 85년도 이전에는 원성동이란 자체에서 85년 12월 31일,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86년 1월 1일부로 원성 1,2동으로 분동이 됐습니다. 분동이 돼서 그때 당시에 70년대 자료는 솔직히 제가 가지고 있지 못하고요, 86년 되면서 제가 원성1동 협의회장을 맡으면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서류라든지 증거물 모든 것을 우리가 자료를 갖자 라고 해서 그때부터 활발히 적극적으로 추진을 했습니다. 제가 협의회장을 하면서 정말로 새마을이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한번 보여주자, 전국적으로 깜짝 놀라게 해 주자 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제가. 자율방범대 조직, 효도 관광, 문패달기 사업, 원성 1동에 각 구간별로 청소구간을 딱 지정해서 팻말을 박아놓고 이 구간은 당신들이 책임을 지시오 라는 협조공문을 보내서 우리가 싸리비를 또 산에 가서 채취를 해서 싸리비 몇 백 자루씩 만들어서 무료로 지급을 하고. 또 아침 1일, 15일 새마을 조기 청소에는 이웃 신안초등학교를 제가 방문해서 교장하고 담판을 졌습니다. 그래서 1일과 15일 날은 새마을 청소에 적극 참여를 해 주십시오 하는 승낙을 받고 전원 거기에 상응하는 장학금을 지급을 해 주겠습니다. 또 아니면 1일과 15일에 나온 학생은 제 성의로 노트 한 권이든지 볼펜 한 자루를 주겠습니다. 라고 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아침이면 몇 백 명 씩 나오고 그랬습니다. 이래서 조기청소를 하고 저는 전반기 운동회 때 아니면 연말 졸업식 때 제가 사비로 5만원, 10만원씩을 줘 왔습니다. 그 출석부가 기록돼, 그 학생들 출석부가 있습니다. 이런 사업을 제가 추진을 하고 86년도 이후에는 아주 적극적으로, 아주 그 거듭 말씀 드리지만 새마을에 추종을 불허하는 원성 1동을 만들자는 제가 캐치 플레이를 걸었습니다.

문. 70년대에 추진했던 사업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으신가요?
답. 그렇습니다. 그때 당시에 기억에 남고 제가 아쉽고 자료가 없는 걸 말씀드리면요. 당시 그 사물놀이라고 하죠, 사물놀이. 근데 원성1동이라는 여기가 박씨 집성촌인데 아주 이기주의고 타파적이에요. 이런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 제가 새마을을 했는데 그 뭔가 혁신적으로 한번 이 동네를 만들어보자. 이웃 간에는 아주 박씨 아니면 상대를 안했습니다. 이래서 이걸 뭔가 타파를 해보자 라고 해서 구상을 한 것이 사물놀이 기구를 당시에 86만원어치 를 모든 걸 구입을 했습니다. 외상으로 구입을 해서 이걸 한번 우리가 획기적으로 우리가 활용을 해보자. 라고 해서 집집마다 명절 때면 대보름에 쇳소리가, 옛날 속어에 속담에 쇳소리가 나면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대보름 때는 집집마다 가가호호 다니면서 모금을 하고, 또 굿을 해 주는 겁니다. 우물가에 가서 해 주고 부엌에 가서 해 주고, 옛날 전해오는 우리가 미풍양속 식으로 그걸 했습니다. 이래서 3년 동안은 제가 그걸 했습니다. 3년 동안은 제가 쌀자루 메고 다니고 그 기록이 지금 제가 갖고 있는데요. 그건 제가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먼저 그 통장들이 법적 싸움이 있기 때문에 그걸 제가 공개하면 그 통장들이 지금 문제가 되니까 자료들은 제가 못 줍니다. 갖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제가 그 기록에 없는 사업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당시에 새마을 회관을 22평을 땅을 구입을 해서 신축을 했습니다. 나머지 우리 6개 마을에 방송시설을 모두 해주고, 또 3년 동안 남은 돈 160만원을 제가 분통, 1통이 7개 통으로 현재는 분통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1통 지도자한테 제가 주고 나왔습니다. 이런 그 70년대 참 예기치 못한 일이 있고요. 여러 가지 일이 있습니다마는 자료가 없는 것이 제가 가장 아쉽습니다. 그 당시에는 또 자율방범대, 이것을 제가 천안시에서 가장 먼저 창설을 했습니다. 창설을 해서 자율방범대 저희 그 대지에다가 25평 조립식 건축을 지어가지고 자율방범대를 제가 데리고 운영을 했습니다. 자율방범대와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를 우리가 한 개 사무실을 제가 운영을 했어요. 이 때 당시에 자율방범대 천안 최초로 운영을 해서 제가 중앙회에 2년에 걸쳐서 우수상을 받았죠. 그래서 상금도 50만원씩 받았는데, 그것이 후에 그것이 발전을 하면서 자율방범대 데리고 있던 애들이 차량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는 바람에 효도관광을 하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효도관광을 참여하는 당시에는 12인승, 15인승 버스가 20대, 17대 정도가 동원돼서 무상으로 해 줬습니다. 오늘날까지 지금까지 계속 17년 동안을 효도관광을 하고 있습니다.

문. 효도관광이 중단된 것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답. 가장 제가 지금 핵심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그겁니다. 천안시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충청남도에서도 제가 당시 2000년대, 1990년 이후로는 충청남도 지도자 협의회 부회장도 보고, 천안시 회장을, 협의회장을 했습니다마는 가장 아쉬운 부분이 효도관광입니다. 아울러서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는데 그 아쉬운 거 한 부분은 제가 공개를 못하는 입장입니다. 공개를 못하고 천안시에 관련된 우리 중앙회의 얼굴이기 때문에 제 가슴속에 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효도관광은 작년 재작년 2010년도까지 저희가 17년 동안을 계속 꾸준히 해 왔습니다. 해왔는데 지금 현재 단절 돼있습니다. 내년 2013년도에는 기필코 이걸 다시 부활을 하려고 동사무소 동장과 모든 것을 합의를 봐서 현재 기금 마련하기 위해서 바자회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오시면서 보셨지만 젓갈 바자회도 하고 있고 미역 판매도 하고 있고, 그 자체적으로 노력하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하천 풀 깎기 운동이라든지, 산불 조심 캠페인을 우리가 한다든지 여러 가지 이런 걸 하면서 기금을 합니다. 일 년에 현 작금에는 약 300여명을 취급하는 걸 하려면 기금이 약 7, 800원 정도가 소요가 됩니다. 이것을 버스가 지금 현재는 45인 버스로다가 8대, 9대 다닙니다. 나머지는 그 음식을 다 여기서 만들어가지고 갑니다. 또 아울러서 각자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개인 지급하는 봉투가 또 있습니다. 떡이라든지 음료수라든지 우유라든지 사탕이라든지 야쿠르트라든지 과일이라든지 이런 것을 각자 지급을 해 줍니다. 또 술 같은 향응은 현지에서 직접 우리가 하고요. 그러니까 그 효도관광을 한번 하면 천안 시내가 들썩거립니다. 왜냐하면 자랑하기 위해서 천안시 시가행진을 저희가 합니다. 버스를 10여대 동원해서. 그러면 관광버스가 9대, 10대 가지요? 음식차량이 2대가 또 따라붙습니다. 앞뒤로 효도관광 에스코트하는 차량이 두 대가 있습니다. 또 거기에 방송시설하고 오락하는, 천안시에 요구를 하면 풍물단 이라든지 이런 것이 옵니다. 이것이 다 하다보니까 엄청난 차량이 소요가 됩니다. 그러면 고속도로, 우리가 엑스포를 방문을 했을 때는 고속도로에 약 2km정도를 우리가 점령을 하고 내려가게 됩니다. 이러니까 이 길거리에서 전부 버스마다 현수막을 다 붙이고 대규모로 다니다보니 전부 천안시가 부러워합니다. 이것을 제가 지금까지 해온 것인데 3년을 못해가지고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좀 아쉽다고 하면, 천안시해사건인데, 이것은 짤막하게 표면만 말씀드리면 우리 사무국장이 돈을 좀 축을 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 다 공개 돼가지고 28개 읍면동을 전부 소환하는 이런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협의회장을 맡고 있어서 제가 그걸 다 제 사비로다가 물어넣고 저희지금 법원에서 소송 걸려가지고 법원 출두하라는 소송장, 재판하고 나오시오 하는 그런 저희 서류가 저희 서랍에 몇 개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을 깨끗이 제가 마무리 하고 협의회장 사임을 하겠습니다. 그것이 충청남도 지부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문. 성공발표에 관해서 어떤 사례를 발표 하셨고, 그에 대한 반응들이 어떠했는지?
답. 성공사례 발표는 70년대에 제가 아마 한 것이 아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사물놀이 기구를 해서 우리 주민들 화합을 하고 주민들 한데 뭉치게 하고, 그분들이 새마을이 이런 걸 하는 거라는 걸 익혔습니다. 그래서 양보하고, 이웃 간에 서로 박씨 집성촌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파괴가 된 거에요. 이때부터 명절 때 정월보름 때 되면 서로들 떡 해서 이웃 간에 나눠먹고 이러한 내용입니다. 이래서 다시 말하면 주민들이 아주 좋아하고 저한테 주민표창을 만들어주고 한 이런 내용입니다.

문. 사례들을 발표를 다른 지역에서 하시면 그쪽 반응은 어떻던가요?
답. 대개 성공사례 발표한 걸 보면 모두가 한결같이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내가 이렇게 했다 이것을 발표하는 것 아닙니까. 근데 전 어려운 과정은 빼고요, 내가 이런 일을 했다, 라는 것만 이렇게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좋은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수상을 받고 성공사례를 제가 3회를 나가 봤습니다. 3회 모두가 좋은 수상을 했습니다.

문. 가장 보람 있었던 일, 효도관광 말고 다른 사례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겠어요?
답. 많습니다. 일일이 제가 열거를 못하겠는데요. 가장 보람 있었다는 것도 2002년도에 전국 체육대회가 천안시에서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이때 당시에 당시에는 제가 천안시 회장을 할 땐데 약 45여 개 경기장에 남녀 지도자들 환경봉사를 나가게 됩니다. 각 경기장마다 약 7,8명, 10명씩을 나가야 됩니다. 하루 1일 약 220명에서 240명을 차출해야만 40여개 경기장을 커버를 하게 됩니다. 이때 당시에 저희는 각 요소요소에 배치를 하고 일일근무자를 체크를 하고 이 과정이 참 보람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호돌이 봉사상을 당시에 받고, 천안시장님한테 지금도 집에 있지만 엄청난 고마운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영원히 간직하라고 크게 제작을 해주셨는데 그것 말고도 보람된 게 많습니다. 또 문패사업을 했는데요, 저희들이 총무하고 같이 나무하고 사다가 직접 우리가 색칠을 하고 글씨를 써서 모든 니스 칠을 꼼꼼히 해서 자료를 보시면 알지만 가가호호 방문을 해서 달아드렸습니다. 달아줘서 아주 좋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2년간 약 600여개를 하고 중단이 됐습니다만 그것도 부활시켰으면 하고요, 다시 또 하고 싶은 내용은 국기게양사업인데요. 그것도 서두에 약간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 관내에 연차적으로 계속 국기꽂이 작업을 제작해서 대문 앞에다 달아주고, 국기를 8월 15일 광복절 때는 일시적으로 다는 방법. 이래서 당시 대전 KBS나 MBC에서 대대적으로 원성 1동 와서 사진을 찍어가지고 방송을 한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이것도 아쉬운 점의 한 부분입니다.

문. 새마을지도자로서의 자부심과 어려웠던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 물론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마는 당시, 당시에 모두 그걸 타파를 하고 설득을 해야 됩니다. 아쉬운 부분이 닥치면 그때, 그때 설득을 하고 개척을 해 나가야 됩니다. 뭔가를 찾아야지요.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뭔가 개척을 해서 찾고, 또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새마을 지도자 사명감 아닙니까. 사명감을 활용을 하다보니까 모든 것을 설득을 하다가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는 시에다 요청을 하고 이렇게 해서 일을 해 나갔습니다.

문. 설득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으셨나요?
답. 도저히 만약에 설득하다 안 되고 이 사업은 꼭 해야 되겠다는 사업이면 제가 사비를 털어요. 사비를 내 놨습니다. 사비를 내놔서 하고, 한 가지 빠졌는데 가장 제가 하고 싶은 사업이 있는데 그걸 말씀을 못 드렸네요. 그건 뭐냐면 지금 현재는 모든 사망을 하면 장례식장으로 가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70년대 말입니다, 70년대 그것을 제가 빠뜨렸는데. 70년대 그 장례 사업이나 그 환갑이나 회갑이 이런 것이 모두 다 가정에서 했고요, 이 모든 가족 이것이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제가 착안을 한 것이 뭐냐면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 집 가정에 그릇이라든지 모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대여를 했습니다. 그릇 점에서. 수저나 그릇이나 모든 것을 대여를 3일 동안 4일 동안 대여를 해서 100만원이고 50만원이고 대여 비를 주고 그랬습니다. 당시 그것을 제가 착안해가지고 우리 동에서 애경사가 일어난 것은 우리가 무상으로 한번 지급을 해보자 라고 해서 가스시설서부터 가스레인지, 밥그릇, 전기 세트, 전기 세트라고 하면 배전판에서 우리판으로 전기를 끌어 오면 우리 여기서 전기 50m, 20m 등의 선을 다 놔서 골목이라든가 전부 배치를 해서 켜주는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치약이라든지 무슨 물통 주전자 이런 것을 다 구비 해 놨습니다. 그래서 어느 통 지도자가 우리 동네에 이러한 애경사가 있습니다. 하면 우리가 배치를 해줍니다. 그러면 3일이고 5일이고 사용을 한 다음에 무상으로 받는 이런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 저는 부활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문. 지도자로서의 사명감이 어떤 건지 말씀해 주세요.
답. 나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국가에서 나에게 내려준 새마을 지도자라는 직책입니다. 직책을 수행하다보면 걸림돌이 있고 막힘 돌도 있겠죠. 이것을 최소한의 관문을 뚫으려면 모든 애로사항과 역경이 있습니다만 헤쳐 나가야죠. 헤쳐 나가다가 도저히 막힐 때는 제가 사비를 많이 냈습니다.

문. 스스로 평가해 보신다면 어떤 점수를 드리고 싶으세요?
답. 평가라기보다는 나라는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서 배려를 해야 되고, 나보다는 이웃보다는 국가를 우시 했습니다. 저는 느낌이요, 한국,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서관용이 있고,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제가 뼈저리게 느낀 것이 월남 패망 후 난민촌에 전 세계로 흩어지는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한국이 있어야 내가 있다라는 것을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요 작금에 보면 참 몰지각한 분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아쉬운 점을 갖고 있고요. 새마을 지도자를 하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고, 아쉬움이 없습니다. 잘 선택하고 지금까지 잘 수행해 왔습니다만 요 몇 년 사이는 직장 관계로 많은 일에 참여를 못해서 우리 동료 지도자들한테 미안함을 갖고 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 지원 정책이라든가 공무원들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답. 공무원이요? 공무원도 우리 국민에 못지않게 대단한 열기와 성을 가졌죠. 우리 새마을 지도자의 창시자인 박정희 대통령께서 우선 새마을 사업에 가장 핵심적, 중점을 뒀습니다. 중점을 두다 보니까 일개 각 기업체라든지 관공서에서도 새마을 기를 우선적으로 달고요 새마을에서 앞장서왔습니다. 새마을에 앞장서다보니까 심지어 좋게, 나쁘게 평가할는지 좋게 평가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청에 새마을과를 들어가야 만이 승진 자리가 될 정도로 이 새마을에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이러다보니까 새마을지도자들도 사기가 아주 충천해 있었고요, 꼭 해야 되겠다는 자부심을 가졌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요?
답.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하다보니까 저소득층이 점점 줄고 의식주가 많이 변했습니다. 보니까 초창기에는 주목적이 환경 개선사업을 많이 해 오다가 최근에는 정신운동 쪽으로 많이 가고 있습니다. 정신운동 쪽으로 가다 보니까 우리나라 구조가 될는지 교육환경이 될는지 모르지만서도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좀 개선을 하고 새마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정부에서 홍보를 해 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주가 자꾸 바뀌죠. 시골 같은 경우는 초창기에 보면 노랫말도 나오다시피 초가집도 없애고 등등 나옵니다마는 그런 사업으로 시작으로 해서 요즘에는 그런 사업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전혀 없고, 다시 말하면 정신운동, 아니면 환경운동, 이런 쪽에 추진을 하고, 우리가 외국에서 한국으로 새마을 운동을 배우러 오고, 교육을 시키는데 너무 우리 자료가 없습니다. 자료가 없고 원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우리가 이렇게 했는데 이런 것들을 개선해주세요 하는 정부한테 자꾸 건의를 해야 되는데 물론 중앙회에서도 행자부에다가 정부00를 하겠습니다마는 아직 제가 볼 땐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70년대 80년대에는 정부에서 그런 데 집중적으로 예산을 세워주고, 이 사업과정 내내 이런 우리 정부를 위해서 이러이런 것 좀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이 들어와야 되는데 지금 그런 게 없지 않습니까. 자체적으로 일개 운영을 하다 보니까 새마을이 자꾸 국민한테 멀어져가는 이런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 해주시겠어요?
답. 저희들이 초창기에 새마을지도자를 할 때 보면 국가관이 투철했습니다. 또 아울러 사명감이 투철했고요. 내가 주어진 새마을 지도자를 최대한 십중 발휘해서 일을 해 왔습니다. 그것을 보수에 관계없이 일을 해 왔습니다. 또 표창에 관계없이 일을 해 왔습니다. 저 또한 36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조금도 부끄럼 없이 표창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업 원성 일개 동에서 이런 사업을 하고 이런 일을 했다고 하면 제가 자부하건데 아마도 저는 훈장감이라고 저는 자평하고 싶습니다. 허나 저는 표창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요즘에 신규 새마을지도자 보십시오,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오직 자기 밥그릇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천안시에서 발행하는 자녀 장학금 이걸 욕심내서 일을 합니다. 또 자기의 개인적으로 득이 되는 것을 찾다보니까 자기의 직분에 본업에 새마을지도자는 뒷전이지 않느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 새마을지도자 새로 들어오시는 분들 보면 제가 많이 교육을 시킵니다. 일개 개인 친목계보다는 좋다. 국가관이 있어야 새마을을 한다. 또 새마을 하다보면 애로사항도 있는데 결국은 새마을이 이것을 성공시킨다. 내가 본보기다. 왜, 제가 천안시에서 천안시 회장을 하면서, 원성동 협의회장을 하면서 별의별 감투를 다 줬습니다. 제가 주는 감투를 다 갖게 되면 20개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이것을 다 타파하고 오직 새마을 길만 걸어왔습니다. 새마을지도자 아니면 안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통장 일을 맡아도 그건 안한다. 왜, 그건 다소 보수가 있지 않느냐. 보수. 지금 천안시 같은 경우는 22만원씩 주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건 보수가 있지 않느냐. 새마을 지도자는 보수가 없지 않느냐. 난 이걸 한다. 이게 진짜 우리 국민이 할 일이고 새마을 지도자가 할 일이다. 라고 해서 저는 모든 감투라는 건 한 가지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새마을지도자만 난 하겠다는 것은 앞으로도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우리 앞으로 들어오는 새마을지도자한테는 꼭 제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새마을지도자의 사명감을 다 갖고 일해라. 밝은 미래가 있다. 새마을이 꼭 우리가 해야 될 임무고 업무다 라고 강조를 합니다.
국민들도 과거에 지금 50세 이후에는 새마을의 정신을 다 알고 있습니다. 50대 미만 정도의 중장년층은 아마도 새마을 정신의 밑바탕을 모르고 새마을 정신을 모릅니다. 50세 이상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를 알고 있습니다. 새마을의 향수를 압니다. 이래서 지금도 좋아졌네 라는 노래와 새마을노래 라는 등등 이런 우리 건전가요, 이거 좀 계속 방송에 내보내고 우리 국민들을 설득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새마을 하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서 한번 뭔가 우리 현재 경제나 사회가 어려워지고 얽매이고 서로 아웅다웅 싸우고 있는데 모든 걸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라는 생각을 좀 심어줬으면 좋겠어요.

문. 유공지도자라는게 어떤 건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답. 글쎄! 참 부끄럽습니다. 지도자 여럿이 한 일을 제가 개인이 그런 유공지도자를 받기가 좀 쑥스럽고요. 제가 지금 여기 좌담회를 하고 있어도 제 가슴 속에는 저 보다도 우리 동료, 같이 일하신 분 있고, 또 우리 새마을 하면서 총무를 하셨던 박정인이라는 총무가 있는데 저보다도 새마을에 더 깊숙이 관여를 했고, 옛날 과거에 그 사회체육 운동서부터 원성동 소식지라고 해가지고 등사기에다가 가리방 긁어가지고 그런 것까지 만든 그러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가 안타깝게도 현재는 뇌졸중으로 쓰러져가지고 장애자가 되어서 지금 있는데 그런 지도자들한테 모든 공을 돌리고 모든 것을 다 자랑을 해야 됩니다마는 이 자리에 선 제 자신도 좀 부끄럽습니다. 우리 모든 공은 우리 박정인 총무나 동료 지도자들한테 다 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