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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저는 처음에 먹고 살기 괜찮고 제가 어렸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생각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면 직원이 새마을 지도자를 면에서 와서 교육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때부터 교육원에 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 교육이라는 것은 정신 교육으로 자조, 자립, 협동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 창고 짓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마을 안길을 만들려고 일주일밖에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어떤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주민들이 협동, 단결을 해야 되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니 새마을 사업이 참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 확장해 놓은 그 마을 안길의 넓이, 길이는 그대로에다가 그냥 재포장한 것뿐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정부 지침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목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고 지도자를 양성을 시킨 것이기 때문에 지도자 입장으로서는 안 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도자분들도 지침에 따라서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도 지침에 따라서 내 마을에 손해를 볼 것이 없고, 내 돈 들여서 하는 것도 아니고, 참여해서 잠깐 힘들다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저희 마을에 지붕 개량을 하신 분들이 제가 보기에는 2~30%였습니다. 옛날에 묶은 짚으로 엮어서 계속 쌓아 올린 것을 걷어 내는데 몇 십 년 묶은 것을 동네 분들이 전부 올라가서 털어냈습니다. 지금은 쇠를 걸어서 하지만 그때는 못을 걸어서 나무로 엮어서 했습니다. 시멘트 올리는데도 한 집 한 집씩 짓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72년도 초기부터 계획적으로 들어가서 한 6~7월경 까지 마을 안길, 지붕 개량 사업까지 하였지만, 전기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전기를 발전기로 이용해서 집집마다 연결해서 형광등 하나 켜놓고 저녁에만 돌려서 비치는 방법으로 했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집부터 나섰고, 그리고 다른 동네 분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협조를 얻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먼저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별 어려움 없이 진행한다고 생각하지만, 문제가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된 다른 마을에 가서 구경도 하고 지도자 만나서 협조도 받는 등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 마을에서 새마을운동으로 추진한 것은 쌀을 조금씩 모아 절미 운동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식구가 한 사발 할 것을 한 솥 떠놓고 그것으로 저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아서 마을의 기금으로 사용하고 마을 발전에 조금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을 안길 같은 경우에는 그때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못 할 정도의 마을 안길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넓어져서 못 들어가는 차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멘트가 있어서 전부 다 포장이 되었는데, 그때 당시에 새마을운동이 추진 되지 않았다면 문제점이 몇십 배 몇백 배 되었을 것입니다. 지붕 개량하기 전 문제점이 지붕들이 썩어지고 골이 져서 여름에 막 우박으로 비가 오고 태풍이 오면 날아가고 방으로 물이 줄줄 새면 짚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 이런 시절이었었는데, 그때 새마을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와서 보면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이 지금에 와서 효과적으로 변화되지 되지 않았냐는 영광을 느끼고 지금도 감회가 깊고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그때만 해도 잘 못 살았기 때문에, 쌀을 얼마씩 집집마다 걷어서 통장을 만들어서 마을 자금으로 만든 다음에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서 한 번 해보자 해서 소득도 올리고 여러 가지로 방법을 고안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시멘트를 싣고 오면 마을주민들이 협조해서 차에서 내려주고 해야 하는데 이런 것이 마을주민들이 처음이라 제가 먼저 나서서 동네 분들 몇 명하고 내리고 그러면 다른 마을주민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돈을 얼마나 받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저 사람은, 지도자도 봉급을 받을 텐데.”하니깐 저는 돈을 하루에 얼마씩 받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진행만 하려고 하지 스스로 나서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동네 분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떤 행정당국에서 큰 보수를 줘서 하는 거로 인정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처음에 몇 분들한테 ‘이런 사람도 있더라.’라고 반대되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이야기를 하였죠.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저는 33명을 담당하였는데, 33명에서 한 명씩으로 단체전으로 나와야 할 것이에요. 누구는 나오고 누구는 나오지 않고,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 다른 사람들은 대신해서 나와야 하는데 못 나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가“왜 그 사람은 안 나오지 않느냐.”그러면 나도 내일 안 나온다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중간자이기 때문에 행정당국의 담당자가 와서 저에게 지시량을 주시는데 그러면 지시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도 모자를 판인데 하나씩 자꾸 빠져서 곤란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러니까 저 다음부터 마음을 싹 비우고 진심으로 하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본심이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마을 주민들을 속이면서 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솔직히 우리 마을을 위해서 노력하려는 사람이다.’라고 마을 주민들에게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제가 지도자 입장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진행할까를 고민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하면서 훈장을 받게 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이라는 기간은 사실상 작았지만 우리 마을이 좁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거의 모든 새마을 사업 기준에 의한 사업은 거의 마무리가 되고 보니까 저희 마을이 충남하고 충북하고 경계에다가 강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왔을 때 ‘참 마을 잘 되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차츰차츰 퍼지고 좋은 이야기가 돌고 보니까 군, 도에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1972년 7월 13일 훈장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가 주간 중앙 공무원 교육을 해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1기였는데 김준 새마을원장이라고 하는 분께서 참 아주 말씀도 잘 하시고 정신력, 자주, 자립, 협동에 대해서 교육을 시키고 하셨어요. 그때 끝날 무렵에 담화 회포를 푸는데 육영수 여사님께서 오셔서 수고한다고 하시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새마을운동을 여러분들이 교육을 받고 나서 마을주민들과 상의해서 노력해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일이 악수하면서 다과회를 진행 하면서 육영수 여사님께서 모두에게 한 잔씩 드리면서 다 악수하고 지도자 입장에서 ‘지도자가 영부인하고 악수 한다는 것이 영광이다.’ 생각하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 10월 2일 훈장을 수여한다고 통보가 왔습니다. 그래서 현재 군수님, 새마을 계장님과 같이 훈장 받는 날, 경제대학으로 갔습니다. 가니까 그때 당시에 잘 몰랐던 각 부처 장관들과 그리고 기자분들이 계셨고, 수상식은 슬라이드로 화면에 비치면서 그 내용 자체를 설명을 대통령님께서 전부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장을 직접 대통령께서 저를 달아주셨는데, 그때는 새마을 지도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저는 대통령님 바로 옆에 앉아있었는데, 대통령 식사메뉴라면 아주 호화로운 반찬으로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한테 새마을정신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도 보리쌀하고 쌀하고 반반, 국, 김치, 반찬이었습니다. 전 장관들하고 다 같이 먹었는데 저는 옆에서 밥을 먹는데 지금 와서 먹는다면 아마 세 숟가락도 못 먹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했느냐.’ 같은 질문을 많이 받고 ‘마을의 문제점은 뭐냐.’라고 물어보면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지금 인삼 농사를 한 참 잘 짓고 있는데 지금 공동 작업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삼 건조실을 지어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더니 그때 하사금으로 150만 원인가 얼마를 받았습니다. 그걸 받아서 20평~30평짜리 건물을 세워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용해서 오다가 이제는 인삼 농사를 안 하고 이제는 부시고 다시 그 장소에다가 경로당을 지었습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옛날에 우리 마을에서 발전기를 이용해서 저녁에 호롱불을 켜놓고 있다가 형광등 조그마한 것 하나 켜놓고 환희 비출 때가 그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또 살면서 우물 샘에서 그 아주머니들이 물동이를 이고 집에 나르면서 먹을 물, 식수 전부 다 나를 때 그 고생을 말할 수 없는데 그래서 조그마한 상수도를 하나 만들어서 집집마다 잘 다 들어가게 해서 호스 탁 틀면 물이 줄줄 나올 때 새마을 사업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발전적인 것이라고 생각된 것 별로 없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달라지죠. 사람은 환경에 바뀌면 마음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때 새마을운동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제가 34세였는데 그때만 해도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 마을의 뭐 시멘트가 지붕에 올라갈지 누가 알았겠어요? 몰랐잖아요. 새마을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살게 되고, 현재까지 자꾸 사람이 환경이 바뀌니까 발전하고 발전하다 보니까 지금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제가 생각할 때는 그때 당시 마을 일서에 안 빠지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장을 받은 이유도 그런 생각도 들고, 또 그런 보람을 느끼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그때 당시에 항상 생각이 납니다. 또 그때 협조해주신 분들도 한 40년이 되었는데 돌아가신 분들도 거의 많고 지금은 농촌도 고령화가 되어서 이제는 보통 농촌 마을이 60대가 제일 젊을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이 노령화가 되어도 깨끗한 환경에서 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물질적 도움은 별로 없었습니다. 마을 안길을 만들 때 시멘트 20% 정도이네요. 그때 한 시멘트 한 장에 천 원 한다면 한 200원 낸 정도였습니다. 그거 외에는 정부 지원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게 최고였죠.
문. 지도자로서의 자부심은 어떤 점이며 애로사항은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자주, 자립, 협동, 단결인데요. 새마을지도자 분들이 보신다면 그때에 새마을운동 역할이라는 것이 개인의 생각보다 마을의 발전을 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좋은 생각을 가져야 될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면 우리 마을이 더 잘되어갈지 또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생각을 더 가지고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해서 잘 해결하였으면 그것이 최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