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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제 고향이 경상북도 청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그때 유천의 재건중학교라는 곳을 들어갔습니다. 그때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정부의 지원도 전혀 없이, 100% 봉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도 언젠가는 저 선생님같이 봉사를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내려와서 고등학교, 대학을 제 자립으로 고학해서 졸업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공직에 잠깐 머물다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금정구 부곡동으로 갔는데, 부산에서도 가장 우범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외딴 데에 조그만 집을 지어서 가내 공업을 시작했는데 그 바로 옆집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 저녁마다 청소년들이 와서 매일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이 마을의 우범 지역을 모범 마을로 한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 동네 자연 부락에 있는 청년들하고 같이 협의하여 새마을청년회를 조직을 해서 이 마을의 불량배들을 한번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처음에는 청년들이 잘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이 아주 열심히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제가 앞장을 섰습니다. 거기서 제가 회장을 맡아서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 수 있도록 제가 봉사를 더 하고 제가 좀 베풀기도 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참여하게 됐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제일 처음에는 마을의 불량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해서 저녁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는데 경찰 인력도 부족하고 하니 저희가 방범대원이 되어서 밤늦게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주민들 출퇴근 때, 아침에 교통정리도 하고 때로는 빗자루를 가지고 조기 청소를 했습니다. 이렇게 돈이 들지 않는, 저희의 노력으로 봉사로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3년 동안 저희들이 청소년들을 선도했고 또 재범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뭔가 제도를 만들어야 되겠다 싶어서 새마을청소년, 새마을중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때가 1975년도 3월 5일, 지금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도된 청소년 75명을 입학시켜서 그때 제가 교장 겸 청년회장 겸 또 저는 공대를 나왔기 때문에 기술과목을 담당을 하면서 새마을학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를 13년을 했습니다.
초창기 학교 교실이 동사무소 2층이었는데 2층을 비워달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2년 과정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서 교실을 비워야 한다는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정부 시책에 의해서 예비군 중대가 창설이 되어 예비군 중대 사무실을 동사무소 2층으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쫓겨 나왔습니다. 그렇게 쫓겨 나와서 전전하다가 교실을 못 구해서 제가 경영하고 있던 공장 2층을 이 학생들을 위해 증축을 하여 그 학생들을 13년 동안 거기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하고 나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그곳을 졸업해서 의사도 한 사람 되고 또 공무원도 되고 기술자도 되고, 또 지금 기업을 하는 기업가도 되고 이런 것이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학교를 설립하다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이 선생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봉급을 줄 수 없는 것이 제 입장이고 또 우리 청년회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무료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그때는 현직 교사들이 2명이 있었고 저, 또 동사무소 직원, 동사무장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어서 교사가 됐기 때문에 나중에 현직 교사 두 분이 못하겠다고 하니 제일 어려웠습니다. 저희 주변에 부산대학이 있습니다. 부산대학의 총장을 찾아가서 사범학교 학생들 중에 봉사하실 분들에게 좀 도와달라고 애원하여 그 선생님들을 모시고 와서 다시 정상화시켰던 그런 어려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를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거기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한 3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정규 고등학교를 제가 학비를 대 줘서 졸업을 시켰습니다. 나머지 학생들, 검정고시에 합격을 못 한 아이들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밟고 싶다고 해서 우리 공장 2층에 학교를 지으면서 교실을 하나 더 만들어 새마을고등학교까지, 고등학교 과정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한 3회 정도 졸업을 시켰습니다. 그런 것이 보람이 있었습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지금도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검정고시를 합격해서 우리 공장에서 기능공으로서 근무를 하면서 새마을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수능 시험의 성적이 아주 좋아서 고신의과 대학에 들어갔는데 본과 1학년 때, 처음에 들어갈 때 학비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또 그 당시에는 의과대학 학생 한 사람을 공부시킬 만한 입장도 못 됐습니다. 그래서 그 학비 문제 때문에 제가 그 당시에 부산 지방 검찰청 선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검찰청에 손제복 청소년 담당 부장 검사가 있었는데 그분한테 가서 우리 학생의 독지가를 한 분 구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기하니까 그 당시에 부장 검사님께서 MBC ‘자갈치 아지매 (‘아주머니’의 강원, 경상도 방언)’한테 연락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만 김옥희라고 ‘자갈치 아지매’가 왔습니다. 저하고 셋이서 만났는데 내일 아침에 ‘자갈치 아지매’에 한번 방송을 해주겠다, 그러면 독지가가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있었던 얘기를 해달라고 해서 해주고 나니까 그 이튿날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제목으로 방송에 나갔습니다. 기능공이 새마을중학교를 졸업해서 이렇게 합격을 했다, 그러니 독지가를 좀 찾겠다는 그 방송이 나가고 그 이튿날 독지가가 나타났는데 사하구 장림동에, 지금도 기억납니다. 김승희, 병원의 원장님께서 입학금뿐 아니라 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학비 전액을 부담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진희 학생이었는데 제가 ‘너 빨리 가서 등록금을 받아오너라.’라고 했습니다. 근데 이 학생이 작업복을 입고 그대로 갔습니다. 가서 ‘제가 이진희 학생입니다.’하고 말을 하니 원장님이 믿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이 학생이 이진희 학생이 맞느냐고 하셔서 맞다고 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그 기름때가 묻은 얼굴, 손을 보고 믿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원장이 더 보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학비를 받아 와서 저한테 평생 잊지 않겠다며 큰절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부가 시작이 됐는데, 정말 안타깝게 생각을 하는 것은 이 학생이 3학년, 본과 1학년 때 피부암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제일 보람이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문. 자신을 어떤 새마을지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저는 추진을 하는 과정에서 저의 그 추진력이랄까? 제 장점부터 말씀을 드리면 처음에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참 어려운 가정에서, 시골에서 재건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그런 자신감이 생기고 좌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면 되겠다하는 생각만 가지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고학으로 고등학교, 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면서 상당히 자신감을 얻었고 그런 것들이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접목이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다고 보고 그것이 제 자신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1991년도에 부산시의회에서 의회 정치 활동을 12년 동안 했습니다. 마치고 나서, 다시 금정구 새마을지회장을 맡아서 우리 금정구의 초, 중, 고등학교가 한 40개 정도 있는데 거기다가 제가 내려진 새마을 기를 전부 다시 달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들 새마을봉사단을 결성하려고 계획을 다 해놨다가 2개 학교만 결성을 했습니다. 그 학교 학생들, 반장, 부반장을 중심으로 해서 한 학교에 약 100명씩 정도 소집을 하여 매월 15일이면 그 주변 조기 청소를 아이들하고 같이 했습니다. 우리 금정구에 초등학교가 한 20개 학교가 되는데 제가 전부 다 봉사단을 조직하지 못한 것이 지금 굉장히 아쉽습니다. 제 임기 6년 동안 지회장을 했는데 임기가 끝나는 바람에 그것을 못하고 나온 것이 굉장히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는 보잘 것 없는 지도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마을지도자는 대학을 졸업하나, 중학교를 졸업하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나 똑같은 자격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이 어딜 가도 대단히 많이 배운 새마을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밑바닥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활동하는 새마을지도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우리 지도자들도 저한테 굉장히 편하게 접근을 했고 그것이 새마을운동이 발전될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정부로부터 우리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지원되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부 우리 새마을지도자 자력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자세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그때 공무원들하고 같이 동참도 하고 그분들이 일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잔업을 한다고 해서 잔업 수당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때 새마을행사가 참 많았는데 새마을지도자대회라든지 새마을행사가 있으면, 공무원들이 밤늦게 12시, 때로는 밤을 새워가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 것, 그런 공무원들의 자세를 보면서 우리가 정말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지원이 없어도 그 새마을 담당 공무원들의 자세는 대단했다는 느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새마을과가 있었던 그때의 체제로 정부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결국에는 새마을운동이 1970년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4월 20일부터 시작됐는데 그 이전에는, 사실 농촌에서는 너무 어려워서 보릿고개를 넘을 수 없을 정도이지 않았습니까? 못 죽어서 산다, 뭐 이렇게 살아온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 고향, 저도 고향이 시골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들을 봐왔고 또 도시에서도 졸업을 하고 나면 취직할 공장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니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현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1970년도니까 제가 이제 대학교 막 졸업하고 군에 갔다 와서 시작을 했을 때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어려웠고 앞으로 내가 과연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실망감만 계속 가지고 있다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지도자들은 역시 새마을정신으로 살아가면 새마을운동이 더욱더 발전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운동하는 것보다도 나 자신이 새마을운동을 하면 스스로 더 얻는 것이 있다, 베풀면 오는 것이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지도자들이 새마을운동에 임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정부에서는 새마을운동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제가 알기에는 새마을연수원에 지금 중국의 새마을지도자 교육 대상자가 30만 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소화를 시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좀 과감한 투자를 해서 지금 새마을연수원 하나 가지고는 도저히 수용이 안 되니까 적어도 각 시, 도에 대여섯 개는 더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마을도 우리가 수출을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부에서 과감한 투자를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마을지도자들이 어느 시점이 되어 나이가 많거나 하면 그만두는데, 저는 아직도 우리 동의 새마을지도자로서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는 정년을 생각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새마을운동을 해야 후배들이 따라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역의 젊은이들이 새마을운동에 참여를 해서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젊은 분들, 대학생들, 이런 분들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나 아니면 새마을중앙본부나 당국에서 그런 것에 과감하게 투자를 하는 것이 새마을운동이 앞으로 더 발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새마을교육도, 제가 교육을 1975년도에 받을 때 2주간 받았습니다. 보름간 받았는데 그때 김준 원장님한테 받았습니다. 그때에는 직능 지도자들은 6일간 받고 지역 지도자들은 15일간 받았습니다. 지금은 연수원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2박 3일 또는 3박 4일 정도밖에 안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교육을 받았지만, 그 교육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적어도 한 일주일 이상 교육 계획을 세워서 완전히 새마을지도자에게 세뇌 교육이 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 저희가 보름 동안 교육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세뇌 교육이 돼서 어떻게 보면, 누가 보면 미쳤다, 저 사람 미쳤다고 느낄 정도였기 때문에 그때 그 교육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