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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와 진행했던 사업은 무엇입니까?
답. 제가 어릴 적에 고생할 때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는 원래 원주에 사는데 원주의 남산에 가면 산이 높은데 그 곳에 하수도가 내려 보내는 곳 입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피난 후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굴을 파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굴을 파고서 거기서 며칠 동안 굶거나 병에 걸려서 돌아가신 할머니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통장, 새마을 지도자, 민간구호 단체 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강점기부터 마을을 관리하던 반장들만 있었죠. 그래서 주로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 분들이셨습니다. 그 분들 장례를 치러주자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 어르신들이 참여를 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굴 속에 들어가니 시체냄새가 심하게 났습니다. 신문지를 비벼서 코를 막고 입을 막고 그 굴속에서 들어가야 하였습니다. 굴속에서 살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죽을 때 눈을 뜨고 죽습니다. 그런 일을 24번 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눈을 감기게 하고, 코와 입을 막은 다음에 그 굴의 문이 가마니인데 시체를 싼 다음에 나무못으로 박고 흙을 파서 오르락내리락하니 짚은 다 닳고 새끼줄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올라오니 반장과 저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처음에는 같이 들어가자고 말을 하더니 이제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저의 눈동자와 마주치니 저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구성원들에게 지시사항을 무조건 강요 하면 안 되는구나. 모두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지도자가 나서야 된다."라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려운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수레 꾼이 돈이 되는 사업이었습니다. 전부 연탄 지게를 지고 산꼭대기까지 배달해 주었습니다. 이런 지게꾼 중에 손자 돌보는 할머니들이나 옷이 다 헤어진 것을 입은 할머니들도 있었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산꼭대기 집들이라 앞마당이 없었죠. 길가에서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밑으로 내려가면 쳐다 보고 왜 안 줍느냐고 욕을 할 정도로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어려우신 분들을 먼저 공동 수돗가에서 밤에 전깃불을 켜고 판자에 태극기를 걸고 모두 모이라고 했더니 궁금해서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보러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왔던 사람들이 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와서 같이 애국가를 불렸더니 경건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반장이든 동장한테 사람대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집합 장소나 회의 장소에 나오라고 한 일이 없었죠. 그래서 제가 앞에 서서 애국가를 부르자고 하고 난 뒤에‘이제 나도 우리나라 하나의 국민구성원이 되었구나.’는 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마을 사람들을 많이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람에 신문지가 날아가서 밑으로 내려가면 욕을 하던 어려운 상황을 다 같이 단합을 해서 이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 4월 2일에 새마을운동이 선포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원주에 가면 6차선 도로로 된 넓은 다리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왕복 1차선밖에 안 되는 다리였죠. 그 다리 밑에 가난한 아이들, 구두닦이 하던 아이들, 소매치기하던 아이들,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 당시에 5원, 10원으로 무얼 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농업 조합 즉, 지금의 농협에다가 10원씩 내고 통장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열심히 벌어서 낭비하지 말고 여기에다가 저축해서 돈 벌어서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시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 자꾸 어려운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지들이 깡통 들고 다니면서 서로 싸움을 하는데, 좀 더 나은 깡통을 들고 가서 밥을 얻어오면 왕초 거지가 왜 내 것을 가지고 가느냐고 싸우고 그랬습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거지들이 미제 깡통이든 국산 깡통이든 그걸 가지고 싸우니깐 저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미제 깡통이든 국산 깡통이든 깡통은 똑같은데 그걸 훔쳐갔다고 때리고 싸워도 되느냐고 많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마을 운동으로 세상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원주 시장님이 찾아왔습니다. 원주 시장님께서는 강원도지사님께 만나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시장님, 통장님이 집까지 찾아오는 것이 아주 영광스럽고 우러러보았습니다. 도청을 가니 새마을 휘장을 달아주기 위해 도지사실에 과장님, 국장님들 많은 사람들이 서있고 거기서 도지사님이 새마을 마크가 있는 휘장을 달아주면서 그 동안 많은 일들을 해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시장님과 같이 단상 밑으로 내려오니까 원주 시장님이 행사할 때 마다 저를 초대해서 단상 위에서 그 동안에 제가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하니 시장님이 새마을 지도자라고 불렸습니다. 사실은 그 전까지 새마을 지도자가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시에서 회의하는 곳과 초대한 곳들을 보니 그동안 가르친 학생들,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장소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교회를 빌렸다가, 문화원을 빌렸다가 나중에 사정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면 또 다른 곳을 빌렸죠.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있지만 가난하다. 나쁜 짓만 하니까 그렇게밖에 못된다.”라고 사회에서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저녁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가족들의 눈동자를 쳐다보면 전부 눈동자가 까만 것이 당신을 닮은 것처럼 당신 다음은 가족이고 가족의 다음은 사회이다. 사돈 맺고 하는 것도 사회구성원들이다. 사회 다음은 민족 그리고 국가가 있어야 한다. 국가를 위해서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하였죠. 그렇게 애국심을 불러 넣었습니다. 즉 자기 혼자만이 잘 살려고 사리사욕 하지 말아야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힘들 때 어려움에서 구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육장 관련자께서 감동을 받아서 교육장을 초청했습니다. 교육장이 와서 애들 키울 때에는 애들을 때리지 말고 공손히 키워야 애들이 바르게 크지 자꾸 야단을 치고 때리면 도망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교육받던 어떤 여자가 후회가 된다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교육 받고 나가면 저는 43명 중 일부가 강의에 만족하고 넘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육에서 큰 성과가 있어서 금천 구청에서 6일 동안 구민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강의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이 나와서 연대 보증과 일반 보증 차이점, 공공질서에 관한 법에 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루에 전깃불이 12번씩 꺼진 때 이었습니다. 세무서장은 구민들이 세금을 잘 납부하면 당시 400만kWh 전력량을 500, 600으로 높인다고 제도화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시행하려고 하니 수행하기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문. 사업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교육할 장소가 없었던 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날에는 시장님이 자주 강의를 부탁하였습니다. 강의를 하기 전에 장소를 정해야 하는데 한 교회에 요청하니 얼마 못 가서 안 된다고 하고, 문화원을 빌리니 교회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장소가 없어서 고민을 했습니다. 혼자서 진행을 하니까 경비지원해주는 사람들도 없다 보니 어느 날 시장님이 불렀습니다. 시장님께서 교육장소를 없어 이리 저리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청 회의실에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청 회의실에서 7년 동안 했습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후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아쉬움과 그리고 그때 혼자 하니까 강의들을 촬영 했어야 됐는데, 그때는 카메라 하나 사기도 힘들었습니다. 카메라맨이라도 뒤따라 와서 강의들을 찍어두었더라면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쉽습니다. 그 후에 동지들을 모아서 회비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새마을 모자, 새마을 노트, 중앙연수원에서 만든 새마을 노래책 등과 똑같은 교재들을 만들어서 교육생들한테 나눠주고 각 계 각층, 심지어는 언론 기관에 있는 신문기자들도 초청 했고,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 513명 중 저를 총 회장으로 뽑았죠.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그 당시에는 정부 지원은 하나도 못 받았거나,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지금 같았으면 정부의 지원을 요청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요청 할 생각도 없었고 요청을 한다고 하면 보람,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저 혼자 애를 쓰면서 하니까 지역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시청에서 교육 할 때는 원주시장님께서 중심으로 원주 새마을 향토 연수원이라고 간판을 붙이고 했습니다. 동지들도 5, 6명 모였습니다. 그때 원주에 고속도로가 막 개통이 될 때였는데 한글학회 선생님을 찾으러 서울에 갔습니다. 서울대 장병림 교수, 안오상 박사님이 자주 오시는 명동 성당 앞 호텔 커피숍에 찾아가 부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는데 강사가 없다, 오셔서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공무원, 새마을중앙회 과장으로 아셨나 봅니다. 그래서 보수를 어느 정도 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물이 흘렀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훌륭하신 선생님인 줄 알고 와서 부탁하는데 섭섭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안경 너머로 유심히 살피시고 공무원이 아니냐고 물어서 새마을 지도자라고 했더니 미안하다고 하시고 한 번 강의를 해주시더니 안오상 박사, 장병림 교수, 이화대학교 박준희 교수, 중앙대학교 이재호 교수님들이 아무 보수 없이 와서 계속 해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주의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때는 교수님들이 원주에 올 일도 없거니와 얼굴이나 한번 뵈려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께서 주기적으로 오셨습니다.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아무리 보수를 안 드려도, 강의비를 안 드려도 와도 주무셔야 되니 여관비를 줘야 했습니다. 여관비를 주려 하니 저도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니 집사람에게 사정을 해서 조금씩 얻어서 쓰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점 있었지만 지금은 지나고 생각하니 보람 있었습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내가 열심히 해서 보답한다고 느끼는 것이 감사라고 생각하고요. 보람을 느낀 것은 저에게 새마을 교육을 받고 가는 5,883명의 각 계 각층의 사람들이 졸업장, 수료장에다가 액자에 넣었습니다. 그때는 한참 새마을 지도자로서 돌아다녔습니다. 향구동 산꼭대기도 가고, 청주 담배 한 보루 사서 나눠주면서 열심히 하자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가보면 수료증을 걸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국가관이 아주 확립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교육할 것이 없습니다. 그걸 볼 때 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그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효과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졸업장이 금 테두리도 안 한 그냥 종이인데 그것을 높은 데에 걸어놓고 쳐다본다는 것이 보람이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지도자로서 자랑스러운 점과 아쉬운 점은?
답. 자랑스럽다면 이 때 까지 한 것이 후회는 조금도 없고 감사하게도 원주 시민들이 잘 따라 주었습니다. 택시 기사들이 제가 서울 갔다 고속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타려면 장소를 말하지 않아도 저희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려고 하면 기사님이 돈을 사양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도 무료 봉사하는데 저도 무료 봉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보람이 있고 고마운 일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더 많은 역할을 앞으로 못한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제가 지금은 도자기 인간문화재인데 그때는 도자기 일을 15%밖에 못 하고 새마을 운동 관련 일을 85% 정도로 했습니다. 모든 시민들이 제가 도자기를 하는 줄 모르고 새마을운동의 기수인지 알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513명의 지도자들의 총 회장을 8년 동안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진행하면서도 다른 새마을 지도자들하고 잘 단합이 돼서 원주시 새마을운동이 잘 되었습니다. 어디 보다도 잘 되었습니다. 이래서 서울에 있는 교수님들도 수시로 와서 격려를 해주고 참여를 해주고 와서 강의도 무료로 해주었습니다. 수원 새마을연수원장으로 계시던 김준 원장님도 여러 번 왔습니다. 여러 번 오셔서 지도를 해주고 갔습니다. 또 곽정현 씨도 와서 지도를 해주고 하니 저로서는 뿌듯하였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새마을운동 되기 전과 지금 시대는 두세대나 지났긴 하였지만, 지금 세대 사람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웠던 시대부터 나오면서 겪으니까 그런 어려움을 눈으로 다 보고 자랐습니다. 그때는 못 살았고 먹을 것이 없고 북한보다 GNP가 훨씬 더 작았습니다. 그때 북한이 760달러인가 670달러인 걸로 알고 있지만 하지만, 우리나라는 약 40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북보다 못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죽하겠습니까. 근데 그것을 바꾸게 한 운동이 새마을운동입니다.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새마을운동을 했으니까 국민들의 문화수준도 높아지고 배움들이 있고 그래서 문화수준이 향상되니 먹고 살기도 좋아졌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새마을운동이 위축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갑자기 위축이 되어서 왕성하게 활동해야 하는데 안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새마을운동이 종사하는 분들이 전국에 수 백 만 명이나 됩니다. 지도자분들이 지금보다 열심히 하신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전진할 것입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나는 국가관을 정립시켜주는 지도자고, 제가 새마을운동 지도자라고 하기에 부끄럽고 해서 그동안 제가 새마을지도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새마을지도자 활동에 관해서 이야기는 했지만, 아직도 아쉽습니다. 그 당시에는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가 없었습니다. 산발적으로 수원연수원에 졸업생들끼리 기별로 모임만 하고 없어서 우리가 중앙본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1980년 7월 25일 수원 새마을연수원에서 저희가 임원들끼리 여러 명 모여서 간담회를 했습니다. 간담회를 해서 과정을 새마을지도자 중앙협의회를 만들어서 새마을 여성 중앙회도 만들고 공장 새마을운동중앙회하고 모두 연합한 것이 완전한 새마을지도자 중앙협의회이다. 그래서 본부를 만들자고 해서, 그 다음으로 수원 새마을연수원에서 250~260명의 전국의 각 회장들이 모였습니다. 회장 마을 각 원로급들이 모였습니다. 새마을지도자 중앙협의회를 만들자고 의결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의가 되고 조직이 되어야 하니까 8월 5일 날인가 결의가 되었고, 그 당시에는 “전국의 각 시, 군의 새마을 회장들이 조직이 되어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도 있으니까 우리가 모든 시, 군에 조직하자.” 그래서 시, 군 새마을 회장들을 뽑기 위해서 분담을 했습니다. 각 시, 군 그리고 8도의 한 두 사람씩 대표를 선출 하자고 했습니다. 전부가 우리 돈을 가지고 썼었죠. 그리고 저는 강원도 대표로 선출되니 강원도지사님을 만나뵈어서 도지사님에게 “각 시장 군수에게 연락해서 새마을 회장이 없는 곳은 새마을 회장을 만들어 달라.” 부탁해서 1980년 8월 10일부터 17일까지 강원도 내 시장 군수를 다 만났습니다. 만나서 적임자가 아닌 회장은 그때 모두 다 교체를 하고 회장들을 모두 선출하고 조직해서 8월 18일 제가 강원도 총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18일 강원도 새마을회의를 하자 제안을 해서 부회장을 한 명 더 선출 하였습니다. 18일 춘천에서 강원도 시, 군 새마을 회장들을 다 모아서 여기서 강원도 새마을 회장을 뽑고, 앞으로 중앙협의회에 가서 역할을 하라고 했습니다. 강원도 회장을 모두가 저한테 하라고 했지만 거절하였습니다. 제가 조직했기 때문에 안 되고 다른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선출되신 회장님을 데리고, 9월 11일 중앙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9월 11일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를 만들고 그 다음 날 인가 새마을중앙여성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앙협의회에 들어가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때 220명이 간담회를 할 때 전국 22명에 저도 들어가고 도에 두 명을 중앙협의회의 준비 위원으로 뽑아서 저는 강원도 준비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9월 11일 날 중앙협의회를 창립했습니다. 김준 원장님이 되고 저는 22명 중 유일한 지도자 중에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이사되신 분들이 청와대 박진원 특별보좌관님이 되었고, 또 해군 제독으로 계셨던 이맹기 대장님이 하였고, 서울시 상공회의소 회장 하셨던 정수창 씨가 본부의 이사가 되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그동안에도 새마을지도자분들께서도 열심히 종사하였다고 생각은 되지만 아쉬운 점은 아직은 조금 모자라 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훌륭하게, 좀 더 힘 있게, 더 광범위하게, 역할을 해서 새마을운동이 꾸준히 해야 됩니다. 지금도 역시 새마을운동 이외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운동이 있지만, 모두 다 정부에서는 다 지원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우리 국가를 짊어지고 나갈 운동은 새마을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 외에는 국가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몸을 내버린 운동은 제가 새마을운동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새마을운동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