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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새마을운동이 최초에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시고 바로 그해 10월부터 그 이듬해인 1971년 5월까지 이른바 335사업이라고 시멘트 335포를 33,000 마을에 주어서 자율적으로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사업을 골라 필요한 사업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때 제가 새마을운동을 하기 전에 전국 마을의 숙원사업을 들어보니까 전부가 마을의 조그마한 사업들이었습니다. 소개량이나 마을길, 빨래터 만드는 것 등의 사업을 하려면 시멘트가 필요했는데, 시멘트가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시멘트를 주어서 사업을 할 때 저는 현장에서 군수로서 사업지도도 하고 현장도 뛰어다니고 주민들과 대화도 나누고 사업이 성공하는 것도 보고 여러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무부의 1차 사업이 끝난 다음에 정부에서(내무부에서) 1971년에 새마을추진기구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1971년 8월 10일에 내무부에 새마을담당관(초기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전 고건 총리가 부국장이었습니다. 그 밑으로 3개의 과가 생겼습니다. 도시지도과(초기 도시개발과), 농촌지도과, 주택지도과 이렇게 3개의 과가 생겨 업무를 분담해서 했습니다. 도시지도과에서는 국토 가꾸기, 도시새마을운동, 소도읍가꾸기, 기타 도시와 관련된 것과 주무역할을 하고 농촌지도과는 농촌새마을운동, 주택지도과는 지붕개량 등 주택개량 하는 것을 했습니다. 특수지역도 좀 하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새마을운동을 바로 거기에서 시작해 계속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 새마을담당관으로서 새마을을 총괄하는 역할을 계속해 왔습니다. 내무부에서 기획하고 현장에서 뛰면서 새마을운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의 분위기는?
답. 분위기 전체가 새마을운동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정부 제1과제가 새마을운동이었고, 각 부처에 새마을담당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장새마을운동, 상공부, 예를 들면 공장새마을운동이 있습니다. 그다음 농림부 같은 데는 농촌과 관련되어 있고, 소득과 관련되어 있으며, 기술지도에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무부의 기타 여러 관련부처는 새마을운동일환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계획도 세웠습니다. 내무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새마을운동협의회를 만들었는데 각 부처 차관들이 구성멤버이며 이곳은 종합적인 새마을운동계획을 논의하고 매년 초창기에는 새마을운동 계획이 나옵니다. 각 부처들이 낸 계획들이 나누어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매년 말에 평가를 해서 새마을운동역사책을 만들고, 책에 나와 있듯이 같이 열심히 뛴 것입니다. 그다음 특히 고위공직자들은 5박 6일 새마을운동이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새마을지도자들에 대한 교육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새마을정신을 주입시키고 생활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 교육에는 장관까지 전부 가서 교육을 받으면 새마을운동정신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전체 분위기가 사명감을 가지고 새마을운동을 같이 한 것입니다.

문. 도시새마을운동 시작을 위한 준비는 잘 되어있었나요?
답.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도시고 농촌이고 우리나라에 아무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도 지혜로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당시 농촌새마을운동이 불기 시작했는데 도시까지는 첫해 335사업은 들어가지 않았고 농촌 중심이었는데 335사업이 끝나고 도시도 불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시는 어떠냐면 잘 아시지만 60~70년대에 이농현상이 심할 때 농촌이 살기 어려우니까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겁니다.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도시에서는 인구를 수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주택도 없고 환경도 안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도시가 더 살기 어렵게 되고 여러 가지 도시병폐현상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조리가 생기고 도시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시는 도시 배후지역인 농촌의 중심지였습니다. 시민들의 의식구조나 행태 이것은 주변에 영향을 줍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도시에서 하는 것이 농촌으로 파급되는 겁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가 굉장히 중요한 기능을 해야 하는데 이런 여러 가지 도시병폐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건강한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하지는 못 했습니다. 그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분 것이고 우리도 해야된다라고 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범국민운동이다, 도시민도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1972년도에 내무부에서(당시 제가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과장) 도시새마을운동계획을 세우고 각 시도에 지시를 해야 하는데 도시는 농촌하고 구조자체가 다릅니다. 농촌은 단순하게 같은 형태로 되어있어 마을과 농기를 중심으로 한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도시는 지역적으로 다릅니다. 중심가가 있고 변두리가 있고 아파트지구도 있고 상가도 있듯이 각각 다르고, 또 하나는 기능단체들이 많습니다. 공동단체, 학교, 공장, 기타 기업체들 여러 가지 형태들이 있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 주체가 다양합니다. 특히 도시에 지역새마을운동, 뒷골목새마을운동이나 기타 여러 가지 역할 퇴폐운동을 하는데 있어 여성 새마을지도자역할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새마을운동은 공통적으로 시행할 사업대상도 있지만 지역에 따라 해야 할 것도 다르고 직무에 따라서도 각각 다 다르며 다양해서 어려운겁니다. 농촌새마을운동은 가시적인 물량사업이 많은데 도시에서는 정신적인 것, 일상적으로 지켜야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새마을운동과 달리 다양한 구성을 해야 합니다. 주체에 따라, 대상지에 따라서 실천사항들을 중앙에서는 예시를 해줍니다. 절대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방법만 제시를 해줍니다. 시달을 하면 시에서 다시 지역에 맞게 계획을 세우고 새마을지도자들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실천사항을 정해서 할 수 있도록 해서 추진해 온 것입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도시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도시새마을운동은 제가 말씀드렸듯이 지역단위로 하는 지역새마을운동, 직능단위로 하는 직능단위새마을운동 이 두 가지로 크게 분류를 합니다. 지역단위 새마을운동은 변두리나 시가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것은 기초환경정비가 있습니다. 내 주변을 깨끗하게 하기, 골목 가꾸기, 하천치우고 가꾸기, 내 집 환경 가꾸기 등 이런 생활환경과 관련된 것으로 기초생활환경을 가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푸른도시가꾸기입니다.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나무심고, 화단 만들고 행정시책으로는 원인자녹화라는 게 있는데 흙이 들어가면 허문사람이 그곳을 푸르게 가꾸도록 의무화하는 제도입니다. 또 녹색카드라는 제도도 시행을 했는데 그것은 빈자리 공간에 나무를 심도록 권유하는 통보를 녹색카드로 합니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주민들이 권역을 정해서 가꾸고 책임지고 평상시에 관리해 주고 하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민윤리확립입니다. 말하자면 질서 지키기, 퇴폐풍속, 도박 없애기, 화투짝 없애기, 저도 공무원을 하면서 스트레스해소로 잠깐 시간이 나면 식당에서 화투친 적이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화투짝에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특히 화투를 하다가 도를 넘으면 도박이 되고 가정파탄이 오는데, 농촌이나 도시에서도 그러다가 새마을운동으로 인해서 도박도 적어지고 하니까 부녀자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도시새마을운동에서는 부녀새마을지도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능새마을운동은 주체가 여러 가지로 다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자율적으로 하되 바로 직장단위로 화목하면서 일과 생산을 할 수 있는 분위기조성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공장이 있으면 내부도 깨끗이 하고 노사협조도 하고, 생산성 향상을 위해 팀을 이루어 평가도 하면서 생산도 늘리면서 분위기조성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직능새마을운동이 선도적인 새마을운동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말하자면 농촌새마을운동도 돕고 지역새마을운동을 할 때 인력도 지원하고 자재지원도 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새마을운동의 특징이 중앙에서는 지침이 나갑니다. 대개 예시를 주면 골라서 지역 실정에 맞게 하는 것이고 또 시․도에 가면 새마을 과에서 조정하고, 마을 일선 새마을지도자에게 가면 지역에 맞춰서 하는데, 다만, 초창기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실정에 안 맞는 것은 수정하도록 하고 그리고 또, 예를 들면 도시새마을운동인 경우 나무 심는 게 있는데 요즘 길가에 작은 나무를 쭉 심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수벽이라고 합니다. 수벽은 위치선정을 잘해야 합니다. 수벽은 새마을운동 초창기에 시작한 것으로 위치선정을 잘못해서 교통장애가 된다든지 하는 사례들도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또 경험을 통해서 시정도 하고 해 나갔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첫째 업무량과다입니다. 새로운 것을 했기 때문에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떤 틀에 있어서 한다고 하면 궤도를 달리듯이 그대로 해 버리면 되는데 기획하는 사람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정해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서 업무량이 엄청 많았습니다. 특히 내무부에 새마을 3과가 있었는데 밤낮없이 뛰었고 앉아있을 수도 없이 현장에 나가 보고, 확인도 하고, 잘못된 게 있으면 지도하고 했습니다. 물론 시․군․읍․면에서도 하지만 중앙에서 직접 현장을 많이 다녔습니다. 예를 들면 내무부장관도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대화도 나누고 격려도 해 주고 하였는데, 업무량 과다가 제일 힘이 들었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했습니다. 내가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고 업무는 많지만 재미를 느끼고 일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공무원들이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새마을지도자들은 마을에서는 더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문. 국토 가꾸기는 어떤 활동인가요.
답. 아름답고 쾌적한 국토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60~70년 때 우리나라가 돈이 없으니까 길을 뚫어놓으면 언덕손질을 해야 하는데 초창기에는 고속도로도 언덕손질이 안되었습니다. 모든 국도나 지방 도로들이 언덕은 파헤쳐 진대로 놔두고 길만 가운데 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측구, 하수구는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하천도 정비가 안 되고 관광지도 무질서해 쾌적하지 못한 환경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환경을 쾌적한 환경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농촌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기 시작했고 박정희 대통령께서‘국토는 우리 선대들이 묻혀있고, 또 우리들이 묻혀야 할 땅이고, 우리 후배들이 살아야 할 보금자리이다. 그러니 잘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1972년도에 제가 담당하던 과에서 국토 가꾸기 지침을 만든 것입니다. 솔직히 국토 가꾸기 지침 만들었지만 이것도 무에서 유를 만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법이 각각 다른데, 도로에 공법을 어떻게 어떤 상황으로 할 것이냐, 무엇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를 골라서 해야 했습니다. 마침 선진지 시찰에 의해서 일본, 대만, 홍콩 등을 보고 슬라이드 자료를 만들어서 교육도 시키고 했습니다. 이런 대상지를 골라서 해야 되는데 그 사업내용은 도로변하고(주로 국도변 가꾸기), 관광지 가꾸기, 소하천 가꾸기 등 이였는데 가꾸기 대상들을 놓고 사업추진을 하되 대한민국이 방대하니까 한 번에 할 수 없어서 3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단계는 수도인 서울에서 도청소재지까지 7개 노선의 국도(약 1,053Km)를 1단계로 시작을 했습니다. 2단계는 도청소재지에서 군청소재지, 3단계는 군청소재지에서 읍면소재지로 해서 778개 노선을 계획했습니다. 1단계 계획을 추진을 할 때는 교재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했기 때문에 지침을 만들고 교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 경춘가도(서울에서 춘천까지의 거리)에 교육장을 만들어 먼저 주도를 해서 경관조성을 시작했습니다. 그 지역이 하천도 있고 관광지도 좋은 곳이 많고 절개지도 많아서 최적지라 생각했고, 빛고개, 마치고개, 여러 가지 형태의 공법을 넣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꾼 것입니다. 그래서 교재를 만들어 새마을지도자, 일선 공무원들, 시도시군관계자들을 현장교육을 시켰고, 자기 지역의 국토 가꾸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하다보니까 여러 가지 공법을 골라서 해야 하는데 놀란 것은 공법에 이름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무부에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를 들면 언덕 손질하는데 아주 급경사가 있을 때 돌도 박고해서 옆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철근 놓고 시멘트로 바르는 게 있는데, 이름이 없어서 심줄박기로 이름까지 새로이 만들어 가면서 공법내용을 만들어 갔습니다. 다만, 바꿀 때 기본철학이 현장자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돌, 모래, 자갈을 써서 지역에 맞게 지역향토색이 날 수 있도록 했고, 시멘트는 겉에 함부로 바르지 못하게 했고, 꼭 발라야 했다면 뒤에 보이지 않게 바르도록 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친환경정비를 한 것입니다. 나무 하나를 심을 때도 정성들여 심고 대화하는 자세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돌, 모래, 자갈 해서 돌모자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교육을 시켜서 각 지역에 하도록 했는데 점검하면서 놀란 것은 국도를 내려가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변해 버린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조직의 힘과 국민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과 우리 국민에게 무한한 힘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국토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뒤로는 도로 만들기를 할 때는 절개지를 설계에 넣어서 한꺼번에 하고 있는데, 그래서 국토 가꾸기로 나라사랑, 땅사랑, 푸른나라만들기, 이런 사상을 바로 고취시켜 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소도읍 가꾸기는 어떤 활동인가요.
답. 소도읍은 우리 내무부에서 만든 말입니다. 교과서나 외국에도 없는 말이었는데 그때 모든 것을 무에서 출발한 겁니다. 모든 것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소도읍이라는 것은 법정도시, 인구 5만 되는 시가 있고, 농촌이 있는데 그 중간에 낀 것입니다. 읍․면 소재지 인구는 많고 취락지가 농촌과 달리 구성되어 있는데 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중간 형태입니다. 농촌은 새마을운동을 했고 도시는 도시대로 계획가지고 가꾸어나갔는데, 소도읍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소도읍이 읍이다 그러면 군의 중심지인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고 거기가 전부 연결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배후지역인 농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쾌적한 환경으로 만들어 줘야 하고 문화 환경까지 우리가 곁들여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소도읍가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도 1972년도에 계획을 세우고 시달을 하되 수가 많기 때문에 한 번에 할 수 없어서 국토가꾸기 식으로 3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수도권에서 도청소재지까지의 읍면소재지와 이에 준하는 취락지역(약 108개)을 1단계로 시작하고, 2단계는 도청소재지에서 군청소재지까지, 3단계는 군청소재지에서 읍면소재지 안에 있는 대 취락지역을 소도읍가꾸기로 했습니다. 주로 생활환경개선을 목적으로 하였고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새마을 가꾸기로 할 것은 하고, 또 기술지도해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도시새마을운동과 마찬가지로 질서유지운동 등을 전개하는 소도읍가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소도읍기능화라고해서 시책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도읍이 매우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소도읍이 더욱 중시하는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는 농촌이농이 많기 때문에 농촌에 정주하도록 만드는 것을 무엇으로 할 거냐, 소도읍이 제대로 기능을 해 줘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안 떠나고 그 배후지역들인 농촌지역까지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지방인구정주시책의 하나도 되는데 요즘은 교통이 워낙 편리해서 일일생활권이 되고 도시로 몰리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만, 정주시책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큰 정책적인 의미를 담고 시작했고, 지금도 소도읍기능화시책으로 사업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문. 새로운 정책들이 지방까지 전달이 잘 되었나요?
답. 아주 잘 되었습니다. 내무부에 새마을담당관이 있었고 도에 새마을과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군에는 새마을운동을 담당을 하기 위해서 부군수를 두었습니다. 지금은 부군수가 일반 업무를 다 다루지만, 당시에는 새마을운동을 담당하기 위해서 부군수(새마을담당 비서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과가 있었고 읍면에 가면 새마을담당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시책이 위에서부터 내려가면 그곳에서 조정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읍․면까지 그대로 내려갑니다. 읍․면까지 시책이 내려오면 교육받은 새마을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에 시달이 제대로 되고 소화도 잘했습니다. 그리고 관계관들이 일선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역할을 하고, 현장을 뛰고 하기 때문에 현장과 조절해 가면서 잘 전달되었습니다.

문. 정부의 정치권들을 주민들은 잘 따라왔을까요?
답. 대체로 잘 따라왔습니다. 새마을운동 초창기에 할 때는 성공사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 분들이 있겠지만, 정부의 자재지원, 기술지도는 정부의 하나의 지원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새마을지도자를 뽑아서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사업을 선정하고 공동으로 추진을 했습니다. 농촌새마을운동할 때 기초 ․ 자조 ․ 자립마을 이렇게 3가지로 구분하여 잘한 곳은 지원을 더 해주었습니다. 잘한 곳에 시멘트 500포 지원을 하다보니까 경쟁적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달이 잘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공직에 계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답. 저는 새마을담당관을 하고 바로 광주 시장 선거에 나갔고, 시작부터 새마을이 몸에 베인 사람으로 도시새마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시새마을운동은 어렵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었고, 손쉬운 주변 일부터, 작은 일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체질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담배꽁초 버리지 않기, 휴지 버리지 않기, 교통질서 지키기 등을 하라고 했는데 한번 하고 끝나면 안 되기 때문에 체질화를 시켰습니다. 쉬운 일 플러스 체질화라는 것이 도시새마을운동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딱 3가지 만 골랐는데 첫째, 깨끗한 도시 만들기입니다. 그때 당시 도시가 지저분한 곳이 참 많았습니다. 다음 두 번째로 질서 있는 도시 만들기, 마지막으로 푸른도시만들기입니다. 이 3가지만 역점을 두고 하되, 특히 깨끗한 도시를 만든 것이 제일이었습니다. 외부 사람들과 외국 사람들도 들려보는데 그 사람들 보는 눈이 우리나라 수준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먼저 깨끗해야 됩니다. 그래서 58개동 동장들한테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동 실무일은 사무장(실무관)이 일을 다 하는 시절이기 때문에 동장들에게는 깨끗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청소 잘하는 것만 맡도록 해서 월별로 평가를 해 등위를 매겼습니다. 물론 새마을지도자들이 고생 많이 했지만, 그렇게 하다보니까 거리가 변화하고 정말 깨끗해 졌습니다. 다만, 아침 6시가 되면 온 시가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특히 시장관사 쪽에 마이크를 더 트는 겁니다. ‘우리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하면서 보라 이겁니다. 어떤 때는 아침에 항의도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교 교사라고 얘기하면서“잠을 자려고 하는데 새마을운동을 아침 6시부터 트냐, 끌 수 없냐”고 저한테 전화가 와서 제가 그분께 “학교 선생님이면 더군다나 자발적으로 내 집 앞 청소를 해야 될 것 아니냐,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안하는 분이 계시니까 노래를 트는 것 아니냐, 솔선수범해 주십시오” 했더니 “알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일선에서 일하면서 이 일이 항상 머리에 남습니다. 다음에 충청북도 부지사를 할 때는 정종택 지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도 청와대에서 새마을담당관도 하시고 새마을운동이 몸에 베인 분입니다. 여름에 점심시간만 끝나면 몇몇 공무원들을 데리고 시가지로 나가 어깨띠를 메고 집게와 봉투를 가지고 휴지나 담배꽁초를 말없이 주었습니다. 그것을 매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새마을지도자들을 뿐만 아니라 고급공무원들의 열성이 시범을 보여서 새마을의 기초가 닦아졌다고 생각을 하고, 충청북도만 얘기하면 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수안보 같은 관광지는 아무리 청소도 좋지만 아침부터 새마을노래를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것을 맞춰가면서 초창기 새마을운동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새마을운동 노래도 없으니까 새마을운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노래라도 나와야 새마을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 텐데, 지금 새마을기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있습니다.

문. 의정활동을 하면서 하셨던 새마을운동은?
답. 저는 문자 그대로 새마을 맨(Man) 입니다. 모든 게 새마을운동으로만 해 왔기 때문에 새마을 생각만 하면 옛날 생각이 나서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제가 국회의원을 15대 때 했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변화가 많이 됐고, 주변 변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변화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조금 색다르게 보는 분들, 정치색깔로 보는 분들, 물론 과거에 그런 오해도 없지 않아있었지만 그런 과오를 일으킬 만한 일은 조금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니고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 이름을 바꾸고 정신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새마을운동과 근면 ․ 자조 ․ 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절대적이고 영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마을운동이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고, 우리나라의 브랜드입니다. 제가 국회 내무위원회하고 예결위원회를 4년간 하면서 새마을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안 된다며 새마을의 정신과 새마을이란 이름, 이 두 가지만은 변경할 수 없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었습니다. 그다음 예산문제인데, 새마을중앙본부의 예산은 원래 정액보조를 해 주었습니다. 예산에 넣어 누가 손대지 못하게 해서 국회의 의결을 갔는데 중간에 변동이 되었습니다. 행자부에서 사회단체에 대한 예산을 총괄확보를 했는데 요즘 사회단체 엄청 생겼습니다. 모든 단체들이 1년 할 사업계획을 내라고 해서 사업단위 심사해서 포괄적으로 배정을 해 줍니다. 새마을중앙본부도 사회단체와 똑같이 동격으로 들어있습니다. 저는 그게 안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정액보조로 해왔는데 다른 곳과 비교하지 말고 예산도 깎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새마을관계자로서 역할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두 가지 점에 역점을 두고 저는 활동을 했습니다.

문. 다른 국회의원들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반응은?
답. 정치성향에 따라서 새마을운동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물론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본질은 알지만 외형적으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의원도 있고, 즉 정치적인 시각입니다. 그리고 다소 무관심한 분도 있었고, 반면에 아주 열성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저와 같이 동조한 분도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의원들의 숫자가 많았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열심히 뛰었다는 겁니다. 초창기에 업무량이 너무 많았는데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막혀있는 갱도를 뚫고 나가는 느낌, 갱도를 뚫으려면 정말 힘이 드는데 그런 것처럼 정말 열심히 뛰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현장 가서 보면 눈에 띕니다. 농촌과 도시가 달라지고 국도변 1차 사업할 때 현장을 보고 달라진 도로의 모습에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때 느끼는 감격, 이게 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기반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이 정도 되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문. 새마을운동하면서 아쉬운 점은?
답. 새마을운동을 하면서는 아쉬운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속되어야할 새마을운동이 지속되지 않는 것, 체질화 되어야 할 것이 안되는 게 아쉽습니다. 예를 들면 싱가포르 같은 곳은 담배꽁초 버리지 말기, 침 뱉지 말기 등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생활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새마을운동 선에서 벗어나서 너무 자율적으로 풀어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요즘 새마을운동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노래도 들리지 않고 하니까 국민들이 볼 때는 새마을운동이 없어진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경향이 있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기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어느 시점부터 새마을기구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부에서 무관심한 것입니다. 새마을중앙회에 넘겨 놓고 물론 80년대 초부터 중앙회가 생겨서 업무이양이 되고 민간주도로 중심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정부에서 할 역할도 있을 것인데, 전부 기구가 없어졌습니다. 지금 현재 도 기구는 경상북도만 과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담당과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과 정부정책이 연계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고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애로사항이 있으면 해결하고, 또 연구도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점이 아쉽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답. 공무원으로서는 사명감, 변화하는 모습, 너무 못사니까 잘살아보자, 우리가 새마을노래를 들으면 흥이 났고 특히 전석환 님이 작사 ․ 작곡한 ‘잘살아보세’ 노래를 들으면 정말 우리가 못사니까 울컥할 때가 있었고, 그 감정을 느끼면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일반새마을운동을 신나게 만든 것으로 첫째, 자재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시멘트를 335포대를 주었지만 단순한 물질적인 이상의 정신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시멘트를 줘서 마을사람들이 지도자를 선정해서 힘을 합해 공동의 입장에서 사업을 선정하고 그리고 사업비 필요하면 자기 힘을 보태고, 또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제대군이 없는 기술을 보태고, 외지에 나간 출항인들이 고향에서 무엇인가를 한다고 하니까 뭔가를 보태고 해서 자기들 힘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 자재지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물을 끌어올리듯 유수의 효과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새마을노래와 잘살아보세의 노래입니다. 노래가 분위기를 돋워 주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겁니다. 같이 하고 싶어 하고 굉장히 심리적으로 해야 된다는 활동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도자와 지도자교육을 통해 성공사례발표도 하고 전국대회도 하는 것들을 신나게 만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 초기에 국민들의 신뢰는?
답. 신뢰가 대단했습니다.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직선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환경과 내 주변부터 끌어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신뢰가 대단했고 전체가 새마을분위기였습니다. 그 분위기속에서 다소 이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물 결속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말하자면 새마을 홍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의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반대하고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었나요?
답. 정치적인 시각으로 본질을 알면서 반대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는데 주로 이해관계, 새마을운동 자체의 반대가 아니라 개별사업에 이의를 내거나 반대를 하는 것은 지역에서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을 안길을 낸다고 하는데 담을 잃고 내 마당이 들어가면 반대를 합니다. 이럴 경우 실 예로 1차적으로 새마을지도자선에서 안 될 경우 2차적으로 행정기관에서 군수가 나서서“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손해가 가며 행정기관에서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하고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판적인 경우인데, 재미교포이고 순교자로 유명한 김은국(리처드 김) 작가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에게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줬더니 하시는 말씀이 농로내고 좁은 길 넓힌 것에 대해서“왜 길을 넓히냐, 그대로 놔둬야지, 농촌의 정서가 어린 것 아니냐, 얼마나 아름다운 정취가 넘치느냐 왜 없애느냐”라는 말을 해서 제가“외지에서 와 한번 돌아다니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새마을운동은 생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지게를 없애고 리어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항상 농촌사람들은 남에게 보기 위해서 길을 넓히지 못하게 어려운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없애는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라고 했더니 알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외부의 간단한 착각은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설명을 해 줍니다. 정치적인 색깔로 반대하는 사람한테는 말로 이해를 시킬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해를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생활과 생각하는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주로 하는 근면절약, 화투버리는 것, 밖에서 질서 지키기 이런 것들이 전부 달라지고 물량적으로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기본적인 것은 생각도 달라지고 행동하는 자세도 달라지고 주변도 달라졌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이게 기초가 된 겁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저는 그것이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문. 지금까지의 새마을운동을 평가한다면?
답. 새마을운동을 역사적으로 평가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고 해서 평가할 수 없는 게 아니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40년을 해 왔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 브랜드이기 때문에 평가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초(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 두 기축이 우리나라를 1960년 초 83불에서 2만 불시대로 만든 것이고, 산업화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 외에 민주화 꽃이 피게 만들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게 만드는 기축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 두 가지가 바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만들고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경제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새마을운동도 정신적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물량적인 지원은 적어졌지만 정신적인 실천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불우이웃도 돕고 어려운 사람 서로 힘을 합해 밀어주는 게 전부 초창기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요즘 기부문화가 있는데, 이것도 기본적으로 정신은 새마을운동정신입니다. 모든 것을 기초적으로 놓고 보면 조그맣게 한 개부터 시작해서 더 커져가는 것인데 바로 새마을운동이 기초에 깔려있다는 얘깁니다. 제가 볼 때 이런 것을 찾아서 지속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할일도 많고 그리고 능히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미래는?
답. 새마을운동 초기에도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왔었습니다. 동남아 같은 곳에서도 배워가고 교육도 받아갔는데 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맞지 않아 차질이 있기도 했었습니다. 외국에서 배워가는 것은 지금의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70년대 초창기의 새마을운동의 기본과 방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대상은 그 나라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적용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의 새마을운동은 세계화로 올라가려는 단계에 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개발도상국의 개발모델로 새마을운동을 70년대에 인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UN에서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 개발하고 발전시키는데 새마을모델을 이입시켜야 되겠다고 하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남아 및 중국도 마찬가지로 교육도 받고 자재지원도 해 주면서 새마을세계화가 확대되고 넓혀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모국은 어디냐, 대한민국입니다. 새마을운동 세계화의 종주국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육을 해야 하고 각 나라의 유형에 알맞게 피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재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 각 나라에 가서 활동할 요원육성양성, 들어보면 새마을교육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 일부 자발적으로 해서 조금 어긋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리는데(중국 같은 곳) 그런 사례가 없도록 요원을 양성해서 활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또 지원관계의 주체가 다양한데 이것도 하나의 중심축이 있어야 되고, 조정도 같이 하는 곳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 중앙회의 역할이 크겠지만, 정부에서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미래에 더 뻗어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의 뿌리가 40년 내렸고 대상은 여러 가지로 달라졌지만 시대에 따라서 대상을 선택할 것이 있고, 정부정책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정부와 연계되어 사업을 추진하고 기본적으로 할 것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 질서, 행동으로 해야 될 것을 해야 되는데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찾아서 하도록 만드는 것, 물론 옛날과 달라서 분위기가 문제인데, 이렇게 된다고 하면 미래는 지속적으로 새마을운동이 가는 것이고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영구적인 국민적인 운동이고 잘살기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새마을운동은 기본적으로‘우리나라에서 창조된 잘살기 모델이다’이렇게 국민들이 생각하고 우리 것을 더 발전시키고 세계화 시키는데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지만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고 무엇인가를 알고 실천도 같이 해보고 또 하도록 만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은 인식을 못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어떤 젊은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새마을 모자를 쓰고 다녀서 새마을운동에 관심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새마을모자 쓰고 다닌 것 하나가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이것을 작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파급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큰 것도 봐야 하지만 작은 것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제 여기자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새마을이야기가 나와서“교과서에서 나왔나요? 그것을 배웠나요?”라는 말을 했더니“아. 배웠습니다.”하고 말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정치적 중립으로 정치적 때가 묻으면 절대로 안 되고 정치적 중립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나가야됩니다. 새마을운동에 많이 참여하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에 맞는, 그 당시 만든 운동 중에 녹색운동이 있는데 이 운동이 정부시책이고 우주환경문제와도 관련되었습니다. 저는 새마을운동으로 채택해서 하는 것은 시의 적절하다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시대에 맞게 정부와 관련된 사업들을 선정해서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기본적인 것, 기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량적인 것은 변하지만 기본적인 정신과 실천적인 것은 변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실천하도록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