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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제가 실질적으로 새마을지도자에 참여한 것은 군 제대를 하고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아까 얘기했듯이 박정희 대통령 생가 주변에 나무도 심고 그런 일을 했었는데 그러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제가 살던 정든 집을 잃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노부모님이 다 계셨었는데 갈 곳이 없어서 찾아올라 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제가 전부터 생각하기를 새마을 운동은 첫째로 잘살기 운동입니다. 근면, 자족 잘살기 운동인데 저도 그 당시 생활이 너무나 어려웠고 또 전깃불 하나 없는 이곳에 올라와 정착하려니 너무 막막했습니다. 여기서 헤쳐나갈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면서 전기도 들여야 하고 다닐 수 있는 길도 없으니 길도 넓히기 위해서 제가 의지를 가졌습니다. 저는 당시 사곡동 7통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됐는데, 그때 주민총회에서 선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어떻게 보면 남보다 리드할 수 있도록 앞장섰기 때문에 지도자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것이 7통 새마을지도자였고 1980년도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제가 이 지역에 오니까 이 마을의 분위기는 1970년도 공업 단지 조성 시에 이주민들이 골짜기 전체에 숨어 살았다고 할 정도로 아주 힘든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전기도 넣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제가 그때부터 시작했더니 주민들도 우리는 지도자를 잘 만났다고 하며 저를 따라 주었는데, 그만큼 제가 노력을 많이 한 것입니다. 노력하다 보니 모두 다 스스로같이 하게 되고 그래서 그때는 신바람 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우선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 있고 저희가 필요한 것을 하는 것이 새마을 사업인 것입니다. 비가 오면 어린 학생들이 등교할 길이 없어서 업어서 건너가야 할 정도였는데 이런 거부터 먼저 하나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민총회를 거치고 설득을 하니 모두 다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것이 제일 1차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고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 저는 늘 평소에 뭘 해야 한다 생각하면 그와 관련하여 필요한 곳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때 마침 구미 공단 공업 단지 뒤에 800mm 흄관 한 개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옮겨서 여기에다 다리를 놓으면 딱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민총회를 해서 전부 어느 날 몇 시에 가자고 약속을 하고, 그것도 일요일에 틈을 내야만 차량도 많이 안 다니기 때문에 일요일에 남자 주민분들 20명 정도 모시고 갔습니다. 그때는 길도 없으니 무엇으로 가느냐 하면 소가 끄는, 우리 경상도 말로 소구루마(‘수레’의 잘못).를 가지고 갔는데 소는 못 가니 저희가 손수 끌고 가서 지렛대를 가지고가서 그 무거운 흄관을 거기에 옮겨 싣느라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남자들 한 20명이니까 그 정도 할 수 있는 능력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거기다 실어서 밀고 당기며 손수 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와서도 포장도 되지 않은 그 철로를 따라서 길도 아닌 그 험난한 데를 밀고 당기며 그것을 해놓고 나니까 그때부터 주민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주민들 뭐든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춘 듯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똑바른 길도 있고 굽은 길도 있으니 흉관을 한 개 놓아가지고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선로반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 다리를 놓는데 자제가 부족하니 철도침목 10개만 빌려주시라.’ 하니까 가져가서 쓰라며 10개를 주셨습니다. 그것도 손수 우리 주민들이 리어카가지고 가서 끌고 와서 10개를 놓고 나니까 차가 다닐 수 있는 교량을 가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주민들이 정말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따라왔습니다. 그때부터 신바람 나서 시작을 하게 된 것이 하나의 사업이고 첫 원점입니다. 얘기했듯이 이런 일을 하므로 인해 사람들에게 많은 인내심과 확고한 의지를 심어주니까 스스로 자기들이 뭐든지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또 저희가 살아가는데 어려운 것이 전깃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호롱불을 켜놓고 사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이번에는 우리가 전기자가발전기를 구입하기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저희 자체적으로는 돈이 없으니까 모금 운동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주민들을 설득시켜서 모았습니다.
집집마다 돌면서 쌀도 걷고 돈 있는 집에서는 돈도 넣고 하는 그런 모금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한 일주일 했더니 당시가 1978년도였는데 저희가 백미 쌀을 두 가마 정도 모았고, 현찰이 150만 원 정도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큰돈이었습니다. 매우 좋아서 이 돈을 가지고 전기 발전기를 사서 전기를 놓자고 회의를 했습니다. 주민들하고 흥에 겨워 그 다음 날 쌀을 팔고 하여 돈을 모으니 한 250만 원 정도 됐던 것으로 압니다. 그 돈을 가지고 대구 교동시장의 전구, 전기제품 파는 곳을 가서 물으니 발전기 한 대가 30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했습니다. 돈이 모자라니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래서 올라와서 다시 주민 총회를 하여 우리가 자가 발전기는 이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이 모은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 당시 자동차 배터리를 하나씩 새것을 사면 집집마다 15축짜리 쪼그만 전구를 켤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것으로 전깃불을 켜니까 얼마나 좋은지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리고 쪼그마한 15인치 흑백 TV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민들이 대단한 협동심에 놀랐고, 좋아했고, 신바람 났습니다. 탱크가 있다고 해도 밀고 나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신바람 나서 일을 했고 그러니 그때부터는 주민들도 단합이 정말 잘 됐습니다.

문. 사업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첫 번째 가장 어려웠던 것은 주민들은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있었지만 작은 일을 하려해도 경제적인 문제가 뒤따랐습니다. 돈을 투자하거나, 빌려줄 사람이 없어서 아까 얘기 했듯이 돈을 모금으로 모은다든지 하여 해결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동네 올라오는 데 길이 너무나 나빴던 것입니다. 전부 다 철도 변 따라, 농로 길 따라왔어야 했는데 마음 놓고 차라도 다니려고 도로를 포장하고 길을 넓히려고 해도 돈, 예산이 없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우리나라 아시안 게임을 할 적에 정부에서 경부선 철도변의 차폐식수(가림나무심기) 사업 같은 것을 해서 외국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는 이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도 행정을 위해서 환경 개선 사업에 목적을 두고, 보기 좋지 않은 것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되니 취락 구조개선 사업을 하여 주택을 바꾸고 마을환경 개선 사업을 하자며 시작했던 것이 정말 성공한 하나의 사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인력으로 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고 사람들이 따라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다 보면 대가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고 환경 개선 사업을 시작하면 행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행정적인 도움을 꼭 받아야 되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상병으로 군 제대를 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예비군 소대장까지 했습니다. 소대장을 하면서 그때부터 동네 활동이나 이런 데에 참여를 많이 하고 행정적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인맥을 갖췄던 것이 제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사업할 때에도 누구보다도 먼저 도와줬습니다. 행정이 갖춰져야만 뭐든지 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동사무소, 구미시청, 경상북도 도청 이런 곳에서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까이서 도와주고 했던 사람들이 있어서 힘을 많이 얻은 것입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크게 실패했던 적은 없고 그 뒤로도 제가 살아오면서 남보다 앞섰고 스스로 노력했던 대가인지 모르지만, 행정적으로도 도와줬고 주민 자체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는 데는 큰 어려움 없이 오늘까지 무사히 온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크게 아쉬웠다기보다는 이곳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었습니다. 또 제가 여기 와서 고생한 만큼 희망 사항 하나는 전깃불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전깃불만 들어온다면 마음대로 문화 혜택을 볼 수 있으니 그게 이곳에서는 가장 큰 사업이었습니다. 또 지하수 사업을 하고 나니 상당한 보람을 느꼈고 그 뒤에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다보니 정말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보다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큰 것을 바라기 위해서는 우리의 위치도 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큰 곳에서보다는 작은 데에서부터 차츰차츰 우리 노력의 대가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지고, 또 주민 협동에 의해서 소득을 높이는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정신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에만 집중하고 도시는 아예 생각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사업을 그렇게 하고 나니 어떤 친구는 ‘야 그 동네 양자 간다.’고 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동으로 구미시청 같은 데서도 행정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돈이면 돈, 물질적으로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그런 많은 사람들 도움 속에서, 오늘까지도 새마을지도자를 해왔고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답. 제가 이렇게 새마을지도자로서 오늘 이 시간까지, 이런 대화까지 하면서 새마을에 남을 수 있다는 이 자체 하나만으로 보람 있고 감격하고 만족스럽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깊고 많은 숙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보람 있었던 것은 저는 대학교 문턱에도 들어가 보지도 못한 사람이지만 지도자를 하면서 구미시장, 구미시 회장, 경상북도 협의회장, 중앙 이사까지 근 30년의 세월을 그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대 마침 또 경운대학교라는 구미의 대학교에서 지금 새마을 아카데미 연구소 원장 하는 최진곤씨와 인연이 됐습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요즘 우리 대학교에서 도에서 지원을 받아서 외국인새마을운동 교육을 한다. 그런데 자네가 새마을을 35년 동안 했으니까 나와서 좋은 사례든지 이런 걸 해줄 수 있지 않겠나.’고 하여 마침내 제가 승낙을 하고 ‘좋다. 그러면 가보자.’고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아직도, 아무리 더워도 더운 새마을 복이 정말 좋아서 입고 다닙니다. 그 강단에 설 때에도 항상 새마을 모자를 쓰고 강단에 서니까 외국인들이 보는 시야, 선입관부터가 달라집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대한민국에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와서는 유명한 교수들은 글로서 표현만 할 줄 알지만, 진실한 지도자를 만난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며 정말 감사하다고 합니다. 강의가 끝나면 제가 사진 모델입니다. 수업 끝나면 전부 사진 찍고 악수하고 아쉬움을 표하고 자기들이 정성껏 그 나라에서 가져온 선물까지 줍니다. 제 생활이 어떨 때는 고통스럽고 힘들 때도 있지만 이렇게 보람 있는 생활을 하니까 그 강의만 갔다 오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과연 우리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가 외국 사람들 앞에서 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고 이런 감명 깊은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삽니다.

문. 지도자로서 자랑스러운 점과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장점을 말한다면 저는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 전체의 전직 시도 회장단들과 인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든지 제가 스스로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살 길이고 새마을운동이 나의 몸에 맞는 하나의 정신적인 종교요, 내 마음가짐이다 싶습니다. 이 길을 끝까지 간 것이 오늘날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저를 버리지 않고 전화만 한 통 해도 ‘회장님 잘 계십니까?’ 이렇게 반가워합니다. 이렇게 전부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새마을운동을 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제 스스로가 행동과 실천으로 했습니다.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딜 가나 그렇지만 전직과 현직, 이 새마을 가족은 떠나면 남입니다. 근 30년 동안 어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일했던 사람들이 보통 읍면동부터 중앙회장까지 하려면, 아마도 저 같은 경우 아파트 한 채 살 돈은 썼을 겁니다. 제가 스스로 국가나 사회에서 이 새마을지도자, 동 회장 하는데 돈 주는 사람 없잖습니까? 그래서 국비를 받아서, 시 이런 데서는 국비도 못 받지만, 시장, 군수들이 조금씩 사업비 주는 식으로 하며 살아왔습니다. 늘 아쉬운 것은 저희가 그래도 한 시대를 새마을지도자로서 시, 군에서부터 도까지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중앙에서 이 사람들에게 뭔가 위로해주고 예우해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참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딜 가면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동안 열심히 하면서 받은 우리 새마을훈장 받은 것, 대통령 표창 받은 것이 장롱 속에 전부 녹슬고 있고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습니다.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40년이란 세월 동안 대한민국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몸을 바쳐온 지도자들에게 국가도 책임질 의무가 있고 뭔가를 좀 도와야 된다는 데에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저는 실질 그대로 살아있는 지도자입니다. 남들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살아있는 현 지도자다.’라며 증명해 줍니다. 또 사실 새마을지도자도 최일선 지도자에서부터 읍면동 군, 시, 도, 중앙을 거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보통은 일선 지도자 하다가 끝내고 동 회장 한 번 하다가 끝나면 말고 구미시 시회장도 하다가 끝나면 그만둡니다. 거의 다 그렇게 끝나고 마는데 저는 자랑이 아니라 이 어려운 곳에서 최일선 7통 지도자로 제가 주민 총회에서 선출 받아서 시작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동회장, 구미시회장, 경상북도회장, 중앙이사까지 이 과정을 거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과 노력이 있었겠습니까? 저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 새마을가족들에게 이제는 새마을운동으로 가장 성공한 우리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인 박근혜 대통령이 새마을대통령이 되었으니 좀 챙겨달라고 하면 나쁜 얘기지만은 좀 뭔가 마음 속 깊이 알고 계시고 답례를 해주셨으면 싶은데 모르겠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새마을운동 초기에는 물질 지원을 했습니다. 물질이라 하면 도로 포장하는데 시멘트 같은 것을 지원해줬습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나와서 시멘트를 비벼서 넣고 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지원 사업이었습니다. 재료는 그렇게 해서 시작했고 처음에 마을안길 넓히기 하고 초창기에는 길 같은 것도 전부 다 자기가 희사해서 내주고 이런 식으로 해왔습니다. 국가로부터 개인적인 보수라든지 이런 것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생계도 어려운데 그렇게 했느냐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우리 새마을지도자들이 우리나라 전국 모두 똑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개인적인 공직 생활을 30년, 40년 했다면 연금이라도 타서 생활 유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새마을가족들은 정말로 20년, 30년, 그 많은 세월을 새마을운동과 함께 생사고락 했어도 누구 하나 아직까지 예우를 받거나 보수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아쉽다고 말씀드린 대로 정말 이제는 시대적으로 국가나 그 지역에서, 생활자치단체에서라도 예우를 해주든지 아니면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예우라도 좀 더 떳떳하게 해줬으면 합니다. 이 많은 조직을 위해서 국가가 조금 더 앞으로 관심 깊게 무언가를 해줬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그때는 어디를 가도 초창기 새마을운동을 국민 전체가 동참해서 움직이고 할 수 있었던 하나의 큰 원동력은 새마을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들도 그 나라 언어로 부르고 있는 우리 새마을노래는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작사 작곡하셨습니다. 예전 초창기에 조기 청소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1일, 15일은 내 집 앞에서부터 청소 쓸기 운동, 조기 청소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1일, 15일에 새벽 6시만 되면 청소차에서 새마을노래가 제일 먼저 퍼지면서 골목길을 쭉 가면 전 동민들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일어나서 내 집 앞부터 청소를 하고 담배꽁초를 주웠습니다. 그때는 군관민, 어린 학생들까지도 전부 다 참여하고 동참했습니다. 그만큼 초창기 새마을운동이 전 국민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을 가져줄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 노래, 새마을깃발 이 두 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는 또 중앙 연수원 대강당에서 교육이 엄청나게 이루어졌는데, 제가 생각할 적에는 국가나 사회의 발전은 교육이 근본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때의 새마을교육이 후배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연수원을 거쳐 오면 정신이 바로 섰습니다. 사람이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식을 가질 정도로 그 연수원의 역할이 컸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연수원에 올라가서 얘기했던 것이지만 이 연수원을 다시 활성화하는 길은 지금 외국으로 우리 새마을운동이 많이 퍼져서 전 세계가 배우러 오는데 지금의 우리 어린 학생들, 초등학생들까지도 차라리 연수원에서 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기초 원칙이라도 가르칠 수 있는 연수원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니 우리 국민 전체가 새마을운동이 뭔지도 모르고 잊어버립니다. 또 경제가 이만큼 발전하니 잊어버리고 그렇습니다. 좋은 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저희가 항상 새마을지도자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도 국가를 위해서 한 시대를 그만큼 노력과 봉사를 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 국가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없이 살면서 그 삶의 고충, 가난의 고통을 알았을 적에는 무엇이든지 사회생활이라든지 결집도 됐습니다. 남을 헐뜯고 이런 것도 없고 저절로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경제력이 생겨서 자기가 마음대로 밥 먹고 어려운 것을 모르고 사니까 옛것은 잊어버립니다. 새마을운동이 뭐하는 것이냐?, 지금 새마을지도자가 있느냐?, 하는 것에 때로는 그런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조금 전과 반복되는 얘기 같은데 20년을 넘게 30년이라는 세월, 더 하면 40년 동안 아닙니까? 이 세월 동안 새마을운동에 몸 바쳐서 일해 온 사람들에게 국가가 보상금을 줍니까? 그렇다고 해서 40년 한 사람들에게 퇴직금이라고 예를 들어서 연금제도라든지 이런 것이 있습니까? 국가의 보상금 없이 일해도 아무도 국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이 뭐냐면 국가가 이제는 우리 새마을지도자들에게 조금 위로를 해주고 뒤를 봐줘야 하는 그런 시기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