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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오류이리가 어디있는 마을인가요?
답. 오류리가 우리 전주역에서 열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은 오류라고 하는 역이 있는 마을 이예요.
문 : 임실 쪽인가요?
답. 그렇죠. 임실쪽. 남원 내려가는 쪽으로 가요.
문 : 그럼 임실에서 조금 더 내려가요?
답. 그렇지요. 임실은 역에서 조금 더 들어가고. 옛날 양반들이 기차소리 안 들으려고 여기로 들어가서 읍내가 있고 이제 우리 그 마을은 쭉 철로 변에 있었어요.
문 : 원래 고향이 거기이신가요?
답. 아니요.
문 : 그럼 오류리를 어떻게 아시게 되었어요?
답. 남편이 임실군 성수면에 근무를 했어요. 그때. 그런데 그분도 옛날 농촌사람으로서 너무 농토가 없어요. 토지가. 그러니까 그게 한이 져서 그 오류리라고 하는데서 한 3㎞ 올라간 그 평평한 산을 개간을 해서 농업을 겸해서 하는데 거기에 시집을 갔죠.
문. 그때 한창 오류리로 이사 가 사실 때 몇 년도였고, 크게 농촌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그때도 이사할 때가 이제 결혼해서 산에 가서 8년을 살다가 그 마을로 내려왔어요. 71년도에 그 마을을 갔어요. 근데 그때 당시는 그 마을이 역이 껴있는 마을인데, 옛날 여수반란사건 때 피해를 본 마을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을 잘 안 붙여주고 단합이 되기가 힘이 들고 그때 멋모르고 같이 가담하고 어쩌고 해서, 조금 그 우리 성수면내 중에서 옛날에 그 사상이 안 좋다고 해가지고 이렇게 좀 내놔있는 마을이더라고요. 그래서 자녀들을 교육도 잘 안 시키고, 간첩들한테 옛날에는 지금은 다 지워졌지만 빨간 줄인 사람들은 출세를 못했잖아요. 그런다고 이게 좀 반항적이라고 할까? 조금 이렇게 좀..
문. 많이 낙후되어 있었나요?
답. 그렇죠, 낙후됐었죠.
문. 사정이 어느 정도였어요?
답. 그때 그 농가가 0.4㏊(헥타르)였기 때문에 굉장히 농토가 없어요. 농촌에서는 농토가 있어야 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주변 인근 산 같은 거 개간해서 먹고 살고 어려웠어요.
문. 밥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았겠네요.
답. 그렇죠, 그때 당시는. 식량이 부족하니까.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은 식량인데 그게 부족했으니까. 그리고 남의 산 같은 것을 지켜주고 그 세경을 받아먹고 살고 그런 일도 있었지요.
문. 정말 못살았네요.
답 : 힘들었죠.
문. 어떻게 거기에서 마을을 일으킬 생각을 하셨어요?
답. 저는 거기에서 3㎞ 떨어진 산속에 결혼을, 시집을 갔는데. 남편은 이제 그 오류리라는 마을에서도 또 한 3㎞를 가는데, 면사무소 면서기였어요. 그러니까 그 마을을 잘 알죠. 개간하는 포부를 가진 사람한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첫 시집살이를 그 산속에 가서 했지요. 고생 많이 했죠, 그때 당시는. 그러다가 제가 거기서 축산도 해보고, 밤나무도 키워보고 별짓 다했지요. 그러다가 도저히 힘들고 농촌이라는 곳이 생각 밖이더라고. 내 이상과 꿈만 가지고는 안 되고. 농사를 지어보기는 했간디요. 무남독녀 외딸로 컸는데. 그리고 여학교 졸업하고 갔을 때라 ※영상이 잘림※ 역전이 있는 마을에 셋방을 얻어서 그 마을에 기거를 하게 됐지요, 저는. 저는 낯설지요. 아이들 아빠는 그 면내를 다니니까 이문없지만.
그런데 그때 제가 그때 계획으로는 2-3개월 있어야하겠다 라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방을 하나 얻어서 있었는데. 거기 가서 보니까, 그래도 여학교 졸업한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고, 거의가 다 초등학교 나오고, 초등학교 못 나온 사람들이지.
아까도 말씀하듯이 지금 이야기하지 그 때는 겨울이 길었어요. 그러니까 농번기하고 사이가 너무 기니까 거의 겨울에는 술, 도박, 그런 걸로 세월을 보내고. 그래서 제가 참 느낀 게 있었어요. 이러면 안 될 텐데.
그래서 결정적으로 거기에서 그런 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때 당시 ‘가족계획어머니회’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가보니까. 이제 못사니까. 지금은 반대지만. 임신할 수 있는 여자들 열 명이 모여서 피임방법 이런 것을 하는 어머니회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외부에서 오고, 또 이제 공부한 사람이 왔다니까 사람들이 잘 해주더라고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참 좋은 일을 해요. 왜 당신들만 하냐, 이렇게 마을이 큰데. 들어보니 104세대예요. 그러니까 여러 사람을 더 규합을 해서 이 어머니회를 한번 해보자고 그랬더니, 제 이야기를 듣고 그때 당시의 회장님이 ‘아이고, 장서기 댁은 아는 것도 많을 것 같고, 나보다 훌륭할 거 같으니 그럼 우리 동네의 회장을 맡아서 해보라.’고 그래서 가있는 동안 계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자고.
지금이니까 전깃불이 있고 마이크가 있지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부락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는 방법은 징치는 것뿐이었어요. 제가 징을 쳐서 사람들을 나오라고 했더니 호기심에 막 동네사람들 다 나온 거 같아요. 멍석을 깔아놓고 거기에서 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했지요. 이렇게 열 명만 하지 말고 뜻이 있는 사람 많이 참여해서 어머니회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니, 다들 좋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그런 것을 조직한 것이 한 사십 명 정도 됐었어요. 그런데 이제 사람을 모아놓고 나면 구심점이 있어야겠다 싶어서. 그때는 돈도 어렵고 그러니까 ‘좀도리쌀 모으기’를 처음 시작 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아침, 저녁 밥 할 때마다 한 수저씩 떠 놨다가 한 달에 한번 우리가 월례회를 할 때 가지고 와라.
그런데 이제 그때 전기도 없고 마을은 100세대인데 길어가지고 골목골목마다 시궁창도 많고 그러니까 모이려면 힘들어서 보름밤을 정했어요. 회의날을. 달이 밝으니까. 그래서 이제 모으기 해서 돈을 이렇게, 쌀을 하루저녁 가지고 오면 한 몇 만석이상 나오더라고요.
그런 중에 새마을운동이 그때, 72년도에 일어났던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각 면단위에서 한 개 마을씩 해서 그렇게 시범마을을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우리 마을도 새마을 교육, 새마을 마을로 지정을 받는데. 저보고 이제 교육을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처음으로, 처음이죠. 그런 사회교육은. 그래가지고 이제 도에 가서 교육을 받는데.
그때 당시 마을금고 사무총장하고 하여튼 전북대학교 교수분의 강의가 여러 사람 강의 중에 참 마음에 와 닿아요. 내가 그때 생각에 저런 훌륭한 분을 우리 마을로 모시고 가서 동네사람들한테 한번 해주면 참 도움이 되겠는데,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가서 전달을 못할 거 같아서 제가 끝나고 그 선생님들한테 문의를 했어요. 우리 마을에 한번 좀 와주실수 있냐. 그러니까 오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을에 가서 그때만 해도 회관도 없고, 그때 2월 달이라 춥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동네 모종이 있어요. 모종에다가 이제 멍석을 싹 둘러서 막아놓고, 동네사람들 모여라라고 해가지고 두 분을 초청을 해서 강의를 했죠. 그랬더니 역시 이제 지금이니까 그렇지 그때는 농촌 분들이 순박해서 정말 교육이 필요했어요. 막 저보다 더 뜨겁게 불이 붙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새마을운동이 시작이 된 거예요.
문. 그럼 뭐부터 시작을 하신 거예요?
답. 그러니까 이제 아까 그 기금 모으는 거, 좀도리로 해서 모으다가, 하다보니까 여기서 교육와라 저기서 교육 와라 중앙교육도 가게 되고. 그래서 제가 그때에, 이제 지금은 마을금고인데 그때는 어머니금고라고 있어서, 거기 가서 일주일 받아야 그 복식부기를 하것어요? 하지만 대충은 배워가지고 하려고 하는 의욕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배웠어요, 하여튼. 마을에 와서 사실 이사장을 하려면 회계를 따로 둬야 하는데 누가 할 사람이 있겠어요. 이제 구내회장, 이사장, 채무과장 맡다시피 해서 그 마을금고를 육성 해 볼려고 했더니.
문. 마을금고가 꼭 필요한 이유가 어떤.
답. 그게 왜냐하면 돈이 없으니까. 뭔가 이게 해보려고 해도 이 자본금이 없고. 또 농자금 같은 것을 빚을 얻을래도 빚을 안줘요. 농협에 부채가 많으니까. 그때 내가 교육받을 때 이 마을금고는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모아가지고 그게 자금이 되면 그걸 싸게 융자를 해줘서 푼돈을 갚을 수 있다, 그게 너무 매력이 있었어요, 나한테는. 그런데 그 설명을 막 하니까 그건 빨리 사람들이 안 따라와요. 왜냐하면 옛날에도 그 여수 반란사건 때 이런 때도 뭐 좋다 해서 동참했더니 자기들이 고통을 받았는데.
문. 피해만 받았다.
답. 응. 그랬는데 그 더군다나 돈 갖다가 그렇게 맡겨가지고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안 따라줘서. 그때 생각난 것이 사람이 뜻이 있으면 길이 반드시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할 때 ‘아. 그러면 이분들한테 첫 번 출자할 수 있는 돈을 만들어서 줘야겠다.' 해갖고 공동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이제 예를 들어서 자기 일을 해야 되면 밥 먹고 나가면. 나갈 때는. 그러니까 새벽에 새벽운동을 했어요, 그때. 새벽 네 시 반이면 주부들 나오라고 해서 밥하기 전에 나와 가지고 남의 논을 맡아요. 한 필지면 한 필지를 맡아요. 이천 평 그러면 이천 평 맡아서 모내기를 해주면 회원이 막 40명, 50명이면 들어가니까 한참이면 끝나버려요.
그러고 그 다음에 학교 운동회를 한다고 그래서 그 학교의 운동복을 우리가 맡았어요, 주문을. 가서 우리가 운동복을 해주겠다. 그래가지고 그걸 이제 농촌에 미싱들 갖다 놓고. 제가 처녀 때 그때 당시는 직장이 구하기 힘들어서 여고 나와 가지고 바로, 참 그때는 몰라 양재학원 같은거. 지금이니까 알아주지 미용학원, 양재학원을 천대를 하고 그럴 때에요. 나는 뭔가 내가 내 생활을 해야 한다 해가지고 양재를 배웠거든요. 근데 그 기술이 있으니까 좋지. 그래가지고 이제 만들어 납품하고 막 돈이 생기더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놈을 전부 나누어서 처음에 40명에게 출자금으로 한 사람 앞에 5만원이면 5만원씩을 싹 갈라서 통장을 딱 만들어줬어. 돈을 출자금을 넣어서 준다는데 안하겠어요? 그래가지고 사람들이 그때부터 호응이 와서 쌀 모으고, 하여튼 돈만 생기면 가져왔으니까 금고가 불어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금이 모아지니까 재미가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별짓을 다했어요. 양발장식도 해갖고 남아서 돈도 해가지고 공동 작업을 해서 그 돈들을 모아갔지요. 그러니까 이제 농자금 같은 거 큰 거 아니라도 그렇게 대출을 해줄 수 있으니까. 은행가면 담보를 내야하는데 담보물도 없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우리 동네가 소문이 나고 활성화가 되고, 옆에 동네에서도 좀 돈 빌리자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서 하다보니까 이제 새마을운동이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새마을운동 한창 할 때 우리 동네 첫 번에 빛을 못 봤었어요, 사실은. 왜냐면 환경사업을 했잖아요, 처음에. 72년도에. 시멘트 0.5포대, 아니 그때 시멘트 500포대에다가 철근 0.2톤을 주면서, 그건 마을공동사업만 쓰라고 했는데. 그건 새마을지도자가 하는 몫이고. 저는 상당히 그런 걸 따져요. 제가 할 일, 안 할일을. 내가 부녀회장으로서 군에 가서 교육받은 거니까. 부녀회장이 할 일은 생활을 개선하는 것, 식생활. 이를테면 주택을 개량하고 그래서 여성들이 편리하게 사는 거 이런 것을 해야 한다 이런 것을 듣고 왔거든요. 그런데 부엌 개량을 해보려고 하니까 그땐 농촌뿐만 아니라 아궁이에 불 때가지고 해먹을 때니까. 그런데 싱크대 같은 거 만들고 다 하려고 보니까 시멘트가 솔찬히 있어야 됐어요. 근데 부락으로 공동으로 나오는 거니까 개인집을 주겠어요? 그런데 그때 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그때 제가 결혼할 때 금반지 세 돈이 있었거든요. 시집올 때. 그런데 끼려니 농촌에서 낄 새도 없고. 농사일하고 나서. 회원들한테 설득을 시켰어요. 내가 금반지 세돈, 결혼 할 때 내 놓을 테니 당신들도 안 끼고 있는 거 내서 이것을 팔아서 시멘트를 사서 부엌에다가 해서 편리하게 살자. 그리고 또 나중에 소득사업해서서 전부 금 세 돈씩 해주마, 그랬더니 저를 신임을 해가지고 금이 열다섯 돈인가 들어 왔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걸 팔아가지고 시멘트를 사서, 그 영화 보면 알겠지만 벽돌을 우리가 찍는데 처음에 애 많이 먹었어요. 기술이 없어가지고. 어찌나 무너지던지, 근데 나중에는 숙달이 되니까 잘 되더라고. 그래서 그 벽돌을 전부 엄마들이 찍어서 집집마다 이제 부엌을 한 거예요. 그래서 서서히 바꿨었고.
그렇게 이제 변화가 되니까 재미있죠, 여자들이 좋아하고. 그때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이제 하는데 새마을초창기에 그 하루는 느닷없이 막 군청에서 오셔가지고 불러 대서 갔더니 지사님이 여기를 들린다고 그러니까 막 모아서 작업을 하라는 거야.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아 어떻게 갑자기 무엇을 모아서 하겠냐고. 근데 그때 우리가 무엇을 했었냐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길이 그 뒷산이 우리 동네 산도 아니고, 저 장수군 사람들의 선산이 있는데 거기를 밤나무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 개인이 산에다가 밤나무를 심어서 성공을 했거든요. 그때 처음 개량종 이만한 게 나왔을 때라. 그래서 군에서 밤나무를 이렇게 묘를 준다고 그래요. 그런데 대단위라고 해가지고 많이 하는 면에다가만 줘요.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그렇게 많이 할 수는 없고 산을 오전, 오후로 해서 이천그루를 심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군청 산림과 가서 사정을 해도 안 된대요. 대단위로 해야지 소규모로는.
그래서 군수님을 만나려고, 지금이니까 도로가 교통이 안 막히고 좋지. 그때는 기차타고 또 버스타고 가는데, 관사에 찾아가서 세 번을 가도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번은 작정을 하고 새벽에 가서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았더니 출근하려고 나오시더라고. 그래서 붙들고 사정을 한 거지요. 이러고 저러니까 기특하게 본거죠. 알았다고 내가 바로 알아봐서 조치해주마 하고, 이천그루를 주기로 결정을 받아서 우리가 밤나무를 심으려고 그 구덩이를 파놨었어요, 산에다가. 그랬는데 뭐에 쓸 수 있는 일이냐 그것뿐이 없을 거 같아요. 그래서 밤나무를 심지 않고 구덩이만 미리 파놨는데 그러면 알았다고 하고 점심시간에 막 방송을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점심 먹고 나올 때 전부 퇴비를 한 가득씩, 여자들이 지게도 잘 지고 일을 잘해요. 그래서 이고 나오고 해서 한군데 공동마당에다 모으라고 했어요. 이 뭔가를 지사님한테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가지고 이제 막 애기 업어다 바쁜 게 갖다 모았어요. 그걸 이제 다 이어갔고 나르는 거야, 산에다 퇴비를. 그렇게 하는데 그때 도지사 일행이 한 이십 명이 오셨더라고. 우리 마을은 예정에 없었어요. 이렇게 막 보일 수 있는 마을이 못 돼요. 환경이 아무리 해도 때깔이 안나. 그러니까 못 보니까 다른 마을을 보려고 했는데, 가는데 마다 혼났는가봐. 그런데 이순선 지사님이라고 아주 대단한 분이 있었어. 근데 이제 이 양반이 화가 나가지고, 그랬나봐요. 그러면서 지사님이 우리 마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느냐면 말을 좀 들었었어요. 그때 서울서 온 두 교수님하고 마을금고사무국장이 참 일을 열심히 하는 부녀회장이 있는 동네가 있다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 오류리 라는 마을에 한번 가보고 싶다. 그러니까 거기서 갑자기 변경이 되가지고 정부 답사를 오니까, 우리보고 모아서 일을 하라고 했던가 봐요.
그런데 그게 그때만 해도 각자 막 돈 없고 그럴 때인데 상당히 애썼어요. 우리가 천을 떠다가 집에서 만들어가지고 가운을 똑같이 해서 입으니까 보기가 좋더라고요. 작업복을 입었었어. 그러고 그렇게 하니까 와서 보니까 좋았나봐요. 이제 회관도 없으니까 공터에다가 현황판을 갖다놓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새마을 지도자님이 브리핑을 하시는데 군에서 온 양반들이 조금만 와달라고 잠깐 부녀회장이 하라고 하더라고. 그때 당시 저보고. 그래서 이제 시작을 하니까 하여튼 제가 이제 느낀 거 막 하는 것 하여튼 제대로 이야기 했는가 모르겠어요.
농촌의 건강을 위해서 녹황색 재배 같은 것도 그때 막 평당으로 있어가지고 비닐로 해놓고 금반지 팔아서 시멘트 찍고 한참 할 때 얘기. 그런 얘기들. 그리고 또 학교 운동복 납품한 얘기들. 우리가 한 얘기 해야지 다른 것은. 그리고 환경사업은 우리가 한 게 아니고 남자들이 했어 거의. 그러니까 이제 그때는 참 어머니학교를 또 했어요. 이 엄마들이 뭣을 몰라 이 사람들 깨우쳐 주려면 뭔가 가르쳐야겠다! 해서 방으로 모아놓고 글도 가르쳐 주고 했거든요. 그런저런 일들을 했는데 그때 당시에 우리 지사님이, 참 내가 안 잊어버리는데 문공부 차관을 하셨던 분이예요. 상당히 그런 쪽으로 당신님도 도정을 펼치고 싶은데 이 마을에 오니까 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양반이 굉장히 예뻐했지 사실은. 그때부터 알아가지고. 그래가지고
문. 감동을 많이 받으셨나보네요.(43:51)
답. 그래가지고 갈 생각을 안 해. 그러니까 듣고 나서 쭉 마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그렇게 필요했던 시멘트를 한 2,000포대인가를 지사님이 주신다고. 그리고 꽃 같은 거 좋아하셨거든. 개나리꽃 같은 거 보내 줄 테니 빈터 같은데 심으라고 하고 가셨어요. 이제 부락은 붐이 일어나죠. 막 시멘트가 공짜로 2,000포대 오니까 집집마다 그놈 갖고서는 다 뭐 부엌 개량하는 것이 문제가 없어졌고 이제 우리 지사님이 가셔가지고, 좌우지간 중앙 계통해서 신문사나 그런 사람들이 다른 인터뷰한다고 오면 양이 안차고 나만 불러 오라고 한 대요. 하여튼 감동을 받으셨던가봐.
문. 처음 하시는 일에 남자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답. 그렇죠, 처음에 했죠. 처음에 수근 거리고. 처음에 금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한때는 이게 이렇게 막 하니까. 자기들이 생각할 때 힘이 주어진다 생각할 수가 있죠. 돈을 갖고 이제 하니까 자꾸. 저렇게 객지에서 왔는데 아무리 우리 장서기, 우리 집 신랑은 그때 당시 면서기면 그래도 가면 닭도 잡아주고 할 때예요. 시방하고 틀려요. 그런 면서기를 했기 때문에 제가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됐고. 이제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던 거 같아요. 하는 일마다 성공을 했어요.
문. 남자들이 뭐라고 그러시던가요? 부녀자들 다 모아갖고 뭘 하니까 그 당시에는.
답. 딴 것 가지고는 뭐라고 안했어요. 다 우리가 좋은 일 하니까. 근데 돈 때문에. 마을금고 하는 거 가지고. 왜 저렇게 객지서 온 사람한테 돈을 다 갖다 맡겨가지고, 만약 들고 가버리면 끝나는 거 아니냐고, 그거가지고 난리가 났었나 봐요. 뒤에서 수군거리고 굉장했어요. 그래서 제가 참 고통을 받았지요. 그래서 이제 그 다음에 먼저 회장을 하던 사람은 거기에 씨족이야. 80%가 강씨들 씨족이 사는 마을이거든요. 그래서 교육도 시키고 회계도 맡겨주고. 그러자니 설득도 하고 어려움도 받았지만은 저는 거기에서 어떤 지혜를 냈냐면, 내가 이 마을에서 이 부녀운동을 하려면 어른들의 호응을 받아야하겠다, 부락에. 그래 가지고 ‘산 삭망(朔望)지키기 운동’을 벌렸어요. 그래가지고 돌아가시면 왜 초하루 보름날 지청 해놓고 거기다가 밥 해놓고 그러거든요. 그걸 없애고 돌아가시면 무엇하냐. 살아계실 때 초하루하고 보름날은 시부모님들한테 막걸리 한잔이라도 잘 대접하고 음식도 잘 대접해서 웃어른을 공경해라. 그러고 마을에다 여러 나무 하나 붙여놓고 부모들한테 불효를 하는 사람들은 여러 나무에 써넣어서 붙여 넣게 되어있어요. 회의날 그것을 열어서 불효자로 나오면 망신이지요. 그렇게 그걸 ‘산 삭망(朔望)지키기 운’동을 해서 성공을 했어요. 참 안 좋은 며느리 다 좋아지고 이 시부모들이, 시어른들이 굉장히. 그 노인들이 얼마나 우리를 좋아했냐면, 옛날에 남자들도 자치회도 있고 막 마을에 이장회도, 같은 회의를 쌍립하면 남자들은 회의가 성립이 안돼요. 남자들이 집을 보고 여자들은 부녀회를 나가라 할 정도가 됐어, 시부모들이. 너희들 나가면 배워가지고 온다고. 그리고 그때 당시 농촌에 차 끓이는 법 같은 게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휴경지 같은 거 활용해서 논두렁 콩 심기 같은 거. 참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는가 몰라요 저도. 그런 걸해서 수입을 내 가지고 거기서 난 콩으로 두유차 같은 거 끓여서 꼭 어른들 대접해 드리고. 그러니까 인정을 받았었어요. 그리고 나가면, 부녀회 나가면 배워서 오고 좋은 일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나갈 일이 있으면 집에서 며느리를 내보내지 아들은 못 나가게 할 정도로 어른들의 신용을 얻으니까, 그렇게 안 되도 그때 당시 산아제한연구로 이렇게 우리 마을 상을 타고 됐어요. 그러니까 저도 참 어떻게 그때는 그렇게 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하기 전에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 밥을 했어. 그렇게 해야 직성이 풀렸어. 그 정도로 열의가 있었고 또 계속, 계속 지혜를 주셔서 하는 일 마다 그렇게 잘 되더라고. 그리고 또 그전에는 공동사업이 없다가 있으니까 이게 돈이란 힘이 예요. 남자들도 이제 돈 조금 쓰려면 마누라 말을 잘 들어야 쓰니까 그렇게 말을 듣고. 이제 우리가 막 노름하고 술 먹고 오면 못하게 하고 굿판장 만들고 그러니까 못했지.
문. 그전에는 술도 먹고 도박도 많이 하셨나봐요.
답. 말도 말아요. 왜냐하면 겨울이 길었잖아요, 옛날에는. 그러면 그때는 부엌이라는 게 없었어요, 농촌에. 지금이야 막 축산도 하고, 이모작, 삼모작 하지만, 그때는 한번 모심어서 그것만 가지고 먹고 사니까 하여튼 겨울은 석 달, 넉 달을 놀아야 하니까 무엇하것어요, 농촌에서. 오락시설도 없고. 그러니까 별수 없이 주막에 가서 술 먹고 노름하고 그러면. 내가 가서 이제 또 느낀 게 뭐냐면 지금은 부엌시설이 잘 되서 금방 가스면 되지만 그때는요 청솔가지, 가지나무 긁어다가 밥을 해먹을 때야. 그런데 남편이 제때 식사를 하고 나가서 놀면 여자들이 자기 시간을 갖는데 이건 가보니까 여자들이 나가지를 못해. 남편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러면 오면 또 밥도 해서 먹여야하고. 그래서 데리러 애들을 보내면 그날은 그 집 초상집이야.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남자들이 또. 네가 뭔데 남자가 술 먹고 노는데 와서 오라 가라고 하냐 해가지고, 싸우고 맞고 두드리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여자가 경제권이 있어야겠다 생각을 해서 그때 경제운동을, 지금 생각하면 조그만 것이지만 했던 거 같아요.
문. 나중에 새마을운동이 계속 번성하면서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답. 그렇죠. 그러면서 저는 또.
문. 여성지위 입장에서 보면.
답. 그렇죠. 그러니까 저는 오늘날 어떤 공부 많이 한, 또 외국에서 들어온 무슨 단체들, 여성단체, 뭐네 뭐네 그렇게 똑똑한 대학 나오고 그런 사람들 모인 단체 하나도 안 부러워요. 왜냐. 그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자기 끼리끼리 하는 여성운동이었겠지만 이 새마을운동은 여성들을 진짜 농촌의 가정에 박혀 있는 사람들 불러다가 지식을 넣어주고 그 사람들한테 나는 그런 소리 어디 가서 해요. 지방자치의 뿌리가 바로 이 부녀회였다.
모여가지고 총회하고, 회의하는 방법 알고, 지금 생각이지만 참 저도 그래요. 어떤 때는 어디 초청받으면 어떻게 그렇게 반대 없이 해냈느냐. 저는 참 하여튼 무슨 좋은 큰 안건을 두면 참 순진 했지요 마을사람들이. 안건이 있으면 미리 다 임원들을 선정해 놓고 그 임원들 한 여서 일곱 분 그분들에게 말을 해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겠는데 내가 회의 때 이것을 내놓으면 여러분들이 여기저기서 좀 찬성을 해서 옹호 해 달라. 이게 반대를 당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이제 마을일을.
문. 지혜롭게 하셨네요.
답. 그랬던 거 같아요. 지금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서 그런 지혜가 나왔는가를 참 모르겠어.
문. 원래 농촌 여기에서 봉사하겠다고 원래 정, 목표가 그렇게.
답. 목표가 뭐. 제가 무남독녀 외딸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어려운 농촌에 살면서 우리 어머니가 굉장히 아버지한테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좀 구박을 당하며 살았던 거 같아요. 좀 무식하다고. 공부안했다고. 당신이 뭐 이제 어머니보다 낫죠, 활동하는 게. 그래서 막 그렇게 어려서부터 그게 굉장히 내 뇌리에 사무쳐 있었어요. 우리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어디에서 이야기 하게 되면 꼭 장래 꿈 이야기를 하면, 나는 꼭 저 농촌에 가서 농장 일궈가지고 불쌍한 고아들도 키우고 그런 것을 꿈을 좀 꿨었어요. 그랬는데 이상하게 농촌에 시집을 가서 결국은 이제 그렇게 부녀자들 모여서 그런 일 하게. 참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런 건지 그게 잘 됐고, 지금도 그렇게 얘기를 한다고 그래요.
그리고 참 안 잊혀지는 것은 가보니까 쓸 만한 처녀들은 다 서울로 식모살이 하러 갔잖아요. 그래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부모와 같이 살 수 있게 할까 해서 제가 거기에 공장을 하나 세우려고. 그런데 누가 촌에다 공장을 지어주겠어요 옛날에. 그래가지고 근방에 안 다닌 공장이 없어요, 영세공장. 그러다가 강원도에 있는 이성물산이라는데 사장님이 강 씨야 또, 만나가지고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 수출하는 품목을 주더라고요. 근데 그게 뭐냐면 일본사람들 정장을 하고 오비 매잖아요, 그게 굉장히 섬세한 작업인데 할 수 있겠냐구 그 기술을 배워가지고 그 마을의 처녀들을 인근 처녀들까지 한 육십 여명, 이렇게 다시 귀향해서 그 일을 해서 돈을 그때는 농촌벌이로 상당했어요. 그래서 부업을 해서 돈을 벌게 공장을 한 이백 평정도 지었어요. 그때당시 지었고.
그리고 그 아이들한테 공부를 가르쳐야겠다. 해서 그 교회 전도사님한테 부탁을 드려가지고, 통신강의를 서울서 사다가 영어 수학은 그 양반이 특강을 해주시고 나머지는 독학으로 해서 밤으로, 낮에는 일하고 중학교의 과정을 아이들 마치게 해서 그중에서 또 산업고등학교 까지 가가지고, 유아전문까지 나와서 또 유치원선생님도 나오고 그런 게 보람이더라고요.
문. 새마을공장을 지우신건가요?
답. 예, 새마을공장하고 비슷하지요. 개인 것이지만. 정부에서 융자 받고 이런 거 하나도 없고 그렇게 했어요. 그때 당시.
문.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참 대단하시네요.
답. 이게 사람이요 뭔 일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그때그때 지혜가 탁탁탁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했나 몰라요. 이제는 그렇게 하라면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주부가 밥을 하는 게 아니라 동네를 한 바퀴 씩 집집마다 돌아와야 밥을 할 정도로. 그게 부락사람들한테 미치고 그렇게 좋더라고. 엄마들이 하나하나 자기 발전 해 가는 게 너무 좋고.
또 저는 참 상당히 순조롭게 한 편이예요.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래서 했고. 또 그러다가 제가 이제 새마을 수원 연수원교육 그때 갔잖아요. 근데 아이고 저는 그렇게 그 교육이 좋을 수가 없어요, 좌우지간 내 생전에 그렇게 굉장히 그렇게 좋은걸 못 들어 본거 같은 게 낮에 그 많은 사람들 그전에 굉장했잖아요. 수원 새마을연수원 김준 원장계실 때. 근데 김준 원장님이 제 얘길 하신대요. 좀 머리가 왔다갔다 하시면서도.
문. 뵙고 왔어요.
답. 그래요? 근데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문. 약간 안 좋으신데.
답. 난 안타까워 죽겠어요.
문. 치매, 치매
답. 그 양반은 우리나라에서 국보같이 모셔야 해요. 국민의 표상으로.
문. 할 이야기는 많이는 못하시고
답. 안쓰러워. 그런데 그때 당시 교육을 받는데 너무 좋아서 낮에 막 베껴놓으면 내가 봐도 무엇인지를 모르것어, 글씨를 너무. 밤에는 날이 새도록 그걸 정리하는 거야. 마을에 가서 가르쳐야 할 거 아니야. 그러면 김준 원장이 훅 돌았어요, 내무반. 우리 방에 늘 불이 켜져 있으니까 한번 부르더라고. 갔더니 대체 무엇을 그렇게 하냐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지요. 내가 마을에 가서 가르쳐야 하는데 도저히 낮에 그냥 너무나도 많아서 도저히 베껴가지고 못가니 정리한다고 그랬더니, 저 교육생들 앞에서 15분간만 내일 아침 조회 시간에 나보고 동네에서 한 얘기를 하래요. 그래서 한 것이 그때 새마을성공사례를 하게 됐어요. 그것도 창시로 했어요. 하사용씨가 오시고 그랬는데 하여튼 그렇게 해서 했는데 호응이 좋아가지고 육년인가 칠년인가를 했어요. 다니면서
문. 성공사례, 교육.
답. 응. 그러니까 그 연수원 나가서 했고, 제가 강연 도중에 그전에 그 박정희 대통령도 들어오시고 막 그래서 연수원에 가면 그 국수 먹는 장면도 그래서 있고. 그때는 하여튼 산업근로자들한테 제가 부산을 가서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몇 군데를 뛰고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올 정도였어요. 나중에는요 제가 한창 강의하고 그럴 때가 제가 서른세 살에 면 회장을 해가지고 마을 회장을 하면서 새마을에 뛰어 들어가지고 오늘날까지 하잖아요. 근데 그때 한참 때 사십대 때, 웃는 말로 아무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못할 정도로 피곤하고. 그래도 재미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죠.
문. 성공사례하시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기억에 남는 일.
답. 그러니까 수원 연수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뒷문이 확 열리더니 까만 제복 입은 분들이 쭉 한 열분 쭉 들어오는데 나는 처음에 누군지 몰랐죠. 앞에서 하고 있으니까. 그때 막 국무총리 그런 분들이 와서 강의 받을 때. 그런데 그때 나중에 있다 보니까 박대통령이예요.
나중에 보니까. 딱 뒤에서 다 앉으시더라고. 이제 내 말에 연수원서 나보고 강심장이라고. 어떻게 대통령이 오셨는데 톤도 안 틀리고 그렇게 그냥 계속 하더라고. 처음엔 좀 버벅거렸죠, 조금. 근데 그냥 아니 뭐 대통령도 뭐 하는 소리 듣는 건데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고 그냥 그냥 평정을 찾았어. 한참 십오 분인가 있다가 나가셔가지고 강의 끝날 때 까지 계시다가 점심 먹었었어요. 국수를 같이. 그때 이게 참 어쨌든 내 평민으로서 대통령을 그래 보는데 그게 상당히.
문. 대통령님이 워낙 관심이 많으시니까 그때.
답. 것도 육영수 여사가 참 안 잊혀져요. 매년 추석이 돌아오면 남편분이 하라고 시켰겠어요? 스웨터에다가 편지 넣어서 보내고 그랬어요. 참 대단한 분이예요. 예, 대통령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모르겠지만 근데 그 나중에 제가 박근혜양하고 MBC에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기회를 가졌었어요. 그래서 그런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는 좀 진짜 이 새마을운동이 저의 삶을 바꿔놨고, 또 생활도 어려운 속에서 자식 사남매를 남편이 마흔 아홉에 세상 떴어요. 그랬는데 그놈 다 가르쳐서 또 오늘 살지 않았나. 저는 생각을 하고.
지금도 새마을이라고 하면 그냥 막 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그 정도로 그렇게 새마을을 좋아했어요.
문. 새마을운동이 또 우리 농촌이나 근대화를 이뤘잖아요.
답. 그렇지요. 이뤘지요. 뭐니 뭐니 해도 새마을만큼 마을여성들을 대거 바깥으로 내보내서 경제활동에 초석이 됐죠. 그리고 모든 단체에 기본을 갖춰놨어요. 어디가보면요 전부 새마을회장 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다른 단체장을 해요. 면 단위, 군 단위 가보면. 왜냐하면 임기가 있잖아요, 새마을은. 임기 딱 끝나면 그만 두면 거기에서 길러진 인물을 다른 단체에서 또.
문. 전파, 전파, 전파됐네요.
답. 그렇게 하더라고. 그러니까 가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이제 새마을을 다하고. 저는 이제 또 참 저는 지금까지도 우리 새마을 하면서 죽어간 우리 선구자들도 있고, 정말 배도 고프고 고생만하고 마을사람들한테 비난 받은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한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항시 가졌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 와서 초대, 그때당시에 부녀국장이지만 부녀부장 뽑혀서 했을 때 정말 저는 알아서 했가니요. 학교도 고등학교 나와 가지고 직장생활도 안 한 사람이. 그렇지만 우리 전북지회가 우승을 놓쳐본 일이 없어요. 그때 당시 우리 회장님이 전라북도에 계속 줄 수 없으니까 우승 띠를 무슨 명목으로 만들어 줄 정도로 미쳤었다니까요. 일선에서도 여기 와서도 직무를 하면서도, 정말 한 번도 무보수로 저렇게 일하는 새마을지도자도 있는데, 나는 월급 받아가면서. 해서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니까 해서 정말 저는 여덟 시간을 근무를 하면 제 생각에 자신 있게 열 네 시간을 근무 했다고 자부를 해요, 지금도. 그렇게 밤낮없이 뛰고 다니니까 되더라고요.
문. 이게 이제 아무래도 성공한 게 교육의 되게 힘이 컸겠죠.
답. 그렇지요. 교육의 힘이 예요. 결론은. 저는 제가 그렇게 교육을 좋아해요. 지금까지도 하여튼 교회에서 설교말씀에서부터 크고 작은 교육장에 저는 다 쫓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제 나이가 먹었어도 절대 조는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좋아요. 교육의 힘이,
문. 새마을 지도자를 양성시키는데 교육이 이제 계속 들어가서 교육시키고 나와서 전파하고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으니까 이제 성공하게 된 거네요.
답. 그리고 저는 나가서 들으면 나가서 끝을 본 적이 없어요, 거의. 어떤 방법으로라도 전달 교육을 마감했어. 그 농촌 주부들이지만 상당히 깨어가지고 그렇게 했지 않는가.
그래서 그 마을은 우리가 소 나눠키우기 같은 것도 해가지고, 부녀회 한 사람들은 거의 집집마다 소 한 마리 씩 다 돌아갔고. 이게 우리가 농촌운동이나 이렇게 근대화 운동이나 무슨 운동을 해도 근간은 가정에 두고, 또 경제적인 뭔가를 이뤄나가야 호응이 오고 가족들이 도와주지, 여권운동하고 여권 신장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집안 몰라라 하고 가정 경제가 엉망이 되면 오래 못 간다고 생각을 해요.
문. 그 저기 이제 앞으로도 새마을운동이라는 게 이제 21세기나 계속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답. 우리나라에서 필요한 거요? 저는 새마을 은사입니다. 그래서 외골수 생각을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새마을을 도외시 하고, 매 정권 바뀔 때 마다 막 눌렀다 일어났다 했잖아요. 핍박을 하고 어려움을 줄때마다 나라가 더 어려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우리나라가 계속 부강하고 잘되려면 저는 새마을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느 나라나 하나 운동의 구심점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 새마을 운동은 이게 하여튼 뿌리가 있어요. 다른 운동은 자기가 좀 잘 살아서 자기들을 과시 한다던가, 또 이런 마음도 있고. 몰라요. 나는 다른 일은 잘 안 해봤으니까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새마을지도자들은 이런 게 없거든요. 참 순수히 그냥 마을 사람을 도와야겠다. 그런 데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게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하고.
몰라요, 제가 잘못 느끼고 살아왔나 모르지만 이 민간운동은 성장을 같이 해야 한다고 봐요. 왜냐면 정부차원에서는 팍 밀고 갈 수 없잖아요. 뭐 하려면 걸림돌도 있고 또 거기에 대해 반대급부도 있고, 또 층계, 층계 결재 맡아야 해야 되고, 좋다고 생각하면 들고 갈 수 있잖아요. 국가나 나라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잖아요. 전에 그 IMF 때 어려울 때 금반지 운동을 누가 했어요. 새마을에서 했어요, 처음에. 새마을 부녀회장이 시작한 거예요. 정영길 회장님이 김장 담으러 전북에 오셔서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저는 새마을을 떠나서 공장도 하고 좀 대우를 받은 사람이여. 그래도 새마을에 뭔 일 있다면 바로 쫓아가는 성격이여. 오라고 하든 말든 저는 가요. 그러면 그때도 오셔서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어렵다는데 금반지 모으기나 한번 해 보려는데 어떻게 생각해. 나보고 그런 정도로 중앙에서도 참 예뻐했었어요. 하세요, 왜 못합니까! 그보다 더 한 것도 했는데 그거 못 모으겠어요? 하면 됩니다. 그래서 해서 됐잖아요.
문. 그럼 국난 극복이 있을 때마다.
답. 예! 앞장서서. 철근물, 제가 동장나왔을때. 새마을운동도 다 임기가 있어요. 나는 전주로 와서 이사를 와서 사니까 이제 도에 이사를 오고 하지만. 근데 하여튼 새마을 조직위에서 할 때 잘하니까, 문민정부 그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이 인구 50만 이상 된 데는 여자들을 동장을 시켜라 했었잖아요, 한번. 그래가지고 그 자격기준이 의회4년 경험, 새마을지도자 5년 경험, 그다음에 공무원이 5급이 돼서 5년 이상.그것이 왔는데 전주에서 하나를 내야 는데 그만큼 여자들을 안 키워놨어요. 갈 자격자가 없었대요. 그런데 나중에 자기들끼리 생각한 것이, 아! 그 새마을에 그 정문자 있지 않냐고 그러니까 열심히 하면 그건 능력을 인정받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오라고 해서 가가지고 사실 저는 되는지도 모르고 동장이 됐잖아요. 오라고 해서 가서 이제.
문. 동장하셨어요?
답. 예, 저 그때 초대 동장을 제가 첫 번이예요.
문. 어느 동에서.
답. 풍남동. 전주시에서 풍남동에서 1번지죠.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래가지고 내가 어떻게 일반 사람이 공무원 하냐고. 못한다고, 그래놓고는 아 하시라고 그래서 막 우리 목사님한테 상의하고 우리 회장님한테 상의 했어요. 새마을도지부 회장, 그때. 그랬더니 뭔 소리 하느냐. 당신 개인을 위해서 열 번이라도 해야 한다네. 족보에도 올라가는 일을 공무원이 되가지고 보따리 싸가지고 다녀도 사무관이 될까 말까 한데, 아이고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는데 뭔소리 하냐고, 얼른 가서 승낙하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부시장님 찾아가서 주신다면 한번 해 보겠다 그래서 동장을 받았잖아요. 받아가지고, 아이고, 내가 뭐 공무원을 해봤어요. 근데 이게 열의가 있으면 해요. 그래서 여자 동장 전라북도 1호로 나갔잖아요. 나가서 했는데, 이게 어디를 가나 열심히 하면 되요. 거기 가서도 정말 제가 생각할 때 열심히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인정을 받고 사십이 개동에서 언제나 일. 이등 들었었어요.
문. 풍남동이 어디인가요?
답. 풍남동이 여기 시내, 시내 안쪽.
문. 아 풍남동, 여기 안쪽에. 오류리는 한 번 가보셨어요 최근에?
답. 가보면 가볼 수는 있죠. 그런데 좀 미안하지.
문.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거.
답. 아 있죠. 있어요. 그때 당시 작업반장 하고 그 양반이 구십이 다 되서 늙었어요. 다. 내가 그때 젊었을 때 갔으니까 그때 다 노인네인 게. 늙으셨죠.
(작업반장)
그때는 없었어, 없어가지고 보리밥만 있어가지고 세보고 보리쌀 갈아서 자금 나나고 그랬어요, 우리가 저 동산에 가서 밤나무 고개다 다 심었어요. 구덩이 파가지고 우리 여자들이
문. 남자들이 뭐했어요.
답. 남자들이 욕 만하지. 우리 가 미친 사람마냥 댕긴 께 싫지. 뒷받침을 남자들이 해줬으니까 했어. 남자들 도와준 사람은 많이 봐줬어요. 갱숙이 댕긴데로 근데 갱순이 안한 사람들은 욕만 막하고 첨엔 힘들었어요. 얼마나 힘들게 했다구, 정문화 회장님 욕 받았어요. 우리들이 막 해가지고 박 대통령 거시기 해가지고 새마을 사업에 그러니까 그 동네 잘살게 해준담 게로 없는데로 하나라도 더 얻어 오느라고 엄한 짓을 다했어. 대수리도 잡아서 상을 타면 치사도 주고 줄게 없은게 막 우리가 그랬어요.
문. 부녀자들이 이렇게 새벽부터 일어나 일했어요?
답. 아침이면 허구는 다 지금 밥해먹고 하고 다지금 가고 그라곰 우리가 좀도리 이렇게 메어가지고 한달이면, 그러면 좀도리 조금씩 거두면 한되씩 되요. 그럼 그놈 씻어. 우리 작업 거시기 하고 그랬어요, 겁났었어요. 늘 그때는 우리가 뫼었지 뭐들 와서 견학을 온게 사람들이 견학을 많이 왔어요. 사방간데서 그래도 잘 들었어요. 저 사람이 뭔 능력이 좋아. 그런게로 거짓말을 안 하거든. 회장님이 많이 욕 받았어요. 힘들었지. 밑에서 우리는 신바람 거시고 사람 운영하면서 욕받어요.
문. 작업 반장이 많이 도와줬다는데
답. 아, 그러니까 도와 줬으니까 젊어서도 부려쳐목고 늙어서도 부려먹으라고 그려. 그랬어요. 웃음서, 욕받어요. 저 남자들이 미친 년들이라고 욕을 얼마나 했다고요. 안 그러다가 여자들이 안 설치니까 설치니까 그랬죠.
문. 미친 사람이라고?
답. 미친년들 메이로 그러고 다닌다고. 하고 그런 게, 그때는 다 거시기 하고 공동으로 작업을 했어요. 논 뭐도 공동으로 기계가 와 당긴 게로 안하고 그러죠. 아이고, 지난 일이니까 그러지 몸살나요. 우리 참 힘들었어요.
문. 제일 힘든게 뭐였어요.
답. 작업 거시기 하고
문. 새벽부터? 몇시부터 일어나 같이 작업했어요?
답. 나는 4시에 일어나서 충동을 시키지요. 4시에 일어나서 작업하려면 징을 쳐요. 징치면 회원들이 일찌감치 밥 먹고 나오죠. 그래서 하고 그랬어요
문. 어떤 작업을 했어요?
답. 나가서 거시기 하고 우리가 공동 작업을 밤나무도 심구고 그놈 메고 뭐하고 저하고 저 산에 가서 큰 이고 걸음 이고 댕기면서 구댕이 파고 밤나무 군에서 밤나무는 탔죠. 줘서 심었어요. 그러죠. 우리 동네가 처음일 꺼에요. 저사람 덕으로 회장 정문자가 욕받어요.
문. 같이 일하면서 어떤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답. 이동네 와서 일도 할 줄도 모른 사람이 참 욕받어요. 이제 그만 찍어.
문. 어쩔 때 가장 고생을 많이했어요?
답. 우리가 다 이어다가지고 쌓어요. 이렇게 산덩이 같은 놈 다 허물어서 근데 노인들이 모정이 거기다 지었어요. 그 양반들이 다 돌아가버렸어요. 그래가지고 모정이 저렇게 생겨서 어디서 모정이 하나 희석할 때도 없어. 그냥 그땐 못 산게 잘산단게 그냥 죽구 살고 한거야 잘살아 보려구, 그땐 없이 산 게로 없이라고 해서 사르려고. 그랬어요.
(과거 이장님)
문. 그럼 옛날부터 부녀자들이 모았던
답. 72년도부터 시작해가지고 현재까지 왔죠. 그런 회가 어머니 회로 명칭을 해서 아마 별로 없을 거에요. 정문자 회장님은 제가 마을 이장이었어요. 그때 어린 나이에 27살에 원체 어려운 시절이지만 내가 잘 안 아끼고 그때 내놓고 봉사를 해서 그래서 마을 분들이 우리 회장님 같이 했지요. 어머니가 부녀 회원이고 우리 정문자 회장님이고 근디 실제로 그때 마을이 106호 있었는데 48세대만 참석을 한거야. 그때도 다 안 오고 그런데 한쪽에서는 그때 만해도 보리밭메고 그러는데 보리밭을 재패고 처음에 변소 개량, 화장실 개량, 장독대 개량 정문자 회장님이 착안을 해가지고 여기서 부르크 벽돌을 찍어가지고 직접 부역 개량 이렇게 서서히 시작을 해가지고 그때 하둑굴 들어가는 사진이 있어요. 귀신 나와, 도깨비 나온다니까, 그때는 소를 8마리를 호당 나워가지고 2년이 키우면 새끼를 나서 뛸 때가 되요. 말하자면 그래서 송아지만 내 놓고 어미 소는 자기들이 했고 그랬는데 하다보니까 발전이 되다 이게 안 되더라고 그래서 두 집, 이 한 마리 가지고 안 되고 두 집에다가 이렇게 해서 저당을 하고 이렇게 했는데 그것도 안돼서 송아지 비쌀 때요. 이렇게 해가지고 팔아가지고 거기에서 현금으로 20만원이면 정기 세탁을 해가지고 거기서 나온 이자 공동작업, 또 시사, 우리 형님 같이 객지 갔다 오신 분들이 시사를 해가지고 해서 이렇게 정기 예탁을 해놓고 또 일시 예탁 통장을 2개해서 관리를 하고 있있어요. 그래서 인제 어르신들 대접 7월 백중이라고 7월 보름날 총회를 하거든요. 그래서 어르신들 대접하고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고 관리를 하고 있죠.
(강문자)
그니까 그때 나는 가난하게 살았어도 사람으로써의 대접을 받았어요. 남편한테 그런데 여기 농촌에 와보니까 여자들이 배운 게 없어. 또 생활도 어려워. 경제권도 없어 하니까 남편하네 학대를 받는 경향이 많았어요. 아 여기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독립도 해야겠고 또 공부도 해야겠다. 그런 걸 느껴서 사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각종 작업을 하고 공돈사업을해서 기금을 을 모아서 통장을 만들었 저축을 하는 그러한 풍토를 길러줬고 그다음엔 주부를 가르치는 걸 했고 또 흩어져 있던 청소년들을 그때만 해도 모여서 한 50명이 공장에서 중학교 과정도 마치게 하고 부모랑 같이 살게 해서 농촌의 젊은이들을 다시 불러 왔는데 한계가 있어요. 저는 벌써 10여년 간 하다가 무남동 외딸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들이 병들고 늙고 하니까. 인제 부모 모시기 위해 전주로 나갔쟈나요. 그리고 벌써 세월이 나간 후 세월이 근 15년, 20년 흘렀쟈나요. 그리고 와보니까 그때는 가난해서 식모살아 어쩌고 했는데 이젠 그게 아니라 가르쳐 노니까 다 잘 되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래저래 지키는 사람은 보시다 시피 할머니들이 여자들인 거 같아요.
문. 젊었을 때 어른들이 여자들이 설친다고 뭐라고 했죠.
답. 그렇죠. 처음에 어른들보다도 남자들이 더더군다나 그때는 산아 제한 할 때라 얘기 못낳 게 하니까 싫은 소리했죠. 그런데 우리가 부모들한테 효도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전환시키고 그러까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 했죠. 그리고 남자들이 비웃고 했어요.
문. 그게 제일 힘들었겠네요.
답. 힘들었죠. 처음에는 못 믿어가지고 통장도 마을금고 잘하다가 못하게 하고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객지에서 더군다나 왔는데 저거 모아가지고 나가버리면 어떻하냐고, 의심도하고 했어요. 지금 보시다 시피 다 좋아했어요.
문. 반장님 말씀 들으니까 새벽 4시부터 종치고 일어나서 일했다고
왜냐면 각자 자기 일을 해야하니까. 자기 일할 때 공동 작업하면 싫어해요. 남편들이. 그런게 다 식구 자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징쳐 가지고 나가면 2시간은 우리가 공동으로 일할 수 있쟈나요. 그러가지고 벌은 돈을 가지고 아까 말 들어보니까는 지금도 그 돈은 천여만 원이 넘어요. 그걸 관수하고 있다쟈나요.
문. 누가 관리를 하죠?
답. 옛날 부녀회원들이 근데 인제 지금은 기류에 따라서 젊은 사람을 영입 했으되 자금은 별도로 운영한다쟈나요.
문. 그때 마련한 자금이 아직도.
답. 그렇지. 그래가지고 있지, 그거 다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 돈으로 마을 회관 땅도 사 줬데요. 인제 부락에 큰 일 있을 때 공동으로 써야 할 때, 그럴 때 그 자금을 내주고. 또 인제 시골에서 고생했으니까 1년에 한번 씩 선지들 견학도 가시고
문. 예기 들어보니까 그 당시 밤나무 같은 것도 직접 전부다 부녀회원들이 심으셨다고.
답. 그럼요. 우리가 전부다 퇴비 걷어서 아까 이고 당겼다고 그러쟈나요. 그거 퇴비요. 이고 날라서 밤 나무 길러서 그때는 장학금을 주고 그랬죠.
문. 새마을 공장도 얘기도 좀해주시죠.
답. 새마을 공장이 그러니까 어디서 만들었냐면 첫째는 농토가 작으니까 생활하기 힘들어요. 첫째는 부업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부업을 할 게 없어서 제가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다시피 해서 한 2~3달 다니다가 어 충청도에 있는 이성물산 사장을 만났어요. 근데 자수성가 하신 분 이라. 또 그분이 진주 강 씨에요. 그래가 인제 이 마을이 진주 강들 씬데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부업할 꺼 주실 수 없겠냐? 와서 보시고 그때 당시 공장을 지워줬어요. 200평 공장을 지어줘서, 우리 마을에서, 근동마을에서 서울 같은데로 남의 집 살러 아이들을 다 불러 들였죠. 그래가지고 여기서 취업을 해서 한 50명이 돈 벌이를 하고 밤에는 야학을 했어요. 그러니까 저기 보이쟈나요. 교회, 그때 당시 김진원 목사님 계실 때, 통신 강의록으로 공부를 하는데 다른건 되는데 영어, 수학은 힘들어요. 그래서 영어, 수학을 그 목사님이 해주시고 해서 여기서 졸업을 하고 한일 고등학교 간 얘도 있고 그랬어요. 아까 그 남자 분 만났죠. 아까 텃밭 그분 부인이 옛날에 부녀회장을 했어요. 하다가 내가 이사오니까 자긴 배운 것도 없고 그런 게 조금 장서기서 하라 그래서 했는데 그 집 딸이 전문대학 졸업해서 학교 유치원 선생해요. 그렇게 발전되고 지금 와보니까 집도 짓고 잘사는 분 잘사는데 단 흠이 있다면 외롭다쟈나요. 농촌이 외로워 그러니까 교회도 인근 교회있는데 이 교회에서 분가 갔는데 인제 합쳐야겠다쟈나요. 안 합치면 되지 않아요. 농촌은. 옛날에 마을금고들도 그냥 마을 단위로 못해요. 지금은 그러니까 그게 연합하고 연합해서 면단위이 하나. 그리고 교회도 거의 마을마다 있는 것을 아까 말했듯이 장로님, 셔틀버스 있으니까 하나로 가야겠다자나요. 농촌은 갈수록 협업이 돼야지 그래가지고 힘들어요. 요런 데는 보시쟈나요. 농초 같은 거 조금 밖에 없어요.
문. 오랜만에 와서 같이 보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나겠어요.
답. 나죠. 첫째는 죄송스런 맘이 먼저 들어요. 그래도 그때 같이 힘써 주시고 같이 했는데 1년엔 몇 번 씩 돌아봐야 하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안돼요. 그래서 인제 그런게 새롭고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다 만나보고 싶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