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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원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답.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은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었는데 새마을운동의 배경이 어떻게 이루어 졌느냐는 것을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새마을운동의 원조는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 회의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때는 부산에서 지방시찰 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 1동을 지나갔습니다. 그 마을이 바로 경부선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기동차로 올라가시면서 보니까 지붕개량사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새마을사업을 하기 전이었는데 마을주변과 안길을 잘 다듬진 것을 보고 박대통령께서 기동차에서 내리시더니 ‘아! 여기 참 잘되어 있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시발(始發)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새마을운동의 시발(始發)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 1동입니다. 그것을 본보기로 대통령이 지방장관 회의 때 모든 마을과 국토를 그 마을처럼 잘 가꾸자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1971년 9월 17일 포항에서 전국시장군수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회의석상에서 말씀하기시를 ‘지금 포항시 기계면 문성동의 우수새마을을 회원들이 보시고 이렇게 가꾸어라, 그리고 그 부근에 산림집단 황폐지(벌거숭이산)가 있는데 이것도 복구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당시 조국근대화의 상징인 포항종합제철 그 일대의 산업시설들이 황폐하고 헐벗은 산에서 토사가 내려오면 피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빨리 복구하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그 산은 국제항공노선의 첫 관문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보면 국가전체의 인상이 흐려질 수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황폐지(벌거숭이산)를 복구하라는 특별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경상북도에서는 73년부터 77년 5개년동안에 115동내 사막과 같은 집단 황폐지(벌거숭이산)를 빨리 복구하라는 지시를 받고 경상북도에서 전 사방공무원을 총 동원해서 굉장히 넓은 면적인 4,538ha를 그 당시에 38억 2,800만 원의 국가재정을 투입하고 연인원 360만 명을 동원해 산을 완전히 복구했습니다. 당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그 작업이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손으로 이뤄집니다. 지금도 사람 손으로 해야 되지 기계로는 안 됩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 산을 복구해 한국사방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임업 사에 하나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사업기간 중인 1975년 4월 17일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그 현장인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오도리를 방문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사방공사현장에 시찰을 가신 일은 역사적으로 박정희 대통령뿐입니다. 그 동네에서 대통령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순수비를 세웠고, 또 경상북도 지사이신 김수학 지사는 1978년 11월 30일에 영일사방준공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사방기념공원을 조성해서 2007년 11월 7일에 개장식을 했는데, 그때 전국산림공무원과 지역 주민 등 약 2,000천명이 참석해서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산림공무원출신들이 한국을 견학을 오면 필수적으로 그곳에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산림청에 파견되어 한 달쯤 작업해서 황폐지 복구 작업 계획을 세웠는데, 37년 공무원 생활 중 황폐지를 복구해서 사방센터를 만든 일에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그 당시 모든 공무원은 지역별, 동별로 책임을 지고 지도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입과 눈으로 하는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지도를 하라고 분담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을 맡아 그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정부의 분위기는?
답. 우리가 나태와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 정체(停滯)와 퇴영(退嬰)을 숙명인 것처럼 감수했는데 우리겨레가‘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그러한 지각을 하면서‘하면 된다.’는 굳은 의지로 근면· 자조· 협동을 기초로 삼아 일어섰습니다. 그것이 큰 동기가 되어서 범국민적인 새마을운동이 퇴영과 정체의 악순환 속에서 영혼의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나라가 앞으로도 못가고 만날 뒤로 물러서는 형편인데‘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의지가 정착이 되어 그와 같은 불길이 올라가서 새마을운동이 성공했다고 봅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새마을운동의 처음 시작은 농촌새마을운동입니다. 그 다음에 도시새마을운동, 세 번째는 공장새마을운동, 네 번째는 자연보호운동, 마지막 다섯 번째가 직장새마을운동입니다. 직장새마을운동은 정부에서 무슨 이수를 준 것이 아니고, 그 직장마다 특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꼭 해야 될 사항을 선정해서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77년도에 직장새마을운동이 확산되어 77년도부터 직장새마을운동을 하는데, 경상북도 도청의 경우에는 각 실국에서 고참 6급 직원 한사람씩 전체 10명이 차출되어 직장새마을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제가 당시 직장새마을협의회 회장이었는데, 도청 안의 직장새마을을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한 끝에 4가지로 분류해서 한번 해 보자고 했습니다. 당시 도지사는 이미 고인이 된 김수학 씨인데 새마을에 대한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당시 도청 직원이 천 명 정도 되는데 중식 때 식당의 음식의 질이 저하되고 맛도 없었습니다. 직원 천 명 중 보통 400명 정도가 식당을 이용하는데 맛이 없고 비싸다고 하여 원인을 물어보니까‘인건비가 많이 나가서 도저히 질을 향상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인건비를 줄이자는 건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직원들이 식당에 들어가서 앉아있으면 식당종업원들이 밥을 가져다주었는데, 그 방법에서 직원들 스스로가 밥을 가져다 먹는 것으로 해서 자율배식을 적용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뷔페라는 게 없어서 다들 생소해 했고, 자율배식을 처음 하다보니까 자기가 먹는 양을 가늠하지 못해서 음식을 많이 가지고 와서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율배식 첫날 400명분 식사에서 80명은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자율배식이 정착이 되지 않아 그랬던 거였습니다. 직장새마을지도자들은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해서 점심시간인 12시에 줄을 서서 직원들에게 먹을 만큼 가져가라는 계도(啓導)를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음식을 남기면 숙직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공무원이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숙직이었습니다. 그렇게 10일 동안 계속 계도(啓導)하니까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게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식의 질이 향상되면서 맛도 좋아져서 청 내에서는 상상도 못할 멋진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도청 안에 각 과가 30개가 되는데, 당시에는 한 과에 신문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5종류가 들어가고 안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문은 대략 오전에 보고 오후가 되면 신문을 안봅니다. 그래서 신문을 그냥 버릴 것이 아니라 수집을 하자고 해서 신문수거함을 크게 하나 만들어 숙직실 입구에 배치해 놓고 각 과에 급사(야간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 책임지고 과에 있는 신문을 모아 수거함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과에서 가져왔고, 안 가져왔는지 항상 체크하게 했습니다. 신문을 가져오지 않으면 급사에게 호통을 냈는데, 다섯 종류의 신문을 30개 과에서 모으니 양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신문을 15일마다 제지회사에 팔았습니다. 김수학 지사가 그러한 것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직장사마을협의회에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때때로 저희들을 불러서 격려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신문판돈을 받아 경비원(수위), 운전기사, 심부름하는 사환들에게 내의도 사주고, 운동화도 사주고, 명절날에는 양로원, 고아원을 위문 방문하니까 도에서 별도로 돈을 주지 않아도 신문 판매한 수익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지금은 어느 정도 공무원의 보수가 상당히 올라가서 좋았는데 당시에는 공무원들의 보수가 빈약해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당시 불우한 직원들. 이를테면 가족이 입원해 있거나 장기간 입원 해있을 때 입원비가 부담된다는 것을 알고 모금운동을 했습니다. 모금해서 불우한 직원들에게 입원비라든가 생활에 보태 쓰도록 격려금을 준적도 있습니다. 네 번째는 매월 넷째 주 토요일 12시부터 청사 내외 대청소를 실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깨끗한 환경이 조성되고 또 근무의욕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4가지를 중점적이고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또 우리 뒤에는 도지사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기 때문에 아주 좋았고, 정말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도청 공무원들이 현재 70대와 80대로 전부 새마을운동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바로 새마을운동의 주역입니다. 비록 우리가 농촌에 가서 지붕개량을 하고, 마을길을 넓히는 그러한 작업은 안했다 하더라도 직장 나름대로 특색 있고, 실천 가능한 운동을 함으로써 새마을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당시 공무원들은 임일재라는 존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공무원퇴직한지 올해 20년째인데, 때때로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 할 때 멋지게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좋고, 그것이 사는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직장새마을운동은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농촌새마을운동을 처음 할 때 군별로 분담을 해서 마을에 나가 그분들과 숙식을 같이 할 때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착수했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능공이 부족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당시 그것을 극복하기 힘들어서 조그마한 교량을 할 때에는 토목직공무원들이 설계 및 감리를 지도했고, 기능공들을 동별로 순회하도록 해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지금 이나 옛날이나 모든 사업을 하면 100%는 성공이 안 됩니다. 다만, 몇 %의 시행착오가 났느냐가 문제인데 시행착오를 몇 %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도록 최대한 노력을 했습니다. 자기 역량, 자기 기술, 모든 정열을 쏟아서 했기 때문에 크게 하자가 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100%는 성공을 못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현재까지 파급효과는?
답. 한마디로 말하면‘크다’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 원조를 받는 나라가 주는 나라로 되었습니다. 그 바탕은 새마을운동으로 해서 국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마을운동이 세계화되었습니다. 한동안 새마을운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는데 다행히 국가브랜드로 새마을사업이 이루어져서 1991년부터 몽고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84개국에서 약 5만여 명이 빈곤퇴치의 좋은 모델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은 이제 국제화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기회의 땅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세계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베스트셀러‘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을 쓴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D. 삭스라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2010년 11월 9일에 경상북도 도청을 방문해서‘어떻게 빈곤의 끈을 끊을 것이냐’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고, 새마을운동중앙회와 경상북도가 공동으로 구미에서 제1회 새마을박람회를 개최를 했습니다. 2009년 9월 18일부터 9월 22일까지 5일간 약 30만여 명이 관람을 했는데, 특히 개막식행사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하셔서 새마을운동을 격찬하는 사항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위한 포럼이 2011년 4월 19일에 경주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때 주제가‘새마을운동의 세계화,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9개 나라 대표들이 와서 성공사례와 토론을 한 그러한 실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마을운동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뻗쳐 완전히 국가브랜드가 되었습니다. 현재 70대 혹은 80대분들이 당시에 피땀 흘려서 하나가 되어 오늘의 새마을운동이 세계화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현재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70대와 80대분들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주역이라는 것만 알아줘도 좋겠습니다. 그분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소득이 2만 달러, 또 세계경제규모 10위권 진입, G20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력이 엄청나게 신장이 되었는데 그 바탕을 말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들을 70대와 80대분들이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우리가 풍요롭게 잘사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후 한때 새마을운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각 관공서에 새마을 기(籏)가 개양되었는데 서울시장(당시 조순)과 정무부(당시 이해찬)가 새마을 기(籏)를 내리라고 해서 새마을 기(籏)를 내렸습니다. 그렇게 새마을의 존재가 영원히 없어질 뻔 했는데 다행히 국가에서 4월 22일을 새마을의 날로서 지정했다는 것이 때늦은 감은 있지만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다시 뭉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룩하신 새마을정신을 되살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탕으로 한층 더 앞으로 힘차게 나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