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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의 추진 배경과 대통령의 의지에 대해서 말씀 해주시겠어요?
답. 새마을운동의 추진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얘기를 이미 하셨을 겁니다. 농촌을 잘 살게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차원에서 새마을운동이 잘 살기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빈곤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60년대 처음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차, 2차 추진하는 과정에 농촌으로부터 유능하고도 젊은 많은 인적자원이 도시로 빠져나가고 농촌은 상대적으로 많은 개발 수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자원의 도시 유출, 또는 공업지역으로 유출 때문에 농촌지역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되겠다. 그리고 농촌에 스스로 지역의 자원을 이용해서 자조적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심 끝에 나온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리더, 즉 대통령의 농촌에 대한 이해, 그리고 농촌 빈곤 실태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서 다른 분 보다는 훨씬 농촌 근대화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이 결과로 새마을 운동이 시작이 되었고 성공 했다고 저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문. 당시 정부 관련 부처와 고위직 공직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답. 사회 전체는 아무래도 공업단지를 만들어가지고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었습니다. 정말 어떻게든 빈곤으로부터 탈피해야 되고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국민적, 시대적 수요가 국민들에게 뭔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되겠다는 인식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빠른 시간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요, 결국 우리들이 간과하고 있었지만 한국전쟁하고 전쟁 피해의 복구나 극복 과정에서 우리 능력이나 우리의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등 우방의 지원이 어쩌면 우리나라의 보릿고개를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면서, 그대로 우리가 갈 수는 없지 않는가, 그리고 전국 민둥산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편하게 살 수는 없지 않는가, 가뭄이 오면 농사를 거의 지을 수 없는 천수답 일색인데 그런 상태에서 우리 농촌에 희망이나 식량 문제에 대한 안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교육수준은 높지만 우리 스스로의 삶의 문제 하루 세끼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북 대치 상황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하는 등등의 고민을 그 당시에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추진력과 결부시켜서 결국 산업화를 시작 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농촌이 상대적으로 더 처지게 되니까 농촌문제를 자원을 적게 들이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차원에서 새마을운동이 나왔다 이렇게 본다면 제가 판단컨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 혁명을 통한 집권, 이런데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나 또는 박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분들이야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받아들였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의 특징이요, 아주 적은 걸 지원해서 아주 큰 걸 얻어낸 운동이거든요? 그러니까 정부 지원 규모라든지 실적으로 봤을 때는 미미한 거예요.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이 그래서 정책 사업이 아니고 국민운동으로 추진이 되었잖아요.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아마 지금 20세기 말이나 21세기 초 기준으로 정부가 재정을 투입하고 그것이 사업이 추진이 되고 성과로 나타나는 패턴을 생각하면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었거나 국가의 부가 투입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소위 농민들에게 일종의 자조적인 개발, 스스로 일어서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촉매의 기능을 시멘트를 통해서 제공했거든요? 그러니까 정부가 제공한 건 초기에는 시멘트 값이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얘기하면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 못한 후대 분들은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시멘트를 많은 분들이 설명 했겠지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330포대씩 지원을 했거든요? 한 포대가 25kg인가 그럴 거예요. 이것을 34,665개. 그 개수만큼 마을에 똑같은 양을 줬으니까 분명하게 나와 버립니다 규모가. 그래서 이 시멘트를 가지고 주민들이 뭘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반응을 측정한 것이 초기의 사업이었습니다. 그 대신 시멘트는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총량을 민간 부문에 대한 공급을 유보시키더라도 정부쪽에서 확보해가지고 공급했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정부 예산으로 마을 앞 공터에까지 시멘트를 도달시키는 것은 어쩌면 그 당시 주민들로서는 굉장히 고맙게 느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생각 합니다.
문. 당시 관련 부처나 공직사회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단 말씀이신가요?
답.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새로운 탐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계속사업처럼 또는 연례적으로 반복되어온 사업처럼 관행이라든지 준비태세가 완벽했던 게 아니고요. 모든 게 그때 내무부를 중심으로 청와대, 내무부, 그리고 일부 관련부처에 협조 속에서 거의 밤새기 작업을 해가면서 신 개척운동처럼 되었어요. 그러니까 공무원들은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현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이런 정도 알려져 있었고요. 처음에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보다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이름이 공무원들에게는 익숙했습니다. 그니까 새마을운동은 종합적으로 이러한 사업들이 추구하는 개념과 운동의 범주를 포괄한 것이고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농민들이 마을 현지에서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게 더 가깝게 느껴지고, 읍면이나 시군 공무원들도 바로 이 새마을 가꾸기라는 말을 많이 썼지,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슬로건으로 받아들였죠. 새마을 가꾸기라는 것은 뭐냐. 헌 마을을 새로운 마을로 바꾸기 위해서 마을을 주민 스스로가 가꿔보자. 그런 뜻인데 대표적인 게 아마 지붕개량 사업일 겁니다. 초가지붕, 저도 농촌 출신이지만 매년 짚으로 새로 갈아 이어야 되고, 그리고 잘 썩고 하니까 그 초가지붕을 시멘트 지붕으로, 그리고 시멘트를 공급받아가지고 그 시멘트를 가지고 주민들이 직접 만든 기와로 만약에 갈아 이을 수 있다면 농민들은 초가지붕 매년 갈아 잇지 않아도 되고, 또 보기에도 좋고, 또 페인트 색깔도 칠해 놓으면 예전에 없었던 활력이 농촌 모습에서 나오니까 주민들이 자신감을 느끼고, 오 이거 괜찮은 것이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읍면 공무원들도 우리 농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고 하는 일종의 신선한 충격을 통해서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환영이니 아니냐 하는 것보다도 당연히 하는 걸로 공무원들은 여겼고, 지방 주민들은 자기들에게 자기들이 돈을 내지 않는 시멘트가 마을당 300포대 이상이 오니까 고맙고 반갑죠. 왜 시멘트냐 하는 얘기들을 사람들이 아마 할 수 있을 거예요. 정부가 그때 급하게 개략적으로 했지만 농촌에 뭘 주었으면 좋겠느냐 하는 조사를 그때 했어요. 그래 보니까 시멘트가 제일 좋다 하는 가정주부, 농촌 주부들의 바람이 많이 반영이 되었고, 다목적 다용도로 쓰이는 일종의 기본 물질이기 때문에 농촌에서 매우 유용한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농민들이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 초기 새마을운동이 어떤 상태에서 추진하게 되었는지 준비과정을 말씀해주세요.
답. 주민들한테 여론조사 요구조사를 해보니까 시멘트가 좋겠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새마을 가꾸기 사업 지침을 내무부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것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박정희대통령이 핵심 참모들과 함께 지방의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둘러보시고 스스로 뭔가 한꺼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야지 이렇게 가뭄 피해가 전국적으로 나타나는데 마을단위로, 농민 개개단위로 맡겨놓으면 언제 문제가 해결 되겠느냐 하는 걱정을 하셨고 그것 때문에 관계부처 회의를 거쳐서 결국 그렇다면 적은 예산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동시에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들의 행동을 우리들이 촉구하는 게 뭐가 있겠느냐 그래서 나온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새마을운동은 국가 예산이 충분해서 마을단위로 충분히 나눠줄 수 있었다면 아마 안 나왔을 거고요. 그 다음에 농민들이 모두 열심히 가뭄을 극복하고 문제해결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도 안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일부 농민들은 정말 그 가뭄 속에서 어떻게 보면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들녘에서 그것을 극복해가지고 조금이라도 뭘 재배해보고 생산해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많은 농민들은 그걸 포기하고 우리가 나서봤자 방법이 없다. 물이 안 나오는데 어떡하느냐. 이런 체념과 좌절상태에 있을 때 그 일부의 의욕과 도전을 가지고 하는 농민들의 그 기상이 우리 농민 전체의 기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한 것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 뭐겠느냐. 해서 나온 게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거든요? 그러니까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농촌의 환경운동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농민들의 의식을 전환시키고 도전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악화된 조건에 대해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와 계기를 조성해주자. 라고 하는 데 주안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 계발운동, 정신 계발운동, 또는 일종의 문화 창조운동이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문. 농촌에 무엇이 필요할까를 설문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어떤 과정으로 설문을 진행하게 된 건가요?
답. 그 당시엔 대부분의 농촌 행정은 군 공무원, 그 다음에 산하에 있는 읍사무소 면사무소 공무원, 그리고 그분들을 돕고 있는 이장을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장이 열심히 한 곳은 더 세밀하고도 정확한 수요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해 볼 수 있고요. 이장님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깊은 이해가 없거나 배움이 짧아가지고 그 부분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마을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공통적으로 읍면 공무원들은 중앙정부로부터 받은 긴급한 지시와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지만 날밤을 새가면서 그때는 일들을 했습니다. 중앙부처인 내무부의 공무원들도 저 자신을 포함해서 집에 못가는 날이 너무 많았어요. 지금처럼 모든 게 시스템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회가 아니고 정부가 역할을 했던 시대거든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뒷 질문에 나오는데 지방정부라는 개념이 그때는 사실상 없어요. 왜 그러냐면 지방자치를 추구했던 이런바 제1공화국 때와는 달리 박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소위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것을 잠시 유보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민들 직선제를 유보하고 대통령 임명제로 해서 전환시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비판의 소지가 있겠지만 능률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는 획기적이었죠. 그러니까 중앙정부에서 방침을 정해가지고 지방에 하달을 하면 지방에서는 완전히 중앙정부하고 지방정부를 구분할 필요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여 줬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행정주도형이라고 볼 수 도 있고 중앙정부주도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차피 자원을 충분히 갖지 못한 나라에서 개발의 긴급한 수요가 너무 큰 시점에서 그리고 자원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악조건 속에서 이 일을 했기 때문에 결국 초반기에는 공무원과 이장, 나중에 새마을 지도자 제도가 생겼거든요? 남녀 새마을지도자의 헌신적인 기여가 굉장히 중요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공무원들도 그렇고 새마을지도자들도 그렇고 지금처럼 보상받고 수당받고 하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다 헌신이었죠.
문. 시멘트가 주부들에게 필요하던가요?
답. 가장 주부들이 원했던 것은 한 서너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주부들이 매일 불을 떼면서 밥을 하는데 나무를 떼면서 연기 속에서 얼마나 시달려요. 그러니까 주부들이 부엌을 개량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다음에 주부들이 매일 나가서 자기 집에 반드시 가져와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물입니다. 동네 우물에 가가지고 물을 길러 와야 되는데 우물이 정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비가 오면 주변에 흙물 영화를 받아가지고 물이 탁해지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들어가서 수질이 나빠지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빗물이 안 들어가도록 우물을 점검하고 뚜껑을 덮을 수 있으면 되면 참 좋지 안겠느냐 하는 주부들의 간절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고, 세 번째는 지금처럼 세탁기가 어디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에서는 거의 빨래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또는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여성들이 이고 냇가로 가서 냇가에서 흘러나온 물에다 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흘러가는 물에다가 빨래를 하려다가 보면 거기에 있는 이른바 자연석, 하천가에 있는 돌 거기다 빨아야 될 거 아니에요. 비벼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연석이라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쓰기도 불편하고 많은 농민들이 동시에 쓸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거기다가 빨래를 할 수 있는 빨래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욕구가 간절했기 때문에 주부들의 그러한 소망이 시멘트라는 이름으로 건의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거에요.
문. 초기 새마을운동의 정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답. 초기 새마을운동은 이미 말씀드린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것은 마을에 기본생활여건을 조금 더 낫게 개량하고 현대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붕을 개량하고, 그 다음에 대나무라든지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아주 가능 말뚝 같은 것을 쭉쭉 꽂아서 연결시켜놓은 울타리, 또 거기다 나무를 심어서 생 울타리도 있죠. 그러한 울타리를 담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농민들이 집을 도시계획이라든지 또는 마을 설계에 의해서 지었던 게 아니거든요. 누가 정착하면서 몇 집이 자연스럽게 짓고 나중에 추가로 사람이 들어오면 또 짓고 그러는 과정에서요 안길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길이 연결도 안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두 사람이 지게라는 거 아세요? 영어로는 A-frame 이라고 그럽니다. 두 사람이 지게를 지고 가면 아주 고생하지 않으면 비켜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좁았어요. 그러니까 그 안길을 넓히는 일이라든지. 그리고 각 가정에서 그릇을 씻고 생활을 하면서 물을 버리면 나오는 물들이 흘러가는 일종의 하수로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가 하수구라고 보통 쓰는데 하수구라고 하는 것은 잘 정돈된 구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냥 보통 집터라든지 또는 길 높이보다 약간 낮게 도랑처럼 파가지고 흘려보내거든요? 그럼 어떤 데서는 고이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썩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일종의 도랑, 마을 안에 있는 조그마한 도랑을 우리가 말하는 뚜껑은 제대로 안 덮어 졌지만 하수구 모양으로 만들어서 마을 환경을 고치고.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우물, 빨래터 그리고 함께 벼를 말린다든지 또는 벼를 수동식 탈곡기에다가 수확하는 작업이라든지 하여간 벼를 베어가지고 지게로 지고 마을에 가지고 오면 그것을 알곡만 골라내는 수확의 작업이 있는데 그 작업을 할 만한 공간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작업공간을 만든다든지 이걸 보통 우리가 마을 공동 작업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어떤 때는 비료라든지 농기구라든지 이런 걸 간직해서 비도 안 맞고 눈도 안 맞고 그러면 좋을 텐데 그런 창고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조금여유 있거나 조금 낫게 사는 농가에서는 개별 창고가 있었지만 가난한 집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동 창고 만든다든지 이런 일들을 농민들이 원했고 또 그 농민들이 결정을 했어요. 처음에 사업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할 때 우리가 두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정말 경험이 없는 농민들은 그걸 해보지 못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형편에 맞는 농사만 짓고 살아왔지 그렇게 시설을 만들어 본 다든지 또는 개량을 해본 일이 없어요. 집 안에서만 자기 집 부엌을 좀 고쳐봤지. 마을 전체가 부엌 고칠 수 있는 계기도 없었고. 안길 개량은 못했죠. 왜냐하면 자기 집에만 겨우 가지고 들어가면 되지, 마을 안에서 서로 남의 입장을 고려할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도대체 마을단위에 필요한 사업들이 뭔가 주민들과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읍면공무원들을 통해서 조사를 해보니까 한 20개 나왔어요. 그래서 그 스무 가지를 가지고 내무부가 새마을 가꾸기 사업 추진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그 새마을 가꾸기 지침은 꽤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안길 확장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다. 그리고 하수구는 이렇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 농민들은 이런 부분에 협력해야 된다. 이렇게 만들어 주었거든요? 그래서 그 지침이 있었기 때문에 읍면 공무원들이 그걸 보고, 마을 주민들한테 가서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협의과정이 성공할 수 있었죠. 하나는 이장 중에서도 일을 잘 하시는 분이 있고, 또 일의 능력이나 일의 범위가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경우는 힘들지 않겠어요? 그런데 일부는 교육을 더 받은 분도 계시고. 군대 가가지고 공병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공사를 해 봤잖아요. 그래서 그런 분들이 앞장서서 예를 들면 면사무소에 관내에 있는 이장들이 다 모여가지고 경험 있는 사람들이 내무부에서 온 지침에 이런 사업은 이렇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자기들끼리 자체 교육을 한 겁니다. 그래서 마을단위로 사업들이 이루어졌다는 점. 그러니까 하나는 지침이 위에서 내려왔고, 하나는 마을 단위에서 어려운 일들은 읍면이나 시군 단위로 자기들 자체 일종의 교육과정, 협력과정을 거쳐서 일이 추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아마 그림을 보듯이 또는 그림을 그리듯이 이해가 될 거에요.
문. 정부차원에서의 시행착오와 농민 단위로의 시행착오의 차이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답. 그러니까 정부단위에서 시행착오라고 하는 것은 마을의 여건이라는 게 정말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새마을 가꾸기 사업 지침을 내려 주었는데 하다가 보니까 마을의 입지와 여건에 따라서 선택되는 사업도 다르고 그 사업에 따른 문제 제기도 달랐어요. 그래서 맨 처음 시급하게 내려준 지침이 다소 획일적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많이 보완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마을을 다섯 개 입지별로 구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순 산속에 있는 산촌, 산촌마을. 그 다음에 산속은 아니지만 산 밑에 산기슭 언덕진 곳, 비탈진 곳에 있는 중 산간마을. 그리고 이제 평야지대, 예를 들자면 전라북도 이리, 옛날에 이린데 지금은 익산이죠. 그 김제라든지 익산 이런데 가면 얼마나 평야가 넓습니까. 그 한 논 가운데 있는 평야마을. 벌써 세 개죠? 그리고 어떤 마을은 도시 근교에 있어가지고 농촌마을이긴 한데 다른 마을하고 여건이 다르단 말이죠? 그래서 근교마을. 그리고 또 하나가 바닷가나 섬은 또 다르잖아요? 그래서 해안도서마을. 이렇게 다섯 개로 구분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업 종도 마을 입지와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고. 그래서 그 사업 종류가 줄어든 반면에 그 사업을 자세히 도와줄 수 있는. 또 자세히 이해시키고 추진될 수 있도록 협력해 줄 수 있는 일종의 개선이 이루어졌죠. 이런 획일성이 가져온 것이 초반이 어려움이 있었다. 하는 게 있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시행착오라고 하면 그겁니다. 주민들이 시멘트를 받아가지고 사업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이. 갑작스럽게 시멘트를 받고 그래 연말까지 사업을 하라. 그러니까 주민들 자체가 시멘트 양은 제한되어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은 많아서 마을도 조금 큰 마을 가면 윗부분 아랫부분 동쪽 서쪽 다 다를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사업이 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합의를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주민총회거든요? 그러니까 한 집에 한 사람씩 모여가지고 논의하자. 거기서 안 되면 손들어서 많은 쪽으로 결정하자. 이게 주민 총횐데. 여성들과 관련된 사업이 많잖아요. 그래서 아 우리 여자들은 의견이 다르다. 그러니까 여자들끼리 따로 사업을 결정하자. 해가지고 생긴 것이 부녀 총회. 그래서 마을마다 두 개가 생겼고 그래서 지도자가 둘 나온 겁니다. 주민총회에서 새마을 지도자가 나오고, 부녀총회에서 부녀 새마을 지도자가 나온 거에요. 그래가지고 그분들이 결국은 사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마을이 첫 해에 시멘트를 제대로 못 쓰고 시간은 없다 보니까 팔아먹어버리기도 하고요, 그 다음에 시장에 가서 팔 거 뭐 있느냐. 내가 사지. 해가지고 몇몇 집에서 돈 좀 있는 부농이라는 농가에서 사가지고 자기들 용도로 쓰고요. 또 일부는 아예 그냥 쌓아 놓고, 나도 모르겠다. 이장이 도저히 얘기를 듣고 새마을 지도자 선출도 잘 안 되고 하는 그런 마을에서는 모르겠다 해가지고 덮어놓고 그 해를 보냈어요. 그래서 두 번째 해 부터는 그런 마을을 제가 다 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해. 우리가 성공한 원인 중에 하나가 평가를 빨리 했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첫 번째 해 봄에 시멘트를 지원해주고 그해 11월, 12월에 전국적으로 평가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그래도 잘 했다고 볼 수 있는 마을만 골라서 두 번째 해에 지원을 하고 나머지는 지원을 안 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민들이 우리들이 잘 해야 정부 지원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싸우지 말자. 해가지고 일종의 각성의 반성이 있었고 이것이 한국의 발전을 빠른 속도로 촉진하는 선의의 경쟁으로 작용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초기에 경제논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획일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다가 마을 주민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우리가 소홀히 했다. 이런 점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죠. 그래서 어쩌면 풀뿌리 민주주의에 의한 기반도 약했지만 정부에서 그 부분에 대한 비중을 너무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우리 새마을운동이 초기에 다소 그러한 마찰음이라고 할까 또는 사회적 경비가 일부 발생한 사례들이 있었다 하는 것이 하나의 시행착오라면 시행착오가 될 수도 있고요. 도시지역은 그럼 안 해도 되는 거냐. 그래서 처음에 새마을 운동이 순수한 농촌운동으로 시작됐어요. 그런데 본질은 환경개선 운동이 아니고 정신계발 운동, 인간계발 운동이잖아요. 그럼 도시는 더 개발 안 해도 되느냐. 고치지 않아도 되느냐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래서 농촌 새마을 운동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도시에서도 뭔가 해야 될 것 아니냐 해서 도시 새마을 운동이 나왔는데 그러다보니까 농촌새마을운동 연장선상에서 도시새마을운동을 하겠다고 하면 도시사회가 쉽게 이해를 못 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왜냐면 농촌에서 통하는 것을 도시에서 해낼 수가 없죠. 안 맞죠. 원리도 다르고 사업 내용도 다르고. 그래서 도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접근을 좀 빨리 했었더라면 그래서 도시 새마을 운동이 농촌에 더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농촌 새마을 운동에 동력을 제공해 줄 수도 있는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에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것은 농촌운동으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범국민운동이라는 것으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이 납니다. 그때 70년대 중후반에 김치열장관이라는 분이 내무장관을 하셨는데 검찰에서 오셨었거든요? 그분의 일종의 시정방침 중에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라는 말이 쓰여 있던 걸 제가 기억을 합니다. 새마을운동의 범국민화가 우리말로 말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농촌 새마을운동이 성공했으니까 도시도 새마을운동을 해보자라고 하는 그 당시의 목표를 담고 있는 거거든요. 이러한 차원에서 세계 어디도 마찬가지지만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대개 불균형 성장을 많이 하는데 우리도 농촌 새마을운동이 성공하면서 도시도 달라져야 되겠다. 농촌이 못 배우고 가난해도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놀라운 기적을 이뤄냈는데 도시에서 수준도 높고 자원도 더 나은데 못 할게 뭐 있느냐 해가지고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농촌새마을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그 복합적이고 매우 다기한 도시에 처방을 내린다는 게 쉽지 않지 않겠어요? 이 부분이 시행착오랄 건 없지만 좀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 다음에 하나만 더 제가 얘기를 한다면 새마을운동 초기에 소득증대운동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환경개선을 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의욕과 자신감을 농민들이 갖게 되면 그것으로 다시 소득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경우에 마을 단위의 투자 재원이 늘어나는 샘이 되잖아요. 그러면 재투자가 늘겠죠. 이러한 차원에서 소득증대사업을 했는데 다른 것과 달리 소득증대사업은 상당한 지식과 기술, 마케팅이 집결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소득증대사업의 경우에는 성공한 경우도 많았지만 성공하지 못한 경우도 꽤 많았다. 그래서 인간계발 정신계발 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이 농촌에 획기적인 전환을 만들어 줬는데 소득증대 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현대화 쪽으로 자연스럽게 접목이 잘 안 되어가지고 농촌이 어쩌면 새마을운동의 지속적인 심화 또는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초기에 충분히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점이 아쉽습니다.
문. 정부와 민간의 협력 이해관계들은 어땠나요?
답. 그 부분은 그 당시에는 속말로 말해서 NGO도 별로 없었고요. 민간이라고 하면 언론이 대표 기능을 했다고 봐야죠. 그러나 언론의 경우에 처음에는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썩 좋은 해석이라든지 내지는 의견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게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구도 아니냐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었고요. 또 실질적으로 야당 정치인들은 박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이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을 해선 안된다 라고 많이 주장을 했거든요? 근데 이게 마을 단위에서 사업의 성과가 나타나고, 농민들이 스스로 이 운동에 대해서 자신감과 필요성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확보할 때까지 한 3,4년 동안은 야당들의 딴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성과가 나타난 후로는 정치적인 마찰은 해소가 되고, 새마을 운동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70년대 중반부터 새마을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교감, 내지는 교류 협력, 이 부분이 어쩌면 우리 국민들에게도 새마을운동에 보편적 인식을 가져오는 계기도 되었다. 저는 그렇게 보고요. 또 새마을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부분에 대한 인식이 많이 확대 되었고 특히 사회 지도층 교육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 각계에서 리더십이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 농촌 지도자들과 함께 숙박을 하면서 합숙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동창이 된 거에요. 그리고 들어올 때는 요새 같으면 안 들어가겠다고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워낙 정부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또 정부가 하는 일이 어떤 면에서는 국가 근대화라고 하는 지식층이 됐든 서민층이 됐든 필요한 것을 공감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사회 지도층 과정이 운영이 됐습니다. 심지어 언론사 인사들도 들어왔어요. 일간 신문사나 방송, 요새 말로 말하면 공중파 방송사의 부장이라든지, 국장이라든지, 사장이라든지 이런 사람이 들어왔거든요? 농민들하고 2박 3일, 3박 4일, 함께 숙식을 하면서 교육을 받아보니까, 교육 내용은 누가 와서 강의를 하느냐에 의해서 아마 언론계 계신 분들도 강의 할 수 있는 분들이니까 간접적으로 영향을 다소 미쳤겠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농촌에서 온 남녀 지도자들의 그 순수한 나라사랑에 대한 열정, 뭔가 마을을 현대화 시켜보겠다고 하는 그 강한 욕구, 이런 부분에서 감동을 많이 했죠. 그래서 그 어떤 기업의 총수도 그렇고요. 고위직에 계시는 판검사님들까지도 농촌에 가서 주말이면 새마을 지도자 격려해주고, 어떤 기업들은 성금도 내주고 이렇게 해서 새마을운동의 인식 기반이 정부 입장이나 새마을운동을 중요시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호전되어감으로써 마찰이 줄었다. 그리고 이제는 범국민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농촌운동으로서의 성공은 확실하게 보였는데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노력에 비해서 족적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문. 시행착오를 어떻게 극복해 나갔는지요?
답. 우선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현장 방문과 현장 교감이었어요. 그 당시에 마을담당 공무원제를 우리가 시행을 했어요. 그러니까 군청 직원이나 읍면동사무소에 있는 직원들은 자기가 몇 개 마을을 맡아요. 두 개 마을 또는 세 개 네 개 마을을 맡아가지고 그 마을에서 불만이 나오거나, 사업이 진척이 잘 안 되거나 할 경우에는 공무원의 능력으로 그걸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 인사 고과에 즉각 반영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공무원들이 낮에는 주로 주민들하고 마을 사업장에 가 있습니다. 주민들하고 계속 현장에 지내면서 뭐가 어렵고 뭐가 잘못되었고 뭐에 대해서 더 요구사항이 있는지를 파악하잖아요. 그리고 저녁식사 후에 돌아와가지고 밤에 사무소에서 서류들을 정리하고 또 낮에 주민들한테 들은 얘기들을 정리해서 상급 부서에다 보고를 했거든요? 그 당시에 내무부는 매일 그러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요새 말로 하면 피드백이 정말 잘 된 거에요. 지금은 공무원들 보고 나가서 주민들에게 그런 여론 들어와라 하면 일주일 주겠습니까 이주일 주겠습니까 할 거에요. 그 당시에는 일주일 이주일이 언제 있어요. 바로 몇 시간 뒤에 즉각 보고해야 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굉장히 피드백이 잘 되었다는 점이 있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가 일 년에 한 번씩 연말에 11월, 12월 달에 관계기관 합동으로 구성된 평가반이 있었습니다. 새마을 평가반이 전국 마을을 방문합니다. 그러니까 평가반 수가 많죠. 그래가지고 그 평가반이 현장에 가서 사업을 보고 잘 된점, 잘 못된 점이 잘 정리를 하면 그게 훌륭한 보완, 또는 개선의 자료가 되고 어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는데 소재가 되잖아요. 이러한 평가 방법이 좋았고. 그 다음에 또 있었습니다. 참 고맙게도 대학 교수님들이 새마을 평가 내지는 연구회를 따로 구성했어요. 그래서 주요 대학에는요 새마을 연구회가 다 있었습니다. 사립대학에도 다 있었어요. 그래서 보고서가 나오는 것을 우선적으로 반영했죠. 그 다음에 또 있습니다. 참 대한민국이 훌륭한 나란데 그 당시에 기술교육이라고 하면 농업 고등학교, 공업 고등학교, 상업 고등학교가 있었죠. 그래서 농업 고등학교나 공업 고등학교의 담당 교사분들하고 농과대학이나 공과대학계통의 농촌과 관련된, 또는 농촌에 있는 여러 공사와 관련된 전공 교수님들이 여름방학, 겨울방학 동안에 순회 평가 제도를 했어요. 그러니까 시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 이 마을도 한번 와서 봐 주세요. 이게 다리를 놓았는데 제대로 놓아진 건지 한번 와서 조사 좀 해 주세요. 이런 그 일종의 요구 리스트를 가지고 방학 동안을 쭉 현장을 돌면서 진단하고 평가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한 것 같아요 이런 것은. 그래서 이러한 과정에다가 그다음에 언론이 계속 보도하잖아요. 특히 제가 지금도 기억을 합니다마는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이 계속 새마을과 관련된 현장방문을 많이 하니까 기자들이 수행하지 않습니까. 그럼 기자들이 갔다 와서 요새 표현을 빌면 기사 칼럼도 쓰고 기사 수첩도 쓰고 또는 오피니언 란에 어떤 대안도 제시하고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새마을 사업이 바로 갈 수 있도록 시행착오를 바로잡아주는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있고요. 가장 중요한 거 하나 말씀드릴 게요. 지금은 없어졌으니까 사람들이 기억을 잘 못 할 거에요. 그 당시에 새마을 엽서라는 게 있었습니다. 또는 새마을 지도자 통신이라고도 했어요. 체신부하고 내무부하고 협의를 해가지고 새마을 지도자 엽서를 일 년에 일인당 처음엔 한 스무 장 씩 줬어요. 그러면 스무 개 엽서를 가지고 얼마든지 자기가 쓰고 싶은 얘기를 거기다 핵심만 써서 기관장 명의 써가지고 보내면 바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내무부가 하는 일 중에 전국에서 온 새마을 지도자 통신 엽서를 받아가지고 거기에 들어있는 내용을 새마을 운동 새마을 추진에 반영하는 겁니다. 아마 이것도 굉장히 자랑스러운 제도에요. 지금은 이제 SNS로 진화되었잖아요. 그 당시에 새마을 지도자 엽서는요 아마 세계 초유의, 일종의 SNS라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걸 무시할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채널이기 때문에 누가 그걸 쓰지 마라 보내지 마라 못 합니다. 거기에 군수 욕을 해도 좋고, 동네 건의사항을 해도 좋고, 공무원 비판을 해도 좋습니다. 모두가 다 반영 했으니까요. 이러한 차원에서 시행착오들이 그래도 빠른 기간 안에 많이 시정이 되고 보정이 됐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문. 70년대 초반에 한국 농촌 사회는 어떤 상태였나요?
답. 70년대 초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1,2년 되었을 무렵이거든요? 근데 저희가 대학을 다닐 때 까지 하루 세끼 식사를 제대로 해결하는 분들은 중산층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나 식사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안 먹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경조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이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의 결혼이라든지 내지는 상례가 생기잖아요? 그럼 면 단위에서는 많이들 상호 방문하고 했어요.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간접적인 일종의 부조 기능이죠. 그렇게 하면 그 기간 동안에는 온 동네 사람들을 먹여 줍니다. 저도 꼬마 때 동네에 상가가 생기면 거기 가서 점심 먹게 가자 어머니가 제 손 잡고 가려고 그러고 저는 안 가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저희 사회가 어려웠다 이렇게 보고요. 그렇게 해서 5.16 혁명 후에 바로 시작된 운동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에 infrastructure 일종의 사회 간접자본을 개선해보자 라고 군에 가지 않았다든지, 내지는 여러 가지로 주민들한테 문제시 되었던 사람들이 동원이 되어서 일종의 국토 건설대 라고 해가지고 도로를 내고 다리를 놓고 하는 사업들 한 게 있거든요? 또 한편으로는 재건 국민운동이라고 해서 모든 국민, 특히 농어촌 지역 주민들이 뭔가 잘살기 운동을 벌여보자 하는 시도를 했었어요. 그런데 그건 실패했죠. 왜 그러냐 하면 정부가 명령을 하고 주민들이 거기에 복종하라는 형태였거든요. 그러니까 새마을운동 방식처럼 인센티브라든지 내지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멘트 같은 어떤 지원을 해 주고 그걸 가지고 주민들이 원하는 일을 해보라고 했더라면 모르는데 재건 국민운동 때에는 국가 재건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참여해라, 옳지 않느냐. 라고 상의하잔 직으로 하다 보니까 식사도 제대로 못한 주민들이 거기에 나서서 어떻게 애국심을 발휘 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실패를 했고, 새마을 운동 때는 아까 말씀드린 재건국민운동이 겪었던 실패의 원인이 보정이 되어서 성공을 했다 이렇게 보면 역사발전이 모두 유익한 상호관계를 갖는다 이런 측면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문. 갑자기 주미들에게 시멘트 주면서 마을을 새로 가꿔라 했을 때 농촌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답. 정부가 공짜로 시멘트를 330포대를 마을 코앞에까지 수송해놓고 여러분들이 알아서 쓰세요 간섭 안합니다. 좋은 사업 결정해가지고 쓰세요. 이렇게 얘기 할 때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농민들은 환영 했죠. 왜냐면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 미국 정부가 정부 간의 협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준 밀가루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말씀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 정부가 한국에 곡물 지원 형태로 지원한 밀가루나 또는 분유, 이것이 농촌까지 공급되면서 일종의 중앙이 지방에다가 나누어 주는 것도 있구나 라고 하는 정도만 알았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자기들이 사와가지고 자기 집을 고쳐보고 싶은, 그러나 돈이 없어서 도저히 그렇게 못한 이러한 주민들에게 시멘트가 상당히 330포대면 많은 양입니다. 그것이 마을 앞에 척 쌓이니까 주민들은 환호했죠.
문. 당시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신뢰가 어땠나요?
답. 우선 농촌주민들이 정부에 대해서 갖는 것은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해결해 줄 수 있다 하는 관행적 사고였습니다. 우리가 48년 정부가 수립 된 후에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서도 정말 주민들에게 일종의 풀뿌리 민주주의 까지를 시행하면서 많은 위로와 격려를 했거든요? 그러다 전쟁이 터져가지고 3년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었잖아요. 그래서 완전히 대한민국이 밑바닥까지 간 상태에 정부 말고는 그 심각하고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정부에 대해서 굉장히 순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학생들이 대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교육을 받다가 보면 사회가 보이고 정부와 시스템이 보이잖아요. 농촌에서는 그런 기회가 없잖아요. 교육도 못 받은 사람도 많았고요. 초등학교 교육만 받고 그냥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사는 분들이 매우 많았어요. 그런 분들이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신뢰를 얘기할 때 소위 4.19혁명을 거친 도시에서 보는 정부하고 가난으로부터 구제해 줄 수 있는 주체라고 당연시 되었던 정부에 대해서 농민들이 갖고 있었던 신뢰의 정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농촌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정부에 의해서 될 수 있고 주어질 수 있다고 봤죠.
문.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었다면 어떤 의견들을 냈었나요?
답. 반대하는 주민들이라고 하는 게 결국 조직화 되거나 제도화 된 게 별로 없었잖아요.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데 비료를 그 당시 정부가 보조를 해 줬거든요? 그러니까 농민들이 달라고 하는 양 만큼 안주고 비료를 조금만 지원받는 경우에 불만을 갖고 있다든지, 그 다음에 그 당시 연료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농촌에서 연료를 쓰는데 그러다보니까 산지 훼손이 심하잖아요. 전쟁 때 불타버리고 이제 겨우 어린 나무 크려고 하는데 농민들이 또 베어다가 떼버리고 하니까 굉장히 감시가 심했거든요? 그래서 그 산림 감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가진 분들, 또 그 당시에는 술을 만드는 양조업이 거의 일종의 허가제였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민속주를 만들어 먹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거든요. 근데 농촌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보면 막걸리라도 만들어가지고 자기 집 일 해주는 사람들한테 줘야 일이 제대로 된다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면 기관 모르게 일종의 밀주 만들다가 적발되어가지고 처치를 받게 되면 불만을 가질 수 있잖아요. 어떤 경우에는 농촌에서 송사가 있을 수 있고 분쟁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지금의 지구대가 아니고 지서, 도시에서 파출소 그랬거든요? 그러한 경찰 내지는 규제기관이 상대적으로 자기에게 불리하게 하고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해줬다고 개인적으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들, 이러한 미시적인 저항이나 갈등은 있었을지언정 농촌 지역에서는 도시에서와 같은 그런 기능이 약했습니다. 왜냐면 농촌 사람들이 그 당시에 신문을 누가 봅니까 잘 안보거든요. 신문을 볼 수 있는 학적 배경도 없고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방송매체가 많이 발전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TV도 그 당시에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거든요 농촌에. 그러다보니까 농촌은 정부에 대해서 그렇게 괴리라든지 내지는 거리감을 크게 갖는 일들이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새마을운동을 통해가지고 농촌이 잘 살게 되면서 거꾸로 농촌이 갖고 있는 문제를 정부에다 투영시키려고 하는 주민들의 자치의식이 향상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새마을운동의 정치적 효과라고 할까, 성과도 아마 나중에 다시 한 번 짚어봐야 될 거에요.
새마을운동은 잘 살기 운동이다, 이렇게 정부가 얘기하고, 처음에 시멘트만 지원을 한 게 아니고요 나중에 시멘트 양도 늘고, 그다음에 철근도 지원을 했거든요, 콘크리트 작업 하라고, 그리고 이제 그 뒤에는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가지고 목재라든지 플라스틱 계통이라든지 이런 것도 지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요 주택계량 사업이라고 해가지고 일종의 조립형 주택이랄까요? 이런 fabric house 개념도 권장이 되고, 설계도 공기관에서 농민들을 위해서 제가 알기에는 12가지를 만들어가지고 맘에 드는 걸 선택하게 하는 등 주민들에게 도움을 실제로 줬죠 정부가. 그러니까 농촌에서 잘 살게 해 주고, 기회를 더 많이 주고, 그렇게 해서 또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이해를 높여 주는데 아마 크게 반대를 하지 않지 않겠어요? 또 소득증대사업 한다고 양묘사업이라든지 양잠사업이라든지 또는 농촌 공장, 그때 이름이 새마을 공장이었습니다. 새마을 공장 사업이라든지, 또 농민들 학교 못가서 억울하지만 스스로 자학을 해 봐라, 자습을 해봐라 해가지고 마을 새마을 문고 활동이 많이 퍼졌고요, 또 요새 말하면 소액 대출이죠, 농촌에서 큰 돈 아니라도 돈을 빌려야 되는데 어디서 빌려, 농협 말고는 빌릴 데가 없는데 농협은 정해진 기준이 전국적으로 통일되다 보니까 조그마한 사업을 해보고 싶은 농민들한텐 불편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생긴 것이 새마을 금고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련의 농민들을 돕고 농촌의 근대화와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시스템적 보완이 꾸준히 이루어지면서 정부에 대한 농민의 신뢰는 그대로 지속이 되든가 오히려 확대 되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문. 지방정부의 중앙정부 정책을 잘 이해하고 따랐습니까?
답. 지금 생각하는 지방정부 개념을 가지고 새마을운동에 적용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5.16 혁명 후에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하는 지방자치제에 대해서 상당부분 유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읍면동장까지 선출직이었던 것을 임명직으로 다 바꿨거든요? 그래서 경제개발에 따른 효율을 추구를 했는데 그러다가 보면 지금과 같이 중앙정부 역할이 지방정부에 의해서 제한받는 게 아니고 중앙정부의 의사가 지방까지 거꾸로 일관되게 아주 효율적으로 전파되고 추진되는 시스템이어서 그런 면에서는 중앙정부의 흐름이 매우 원활하게 마을 단위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봐야 되고요. 그 결과로 재미있게도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개발연대를 거쳐서 1992년도에 지방의회가 부활이 되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직선하는 체제로 복구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배경에서 본다면 지금처럼 중앙정부의 의사나 또는 목표가 지방에서 조정되거나 또는 변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문. 새마을 교육 관련한 정책들 중 어떤 일들을 하셨고 추진 성과는 어땠는지?
답. 새마을 교육이야말로 새마을 운동의 본질과 직결되어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을 농촌개발, 또는 농촌개발 사업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했을 거에요. 새마을운동은 가장 중요한 게 정신계발, 또는 인간계발 사업입니다. 지금은 Human Resource Development, HRD를 굉장히 강조하는데요, 우리 새마을 운동이 해외의 많은 나라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아직도 되고 있는 기본 소지는 project oriented approach가 아니라 manpower oriented approach 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거든요. 학력수준이 낮고 가난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인식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부가 1960년대 재건국민운동 때 나를 따르라 해가지고 실패한 전례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당신을 밀겠습니다 라고 해서 성공한 것이 새마을 운동의 철학인데 그때 우리 농민들이 농민이라고 해서 못 배우고 가난하다고 해서 계속 농촌에서 낙후되고 뒤처지고 묻혀지고 그리고 잊혀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들이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우리도 우리에게 맞는 그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일종의 자기 발견, 또는 각성 운동이었다 이렇게 봐야 되거든요? 그래서 새마을 교육이 초반기에는 주로 정신 계발 쪽으로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술 훈련은 따로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담당했던 것 가운데 농업과 관련된 기술부터 1970년대 중반에는 건축기술을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농민들이 각종 공사를 하다보니까 처음에는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정신계발에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사업의 질이 별로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민들이 자신감을 얻으면서 요구하는 사업이 규모적으로 커지고, 그러다보면 시행착오를 했을 경우에 예산이나 재정 낭비가 되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이제는 정말로 토목, 건축 기술을 농민들에게 가르쳐가지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농민들이 커버함으로서 정부 재정 수요를 줄이고, 할 수 없는 부분은 요새 말로 아웃소싱을 해가지고 이 사업을 완결을 해야되겠다 해서 군청에 있는 기술직 공무원들까지 동원이 되고, 그리고 안 되는 것은 기업에 있는 전문가들도 참여해서 새마을 운동이 질적으로 상당히 발전 했거든요? 이러한 차원에서 새마을 교육이 커버하는 부분이 정신교육에서 시작해서 실용적인 기술 훈련으로까지 연결이 되었고, 나중에는 새마을 지도자 교육과정에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 요령 같은 것도 포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가서 평가해가지고 마을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성과와 문제점에 대한 정부의 결론이 나오기 전에 농민들이 그것을 이해를 해야 불만을 안가질 것 아닙니까. 왜 다른 마을은 5년 연속 지원을 받는데 우리 마을은 3년밖에 지원을 안 해주고 끊어 버리느냐, 그 배경이 자기들에게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새마을 교육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요. 그래서 우리가 새마을 교육에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환경 개선하는 요령을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교육이 아니고, 환경개선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안으로부터 동기 유발을 하고 그리고 이른바 can do spirit 나도 할 수 있다는 정신, 그리고 요새말로 말하는 Do I Y, 그러니까 Do it yourself. 이러한 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 새마을 교육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새마을 교육을 통해가지고 새마을 운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니까 그 마케팅 차원에서 나온 자동차가 코란도입니다. 아세요? 코란도 그것은 Korean Can Do. 한국인은 할 수 있다. 그것을 줄여서 코란도라는 차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새마을 교육이 가져온 성과는 지금도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마을 교육은 어떻게 보면 새마을 교육이 어디에 제대로 초점을 맞춰야 될 것인가를 놓고 좀 헤매고 있다 이렇게 봐야죠.
문. 새마을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답. 새마을 교육이 앞으로 가야 될 방향은 결국 수요자와 공급자 차원에서 봐야 되거든요? 새마을 운동의 특징을 마케팅 개념으로 보면 수요자와 공급자가 일찌감치 접점을 찾는 과정이었습니다. 피터 드러커가 prosumer라는 개념을 내놨잖아요. 그러니까 생산자 producer하고 소비자 consumer를 합한 것이 prosumer인데 새마을운동이야말로 prosumer의 frontier입니다. 우리가 그런 부분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거든요. 지금 시점에서의 새마을 교육이 어려움을 겪고 있느냐, 우리 국민이 뭘 원하느냐를 새마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급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 민간 교육 기관이나 사설 교육기관에서 공급해줄 수 없는 부분을 포함시켜야죠,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공공의 부문. 요즘 정의란 무엇이냐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데 새로운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부문. 이런 부분에 대한 확실한 솔루션이라든지 대안 제시가 지금 되어야 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생각하죠.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 정신인데 그것은 국민 계도용이고요. 가치 체계로 보면 자조, 근면, 협동입니다. 아마 여기 다른 얘기들을 많이 들었겠지만 이 부분은 언급이 안 되어 있을 거예요. 뭐냐, 인간으로서 내가 어느 가치를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인가 그게 자조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이라고 하는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이 소중한가 그건 근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정치적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항상 시장을 벗어나서 살 수가 없다면 여기에서 더불어 살고 네트워킹 하는데 필요한 게 뭔가, 그게 협동이거든요. 그러면 이 자조, 근면, 협동의 가치 체계는 지금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필요한 겁니다. 다만 지금 시장에 필요한 상품으로 개조해내지 못한 게 우리 새마을 시스템의 문제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시 사람들이 지금 자조 합니까? 아닙니다. 너무나 지금 어떻게 보면 흔들리고 있고 자기 정체성을 잃고 있잖아요. 근면합니까? 아니죠. 진실로 근면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열정과 공익에 대한 동의 없이는 근면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협동, 상대방에 대한 존중,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그리고 생산성의 원리, 효율성의 원리, 요새 소통의 원리, 이거야말로 협동의 핵심 요소인데 지금 협동이 필요 없는 시대입니까. 새마을 정신이 낡았다. 새마을 운동이 낡았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들이 낡은 시스템을 가지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채우지 못하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은 자기가 지지 않고 거꾸로 낡은 시스템을 탓하고 있는 격이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새마을운동은 영속적이다. 충분히 영속시킬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저는 새마을 교육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된다. 앞으로 이렇게 생각하죠. 지금까지 새마을운동이 일당일, 일당십을 해 왔다면 앞으로의 새마을 운동은 일당백 또는 일당천으로 가야 된다. 왜, 세계시장을 우리가 품어야 되고, 저 출산 고령화 시대에 공급자는 줄고, 수요자는 늘어난다면 능력을 배가시킬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새마을 교육의 의미는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과 개인적인 평가를 좀 해주세요.
답. 저는 새마을운동을 지금까지 추진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깊은 통찰과 배려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당시 박대통령에게 새마을 조직이 300만이 넘는데 이것을 활용하면 무슨 일이든지 해 낼 수 있습니다.라고 정치적 활용을 주변에서 건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이 적어도 새마을운동만큼은 정치적으로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라고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것도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지, 또는 언급하고 있는지 저는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새마을 운동을 아끼고 함께 해 왔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감사하다는 것이죠. 만약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면 전두환 대통령 정부에서 부딪쳤던 문제가 박대통령 때 즉각 나타나가지고 새마을운동의 존속 자체가 어려웠을 거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새마을 운동이 법적으로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는데 왜 입법을 안했느냐 라는 얘기를 하거든요. 전두환 대통령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법을 만들었죠. 새마을운동 조직육성법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없앴죠. 새마을운동 기금을 조성해서 지금도 기금이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박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법제화 필요성을 못 느꼈느냐, 느꼈습니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서 묶어놓으면 틀림없이 정부 의존도를 높이고 그렇게 되면 여당이 그것을 활용하려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위태로워진다 라고 하는 판단을 하셨는데 정말 그 부분은 저는 혜안이었다, 그리고 애국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은 새마을 운동에 대한 순수한 생각이 좀 더 빨리 국민의 보편적 인식이 되었더라면 새마을운동이 더 확대되고 더 뿌리를 내렸을 텐데, 하나는 도시와 농촌에서 농촌운동으로 치부해버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끝나면서 새마을 운동도 끝났다고 여기고 지속되지 않고 오직 농촌에서만 지속되어 왔다는 점. 새마을운동 중앙 본부에서는 새마을운동 각 부분이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것이 명칭상으로 남아있거나 일부 골간조직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없는 시스템은 사실상 제대로 작동이 안 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또 아쉬운 점 중에 하나가 바로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적인 논리를 가지고 국가의 공통가치로 추진해 나가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정권 차원의 재단을 좀 안하도록 우리 국민이 만들어야 된다. 근데 지금 이대로 가면 농촌중심의 새마을 지도자들이 나이들이 많고, 또 농촌 인구 또는 고령화 차원에서 그분들 세대가 가고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정통적 인식이 안 되어 있는 차세대가 앞으로 어떻게 새마을 운동을 승계해 나아갈 것인가. 국제적으로는 새마을운동이 널리 마케팅 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진공상태로 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되고 여기에는 초지역, 초정파적 노력으로 가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요, 앞으로 새마을운동이 가야 될 측면은 따라서 새마을운동이 대한민국이 자원 없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세계에서 여러 가지 부문에 주목받는 모범 국가로 성장하는 가치형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앞으로 새마을 운동을 계속 품질관리 차원에서 업그레이드 시켜 나가야 되고, 또 새마을운동 중심 세력이 농촌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을 풀려고 했었던 새마을 세대를 넘어가지고 이제는 세계 속에 보이는 것 보다 안 보이는 것이 더 훌륭하고 위대한 한국인의 모습을 새마을 이름으로 레이블을 붙여서 마케팅 해야 되는 시대로 우리가 가야 한다. 그러려고 하면 근면, 자조, 협동, 또는 절대적 개념에서 자조, 근면, 협동 가치를 이제는 도시형 21세기형으로 문화화 시켜가지고 한국인이 정말 자조, 근면, 협동이 몸속에서 체질화 되어버린 그러한 새로운 한국인 상. 그래서 Global Identity 를 새마을 철학을 바탕으로 확립해 나가면 저는 결코 한국이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세계적인 리더십을 갖춘 나라로 갈 수 있다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교육, 새마을 사업, 새마을 운동, 새마을 조직, 이 최종적으로는 새마을 문화, 그리고 한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구성해주는 핵심 요소로 다시 재조명되고 재구축되어야한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후배 세대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새마을운동을 이름이라도 다시 바꾸자. 지금 새마을 운동이 언제부터 새마을운동인데 아직도 새마을 운동이냐 하고 아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으세요. 새마을운동에 대한 본질과 철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세계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자고 요구를 해 오고, 그래서 코이카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등을 포함해서 새마을운동의 국제화 또는 세계화 작업들을 하고 있는데요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재외 동포들에게 가요무대를 만들어가지고 한국을 떠난 시점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일들과 다른 바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한국의 발전 동력이 되고, 미래 한국의 품질을 결정하는 소프트웨어로서 새마을운동을 우리가 확보하지 못하면 옛날 얘기 들려주다가 나중에 공허한 상태에서 우리가 거품처럼 스러져 버릴 거 아니에요. 그래서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저는 전면적으로 재평가를 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