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저희 그때 내무부에 새마을 상황실이라고 있었습니다. 새마을 상황실에서는 국내외 귀빈들이 새마을에 관해서 알고자 방문했을 때 브리핑을 해 드리는 상황실이, 브리핑 룸인데 상황실에 가면 박대통령이 직접 메모하신 게 있었어요. 새마을에 관한 새마을의 필요, 중요성, 그 다음에 새마을 가사 같은 거 그런 것들이 친필로 봤습니다. 아 정말 이거는 우리 농촌 문제, 절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도자의 철학이 담긴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고, 그게 10. 26 이후에 큰 격변기를 맞이했지만 그 다음에 들어선 정권들이 저는 새마을운동 정신을 계승해서 계속해서 발전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당시 내무부에서는 새마을 행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답. 당시 내무부에서 가장 큰 새마을 행사는 1년씩 하는 주로 가을에 합니다. 1년에 모든 활동을 결산하는 새마을 지도자 대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아마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 때는 남녀 새마을 지도자가 성공사례를 발표하기도 하고, 1년에 새마을운동을 결산하는 거죠. 그때의 하이라이트는 새마을 성공사례 발표입니다. 이걸 듣는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이 눈물을 쏟아내는 그게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마침 그때 새마을 교육홍보 계장을 했었는데 교육 홍보계에서 하는 일중하나가 전국에 이와 같은 성공사례를 발굴해자기조 지도자들이 발표 할 수 있도록 훈련도 시키고 그렇게 해서 전국 무대에서 전 국민을 향하여, 또 전국의 모든 새마을 지도자를 향하여 자기 경험담을 쏟아내는 거죠. 이게 굉장히 리얼하고 가슴에 와 닫는, 그러니까 모든 새마을지도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과 안타까움을 대표해서 쏟아 내는 거죠. 그래서 모두가 감동하고 그냥 눈물을 흘리고 소위 감정의 카타르시스 쏟아내고 내년 1년 열심히 해보자. 그런 것을 다짐하는 것이 전국 새마을지도자였다. 그렇게 기억이 납니다.

문. 성공사례가 굉장한 교육 효과가 있었겠네요.
답. 그렇습니다. 이게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것보다도 체험에서 울어 나오는 사례를 발표하기 때문에 가장 강렬하고,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빠른 시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 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문. 그 당시 홍보는 어떻게 했습니까?
답. 홍보는 주로 국내 홍보는 책자를 만들거나 화보를 만들죠.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요. 제가 그때 교육홍보를 맡았을 때 마침 새마을운동 1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 화보를 제작을 했습니다. 화보제작의 책임을 재미 사진작가인데 김해종 씨라고 제가 기억이 나는데요.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 담당 기자인데 백악관에 출입했던 경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의 예술성이 아주 높이 평가되는 분인데 지금도 아마 자료로 있을 겁니다. 화보를 마들어가지고 전국에. 그 다음에 해외 홍보는 우리가 해외 홍보 책자를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도 많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에서 새마을연수원단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성남에 있는 새마을 중앙연수원에서 외국인들이 합숙 교육 받기도 하고 외국에 귀빈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새마을에 관해서 브리핑도 받고 또 우수한 새마을 현지를 방문하는 그런 일들을 제가 책임지고 안내도하고 했습니다.

문.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10년의 성공인가 그렇게 발표 났던데요.
답. 제가 그때 만난 게 별들의 감동 지금 고구려 사업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 한 장한장이 아주 예술성을 담고 잇죠.

문. 그 당시에 교육 같은 경우는 먼저 교육이 왜 필요한지.
답. 새마을은 이제 여러 가지고 개념정립을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정신운동이거든요. 그래서 새마을운동을 일선에서 이끌고 있는 새마을지도자들에 대한 정신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이렇게 한두 시간 교육하는 것보다는 합숙 훈련을 통해서 3박4일이든, 5박6일이든 함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같이 먹고 자고, 강의 듣고, 분임 토의 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스스로 새마을을 실천하면서 새마을에 관한 이론도 강의를 듣고, 이 교육이 끝나면 하나의 새마을전사로써 완전히 변신이 되가지고, 변화 되가지고 일선에 가서 새마을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거죠. 새마을 지도자가 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문. 소득에 관련된 부분을 맡았다고 하던데 정확히 어떤 분야를?
답. 새마을운동이 원래 잘살기 운동 아니겠습니까. 그냥 잘살아보자 말로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소득이 이제 배가 되고 그것이 경제적인 이익으로 돌아와야 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저희 내무부뿐 아니고 농림부라든지 산림청이라든지 유관부처에서 다 이렇게 특히 농촌지도청 같은데서 소득배가를 위한 지도를 했지만 저희 쪽에서 제가 맡은 업무는 소득을 분석하는 통계 업무를 했습니다. 긴 기간은 아니지만

문. 새마을운동하면서 소득 추이는 어떻게. 79년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전까지 소득 추이가 어떻지.
답. 제가 지금 정확한 통계는 안가지고 있지만 그때가 새마을운동한지 거의 10년 다 되가는 시점이었어요. 그 시점에서도 국내외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경재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가지고 한참 진행이 되는 과정 속에서 70년대 초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새마을운동이 결과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그러한 국민적 에너지를 만들어 줬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물론 농민들의 소득도 많이 높아졌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정할 수 있는 그 밑바탕 그 원천은 저는 새마을운동에서 나왔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뭐 몇 년간의 소득이 얼마 농촌 소득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구체적인 통계는 아직 안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이뤄 낼 수 있었던 건 새마을운동에 상당한 원인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정말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80년대 들어서면서 정권이 바뀌었는데 새마을운동에 변화가 있었나요?
답. 저는 큰 틀에서 변화는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박대통령의 새마을 정신이나 이념이 크게 훼손되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내무부에 계셨으면 대통령 돌아가시고 담당부서로써 어떤 생각이 들던지.
답. 저는 이제 원래 외무고시를 해가지고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78년 말에 이제 내무부로 전직을 한 케이슨데 외교관으로 바라보는 대통령과 실제 내무 공무원으로써 새마을운동을 전국에 전파하는 중앙부처에 핵심 실무 공무원으로써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각은 큰 차이가 있다고 전 생각을 해요.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랄까 경외심은 상당했다고 전 생각을 하고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서 새마을운동의 미래에 큰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새마을운동은 본질적으론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염려는 안했지만 그 운동을 주창하신분이 갑작스럽게 서거를 했기 때문에 불안감은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문. 정치적으로 위험했다는 평가도 있거든요. 약간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답. 매사에 관점에 따라서 그래서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거든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관점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이용했다는 평가를 했을지 모르지만, 새마을이 정치에 이용하려고 한건 아니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정치에 도움이 됐는지 그건 모르지만 정말 순수하게 수천 년 내려오는 절대 빈곤을 벗어보자.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해당하는 식으로 정말 그 상태에서 오늘 나름대로 이런 소위 2만불 시대를 이룩하기까지 이게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역사에 획기적인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저는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순수한 목적 그대로 평가를 해주는 것이 좋지. 그 어떻게 새마을을 하다보니까 정치하고 연관된 부분 이거를 침소봉대하고 확대해서 볼 필요는 없다 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70년대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예를 들면 조직 같은 게 새마을중앙회가 생기고 단체나 조직이 있었나요? 전두환 정권 들어오면서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뀌었다고 들었거든요. 기본 이념은 같이 가더라도.
답. 글쎄요. 그때 새마을운동중앙본부를 만들고 하는 핵심 부서에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아마 정권에 핵심 부서에서 했기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 있진 않았습니다만 그렇죠. 새마을운동을 관주도에 국민운동 보다는 민간주도로 전환해 간다. 그거는 그 취지 목적은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오해가 좀 있었죠. 대통령의 실제 동생 되시는 분이 중앙본부의 회장을 맡아가지고 이끌어 갔기 때문에 그런 점은 있었지만 관주도에서 민주도로 넘어가는 과장 자체는 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 당시 상황을 회고해보면 비록 뭐 민간 운동 본부를 만들었지만 내무부라고 하는 중앙부처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고, 예산 지원이라든지, 행정지도라든지 그런 건 거의 그렇게 이루어지면서 단계적으로 민간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에 있었다. 그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 내무부 내에 조직 개편이 있었는지? 그 당시 담당이 새마을과로 되어 있던데요.
답. 내무부에 새마을과가 상당기간 존재를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전두환 정권 때도 지금 아마 다 없어지고.

문. 전체적으로 행정에서 지원 체계가 어떤 부서가 있고, 어떻게 관여를 했는지
답.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에 새마을담당 비서관이 있었고 그 밑에 담당 행정관이나 사무관도 있었죠. 그리고 내무부에는 그 지방행정국장 밑에 새마을담당관이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새마을담당관은 통칭 부르길 새마을부국장 불렀거든요. 새마을 담당 국장입니다. 그 당시에 부이사장이 이제 새마을 담당관인데 지금 뭐 새마을담당관 출신 국회위원들 현재 많이 있습니다. 새마을 담당관 밑에 과가 그때 새마을기획과, 새마을지도과 이런 식으로 과가 있어가지고 다음에 시도에 가면 새마을과가 있고요. 일선 시군구에 가면 새마을과가 있고요. 청와대에서부터 말단 기초 과까지 새마을 담당하는 조직이 다 있었습니다.

문. 역할이 어떻게 됐나요?
답. 역할이라 하면 아무래도 전체적인 새마을 정책이라든지 기획 정책을 위반하고 하는 것은 청와대가 중심을 되고 어떻게 보면 내무부가 실무는 다 하면서도 청와대에 지시를 받아가지고 전국적인 또 전체적인 기획을 수립하면 각 시군구로 내려가서 집행이 되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문. 시군구에서 거꾸로 피드백이 올라오는 경우는?
답. 저희가 새마을에 관한 평가를 매년 하거든요. 각 시도나 시군구에 관한 평가도 하고. 그 다음에 새마을운동이 초창기 농촌 새마을운동이지만 나중에는 공장 새마을운동, 도시 새마을운동 이런 식으로 다원화 됐죠. 그래서 각 분야 별로 평가를 했습니다. 평가를 하다보면 우수사례가 발굴이 되고 그 우수사례를 저희가 이제 분석 평가해가지고 이거를 전국적 파급할 필요가 있다. 싶으면 그런 우수사례는 어느 일선 시군에서 하던 것이 전국적인 이제 사업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선 피드백이 된거죠.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이 40년 가까이 되는데 요즘에도 새마을운동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인지?
답. 그 제가 전작에 말씀드리길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래 물론 잘살아보자. 잘살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의 정신이 바뀌지 않고선 잘 살 수 없다. 이게 지금 새마을의 하나의 철학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근면, 자조, 협동이라고 하는 새마을정신을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구체적으론 농촌 새마을운동, 도시, 공장 이런 식으로 퍼져나갔지만 현재 지금 21세기 들어와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70년대식 새마을운동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냐. 이런 점에선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어요. 70년대식 새마을운동은 저개발 국가, 제3세대, 남미라든지,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데는 충분히 가치가 있고, 지금 한국의 농촌에 있어서 지금 과거 새마을운동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요. 물론 그 중요한 핵심요소는 살아 있지만 특히나 지금 거의 도시화 되어가고 입장에서 보면 지금 우리 도시민들에게 대해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뭐가 돼야하느냐.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저는 이 점에서 한번 생각을 해볼 때 결국 21세기는 지식정보화시대거든요. 그리고 새마을의 기본정신은 잘살아보자는 거고 또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야 되겠다하는 게 하나의 목표 아니겠어요. 그러면 잘사는 대한민국, 선진 대한민국,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결국 저는 지식 정보화 시대에 맞는 새마을운동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하나의 방향으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게 평생학습을 하는 그런 커뮤니티, 그런 국가, 그런 도시가 우리나라에 많아져야겠다. 저희 구리시가 평생학습도시입니다. 금년 가을에 저희가 경기도 평생가을 축제를 개최 준비 중에 있고 내년에 전국 평생학습 축제를 유치하고자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7월 달에 결론이 나옵니다만 제가 이 평생학습 관련해서 요번애요. 북 구라파를 다녀왔습니다. 불과 보름 전에 덴마크, 스웨덴, 필란드를 다녀왔는데 그 나라들이 다 소득이 4만불 이상이고 국가 경쟁력이 세계에서 1등에서 5등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잘살고, 왜 이렇게 경쟁력이 높은가. 제가 이번에 북유럽을 방문하고 결론을 얻었어요. 답이 뭐냐. 거기는 이 3개국이 공이 모든 국민을 말이죠. 교육을 시킵니다. 늙을 때까지, 말하자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학습을 해요. 지금 스웨덴 같은 경우에는 인구가 900만인데요. 평생학습이 동아리 서클이 25만개가 있습니다. 이 25만개 동아리에 참여하는 국민이 300만이예요. 전체국민의 3분에 1이 평생학습에 참여해요. 일반 학생들 빼놓고 성인들이. 그리고 지금 덴마크나 스웨덴 똑같이 말이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버릴 사람이 없어요. 노숙자 없고, 홈리스 없고, 거기는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그런 국민들이거든요. 1당100하는 거죠. 왜 그렇게 되느냐. 그건 국가의 정책적으로 끝없이 교육을 시키는데요. 낙오된 국민들,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애들 보다는 공부가 쳐지는 아이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붙들어 올립니다. 모든 국민들이 낙오된 국민이 없어요. 다 같이 평균적으로 올라가는 거거든요. 저는 우리 새마을운동이 이런 평생학습운동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지식 정보화시대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그런 국민으로 거듭나는 이런 일이 앞으로 새마을운동이 해야 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우리에게 사회적 자본으로 남긴 게 있다면.
답. 중요한 유산을 남겼죠. CAN DO IT.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이것을 증명해 보인 게 새마을운동이죠. 우리는 지금 그동안 이제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일제치하에 6. 25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체념 상태에 빠졌던 것 아닙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다. 정말 체념하고 살아온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 잘 살 수 있다. 우리도 과거 고구려 시대처럼 말이죠. 국가가 융성해서 중국이나 일본을 말이죠. 이렇게 견제하면서 민족의 자존를 지켰던 그런 시절이 있다. 할 수 있다하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저는 새마을운동이고 그 결과로 오늘도 석간 보니까. 이 불경기 중에서도 조선업만큼은 세계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이게 대 새마을운동의 결과로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