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답.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기 전인 1979년 5월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전 괴정동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공무원 교육을 받았는데 일주일 동안 은 무조건 새마을교육을 받고 나서 공무원교육을 받아야 해서 두 달 합숙교육을 받을 때 처음 일주일은 새마을교육을 받았습니다. 학생 때 주위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을 봤지만 직접 공무원이 되고 나서 접한 것은 1979년 5월 6일입니다. 당시 제가 어렸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받은 새마을교육의 충격은 당시 새마을교육을 받았던 분들이 받은 충격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새마을교육을 할 때는 새마을 강사가 와서 교육을 했는데 새마을교육은 이론상의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를 하고 구보를 하면서 낮에는 새마을 현장에 있었던 분들을 모셔다가 얘기를 들었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분 중에 대구에서 올라온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성공을 해서 직물공장을 하는 분이었는데 어릴 때 어렵게 살아서 걸린 폐병을 고치기 위해 개구리를 잡아먹은 일화 등을 얘기하면서 지금은 성공을 했다는 인생드라마 얘기가 전부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성공을 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새마을운동은 하나의 종교처럼 받아들였고 최상의 목표로 인식되었으며 모든 공무원교육에 새마을운동 노래와 잘살아보세 노래가 하루 종일 새벽부터 나왔습니다. 그 시기는 1970년부터 했던 새마을운동이 9년 정도 지나서 정착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했던 새마을운동이 성숙기에 접어들 정도의 단계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는 농촌에 도로, 교량, 지붕 등 많은 부분이 개량되었고 대한민국도 일인당 GNP가 1천불이 되면서 전체적으로 경기가 많이 좋아졌을 때였습니다. 당시에도 반대 세력들이 물론 있었지만 성공사례들을 국민들에게 발표를 함으로서 새마을운동이 종교 비슷하게 인지되고 그것만 열심히 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이 국민들 속에 스며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때는 농촌새마을운동부터해서 농촌 각 분야로 퍼져나갔고 직장, 공장, 학교 모든 분야에 이름을 붙이면 전부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제가 새마을교육을 받고 1975년부터 공무원생활을 시작할 때는 대한민국 전체에 새마을운동이 퍼져있을 때였는데 정작 새마을운동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은 것은 1982년도 12월입니다. 제가 당시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내무소속사무관으로 1985년 2월에 2년 2개월 정도 파견사무관 자격으로 일을 했습니다. 당시 김준 씨가 회장이었고 사무총장은 정경화 씨였으며 정경화 씨는 나중에 중앙본부회장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관주도에서 민주도로 바뀔 때였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고 정부도 바뀌었으며 전체적으로 상황이 바뀌었던 때에 국민소득도 올라갔습니다. 처음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잘 살아보자고 했던 농촌이 피폐하니까 환경도 바꾸고 지붕, 부엌도 바꾸고 화장실도 바꾸는 등 내실을 다지는 단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새마을운동도 분야가 더 넓어졌습니다. 새마을청소년회, 새마을체육회, 직․공장새마을회 등 제가 있을 때 7개 회원단체가 있었고 제일 마지막에 회원단체로 들어 온 곳이 새마을금고연합회였는데 당시 이규희씨가 상임부회장을 했었습니다. 제가 혼자 새마을금고연합회에 가서 자료도 얻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새마을본부에 8번째 회원단체로 되었고 중앙회사무실도 청계천에서 등촌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새마을운동의 교주로 받들 듯이 관주도로 강력하게 하다가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낄 때 즈음인 80년대 들어오면서 민주도로 바뀌며 새마을운동 영역이 확장되는 선순환 구조로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마을운동이 전혀 식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이 과연 관주도로 강력하게 밀어붙였으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라고 생각을 합니다. 80년대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폐해에 대해서 일부 얘기는 있었지만 저는 그런 면을 보는 것이 아니고 관주도에서 민주도로 바뀌는 과정에서 좋은 면만 본다면 상당히 성공적이 않았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 주민들이 새마을운동을 잘 받아들였나요?
답. 불가사이할 정도로 굉장히 잘 파급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요인은 강력한 관주도로 위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국민운동을 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혹자들은 새마을운동이 중앙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운동이 아니냐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인간의 심성구조를 잘 파악을 한 것 같습니다. 요즘에도 대통령이 한마디 한다고 해서 국민들에게 파급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반발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박대통령이 다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느낌이 와서 일을 추진하고 싶지만 밑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사상누각(沙上樓閣)일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이 된 이유는 각 마을단위까지도 지도자를 두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은 새마을운동의 역군이 된 것입니다. 마을에 똑같이 철근을 나눠주고 예산이 되는 대로 시멘트를 나누어줬으면 새마을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재를 주어 마을별로 평가를 해서 우수한 마을은 자재를 더 주고 뒤쳐진 마을은 자재를 안주는데 이것이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고, 경쟁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당시 청와대 참모들이 모든 자재를 한꺼번에 나눠주자고 하니 대통령이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저 같으면 참모들이 자재를 주자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주었을 텐데 박정희 대통령은 안주었습니다. 만약 똑같이 자재를 갖게 되면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고 새마을운동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하듯이 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새마을총렬이라고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종합평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을에 가서 도로, 교량, 길이, 총 면적 등을 조사해서 교량 몇 개, 지붕 몇 동을 개량했는지 통계를 내어 마을별로 우열을 가려 우수마을은 자재를 더 주었는데 경쟁심리를 도입한 점이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체라고 봅니다. 당시는 부시장이 새마을총괄담당이었습니다. 새마을과장이 있었지만 부단체장에게 임무를 의무적으로 주었습니다. 부단체장은 출근하면 다른 것 챙길 것 없이 새마을운동만 열심히 챙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부시책이 그대로 전파되고 주민들 의견이 마을회의에서 이루어져 자재가 얼마가 왔는데 어디로 갈 것이냐 등의 의사결정을 마을회의에서 했습니다. 굉장히 민주적인 방식 아닙니까? 도로를 만드는데 마을에 누구의 땅이 50평, 100평 들어간다 하면 마을에서 전부 희사를 했습니다. 당시 등기부등본을 받지 못했으니 현재 아들이나 손자들이 땅을 반환해 달라 소송을 하면 저희는 땅을 반환해야 하지만 그 만큼 국민들이 자기 땅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놓더라도 도로를 내는 것을 찬성을 했습니다. 우선순위도 마을주민들이 결정을 했고 남녀새마을지도자를 두어서 마을을 전체적으로 통솔했습니다. 그럼 정부에서는 무엇을 했느냐, 새마을지도자 예우를 해 주었습니다. 부군수님과 제가 같이 영농교육을 가면 점심을 식당에서 먹는 경우도 있지만 새마을지도자의 집으로 갑니다. 부군수님과 제가 가면 씨암탉도 잡아주고 했는데 관에서 나온 직원이 새마을지도자의 집에 가서 밥을 먹는 것으로서 신임을 불어 넣어주고 새마을지도자는 마을을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들이 새마을운동의 성공적인 요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왜 꼭 필요한 운동이었을까요?
답. 1961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을 하시고 10년이 되었는데 당시 GNP가 76불이었고 전 세계에서는 뒤에서 4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한번 하고 나서 수출도 늘어났는데 중국이나 다른 후진국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경제학에 나오는 경제발전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마다 균형성장론을 택하는 곳이 있고 불균형성장을 택하는 곳이 있는데 대한민국은 불균형성장을 택했습니다. 불균형성장은 외자유치 등을 해서 공업 쪽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인데 비료공장도 만들고 정유공장도 만들고 고속도로도 만들고 해서 10년 정도 지나니 그 다음이 농업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경제성장 철학과 직결되는데 그게 우리 한국과 절묘하게 들어맞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농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기 때문에 농업부터 일으켰으면 대한민국은 실패를 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70%가 농민이었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공업부분에 먼저 투자를 하면서 어느 정도 경제가 올라가니까 그때 박정희 대통령 하는 말이“이제는 우리 농민들도 잘 살 자격이 있다 그럴 필요성이 있다”해서 서서히 같이 움직인 것입니다. 설탕, 비료 등 소비재 위주가 경공업인데 처음에는 경공업을 하다가 70년대 들어와서 중화학공업으로 바뀝니다. 당시 외국들은 선진국들이 하는 제철산업 조선 등 중화학공업을 한국이 한다고 덤비니까 한국이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경공업을 해도 20년 30년 정도 해야 하고 영국이나 미국 등은 수백 년에 걸쳐서 바뀐 것을 한국은 10년하고 중화학공업으로 바뀐다고 하니까 도저히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한 것은 예외 없이 성공을 했습니다. 농업부문 발전도 같이 해야 한다 선언한 것이 농촌새마을운동입니다. 농촌새마을운동이 성공하면서 이념을 따서 70년대는 앞에 명칭을 붙이면 다 새마을운동이 됩니다. 학교, 공장, 직장에 이름을 붙여서 영역이 확대되고 79년 이후에 공무원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많은 부분이 포함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의 공식명칭은 모르겠습니다마는 범정부적인 추진위원회 기구가 있었습니다. 내무부장관이 위원장, 그 밑에 차관보가 실무위원장, 그리고 각 부처별로 새마을운동 전담부서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교부는 학교새마을운동을 책임졌고 상공부는 직․공장을 책임지는 등 각 파트별로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 전국지도자대회에 박정희 대통령은 반드시 참석을 했고 80년대 이후의 대통령도 참석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에 관해서는 정부는 바뀌었어도 최고 지도자의 관심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답. 70년대에는 관주도의 피동적인 운동이었다면 80년대부터는 민주도로 바뀌면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라고 했습니다. 민주도라고 말은 하지만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굉장히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최고 지도자의 관심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추진은 민주도로 한다면서 정부방침의 전체적인 틀이 바뀌었는데 10년하고 나머지 10년을 민주도 한 것은 정상적인 선순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새마을지도자들이 전국적으로 영차영차 하면서 모였던 것은 오히려 80년대가 더 활발했습니다. 최고 지도자나 최고 지도자의 동생인 정경화씨가 했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해서는 제가 얘기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측면으로 강력한 힘이 실린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을 합니다. 영차영차 하면서 시민들과 새마을지도자들이 어깨를 펴고 신나게 했던 것은 80년대에도 계속 이어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은 ?
답. 새마을운동은 사실 대한민국만 하기에는 굉장히 아까운 운동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명칭을 새마을운동이라고 했지만 세계적인 학문상으로 지역개발운동이라든지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했던 기부충동,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덴마크 운동, 한국도 옛날 운동이 있었고 북한도 천리마운동을 했듯이 각국마다 필요성은 다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후진국이 많이 있는데 그런 나라들도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도 신농촌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우리가 그런 과정을 거친 선배로서 새마을운동을 우리만의 것으로 고수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세계 후진국에 전파를 해서 같이 인류가 같이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40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임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외국에게도“대한민국이 급작스럽게 발전한 이유가 지금도 변함없이 새마을운동이 잘 되고 있어서다 한번 해 봐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선진국들이나 후진국들이 새마을운동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많이 옵니다. 저도 베트남, 몽골, 얼마 전에 네팔도 다녀왔고 아프리카 콩고, 이디오피아, 동티모르 등 새마을운동 국제화를 위해서 구미시가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고 구미시는 2009년도에 대한민국에 새마을박람회를 개최했습니다. 40년 새마을운동을 결산하는 박람회를 개최해서 전국에 새마을지도자들이 구미를 다녀갔습니다. 지금은 새마을운동 발상들에 대해서 이론이 있겠지만 새마을운동 종주 도시로는 구미시를 인정합니다. 후진국과 제3세계에 새마을운동이 보급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앞장서서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할 예정입니다.
문. 각 나라별로 새마을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답. 우리가 직접 가서 새마을교육을 하는 방법도 있고 지도자들을 한국에 불러서 교육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몽골, 네팔 지도자를 불러서 교육을 했습니다. 그 두 나라는 바다가 없어서 한국에 왔을 때 동해안에 바닷가도 구경시켜 주는 등 새마을교육만 한다기보다는 대한민국 경제발전사를 눈으로 보고 배우고 새마을이론도 배우고 가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많이 느끼고 배우고 갔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이론이 아니고 실천입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우리가 뛰어다닌 교육이지 이론적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히려 제3세계에서 설득력이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혹시나 이론 등은 나라마다 날씨나 기후가 다르고 국민성이 달라서 다를 수 있는데 실제로 뛰어서 실천한 부분이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국제화한다고 해서 벽에 부딪친다든지 상대국에서 너무 어렵다든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전혀 없고 하나라도 더 못 배워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종교에 비유하자면 종교를 믿어서 잘 된다고 하면 믿는 것처럼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하면 잘살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제기를 안합니다. 새마을교육을 갔을 때도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잘합니다. 정말 잘합니다.
문. 지금까지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답. 새마을운동을 out-of-date(시대에 뒤떨어진)라든지, 정권유지 전략의 하나로 임기응변으로 만든 운동이라든지 등으로 폄하하는 분들도 혹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신문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소중한 자산을 몰라보고 엉뚱한데서 찾는 사람이다 개인도 훌륭한 면이 있는데 자기 집안에 대해서 폄하하고 자학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라고 기고를 했습니다. 우리 한국이 40여년 전에 했던 전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폄하거나 잊힌 운동이라고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얼마나 부끄럽느냐 이겁니다. 저는 새마을운동이 50년, 100년 가리라고 보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념 자체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 아니고“하면 된다”하는 정신 근면, 자조, 협동 등을 섣불리 손 대서 고친다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 가더라도 새마을운동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지켜 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못사는 나라도 같이 잘 살도록 하는 것은 선진국 문턱에 있는 대한민국이 해야 될 의무입니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으니 원조를 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국의 Peace Corps (평화봉사단)나 라이온스, 로타리 등 국제봉사단체가 있듯이 새마을운동도 그렇게 만들어서 새마을 젊은이를 양성하고 새마을리더 개념으로 후진국에 1,2년 파견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새마을운동을 신청해서 인정을 받고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합니다. 새마을중앙회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미시와 같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새마을운동이 인정받도록 제가 앞장 설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전 세계 누구를 만나, 왜 성공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1시간이 아니라 10시간도 얘기할 자신도 있고, 그럴 의무도 있는 사람이 바로 저라고 생각합니다. 새마을교육을 할 때 40년 전에 새마을현장이 어디에 있느냐 요청을 해서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이 정부사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워낙 갑작스럽게 발전하다 보니까 옛날에 도로, 교량을 만들었던 것이 소달구지 다니는 교량이지 자동차가 다니기는 적합하지 않고 전문가가 설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흔적들이 없어졌습니다. 용인에 가면 민속촌이 있듯이 새마을운동의 흔적들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지 않나 해서 구미에 8만평에 1천억 정도를 들여 만들 계획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 생가 옆에 건립을 할 것인데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답게 새마을운동의 40년 역사를 구미에 가면 다볼 수 있게 추진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지속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답. 어느 정도의 변화는 해야 되겠지만 경계하고 싶은 것은 너무 쉽게 새마을운동 이름을 바꾼다거나 중간에 들어가는 강령이라든지 추진전략들을 섣불리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원형이 깨지는 것 아닌가 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또 새마을운동 앞에 형용사를 붙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저는 반대입니다. 그런 명칭을 자꾸 붙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고 외국에서도 헷갈릴 것입니다. 새마을운동 명칭도 그대로 유지를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시대를 따라가다 자칫 잘못해서 정권의 향배와 흔들려 버리면 생명이 끝납니다. 그래서 저는 새마을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섣불리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가감을 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지금도 한참 배우러 오는데 명칭이 바뀔 경우 얼마나 헷갈리겠습니까. 우리가 옛날에 일본이나 이스라엘, 싱가폴에 배우러 갔을 때 원리를 배우고 싶었지 변형된 것을 배우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그대로 고수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변형되지 않는 방향으로 대한민국 새마을운동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 CI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답. 70년대 새마을운동의 마크를 보면 통일된 것이 없습니다. 새마을운동 마크가 정부의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서 잎사귀 세 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다릅니다. 80년 초에는 근면․자조․협동이 단결인데 왜 잎사귀 세 개가 떨어져 있느냐고 하면서 잎사귀 세 개와 밑에 기둥을 붙이면 협동이 된다고 그렇게 바꿨습니다. 콤파스로 그린 작도법인데 홍익대학교 교수를 거쳐 새마을본부에서 최종 확정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크가 유용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옛날에 광고를 보면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광고가 있습니다. 60,70년대는 비틀즈가 인기 있었고, 그때는 팝송은 전부 백인이 부르고 흑인영가는 흑인들이 불러야 했고 우리가 부르는 국악은 미개한 음악으로 인식을 하고 우리 것에 대한 막연한 엽전근성 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만연했습니다. 그런데 60, 70년 박정희 대통령이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니까 다 되었습니다. 코리안 타임의 의미는 10시에 모이자고 하면 10시 30분에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빠른 사람들이 아니고 굉장히 느려터진 사람들입니다. 빨리 빨리라는 말이 세계적인 용어가 된 것은 60년대 박정희 대통령 이후 생긴 새로운 민족성입니다. 제가 신문에 글도 썼는데 우리 것에 대한 막연한 엽전근성, 못하다고 폄하하고 자조하는 분위기였는데 요즈음에는 케이팝과 한류가 전 세계에 먹혀들어가고 심지어 남미에는 1년에 한 번씩 케이팝 전 남미 노래자랑대회도 하는 등 케이팝은 남미까지도 침투되어 있습니다. 태권도를 우리 한국말로 구령을 붙이듯 케이팝도 한국말이라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데 결국 우리 것이 전 세계적으로 먹혀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징조입니다. 그렇게 되면 혹자들이 얘기하는 새마을운동은 한물간 운동이다, 70년대 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대통령이다, 라는 것은 자기 비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지 소중한 자산, 손에 갖고 있는 희망의 파랑새, 행복의 파랑새를 손을 벌려서 다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것이냐 이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나 새마을운동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밤새도록 토론을 해서 KO를 시킬 것입니다. 진짜 어리석습니다. 제발 부탁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소중한 자산에 대해서 폄하하지 말고 엽전근성이 되지 말고 자기 것에 대한 막연한 평가 절하는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최고인 것입니다. 제가 8월 31일 네팔에 가서 공무원대상으로 특강을 했는데 특강이 끝나고 나니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한 여성공무원이 마이크를 잡더니 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리네에서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배출 못하고 새마을운동을 못하느냐, 우리들은 왜 못사냐고 하면서 분발하자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팔에 정신은 살아있고 가능성은 있다고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왜 네팔에 없느냐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데 운 좋게 대한민국에 태어났을 뿐입니다. 징기스칸이 앞으로 몽골에 또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몽골민족 수천년에 한명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이 있는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out-of-date(시대에 뒤떨어진)된 운동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어리석은 폐해를 범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인문고전을 많이 읽거나 독서를 많이 하면 사고가 넓어지기 때문에 포용 가능합니다. 엉뚱한 책 몇 권보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한다든지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