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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 담당 비서관 일을 하시면서 그 당시 새마을운동 추진배경과 대통령의 의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답. 박정희 대통령께서 미 새마을운동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신 거는 1970년 4월 20일.
그때 1970년은 아주 한해가 전국적으로 극심한 때였어요.
아주 한해(寒海)가 너무 극심하고 그럴 땐데, 그때 그 한해(寒海)대책을 위해서 각 시도 지사회의를 중앙청에서 개최를 했었는데, 시도지사, 지방장관 회의를 하는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유신을 통해서 새마을운동이란 말을 처음으로 언급을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신 날이라고 이제 이렇게 보는 게 옳아요.
근데 박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제창을 하신 거는 이렇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은 우리 역사, 참 가난하게 살았어요. 아주 참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니까 매년 봄쯤 되면 이제 그 춘 농기. 단경기. 보릿고개라는 그런 계절을 맞게 되는데, 그 보릿고개 되면 은 먹을 게 없으니까, 아주 고생들을 하고 그런 역사가 쭉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보릿고개라는 것이, 말하자면 아주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어렵게 지나는 그런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그랬는데, 대통령께서 우리도 보릿고개를 없애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한 이런 신념을 이제 박대통령께서 국정의 제1목표로 이렇게 삼으셨어요. 우리도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이게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신 그 의지고 신념이셨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당시 정부관련 부처와 고위직 공직사회는 어떤 분위기였나요?
답. 그때는 대통령께서 이제 경제개발 5개년 개혁을 처음 시작을 하시면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이런 명제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실 때니까, 중앙 각 부처의 고위 공무원이나 각 부처에서도 역시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그런 그 일념으로 아주 통일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중앙부처나 고위 공무원도 신념이 잘살아보게 하는 이 운동을 아주 환영하고 적극동참하고 이렇게 하게 됐습니다.
근데 이 새마을운동이 농촌운동으로 처음 시작해서 쭉 지내오다가 이제 범위가 이제 확대돼서 직장 새마을운동, 무슨 노동 새마을운동, 뭐 이렇게 쭉 새마을운동 분야가 확대돼가면서 중앙부처의 전 공무원, 고급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을 시키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중앙부처의 고위공무원이나 이런 분들은 거의 다 새마을운동 교육을 그 때 다 받도록 그렇게도 했었습니다.
전 고급공무원들이 마음이 대통령께서 생각하시는 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가난을 벗고 잘살아보자 하는 그 일념에 모두 다 동참해서 열심히들 일할 땝니다.

문. 정부와 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간의 협력, 이해관계는 어땠나요?
답. 이것이 직장 새마을운동을 통해서도, 노동 새마을운동까지 이렇게 광범위하게 이렇게 범위가 확대되면서 자연히 근로자를 포함하는 이 노동운동이 새마을운동으로 이렇게 확대돼가니까, 기업을 하시는 분들 모두가 다 이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동참을 하기 시작을 했고, 따라서 이분들이 이렇게 동참을 하는 데에 따라서 민간인에게도 파급이 많이 되고, 이렇게 됐죠.

문. 초기 새마을운동은 추진을 위한 준비는 어떤 상태에서 출발하게 됐나요?
답.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회의에서 처음으로 제창을 하시기 직전에 그때 이제 그 나하고 또 충청남도 지사들하고, 교통부장관까지 하신 손수익 지사님이라고 계세요. 그 손수익 지사님은 내가 내무부 제정과장을 할 때, 지방 국장을 하신 어른이십니다.
근데 그때 그 손수익 지사님이나 저나 모두가 그때 청와대 비서실에 파견이 돼서 일을 할 땐데, 그때 대통령께서 저하고 그 손수익 지사를 부르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전국의 농촌에 가보면 은 부락에 가보면 은 아주 협동이 잘 되고, 부지런한 그런 부락에서는 담장이 무너지면 은 담장을 돌과 진흙 같은 것으로 이렇게 잘 돌로 잘 이렇게 쌓아서 정비를 해놓고, 소하천이 무너져있으면 은 소하천을 또 무너진 것을 또 잘 이렇게 정비를 하고 다듬어놨고, 또 소하천에 작은 다리가 필요하면 다리도 또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놓기도 했고, 마을 안길도 또 잘 이렇게 정결하게 다듬어놨고, 이렇게 잘 해 논 마을이 있는가 하면 은 그렇지 않은 마을은 그저 게으르고 협동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마을은 담장이 그냥 허물어지면 은 허물어지는 대로, 소하천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이렇게 방치해 둔 이런 마을이 있고, 이렇게 될 것이다.
전국의 마을을 다녀보면서 마을 부락사람들이 모두 협동해가지고 아주 협동을 잘 해서 부락을, 마을을, 잘 이렇게 정비하고 해놓은 그런 마을을 한번 찾아봐라. 찾아봐서 잘 된 마을, 잘 되지 않은 마을. 그걸 사진으로 한번 다 찍어와 보도록 해라. 하는 그런 지시가 분부가 계셨어요.
그래서 그때 국립영화 제작소에서 감독 세 분 하고, 촬영기사 세 사람을 지원을 해주시면서 삼개 반으로 형성해서 전국을 한번 다녀봐라. 이래서 손수익 지사님은 호남 쪽을 이렇게 가셨고, 나는 그때 이 중부하고 강원도 지방을 이렇게 가서 다니고 그래서 찍어왔습니다.
다 찍어 와가지고, 청와대 이제 대회의실에서 대통령과 영부인님. 육영수여사님. 그리고 지금 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님. 그때는 고등학교 계실 때고, 모두 있는데서, 부락 사진 찍어온 거를 대통령께 다 보고를 드렸어요.
다 드렸는데,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을 정밀히 구상을 해서 시작을 하신 게 작업이 그거에서부터 시작이 된 걸로 이렇게 보면 될 겁니다.
이제 그걸 보시고 부락의 마을 분들이 다 단결해서 이렇게 협동해가지고, 부락을 잘 다듬으면 은 이렇게 훌륭한 부락이 되지 않나. 이것이 더 커지면 도가 되는 거고, 더 커지면 국가가 되는 게 아니겠나. 그니까 농민들이 모두 다 근면 자조하고 협동하는 이 정신개정운동을 해야 되겠다.
이것이 가난을 벗어야겠다는 이러한 운동이, 말하자면 정신혁명운동. 모두가 다 이 가난을 벗고 잘살아보자는 이 신념을 안는 그런 정신혁명. 또 부락사람들이 서로 협동하고 단결해서 서로 협동해서 단결해가지고, 잘사는 부락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 이런 것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런 것을 되도록 해서 종합해서 제창하신 게 말하자면 이제 새마을운동이에요. 그것이 이제 1970년 4월 22일 한해대책을 위한 지방장관회의에서 처음으로 그 유신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 초기 새마을운동의 정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답. 초기에 시작은 그때는 마침 그 시멘트 산업이 아주 활동이 활발해서 시멘트 생산량이 굉장히 아주 과잉생산이 돼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것이 이제 저장창고에 들어가 있고 이렇게 돼있으니까,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라는 게 있어요.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라고 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제 발전하려면 경제개발 계획이 일단 성공적으로 추진이 돼야 되지 않습니까?
쭉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그걸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라고 해서 대통령 취하에 그 달치의 경제동향을 보고하고, 이렇게 한 그런 회의를 운영을 했었습니다.
그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때, 이 새마을운동 추진상황을 늘 저 슬라이드로 해서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니까 이 그런 과정에서 월간경제동향보고회의 같은 거 할 때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시멘트가 지금 과잉생산이 되어서 많이 있으니까, 이 시멘트를 부락별로 한 300포씩 이렇게 다 나눠줘서 부락민들이 모두 다 나서서 단결하고 협동해가지고 부락의 안길도 다듬고 소하천도 고치고, 담장도 고치고 이렇게 살기 좋은 마을로 이렇게 고치는 이런 일을 하면 좋지 않겠나. 그게 좋겠다. 하면서 이제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부락마다 시멘트 300포씩, 나눠드렸어요. 그래서 이제 부락민들이 그 시멘트가지고 협동해서 마을 안길 포장도하고, 담장도 고치고 소하천도 고치고 또 교량도 놓고 이제 이렇게 협동으로 새마을운동이 실제적으로 시작이 된 거죠. 그렇게 진행이 돼왔어요.

문. 초창기 새마을운동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답. 농촌개발운동이고 시행착오라고 할 일은 별로 없었고, 다만 전국의 새마을지도자들을 부락별로 새마을지도자들을 한분씩 이렇게 만들어서 그 전국의 새마을지도자가 이 새마을운동을 추진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도록 그니까 부락별로 새마을지도자가 전부 생겼죠.
그 새마을지도자가 부락민을 단결시키고 부락을 잘 발전을 시켜나가고 이런데 아주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그분들이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의 참 원동력이 되신 어른들이십니다. 그니까 이 시행착오라던가 이런 일은 없었어요.

문. 정책을 수립하거나 시행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극복은 어떻게 했나요?
답. 원래 이 농촌개발운동이 전 세계 각국이 다 원하고 하는 일들이에요. 근데 특히 그걸 미국이 Community Development 그걸 이제 간단히 얘기해서 CD사업. 농촌개발 사업이에요. 거기에서 이제 사회층 운동도 나오고 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 농촌개발 사업을 우리도 미국에서 그것을 배워다가 농촌개발 사업을 해왔고, 그런데 세계 각 국이 다 미국에서 그걸 배워다가 CD 사업을 했죠. 농촌개발 사업으로. 잘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
근데 우리도 이제 역시 그거 CD 사업을 배워왔고, 정부에 농촌 진흥청 같은 그런 특정기관이 농촌개발을 위해서 그런 CD 사업을 시작을 했었고, 그래서 우리나라도 사회층 운동도 아주 본격적으로 성공적으로 잘 전개가 됐었고. 그런 것 이였었는데, 우리 농촌에 그렇게 크게 성공되지를 못한 걸로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을 제창을 하셨고, 그 새마을운동이 농촌을 개발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더 외연(外緣)을 확대해가지고 근로자 노동운동에도 확대가 됐고, 기업 운영하는 이런데도 활동이 됐고, 그래서 이제 기업에 큰 기업에 공장 새마을운동 같은 것이, 또 새로 만들어졌고. 청와대 새마을 담당비서관을 하면서 대통령께서 지침과 원칙을 주시면 은 그 지침과 원칙을 가지고 실무를 총 지휘한 것은 새마을담당 비서관. 내가 했으니까. 그니까 이것이 이제 공장새마을운동해서, 공장새마을운동에서는 이제 예를 들어서, 이 근로자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근로자의 복지를 향상을 시키는데 예를 들면 은, 큰 기업에 큰 공장에 여자고등학교를 만들어서 학교를 다니시지 못하는 분들 이런 여공, 이런 분들을 고등학교 과정을 여기서 공부를 시키고, 그런 것이 이제 근로자의 복지의 일환으로 그런 것도 만들어지고 그건 이제 공장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이제 그 사업은 했습니다.
처음에 이 새마을운동은 농촌개발운동으로 시작이 된 거고, 그러니까 지금 이 시행착오라던가 이런 거는 있을 수가 없었고, 그렇게 새마을운동을 추진해가는 과정에 새마을운동 자체도 발전이 되어갔지만, 이 이념과 의지가 대통령각하의 의지가 아주 계속 이끌어주셨으니까, 기본적이 원칙과 방침은 대통령께서 하달을 해주시면 은 그 실무적인 집행은 이제 청와대 이제 새마을담당 비서관을 맡고 있는, 내가 이제 그걸 추진해왔고. 순조롭게 잘 추진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성공이 되어왔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추진하던 시기에 주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답. 그때 참 농촌이 못살고 어려웠어요. 참 뭐 농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뭐 가난한 나라였으니까. 근데 그 농민들도 이제 모두 나와서 함께 시멘트를 가지고 함께 단결해서 협동해서 다리도 놓고 마을 안길 포장도 하고, 아주 그 재미있잖아요.
그 협동하고 단결하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러니까 농촌의 농민들이 아주 자발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니까 자연히 새마을운동도 더 많이 보급이 많이 되고. 그렇게 발전이 되어왔습니다.

문. 주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어땠나요?
답. 새마을운동에 관한한은 뭐 농촌의 농민 여러분께서도 모두 정부를 믿고 모두 따라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처음 시작이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근면 자조 협동. 이렇게 정신개조 운동으로 같이 이렇게 나간 거니까, 무슨 이게 정치적으로 이게 무슨 여야가 있고 이런 것도 없는 거고. 그저 오로지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게 운동이 번지게 된 거라서, 특별하게 반대를 하는 움직임이 있거나 뭐 이런 거는 전혀 없었어요.
모두가 기쁘고, 모두가 기쁘고 즐겁게 다 참여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하기 전과 후, 농촌지역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답. 아까도 처음 말씀드린 대로, 협동하고 단결하는 과정에서 이제 시멘트 300포씩 모두 나눠서 이제 시멘트까지 활용해가면서 마을 안길도 포장하고 뭐 하지 않았습니까?
그니까 옛날보다 부락이 깨끗해지고 외관상 깨끗해졌다는 게 아니라, 많이 발전이 됐죠. The villages not only became cleaner on its exterior, but it actually developed in a great way.
편리하고. 포장도 되고, 소 교량도 놓고. 이렇게 아주 부락을 마을 주민들이 내가 사는 내 부락을 부락민들이 모두 협동하고 단결해가지고 이렇게 잘사는 부락으로 이렇게 만들어갔으니까 아주 좋아졌죠.

문.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답. 그때 내가 정무비서관 겸 새마을비서관 할 때, 이제 새마을 깃발도 만들었고 또 새마을 배지도 만들고 다 만들어졌어요.
근데 하루는 대통령께서 절 불러서 올라갔습니다. 본관에 올라갔더니 대통령께서 새마을운동에도 모자가 있으면 어떨까. 그거 좋습니다. 이랬더니 그 새마을운동에도 모자가 있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러고 내가 내려왔어요.
내려와서 내가 모시고 있는 상사, 정상천 장관님이라고 내무부에서 오래 차관도 하시고 오래 근무하시고 강원도 지사도 하시고, 그런 어른이 계신데, 그분이 청와대, 나는 정무비서관 겸 새마을비서관이고, 비서관들을 다스리는 수석비서관제도가 있습니다. 수석비서관. 그래 그 정상천 장관님이 정무 수석비서관이에요.
서울시장도 하셨고, 내무부 차관도하셨고 이랬는데, 정무 수석비서관이시니까 내가 모시는 상사고. 대통령께서 그 새마을 모자 말씀하시는 걸 듣고 내려와서 바로 수석비서관님께 보고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자가 있으면 어떻겠나, 대통령께서 그런 의견이셨습니다. 이랬더니 아, 그래. 모자 한번 만들어보자. 그래서 이제 모자를 이제 만들어야 되겠는데, 모자 회사를 찾으니까 모자회사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어.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대통령께서 말씀하셨으니까 빨리 일을 진척을 해야 되겠는데, 어디 가서 무슨 얘기라도 들어야 모자를 만들던지 하죠. 무작정 모자를 만들 순 없는 거니까.
근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남대문 바로 옆에 남대문 시장 들어가는 입구에, 경모라고 이렇게 간판이 있는 모자점이 있어요. 그게 생각이 나서 그 경모라는 모자 점을 내가 갔습니다.
갔더니 그 사장님이 그 주인이 내가 이제 대통령께서 이런 말씀이 있어서 모자를 만들려고 내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좀 만들어주실 수 있느냐. 그러니까, 아 무턱대고 만들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근데 김 비서관님, 이 모자라는 게 각 그 나라마다 그 나라의 기풍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영국모자는 영국풍이 있고, 미국모자는 미국풍이 담겨져 있고. 일본모자는 일본풍이, 일본국풍이 담겨져 있고, 독일모자는 독일국풍이 담겨져 있고, 그렇게 돼서 모자를 만들어 지는 겁니다. 모자가 단순히 햇빛만 가리는 게 아닙니다. 그 나라의 국풍이 그 모자에 반영이 됐습니다. 각 국마다.
그래서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사장님 모자챙은 요걸로 해주십쇼. 거기 좀 몇 가지 샘플이 좀 있어서. 챙은 요걸로 해주십쇼. 그리고 모자 앞부분은 요걸로 해주십쇼. 조금 모자가 앞부분이 조금 올라 온 모자 앞부분은 요걸로 해주십쇼. 뒤는 요걸로 해주시고, 옆에는 요걸로 해주십쇼. 그래서 거기 전시 된 모자 중에서 특징이 있는 거를 내가 골라서 요걸로 해 달라 요걸로 해 달라 요걸로 해 달라, 요걸로 해 달라. 이렇게 만들어서 색깔은 초록빛으로 해주시고 앞에 여기에는 노란 초록빛의 새마을 배지를 달아주시고, 그렇게 해 달라. 그렇게 그게 이제 새마을 모자를 만들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얼마 후에 경모 회사 사장님이 그걸 만드셨어요. 만들어서 제가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그때 당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님이, 진병련 비서실장님이라고 이제 계셨는데, 그 진병련 비서실장님이 이제 모자를 다 만들었는데, 대통령각하께 결심을 좀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랬더니 그럼 대기하고 있게. 그래서 이제 기다리고 있었더니, 하루는 인터폰이 와서 비서실장님이 며칠날 어디를 시찰하시고 돌아오시는데 그 귀청(歸廳)하시는 그 시간에 귀청(歸廳) 하실 때에 결심을 맡도록 할 테니까, 그 소회의실에 차려놓고 대기를 해라. 오후 4시에. 근데 지금 청와대 말고, 옛날 청와대는 현관에 딱 들어가면 은 현관에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어요.
그게 이제 소접견실이고, 똑바로 직진해서 똑바로 가면 은 큰 회의실이 있는데, 그게 이제 대접견실이고, 그렇게 있었는데, 그 소접견실에다가 오후 4시에 대통령각하께서 오후 4시에 오시니까 4시에 거기다가 진열을 해놓고 대기를 해라.
그래서 그걸로 이제 대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4시쯤 돼서 이제 대통령께서 청와대에 귀청(歸廳)을 하셔서 들어오셨어요. 소회의실로 들어오셨습니다. 오셔서 새마을 모자? 아, 그래 보자. 그래서 모자 이렇게 보시더니 지금 새마을 모자, 그거를 이렇게 드셔서 이걸 이렇게 한참 보시더니 종호, 이리와. 그래서 이제 갔는데, 나는 평생 대통령께서 종호, 이리와 그랬는데 제 이름을 불러주시네, 보통 김 비서관, 김종호 비서관 이렇게 부르시는데,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게, 난 내 평생의 참 영광이에요.
그게 공직생활 삼심 수년을 하는 가운데도 그걸 지금까지도 잊지를 못합니다. 종호 이리와라. 이리와라. 내가 앞에 가서 서니까 어른이 애들한테 모자를 씌우듯이 모자를 나한테 이렇게 씌우시더니 똑바로 이렇게,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앞에서 이렇게 보시더니 오른쪽에 가서 또 옆에서 보시고, 또 다시 이렇게 가서 왼쪽으로 오시더니 왼쪽을 또 이렇게 보시고, 다시 뒤로 가시더니 또 뒤를 또 이렇게 보시고 그러다 이제 또 다 보시고 앞으로 오셔서 앞에 이제 서셨어요. 내가 이제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다가가서 이렇게 섰더니 왜 애들 모자 쓸 때 조금 삐딱하게 쓰면 은 똑바로 해주잖습니까? 그러듯이 앞에서 모자를 다시 잘 씌우고, 그래서 제대로 잘 썼죠.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그래 이리 줘봐. 이렇게 드렸습니다. 드렸더니, 이거 괜찮겠네. 이거 좋겠네. 이렇게 되셨어요.
그게 지금 새마을 모자입니다. 그러고서는 드리고 가서 고맙습니다. 이제 결심을 받았으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이제 물러나왔는데, 물러 나와서 난 이제 모자 집에 주문을 해가지고 그거를 이제 만들어내서 보급한 게 그게 지금 새마을 모자입니다.
우리나라에 모자회사가 영한모자회사라는 모자회사가 있는데, 그 모자회사가 원래 뭐 모자 그러면 영국에 chic hats 있잖아요? 아주 세계적인 모자는 영국의 그 chic hats죠. 근데 이 영한모자가 아주 조그만 회사였는데 지금은 여러분 그 영한모자의 회사가 세계에서 최고로 가는 chic hats 모자를 생산해냅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그 모자가 우리나라 그 영한모자 회사에서 나와요. 그렇게 발전을 했습니다.

문. 청와대 새마을담당 비서관 재직 시, 자연보호 헌장을 제정, 선포하신 그 경위와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답. 그때 그 환경문제 이렇게 해가지고 얘기는 아직 못됐고, 자연보호, 자연보존, 이런 형태로 용어(用語)로해서 자연보호운동, 자연보존운동, 이런 얘기들이 좀 있기 시작을 했을 때에요.
그게 환경운동의 말하자면 효시입니다. 근데 하루는 대통령각하께서 지금 자연보호, 자연보존 이렇게 운동을 하고 그러는데, 앞으로 이 환경보호, 환경운동이 국정의 중요한 국정으로 이렇게 대두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자연보호 헌장을 주고 이제 환경운동을 하고 그러는 모양인데, 우리도 자연보호 헌장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말씀이 계셔서 그 길로 수석 비서관님, 정상천 수석비서관님이 동경을 다녀와라. 그래서 동경을 바로 갔어요. 동경을 가서 그 자치성하고 그 동경도청을 이제 방문을 해서 자연 환경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가 얻었습니다.
자료를 많이 얻고, 그래가지고 귀국해서 자연보호 헌장을 만들었어요. 만들어가지고, 나 혼자의 실력으로는 다 완결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때 당시의 이 새마을운동에도 크게 조언을 주시고 활동을 하셨던 김유협 교수라고 계십니다. 김유협 교수, 또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아주 참 최고의 원로이신 유달영 박사라고 계세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하시고, 그 유달영 박사가 말하자면 우리나라 농촌운동의 제일 선구잡니다.
이제 제일 어른이시고, 그래서 그 김유협 교수님한테도 가져가서 의견을 구하고 문장을 또 고침을 받고, 또 유달영 박사한테도 또 쫓아가서 말씀을 올리고 또 수정을 받고 이래가지고 만든 게 지금 자연보호 헌장이에요. 자연보호 헌장. 그렇게 만들었고. 그 후에 내가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있다가 이제 청와대 오래 10년 이상 오래 근무를 했으니까 내무부로 이제 원대복귀를 이제 하게 돼서 근데 그때 내무부에 지방행정차관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지방행정차관보제도가 있었는데, 내무부의 지방행정차관보로 제가 이제 원대복귀를 했어요. 차관보로 있으면서 자연보호 헌장이 이제 대통령께 제가 그때 맡았으니까, 되지 않았습니까? 그걸 이제 선포식을, 대통령 모시고 선포식을 한다. 헤서 세종문화회관. 큰 관람석이, 대강당 있죠?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각하를 모시고 내가 이제 그때 내무부에 지방행정차관보였으니까 내가 이제 사회를, 사회를 보고 사회를 보는데 제일 무서운 일이 하나 있었어요.
사회를 보는데 이게 내가 원래 충청북도 아주 산골 촌놈 출신이거든? 그런데 그 내무부차관보가 되어가지고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1,2천여 명이 있는 그 장소에서 사회를 보는데 얼었어. 내가. 많이 얼었어요. 그래가지고 두근두근하고 많이 얼었어. 그래가지고 진행을 하다가 진행을 하다가 어떻게 내가 멈췄어요.
멈춰가지고 조금 아무소리도 안하고 진행을 하다가 중지됐어. 조금. 뭐 때문에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두근두근할 뿐이지. 근데 그러다가 대통령 각하를 이렇게 쳐다보니까 대통령 각하가 이렇게 앉아 계시다가 아무 얘기가 없으니까 이렇게 날 쳐다보고 계세요. 웬일인가 하고 날 쳐다보고 계세요. 그래서 이제 정신이 바짝 나서 다시 이제 그 다음 순서로 이제 진행을 하고 그러고서 이제 그 선포식을 마쳤습니다. 자연보호헌장 선포식을 했어요.
그게 지금 이제 중앙정부부처의 환경부도 생기고 환경운동연합이라고 해서 환경단체도 많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환경운동이 아주 본격적으로 국정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중앙본부가 신설되면서 정부의 새마을운동 정책이 어떻게 변했고,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답. 새마을 중앙회에 대한 일은 내가 내무부 차관 때에 새마을운동 중앙회를 만든 걸로 내가 그렇게 기억을 해요. 그리고 그 이후에 새마을운동 중앙회에 변천과정은 내가 공직을 은퇴한 후라서 그건 잘 모르겠고, 새마을운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하나있어요.
지금은 별세하시고 돌아가신 분인데,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해서 대통령께서도 원칙과 방침이 이거 운동을 국민운동을 늘 시작을 하면 은 용두사미가 되고 그냥 실패하고 마는데, 이걸 끝까지 성공을 시키려면 은 교육을 시켜야, 교육을 잘해야 된다. 하는 게 대통령 각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지도자 연수원을 이제 만들자고.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만들었어요. 만들었는데, 그때 새마을연수원 건물이 따로 무슨 있는 게 아니니까 농협. 농협협동조합중앙회에 농협연수원을 빌려가지고 거기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이제 창설을 했습니다. 그러고 그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 초대원장님을 김준 원장님으로 전남 출신 어른이신데, 이 어른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원장으로 이제 모셨어요.
건물이나 그런 운영은 농협중앙회의 연수원인데 그걸 빌려가지고 거기다가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라고 이제 간판을 붙이고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 발족이 되고, 또 농협의 여러분들이 파견이 되어서 연수원교육을 또 같이 도와주셨고 그때 이제 원장님이 김준 원장님이신데, 그 김준 원장님이 참 보통 열의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니까 처음 연수원을 시작해가지고는 저도 그렇고 우리 김준 원장님도 그렇고 연수원에서 같이 자고 먹고 그랬어요. 연수원에서 같이 자고 먹고. 그러면서 연수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제 연수원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그러고 새마을운동의 농촌의 새마을지도자도 다 교육을 했지마는 이 공장새마을운동을 통한 이 직장새마을운동 거기 고급 공무원 뭐 이런 사람들도 모두 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그렇게 해서 그분들도 다 교육을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그것이 모두 새마을지도자연수원 교육을 잘 이뤄낸 것이, 새마을운동을 오늘같이 이렇게 발전을 시킨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요. 그 김준 원장님을 정말 이 새마을운동에서는 잊을 수 없는 어른이시라서 내가 그 얘기를 했어요.
그러고 하나만 더 얘기를 하죠. 내가 새마을운동과 지도 이념 해가지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교재를 썼었는데, 새마을운동에 관한 교재는 다른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거 하나 가지고 이제 교재를 쓰기도 하고 이제 이랬는데, 그 교재를 쓰면서 제일 마지막 부분에다가 내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우리는 이 새마을운동을 New Community Movement 무슨 New Village Movement 이렇게 영역을 하지 않는다. 그냥 고유명사로 새마을운동. 고유명사로 새마을운동으로 이렇게 쓴다. 왜냐하면 은 이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 의해서 대한민국에서 출발한 창시된 농촌개발운동이니까 이것을 New Community Movement 나 New Village Movement 해서 전 세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던 그런 농촌운동 그런 농촌운동이 아니다 이거는. 이거는 참 박정희 대통령께서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새로이 시작한, 창시한 그런 새마을국민운동이기 때문에, 이거를 New Village Movement, New Community Movement 이렇게 영역을 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 이 고유명사 이대로 쓴다. 그런 교재가 마지막에 그걸 썼어요.
지금도 아마 그렇게들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 끝까지 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은 전 세계에서 우리가 배워온 게 아니야.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 의해서 대한민국에서 창시된 거예요. 발생한 거고. 그러니까 다른 나라가 와서 배워가는 거지. 배워갈 때 새마을운동. 그 고유명사를 배워 가면 되는 겁니다.

문. 과거 새마을운동 당시에 자원지도자연합회와 자원지도자들 그리고 새마을지도자 사이 갈등의 이유가 무엇이였나요?
답. 그게 이제 갈등이라기보다는 이 New Community Movement 농촌개발운동, 이런 거 할 때에, 그거를 주체적으로 이끌어 오신 분들이 이제 자원지도자라고 이제 명칭을 붙였었어요. 자원지도자. 그러니까 우리나라 처음 농촌개발운동으로 시작했으니까 자원지도자가 농촌개발운동에 제일 선배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전국에 자원지도자연합회도 만들고 이렇게 이제 활발하게 잘 운영이 되어왔는데, 이 가끔 이런 상황이 생겨요. 전국의 또 새마을지도자도 부락별로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원지도자 있는 분이, 가끔 저 새마을지도자한테 니들은 관선이고 우리는 민선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지도자다. 니들은 관선이고 그러니까 진짜 지도자가 아니다. 막 이렇게 조금 티격태격하는 그런 일들이 가끔 보였어요.
무슨 뭐 큰 싸움이 아니라. 이 전국적으로 보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게 어떻게 대통령께 잘못 보고가 되어가지고 대통령께서 노하셨어요. 그래가지고 다 같이 농촌을 개발하고 잘살기 운동에 나선 운동 지도자들인데 그거를 너희는 관선이다, 우리가 진짜다 이거 얘기가 되나. 이래가지고 자원지도자연합회 이걸 해산하는 게 어때? 이렇게 말씀이 계셨어요.
근데 내가 이제 비서관으로서 그 자원지도자연합회를 해산하는 건 말이 안 돼요. 그거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 대통령 각하께 각하, 우리나라의 최초의 농촌개발운동을 시작한 거는 자원지도자들이 시작을 한 것이고, 그게 또 역사를 가지고 지금 연합회를 이렇게 발전을 해가고 있는데, 그것을 해산하거나 그러는 거는 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습니다.
이제 이렇게 건의를 드리고, 유달영 박사한테 쫓아갔어. 유달영 박사한테 쫓아가서 아이고 이렇게 말씀이 계셨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유달영 박사도 우리나라의 최초의 농촌개발운동은 자원지도자가 했는데, 그거를 해산하거나 이렇게 해서는 되겠나. 이거를, 자원지도자연합회를 이름을 영농기술자연합회로 이렇게 영농기술자연합회로 이렇게 좀 바꾸고, 그러고 되도록 가깝게 그대로 존재하는 걸로 그렇게 말씀을 잘 드려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영농기술자연합회로 이렇게 이제 맘을 먹고 그래서 내가 각하께 다시 올라가서 이거를 오랜 농촌개발운동에 헌신하신 분들인데 그냥 해산하고 그러면 너무 서운하고 문제가 있으니, 이걸 영농기술자연합회라고 이름을 바꿔서 그대로 유지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게 옳겠습니다. 이랬더니 대통령께서 알았다. 그러셔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제 나와서 자원지도자연합회도 영농기술자연합회로 잘 발전을 시켰고, 새마을지도자연합회는 새마을지도자연합회대로 그대로 원대로 있는 거고, 뭐 그런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어요.
이제 저희끼리 어떻게 얘기하다가 농담으로 그런 말이 왔다 가는데, 그게 조금 싸움도 되고, 그런 때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근데 크게 뭐 갈등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관선. 간선이 아니라 관. 관. 관청에서 임명한 사람이고, 우리는 진짜 농촌 지도자다. 이렇게 되가지고 좀 티격태격 한 경우가 있었는데, 너희들은 관선이고, 우리는 진짜 이제 저 농촌지도자다. 이제 이렇게 막 하니까 자꾸 그게 싸움도 되고, 가끔은 그럴 때가 있었어요. 그게 이제 한두 번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이제 잘못 보고가 되가지고,

문. 새마을운동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답. 1970년 4월 22일이라는 그 날짜를 참 나는 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은 그때는 또 나는 계장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야. 그때는 내무부의 주사. 그러니까 아주 말단 직원이었어요. 주사로 있을 때야 그러니까 지방장관회의 같은 거 준비하려면 그 모두 좌석준비하고 뭐 이런 거 쫓아다니고 막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때 그 대통령께서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운동을 처음으로 제창을 하셨거든요? 근데 그 이후에 4월 22일을 새마을회의의 날로 법정기념일로 법정화 되지 않았습니까? 법으로 새마을의 날이 제정되지 않았어요?
그래 나는 그게 제일 가장 자랑스럽고 그런 일이에요. 그러고 이게 전 세계가 새마을운동을 하라. 그러니까 중국의 등소평이 중국을, 그 많은 인구를, 그 많은 인구 역시 아직 가난하고 그런 나라일 때, 그걸 발전시키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연구를 하고 그러고 새마을운동을 배워 와라 해서 새마을운동을 배워오게 했다는 그런 얘기를 내가 듣고 있습니다. 중국의 등소평 주석이.
그러면서 이 새마을운동이 전 세계에 널리 전파가 됐고, 세계 각 국이 모두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서 여기 오고, 얼마나 참 보람이 있는 일입니까. 나는 참 대한민국이 이것으로 대한민국이 또 새마을운동의 정신개조운동 이것이 바탕이 되어서 우리나라가 지금 무역이 세계 7위에요. 그리고 경제가 세계 10등이랍니다. 10위권이에요. 그렇게 부자가 됐어 우리나라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경제발전이 되고, 크게 된 것이, 새마을운동에 의한 그 정신개조운동의 비롯됐다고 난 그렇게 믿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을 늘 그렇게 참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문. 추진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답. 아쉬운 점은 일단 우리 박정희 대통령각하를 이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더 조금 더 이렇게 후세에 좀 더 이렇게 많이 남겼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에요. (박정희 대통령각하가) 새마을운동을 추진해왔고, 이 나라를 발전시킨 그 공적과 그 과정을 후세에 더 많이 좀 귀감이 되도록 이렇게 많이 좀 남겼으면, 하는 게 내 참 소원입니다.

문. 시작부터 지금까지 추진하신 원로로써, 그동안의 새마을운동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시런지요?
답. 새마을운동이 이 나라를 살리고, 부자가 되도록 만들었어요. 그 새마을정신이 근면, 자조, 협동 아니에요? 근면, 자조, 협동이 바로 우리나라를 이렇게 부자로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부자로 만들었다고, 난 이렇게 봐요. 그래서 정말 이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농촌개발운동, 전국 국민 정신개조운동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게, 무엇보다도 자랑스럽고, 정말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그 동인이 바로 새마을운동에 있다. 난 그렇게 자부를 합니다.

문. 의원님께서 생각하시는 새마을운동의 미래는 어떨 것 같습니까?
답. 이제 농촌경제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근면, 자조, 협동심은 더 강해져야 되는 거고, 원래 사람 살아가는데 근면, 자조, 협동만큼 중요한 덕목이 어디 있습니까. 근면, 자조, 협동만큼 중요한 덕목이 없어요. 사람 살아가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잘사는 나라가 됐더라도, 그래도 겸손한 마음으로, 더 근면, 자조, 협동해야 됩니다. 그래야 이 부(富)를 이 잘사는 이 부(富)를 유지해 나가지, 정신이 썩어버리면 은 이 부는 금세 날라 가요. 그러고는 가난으로 되 빠지기 마련입니다. 정신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늘 우리국민이 더, 더 겸손한 마음으로 이 근면, 자조, 협동이라고 하는 이 정신적인 덕목을 더 발전을 많이 시켜가야, 이 나라의 부와 경제도 계속 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요?
답. 어떻게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지금대로 근면, 자조, 협동을 정신으로 해서 국가와 부락을, 국가와 지역을 발전시키는 동인이 되도록 계속 더 발전을 시켜나가는 것이 옳지. 다르게 변형시키는 게 그럴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마지막으로 향후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대학 후배들 정치후배들에게 한 말씀 남기신다면?
답. 근면, 자조, 협동이라고 하는 새마을정신은 우리 국민모두가 가져야할 덕목이라고 생각이 들고, 나는 사실은 1955년 이제 충청북도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시골,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이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해서 서울대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1954년 그러니까, 55년 대학을 가기 직전 54년에 집에 가친께서 조그만 청주에 카바이드 공장을 운영을 했는데, 이게 부도가 나서 망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뭐 빚쟁이들이 와서 집을 점령하고 막 이렇게 되고 그러니까 식구들이 어머님하고 누님하고 나는 외갓집으로 아버님은 그 빚쟁이들 피해서 어디로 달아나시고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버리시고. 그렇게 이제 풍비박산이 됐는데, 내가 서울대학교 법학과 이제 합격이 됐잖아요? 합격이 됐으니 공부는 해야 되지 않겠나. 그런데 서울 와서 먹고 자고 그러면서 학교 다닐 데가 있어야지 그래서 그 얼마 전에 서울 올라왔어요.
올라와서 당숙 한분이 서울에 그때 종로 4가에 살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쪽에 가가지고 그 당숙 댁에서 머물면서 기숙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느라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고 그래서 기숙가정교사 한자리를 구했어. 그게 말하자면 그때는 가정교사가 먹고 재워주면 할아버지야. 먹고 재워주거나 하면 아주 할아버지야. 돈을 받고 그러는 가정교사는 없고, 먹고 재워주기만 하면 아주, 아주 고마운 일이에요.
그래서 기숙가정교사자리를 하나를 얻어서 거기서 이제 먹고 자는 건 이제 해결이 됐는데, 이게 학교를 다니면서 낮에 점심때, 점심시간이 되면 은 점심 먹을 돈이 없으니까 점심을 해결을 못하잖아. 그러니까 이제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점심시간 가서 누가 돈이 있는 친구가 돈을, 점심값을 내면 은 공짜로 먹기도 하는데, 그게 한두 번이지 그렇게 점심을 먹는 게 안 되겠어. 좋은 일이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점심을 그렇게,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친구들을 잘 명분을 세워서 빠지는 게 이제 더 걱정이야. 이제 그렇게 되니까 괴롭고 그래서 에이, 점심을 그냥 한 끼 안 먹는다. 굶는다. 이제 이렇게 이제 결심을 했어요.
그러고 대학 내내 점심 굶고 학교 다녔어요. 내가 점심 굶고 학교 다니고, 그러고 등록금은, 등록금은 이제 내 사촌 형님이 일부 보태주고, 내가 또 뭐 여러 가지 또 일도 하고 이래가지고 이제 많이 매꿨는데 내가 이제 대학을 졸업 맞고, 청와대 정무비서관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니까 아주 출세 한 거 아니에요, 많이 잘 된 거 아니에요.
근데 그때는 청와대가 대단히 강했을 때라, 강했을 때니까, 이 정무비서관 겸 새마을담당비서관으로 있는데, 기업을 하시는 회장님, 사장님들이 그 정무비서관하고 이렇게 저녁 술잔석이라도 같이 하려고 이렇게 희망을 하는 경우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이제 저녁을 좀 술대접을 하고 싶어서 이제 연락이 오고 또 회장님 하시는 분이 또 연락이 오고. 그래서 그 연락이 오는데 그걸 처음엔 거절을 하다가 아니, 대통령각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이 어디 나가서 술대접을 받겠나. 이렇게 하고서 거절을 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도 좀 옳지 않은 일 같고. 그러지 않으면 민정을 들을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그 비서실장. 회장님 사장님 비서실장 같은 사람이 이제 심부름을 오잖아요? 저녁으로 모시겠다고 술대접을 한다고.
그럼 내가 그 다음부터는 이렇게 했어요. 저기 술대접을 그만두고 술대접대신 돈 없어서 대학등록금 못내는 대학생들한테 등록금을 조금 내주면 어떨까. 회장님이랑 사장님한테 그렇게 한번 부탁을 드려봐. 4년 동안 등록금만 내줘. 그러고 먹고 자는 건, 지가 해결하고. 그렇게 이제 내가 사장님께 말씀을 드려봐. 그래서 한명을 할 수 있나, 두 명 할 수가 있나 몇 명을 할 수가 있는가. 여쭤보라고 그러면 이제 거기서 한명 하겠습니다. 그럼 한명. 그래서 그렇게 쭉 일 년 내내 모이면 은 한 이십 명은 모여. 그래서 20명이 모여지면은 모교 서울대 법과대학 모교에 가서 학장님한테 공부 잘하고 이런 사람이 아니라 무조건 하여튼 돈 없어서 등록금 내기 어려운 대학생 재학생들의 명단을 이십 명만 뽑아 달라. 이십 명을 뽑아주면 은 그걸 가지고 와서 여러분 종로 네거리에 종각 있지? 모두 다 그 빵집으로 오라고 해가지고 빵집에서 다 모였어요.
모이면 이놈 한 놈 불러서 이리와라. 인사드려라 해가지고 앞으로 너를 키워주실 분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잘 모시도록 해라. 그러고 사장님 얘 앞으로 아들노릇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결해줘서, 연결해줘서 이제 다 끝나면 은 모두 다 앞으로 이 사장님 회장님과 연결을 지어서 등록금을 지원을 받도록 해라. 앞으로 4년 동안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만 지원을 해주는 거다. 먹고 자는 건 너희들이 해결을 해라. 해가지고 공부를 시킨 게 이제 내가 36명을 공부를 시켰어.
근데 그 공부시킨 사람이 모두 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내 후배들 아니에요? 이 서울대학교 학생만 했다는 게 좀 부끄럽긴 하지만은 우선 손쉽게 가서 명단을 얻고 한 게, 손쉬우니까 가서 모교 후배들 불러서 했으니까 법과대학 재학생들 했으니까 이놈들 모두 다 우수한 대학생활을 해서 이놈들이 모두 다 사시합격하고 판검사 다 지내고 지금은 변호사들 해 전부. 그렇게 내가 인생을 사는 동안에 그렇게 돈 없는 대학생 공부시킨 게, 아주 제일 내가 보람으로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내가 늘 후배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 인생을 살아가는데, 후덕하고 너그럽게 살아라. 늘 후덕하고 너그럽게 살아라. 나는 내가 살아 온 역적이 후덕하고 너그럽게 산다는 게 내 인생의 아주 좌우명이었어. 후덕하고 너그럽게 산다. 이것이 내 인생의 좌우명이었어. 그렇게 살아왔어. 또 그렇게 실천을 해왔고, 그것을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을 해요.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한 것도 그런데서 다 나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드네.
정말 열심히 하고 모든지, 모든지 열심히 하고 참 성실하고 정직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그러면서도 인간적이고, 후덕하고 너그럽게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그렇게 해주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