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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답. 새마을운동이 마치 대통령의 통치수단으로 정치적인 이용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그렇게 각본을 짜서 정책구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부분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부터 나라를 자기살림처럼 생각하고 이것은 이렇게 해서 잘 살게 해야지 하는 굳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고, ‘농민을 잘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농민스스로 노력하면 잘살 수 있는 것인데, 그 사람들 스스로 잘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스로 우러나와서 ‘나 잘살기 운동을 하겠습니다.’하는 것을 도와주는 운동이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철학은 어디서 나왔느냐하면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인 5.16 혁명 때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들의 민생고를 빨리 해결한다고 그때부터 새마을과 같은 방식으로 농민스스로 돕는 방식으로 하면 될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도와줘야겠다는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계획서나 정책지시를 가지고 새마을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농민이 잘사는 방법으로 농민스스로 노력하고, 농민 힘만으로 안 되는 경우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도와줌으로 해서 농민잘살기운동을 뒷받침해 준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의 분위기는?
답. 처음에는 새마을운동이 소득증대사업으로 시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농민이 잘살게 하려면 농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는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농민들이 소득증대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게 좋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니까 농촌에 공장을 만들면 현금이 농민 손에 많이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농촌에 공장을 많이 만들고, 공장을 많이 만드는 회사도 하나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농어촌개발공사입니다. 대통령께서 농어촌개발공사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셨는데, 그때 농어촌개발공사 만드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왜냐 하면 농협에도 농산물가공기능이 있고, 수협에도 수산물가공기능이 있듯이 농협과 수협에 다 있는 기능을 왜 또 농어촌개발공사를 만들어서 그 업무를 나누려고 하느냐고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뜻은 그런 데 있지 않았습니다. 농수산물가공공장을 지방곳곳에 만들어 놓으면 해당지역 지방민들이 원료를 납품하고 심부름도 하고, 또 공장에서 일하면 소득이 생기게 되는데, 농협과 수협이 제대로 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못사느냐, 그래서 농어촌개발공사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안을 제가 대통령께 보고 드린 것입니다. 당시 ‘농어촌개발공사의 구상’이라는 보고서를 처음으로 하나하나 차트로 만들어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대통령께서는 이대로 하면 농민들의 소득이 될 수 있겠다며 농어촌개발공사를 빨리 만들어서 공장을 많이 짓게 하라는 것이 처음 지시였습니다. 농민에게 현금이 돌아가는 사업을 시키는 첫째 지시가 농어촌개발공사를 만들어서 공장을 농촌에 지어 그 공장에서 일하고, 공장에 원료납품을 하고, 그렇게 해서 농민에게 현금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첫째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농민과 공장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대해서는 당시 지시는 없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을 할 준비는 되어 있었나요?
답. 그때까지는‘새마을’이란‘새’자도 안 나오고 새마을이 뭔지 새마을운동이 필요한지 않은지 조차 전혀 생각되지 않은 1967년도의 얘기입니다.1967년도에 농촌에 공장을 세워서 농민에게 현금이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공장을 만드는 것까지는 했는데 농민과 공장을 연결하는 방법은 말씀이 안 계셔서 제가 주무과장으로서 ‘농민들에게 소득증대사업을 시켜서 공장에 납품하도록 하면 체계적으로 공장과 농민과 연결이 되고 현금이 농촌에 돌 것 같습니다.’라고 건의 드린 것이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계획입니다. 이 책이 1968년 처음으로 나온 농어민소득증대사업계획입니다. 이 사업계획을 보시면 박정희 대통령께서 농촌에 몸소 뛰어 들어가서 일하는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 하사용 씨라고 성공농가입니다. 이 사람이 현재는 80이 넘으셨지만 아주 정정합니다.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계획’이 책을 보여 드리는 이유는 사업계획마다 총사업비 소요가 얼마인지 나오고, 그 중에 각각 부담하는 비용지원은 국고와 지방비, 중장기융자금, 예산외의 양곡지원, 농어촌개발공사의 지원 외에도 자력부담 20%를 넣었습니다. 자력부담 20%를 넣은 이유는 자기 돈이 들어가야 열심히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돈을 넣고 투자를 하고 거기에서 소출(所出)을 많이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지만, 공짜로 줘서 지원만으로 하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하는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계획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사업계획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마을정신의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 주로 어떤 정책들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셨나요?
답. 처음에 새마을운동이 되기 전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계획을 만들 때는 시장에 가지고 나가면 팔리는 물건만 장려를 했습니다. 당시 제일 잘 팔리는 것이 명주실이니까 양잠하는 것, 젖소, 한우비육, 양송이, 제일 많았던 것이 비닐하우스입니다. 겨울철에 눈이 와도 상추나 토마토가 나오는 비닐하우스농업 등 34가지의 작목을 장려하고, 사업계획에 넣어주고, 그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부가 격려차원으로 국비 및 지방비를 지원했고, 농협에서 융자금도 저리로 해 주었습니다. 또한 보사부에서 PL 480을 지원해 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부담금 20%가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식구들을 총 동원해 노동 부담을 해서 자기 것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농어민소득증대의 특별사업인데, 이 농특사업은 농촌에 현금이 돌아가게 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참여농가가 1년하고 나니까 소득이 늘어나고 2년 하니까 소득이 더 많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농특사업 3년째부터는 농특사업에 참여시켜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의 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는 없으셨나요?
답. 시행착오가 많이 있었습니다. 앙고라토끼를 기르면 많이 팔릴 줄 알았는데 토끼 한 마리가 병드니까 다 죽어버려서 큰 낭패도 보았고, 송어양식을 시켰는데 송어양식 기술을 몰라 한 웅덩이에 다 키웠더니 큰놈이 작은 새끼를 다 잡아먹어서 송어가 늘어나지 않아 실패했습니다. 요즘은 물웅덩이를 4~5개는 만들어 송어사이즈별로 넣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성공을 했는데, 그때는 방법을 몰라 실패했습니다. 또 하나 실패한 것은 너무 크게 실패해서 공무원을 그만두겠다고 보고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락교라는 게 있습니다. 초밥 먹으러 가면 락교가 나오는데 일본사람들이 그 락교를 참 좋아합니다. 일본에 출장 갔을 때 일본 농림성에서 한국도 락교를 생산해서 일본에 수출하면 한국이 돈도 벌고 좋지않느냐는 제안이 들어와서 우리가 수출하면 사주겠느냐라고 물었더니 꼭 사주겠다고 해서 농민들에게 락교재배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생산된 해에 일본의 락교생산이 풍작이 되고, 일본에 락교를 주로 수출했던 대만도 풍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한국은 늦게 참여했으니까 내년에 수입할 테니 좀 기다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장고가 있어야 농민들이 수확한 락교를 사 놓고 보관을 하는데 당시에는 저장고가 없어서 살 수도 없었고 수출도 안 되고 하다보니까 농민들이 군청에 락교를 뽑아다가 불 지르고 담당 국장을 파면하라고 야단이 났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농특사업을 해 보니까 잘된 것도 많이 있는데 실패한 것도 3가지가 있습니다. 실패한 것 중에 락교사업이 제일 크게 실패를 했는데 이건 제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공무원을 그만둘 각오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얼마나 고민을 하셨는지 제가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저를 다시 불러서 락교생산 농민들에게 보상하는데 비용이 얼마 드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가 든다고 얘기를 했는데 당시에는 너무 큰돈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누가 맡으면 되느냐’고 물으셔서‘농협이 할 수밖에 없는데 감히 농협회장에게 부탁도 못 드렸습니다.’라고 말을 했더니 그 자리에서 농협회장에게 농협이 책임지고 락교를 매수하고 정부도 농협을 도와주는 것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리고 담당공무원이 열심히 하다가 실패를 한 것은 정부가 책임지고 해 줘야 한다는 결론을 내시고는 저한테 앞으로 사업계획을 더 철저히 검토하고 더 잘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이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던 그런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문.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제일 어려웠던 것이 참여농업인들이 열심히 하고 싶어 해야 되는데 참여농어민들의 열성을 끌어내는 것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농협이나 수협에서 할 일인데 왜 농어촌개발공사를 따로 만들어서 또 일을 시키느냐는 불만들이 있었고, 농협이나 수협은 조직이 큰데 농어촌개발공사는 조직이 하나도 없어서 외톨박이로 늘 혼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더 고생한 것은 농협과 수협의 반대보다도 농어민들이 참여를 안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겨울에 따뜻한 사랑방에 앉아서 투전이나 하는 게 좋지 밖에서 눈맞아가면서 비닐하우스 만드는 일은 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투전하면 그 돈이 거기에서 돌지만 비닐하우스 만들어서 상품을 만들어 팔면 새 돈이 들어온다며 그 사람들의 손을 붙들 고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시 농림부과장 이었는데 농림부과장으로서 군수님께 부탁을 하면 군수님이 열심히 합니다. 그 당시 군수님들은 권위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군수님이 같이 가서 농민들에게 같이 하자고 부탁을 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나무비닐하우스였습니다. 지금은 쇠꼬챙이로 잘 되어 있고 하는데도 쓰러지는데, 당시에는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심어서 비닐하우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눈이 오면 다 쓰러져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농민들이 중앙의 어떤 과장이 와서 일을 시키더니 고생만하고 다 없어져버렸다고 데모가 일어났고, 군수는 더 이상 못 막겠다고 중앙에서 와서 설명을 해 달라고 해서 제가 가서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비닐하우스 만드느라 수고하셨고, 참 고생 많이 하신 건 아는데 비닐하우스 만드는데 씨종자나 비료, 대나무까지 다 중앙에서 줬고, 여러분들이 한 것은 여러분들의 노동력밖에 없는데 노동력을 보상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집에 가서 제가 일이라도 해드릴까요. 저희(정부)가 지원해드린 것이 쓸모없어져 버린 것 때문에 저도 화가 납니다. 그렇지만 오기로라도 우리 다시 해 봅시다. 다시 하면 내년에는 대나무가 아닌 철재로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지원을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수습을 했습니다. 그런 농민들의 불평들을 어루만지고 설득하여 극복한 것이 제 행정의 대부분 일 것입니다.

문. 1970년대 우리 농촌의 모습은?
답. 1960년대의 농촌모습은 전부 옹기종기한 초가집밖에 없었고, 서울이라고 한 도시도 판잣집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못사는 것만 보고 살았고, 60년대뿐만 아니라 73년까지도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더 잘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북한은 이겨야지’하는 생각으로 투쟁을 한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이 나오기 전에 농민을 잘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보니까 마침 잘살기 운동을 통해 하사용 씨 같은 성공사례도 나왔고, 그때 2만호밖에 없었는데 농특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며 다음에는 들어가게 해 달라고 군에 가서 부탁하고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런 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 스스로가 돈벌이가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탁이 많아서 괴롭기도 했지만 뭔가 되는구나 하는 느낌에 흐뭇함도 있습니다. 마침 1970년에 시멘트가 과잉 생산되었습니다. 양회가 과잉생산 되니까 양회(洋灰)협회의 회장인 김성곤 회장이 대통령께 찾아가서‘양회 제고가 넘쳐서 양회업계가 다 쓰러지게 됐습니다. 해결 좀 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하니까 대통령께서 내무부장관을 불러서 전국농촌에 나눠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내무부장관이 시멘트를 받아 농촌 34,000개 자연부락에 시멘트 200포대와 철근 0.5톤씩을 무조건 나누어준 것입니다. 당시 내무부에서 시범사업 10개를 골랐습니다. 도로는 이렇게 내는 게 좋다, 교량은 이렇게 놓은 게 좋다, 우물은 이렇게 만들어라 식으로 시범사업 10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약 50명으로 구성된 평가교수단들이 농촌마을을 돌면서 평가를 했습니다. 어떤 마을은 번듯하게 자동차길이 생겼는데 어떤 마을은 표가 안 나서 보니까 아궁이나 마당을 고치는데 시멘트를 쓰는 등 그러한 내용을 그대로 평가교수단 보고회의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대통령께서 보고회의를 들으시고 하신말씀이‘그래도 잘한 마을 18,000마을은 있네. 그러면 18,000마을은 잘하려고 하는 마을이니까 더 도와줘야지.’하시면서 잘한 마을은 더 지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16,000개의 마을은 아무 것도 안주고, 18,000마을은 시멘트 200포를 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격차가 생기게 되었고 새마을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농촌에 새마을을 하겠다는 경쟁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 기초마을이고, 스스로 움직이는 마을은 자조마을이고, 자조마을이 잘되면 자립마을이 되는데 그렇게 새마을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새마을사업을‘새마을가꾸기사업’이라고 내무부에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주민은 없었나요?
답. 잘살게 되고, 길 내고, 교량 놓고, 우물 만들고 다 좋아지는데 반대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새마을지도자를 마을 이장에게 하라고 했더니 나이가 많고 못한다며 젊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 군인 한사람에게 능력이 있으니까 새마을지도자가 되라고 해서 새마을지도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 지도자가 열심히 몸으로 뛰면서 자신들의 마을을 잘 만들기 위해 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아주머니, 아저씨들 다 잘 따라와 주었고, 반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농촌에 길을 내려면 주민들의 자투리 논밭이 들어가야 했는데, 주민들이 땅을 그냥 내주면서 길을 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손자들이 할아버지 땅이 도로가 됐다면서 정부가 보상하라고 하는 일이 생겼었는데, 그때 당시는 보상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길 내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게 새마을운동이 처음 성공하는 계기(moment)가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답. 원래 농촌 주민들의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의 60%, 많은 곳은 80% 수준으로 격차가 많았는데, 농림부에서 하는 소득증대사업인 농특사업지구의 농민들은 도시근로자소득보다 20%가 많은 120%였습니다. 잘살게 되니까 서로 좋아하고 서로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들이 깨끗해지니까 늦게라도 우리 마을도 하겠다는 지원마을이 생기면 똑같이 시멘트와 철근을 줬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다른 마을은 자립마을이 됐는데 그때서야 자조마을이 되는 마을도 있고, 기초마을에서 서로 부락민들끼리 싸우면서 왜 우리는 안 해 가지고 이 모양이냐고 하는 그런 불평이 생기면 생겼지 왜 새마을운동을 강제로 시키느냐라는 불평은 있을 수도 없고 없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모든 국민이 할 수 있도록 한 정책이 있다면?
답. 수준이 다 다른 마을에게 똑같이 시멘트 200포대와 철근 0.5톤을 일률적으로 주니까 불공평하다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잘사는 사람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더 잘사는 마을이 되었고 낙후된 마을은 지원을 했어도 격차가 있었는데 그런 격차는 불가피했습니다. 그 대신 ‘우리를 더 도와주십시오. 다했는데 다리를 못 놨습니다.’그러면 다리 놓을 수 있는 만큼 시멘트 더 주고 철근도 더 줬습니다. 이렇게 도와주는 일을 지방행정부가 했던 일이었습니다. 지방행정부가 강압적으로 왜 이것을 안했냐가 아니고 부족한 부분에 더 지원을 해서 다 좋아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반대보다는 새마을운동을 하면 더 좋아지니까 더 지원을 받으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문. 모든 지역에서 정부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요?
답. 지방정부의 도지사들, 시장들을 전부 청와대로 불러서 이틀 동안 대통령이 다른 일은 보지 않고 보고회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왜 이런 사업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지방정부가 나는 어떻게 해야 더 잘하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히려 경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사는 중앙정부가 사업지구를 정했는데 반대한다면서 못하겠다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단이 나서 대통령께서 농림부장관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는데 마침 농림부장관이 바뀐 분이라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까 대통령수석비서관이 ‘고과장(고병우) 대답하라’고 해서 제가 일어나서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그 사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농림부장관이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하고 그 곳은 낙농하기가 좋아서 낙농사업을 했고, 낙농을 하려면 퇴비가 많이 생산되니까 그곳에 과수원하면 과수도 잘될 것 같아서 복합단지를 만들었습니다. 지사께서도 얼마 전에 그 사업계획이 좋다고 사인해서 보내왔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 자리에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지사가 몇 달 뒤에 그만뒀습니다.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찬성도, 반대도 안 되는 사업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하는 일을 억지로 반대한다는 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 저항들이 시행착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마을 끼리에 마찰은 없었을까요?
답.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쟁이 서로 잘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잘되려고 노력하는 마을은 더 주었습니다. 저 마을은 저렇게 잘됐는데 우리는 뭐만 더 지원해 주면 더 잘하겠다고 하는 마을에는 더 주었습니다. 열심히 하면서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더 주니까 오히려 마을 간에 경쟁이 생겨서 새마을운동이 더 잘된 면이 있습니다.

문. 정권이 바뀌면서 새마을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도 생겼나요.
답. 소득증대사업과 새마을가꾸기사업이 합해지게 됩니다. 1971년까지가 2차5개년계획기간이고 1972년부터 3차5개년계획이 시작하는데 3차5개년이 시작하는 1972년에는 농림부의 소득증대사업과 내무부의 새마을가꾸기사업을 합해서 새마을운동으로 통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새마을소득증대사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새마을운동이 시작됩니다. 1972년 4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남 광주에 가서 새마을운동 선포식을 했습니다. 그때 새마을운동은 어떤 것이냐면 새마을운동은 위에서 하라고 해서 하는 운동이 아니고 스스로 하는 운동인데 근면 하는 운동, 스스로 돕는 자조운동, 그리고 협동운동으로 근면하고 자조하고 협동하면 잘 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근면과 자조는 알겠는데 협동이란 말이 뭐냐, 협동은 물건은 하나에 하나보태면 둘이 되는데 사람은 하나에 하나를 보태면 둘이 아닌 셋도 되고, 넷도 되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알파를 마이너스로 하느냐, 알파를 무한대로 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새마을운동의 성공을 크게 할 수도 있고, 새마을운동의 불이 꺼질 수도 있으니 협동을 잘하라는 새마을이론을 말씀하셨습니다. 협동이론은 그때 처음 나온 것입니다. 1+1 = 2+알파, 알파는 사람에 의해 마이너스에서 무한대까지 나온다는 이론이 새마을이론으로 정립이 됐습니다. 이런 선언을 하시기전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다른 나라에는 조직적으로 하는 농촌운동이 없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해 드렸습니다. 덴마크는 그룬트비라고 하는 지도자가 노래를 부르며 농민운동을 해서 낙농선진국을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모샤브&키브츠운동을 하면서 모래위에 흙을 사다 심어 옥토를 만들었습니다. 해전 일본도 한국만큼 못살았는데 일본의 농촌에‘아다라시무라스쿠리운도’라고 새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면서 농기구 창고를 공동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참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본사람들도 새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냐면서 깜짝 놀라 자극을 받으셨는지 대통령께서 우리도 새마을운동을 해야겠다면서 새마을운동 원리를 12페이지나 되는 종이에 직접 펜으로 쓰셨습니다. 그 새마을이론을 72년 4월에 광주에서 선언을 하면서 새마을운동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그때부터 새마을운동이 되었는데 새마을운동이 되면서 새마을연수원이 생기고 새마을연수원에서 모두 교육받고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새마을연수원이 그 전에 농림부시대에는 독농가연수원이라고 농협대학교내에 있었고, 독농가연수원이 서삼릉 쪽에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분인지 예를 하나 들자면, 하루는 독농가연수원에서 농촌지도자를 교육하는 것을 대통령께서 아무도 모르게 뒤에 조용히 혼자 앉아서 들어보시고 교육 분위기나 교사강의의 문제점을 체크해서 원장한테 조용하게 지도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독농가연수원의 시대가 2년인가 했는데 그러다가 새마을연수원으로 바꿨습니다. 72년부터 새마을연수원이 됐는데 새마을연수원에서는 장관, 사장, 농민 모두 다 와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새마을연수원장을 독농가연수원장이 아닌 새로운 분으로 모셔왔는데 그때 우리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선생님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해서 새마을연수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더니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하냐, 성공할 수 없다’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섭외한 분이 농협의 차장으로 있던 김준 씨라고 하는 분을 찾아냈습니다. 김준 씨는 당시에는 농협차장이었지만 원래 서울농대 교수였습니다. 교수를 하다가 농대 졸업생들이 농촌에 갈 생각은 안하고 취직시켜 달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더 이상 교수를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산골로 스스로 들어가서 개척농장을 했는데, 시장성이 없으니까 개척농장에 실패하고 나와 농협에 들어가서 차장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농대교수출신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침 그 교수를 잘 아는 사람이 농림부에서 제 밑에 사무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모셔온 것입니다. 김준 원장한테 저도 강의를 많이 받았고 저하고도 같이 농촌을 많이 다니기도 했습니다. 김준 원장을 따르는 농촌지도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김준 원장이 농촌에 가면 청년들이 많이 모였고, 같이 막걸리도 마시면서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분의 이론이‘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정직해라, 노력하면 식물(농작물)은 거짓이 없다’는 교육을 받아서 모든 국민들이‘자기가 노력한 만큼 보답이 오는 거다’하는 것을 교육시킨 것이 새마을연수원 교육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선포한 이유로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생겼을까요?
답. 농촌만 할 게 아니라 지도자가 있으면 다 된다는 것을 알고 공장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신라면의 신춘호 회장은 새마을 연수원에 와서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농심라면으로 이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 공장부터 새마을운동을 했습니다. 모두들 새마을운동을 하면 좋다는 것을 느꼈는데 새마을운동을 반대하는 세력은 야당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정치를 오래 하려고 새마을을 조직화해서 새마을운동을 하는가보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조직을 이루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마다 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야당에서는 꼬투리 잡을게 없었습니다. 야당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혹시나 잘못 이용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정치적인 쟁점으로 만들어서 하지 못한 것이 새마을운동이 정부조직에서 밀어붙인 것이 아니고 농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에 서거하고 나서 야당(민주당)이 정권을 한번 잡았는데, 야당에서 ‘새마을’자가 붙은 예산은 전부 깎으라고 해서 새마을운동이 한번 고역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그 후에 다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야당에서 새마을운동을 어렵게 하는 것을 시정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자기 동생인 전경환 씨를 새마을연수원장을 시켰습니다. 전경환 씨가 새마을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전국을 조직화했습니다. 중앙에 새마을협회 회장이 있고, 도 단위 회장이 있고, 시군단위 회장이 있고 이렇게 새마을을 조직화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위에서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의 박정희 새마을이 아니라 전경환 새마을이 되면서부터 새마을운동은 변질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정치적인 논쟁이 붙었습니다. ‘왜 새마을을 이용하느냐’야당에서는 철저히 독재자들이 쓰는 새마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새마을운동은 1987년 전경환 씨가 힘이 있을 때까지는 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거의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듯이 죽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새마을은 이름만 있고 죽어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외국에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오는 것이 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 마하트르 수상은 'Look East Policy'라고 해서 동방을 보는 정책, 그것이 새마을을 배우는 정책이었습니다. 마하트르 수상이 재무장관 때 우리 재무부에 왔습니다. 당시 제가 재무부 재정차관보를 할 때인데 마하트르 수상이 와서 재무얘기를 하자고 만나자고 한줄 알았더니 새마을을 안내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가까운 새마을을 안내하고 새마을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래서 마을이 잘 살고 있다는 설명을 하니까 마하르트 수상이 계속해서 'Look East Policy'를 제창하더니, 그 후에 말레이시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차차 중국에 등소평 시대가 왔는데, 등소평이 지도자로서‘흑묘백묘’라는 얘기가 했는데‘검은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그만 아니냐,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국민이 잘살면 되지 않느냐’그 이론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을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비서실장을 오래 하신 김정렴 비서실장께서 중국에 가서 강의도 했는데, 두 나라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도, 지금 아프리카의 어느 지도자는 한글말로만 보급을 하고 있는데, 이렇듯 세계 각국에서 새마을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교육시킬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것이 더 안타까운 그런 상태에 와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이 됐지만 이제는 오히려 외국에서 배우러 와서 한국의 새마을의 불씨가 꺼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상태에 있다고 봅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민, 관 어디가 주도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답. 그 말 자체가 나왔다는 것은 새마을을 정말 모르는 사람들끼리 논의를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관 주도도 아니고 민주도도 아니고 농촌에서 마을별로 잘살기 운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농촌이 스스로 우리도 좀 살아보자고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마을은 어떻게 해야지 지붕개량하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우리는 뭘 하고 먹고 살까, 우리는 밤나무심어야지, 송아지 길러야지’ 이렇게 마을별로 소득사업을 찾아서 한 것입니다. 누가 지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도 누가 임명해서 한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자기들끼리 선출해서 한 것입니다. 나이 드신 이장이‘우리 마을은 아무래도 아무개가 하는 게 안 좋아?’하면 주민들이‘그렇죠’하고 박수치면 그 사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지도자가 열심히 하니까 따라오는 사람들이 누구였냐면 마을의 아낙네들이 잘살기 운동이라고 하니까 따라와서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밥할 때 가족 인분수대로 쌀을 조금씩 떠서 그것을 저축하는 운동까지 했습니다. 농촌부인들이 오히려 더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했습니다. 제가 그때는 농림부 국장이었는데 농업방송을 3년을 했습니다. 농업방송을 매일 나가서 하려고 하니까 어려웠는데 TBC(현KBS)방송국에서 제 책상 옆에 마이크를 설치해 놔서 제가 마이크 키고 한다고 하면 바로 녹화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TV가 없고 라디오밖에 없었는데 아침 4시부터 6시까지는 방송이 없는 때였습니다. 6시 땡 치면 라디오가 시작하는데 그때 제일먼저 나오는 것이 오늘의 농정뉴스를 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멘트가 고병우 국장이 오늘의 농정을 얘기 한다는 소리가 나오면 그때부터 제가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3년을 하루도 안 빼고 계속했습니다. 일요일도 하고 출장 갈 때도 했습니다. 농촌에 사시는 분들이 매일 새벽에 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제가 녹음하고 온 걸 모르니까 농민들은 ‘오늘 아침에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오셨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농민들이 중앙정부를 잘 따랐습니다. 그러던 때에 새마을을 야당에서 비판하고 저항이 있고 자꾸 관주도냐, 민주도냐 하는 것을 묻는데, 새마을운동은 관주도도 아니고 민주도도 아닌 마을별로 잘살기 운동이 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답. 새마을운동을 성공했다고 보면 성공했고 좀 더 성공할 것을 왜 중단했냐고 하면 중단한 것이 섭섭하기도 합니다. 새마을운동이 남이 시켜서 하는 운동 같았다면 반대작용도 있었을 것인데,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위해서 스스로 한 운동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운동이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그 뒤에 정치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이용할까봐 새마을자만 내세우면 정치적으로 여당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야당에서 반대도 하고 그랬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답. 70년대 초까지도 우리나라가 못살았지만 60년대 한국농촌은 당시 국민 1인당 소득이 80불이 안되던 때였기 때문에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움 속에 살아서 국민들이 부지런히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일해 봐야 돈 나오는 것도 없고 하니까 더 나태해 질대로 나태해 진겁니다. 그렇게 나태한 국민들이 농어민소득증대사업과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부지런해 졌습니다. 어디 가면 빨리빨리 하는 게 한국사람 문화라고 하는데 그 빨리빨리 운동은 새마을운동 훨씬 이후에 나온 말입니다. 그 이전에는 한국에 빨리 빨리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게으른지 가서‘일을 합시다’라고 했을 정도인데,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신지 32년이고, 20년 동안 하면 50년 전인데, 50년 전 국민들이 지금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셨지만 그때는 대단히 나태했다가 한번 정신 차리니까 부지런하게 일을 잘했습니다. 한국국민을 깊은 잠속에서 깨어나게 하고 같이 잘 사는 운동을 스스로 몸부림치게 만드는 그 동인을 인간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은 오천년 역사상 국민의 Vitality와 Motive를 심어주어서 움직이게 만든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을 위대한 선조로 추앙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민을 일깨워서 잘 살기 운동을 하도록 움직이게 만든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항상 모든 일은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서 한일도 있고, 제가 보고해서 한 일도 있지만, 제가 국장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토론도 많이 하고 반대의견도 많이 냈는데, 제가 생각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과장이나 국장하는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그것을 따르시는 분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보람이라고 하면 일국의 대통령이 좋은 의견을 받아서 실현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사업을 통해서나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을 통해서나 대단히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답. 전경환 씨가 새마을연수원장을 시작하고 서울중앙회 회장을 하면서부터 새마을운동을 난데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과 다르게 중앙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조직화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이 거창한 기구가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누가 지시하고 조직화해서 되는 일이 아닌데 조직화하고 나니까 새마을운동이 이상해 졌습니다. 그렇게 새마을운동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부터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어올랐는데, 조직화로 틀어놓으니까 요원의 불길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새마을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새마을이 외국에서 다시 역수입되어서 새마을운동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새마을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 지금까지 새마을운동에 대해 평가를 하신다면?
답. 새마을운동이 언제부터 시작을 했는지에 대한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정확한 시작 출발점은 없다고 봅니다. 5.16.이 출발점인지, 67년 농공병진이 출발점인지, 농어촌개발공사를 만든 게 출발점인지, 농특사업 만든 게 출발점인지, 새마을가꾸기사업한 게 출발점인지, 새마을운동선포식이 출발점인지, 그런데 모든 사람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1972년 4월 12일 새마을운동선포식을 새마을운동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 새마을선포식이 있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는데, 그런 과정과 환경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79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는 새마을은 정말 번창하고 잘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공인데, 그 후에 새마을이 부정당하고 새마을이 전경환 씨 식으로 조직화되면서 이때부터 새마을은 잘 안되고 불이 꺼지기 시작했는데 참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공은 아니고 새마을의 역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미래는?
답. 대한민국 국민이 잘살기 운동하고 이렇게 경제가 부흥하게 되서 세계 G20국가가 되고, 7대 무역국가가 되는 등 큰 나라가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잘살기운동에 정신적인 백보는 어디 까지나 새마을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을 일으키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키고 방위산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지키고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부강하게 만들었습니까. 이런 일들이 다 새마을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한민국은 새마을정신으로 경제 부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 후진국도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정신을 가진다면 언젠가는 살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문. 젊은 사람들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답. 그게 참 어려운 질문인데, 교육이 언제부터인가 중․고등학교 교과서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이고 나쁜 일만 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잘 했다는 얘기가 많고, 6.25누가 일으켰는지 모른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과서를 보면 얼마나 가슴 아픈 교과서인지 모릅니다. 그런 교과서를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교과서를 배운 세대가 활동하며 언론계, 정계, 교육계 등 모든 분야에서 일을 하고, 교육계 쪽 전교조 같은 곳은 오히려 그 교과서를 더 믿는 분위기가 되어서 역사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새마을을 알기회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바로 서고 교육기관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새마을의 필요성과 역사를 알게 됨으로서 새마을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하게 하는 방법은 교육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근현대사의 교육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새마을만 따로 떼어서 잘하는 방법이 대단히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누가 뭐라고 해도 새마을이라는 말이 절대로 정치적인 상품이 아니고 새마을은 우리가 못사는 데에서 새롭게 잘 살아보자고 하는 운동입니다. 제가 농촌에서 살 때 보면 입을 옷이 없어서 이불만 둘러쓰고 있다가 손님도 못 만나는 그런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계절마다 다 다른 옷을 입는 시기가 왔는데, 그런 데서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정말 모든 인류가 잘사는 운동입니다. 잘 살려면 스스로 노력하면 잘산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새마을운동입니다. 새마을운동은 우리 후손들이 머릿속에 깊이 넣어‘항상 내가 노력해야 내가 잘 산다‘하는 것을 꼭 심어놔야 하고 꼭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은 나이든 세대들이 교육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새마을을 정확히 공부해서 후세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새마을정신이 영속되어야 대한민국도 영속적인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새마을정신을 잊어버리면 다시 나태해 지고 낙오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