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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콩고 대통령과 정부의 지원이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답. 그게 된 그 후에는 전에 보다 너무 자연스럽게 많은 마을이. 왜냐면 우리 지역에
무룽구 지역에는 200만 명의 그렇게 살고 있는 국민들이구요. 그리고 마을 200개 넘어. 모든 사람들이 새마을방식으로 배우러 많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대통령 지원, 아무리 지금까지 제가 하고 있는 일, 그리고 많은 좋은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원을 못 받고 있습니다.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일만 하고. 사실은 NGO라는 정부가 못한 일을 NGO가 해야지. 정부가 참 다 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제가 생각합니다.
그 지원 받은 것은 똑같습니다. 똑같은 입장이지만, 거기에서 장관들이 몇 명 가고 대통령도 그 지역을 잘 알고. 몇 번 일하는 동안에 만나 본 적이 있고. 그리고 우리 국회 회의 할 때도 대통령이 저에 대해서 기억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렇게 조금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은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할 수 있게. 제가 원하는 것은 국민들이 전에 보다도 더 많은 지역에 방문 할 수 있고. 뭐냐 하면 200명 지역도 있고, 그렇게 다른 지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높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 콩고 새마을운동 중 자립해서 외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답. 지금 우리가 전에는 한국 새마을하고, 콩고 제가 세웠던 2004년부터 세우고. 재작년까지 우리 지원 받아서 또 같이 우리 식구들이, 우리 조직이 있는 내에서 같이 섞어서 사업을 했는데. 2011년 지원 없이, 우리 2009년에 실시하려고 하는 사업이 각 지역마다 지금 200개 마을이 넘어서 우리가 어떤 사업을 했는지 그래가지고. 큰 물고기 몇 마리 주고 각 지역에 세 개 나올 때에 3천 마리 새끼가 나와요. 3천 마리 새끼가 나오는 것은 2년 후에는 더 큰 생선이 있거든요. 거기 사진 다 제가 나누었습니다. 그 큰 생선은 어떤 새마을 식구가 몇 명 다 바르고 웃돈을 먹는 생선도 먹이기도 하고. 다른 것도 팔기도 하고 지금 자기가 직접 좋은 집을, 좋은 새마을 멤버들이 또 몇 명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지역에는 먹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생선뿐만 아니라 야채도. 그래서 주는 것은 씨앗. 야채 씨앗 많이 주고. 어떤 지역에는 야채는 잘 심고, 먹는 것도 해결하고. 그리고 몸도 건강해지고. 또 이 물이, 먹는 물 때문에 안 좋은 물 때문에 아프리카 등등, 특히 콩고에서 애들이 자꾸 많이 죽어요. 그 문제에 대해서 사실은 진짜 이것은 기적처럼 우리가 샘플을 스무 개 마을을 잡아서 거기에서 옛날에 6개월 전에 어떻게 상태가, 사람이 몇 명이 죽었는지, 6개월 후에는 참 죽은 아이가 하나도 없어요. 그 케이스를 그 세 과정을 가장 주목해서 그것은 계속 많이 발생하고 계속 돈이 많이 안 들어가는 사업인데 그렇게 우리가 콩고 새마을은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문. 향후 콩고의 새마을운동의 미래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답. 제가 2004년에 시작하여 모델 마을을 만들자고, 모델 마을을 넘어서. 2007년에 지금 새마을 세계화, 콩고 기적처럼 딱 그 모델 케이스가 해외에서 나와서 그 모델마을 넘어서 모델섹터, 섹터는 또 마을 위에 정부 조직 있거든요. 그 섹터 끝나고 우리는 제가 국회에 나오고 난 후에 모델 군을 만들기 위하여, 거기에서 우리가 생선은 100개 마을은, 200개 넘어서 모두 다 생선 양어장은 하나씩 그렇게 시도로 많이 바람 불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선 크니까. 한 번에 새끼 낳으면 3천 마리 새끼가 나와요. 누구나 먹을 수 있고. 그리고 씨앗. 씨앗도 주고. 그리고 먹는 물. 우리가 그 과정에 따라 아기, 참으로 자그마한 애들은 죽을 수 없게. 이게 물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지역을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배고픈 것을 해결하는 것은, 왜냐하면 사람이 힘이 없으면 아무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똑똑해도. 그렇게 그 생선은 모든 지역에, 우리 마을에, 큰 양어장 만들어서 그 생선 거기에 넣고. 그리고 한 일 년, 이 년 후에는 아주 한 사람 당 뭐 큰 생선 먹을 수 있고. 야채들도 잘 먹고. 그리고 앞으로는 모을 수 있게, 그 생선 팔고, 야채도 팔고 자기 좋은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목적입니다.

문. 외국인 지도자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우리가 새마을이라는 이게 밖에서 양심이 먼저 가지고 가야 되거든요. 그것은 제가 자기 나라 사랑하면, 자기 지역을 사랑하면, 모든 것은 할 수 있다는. 하면 된다. 저도 옛날에 너무 힘들었어요. 생각 없이 학생 시절에. 제가 새마을 첫인상이, 아! 바로 이거다! 입니다. 눈물로. 여기에. 눈물로 하다가 제 나라에 방학 때 왔다 갔다 많이 하고 그 지도자를 가슴이 아무데나 울고, 울고. 마을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이게 이렇게 책이 읽어 우는 것이 아닙니다. 땀이 모아져서 울고.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나라사랑, 마을사랑 남을 위해서 사랑해주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런 뜨거운 가슴이 없으면, 몇 번 이 지역에 새마을중앙회 방문을 아무리 몇 번 해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나라사랑, 이 가슴이 뜨겁게 그런 새마을 리더십, 직접 그 경험을 가지고 느껴서 마을 사람들이 어떤 상태로 살고 있는지, 그 과목을 리더라면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문. 어떤 계기로 새마을운동을 알게 되셨고 참여를 하게 되었는지?
답. 제가 한국에 95년에 와서 한국에 온 목적은 공부, 제가 공부 딱 해서 박사 받으면 제 나라에 돌아가서 일을 하겠습니다. 그 목적으로 제가 한국에 자주 왔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가 제가 박사를 마쳐야 할 때인데, 공부 끝나면 콩고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그냥 교수만, 학교에서 애들한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이에요. 그 질문을 많이 혼자서 궁금해서, 어느 날 답답해서 꿈을 꾸는 것처럼 제가 O. K!
제가 국민들이 너무 고생해서 그때에 그 시절에 콩고에서 크게 전쟁이 있었습니다.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 우리나라에서 주먹 쥐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뉴스에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죽어있고. 그 대부분이 농촌사람들이였습니다. 저도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아 왜 이런 사람들이 만날, 콩고는 부자나라인데 왜 가난한 사람, 가난한 나라. 항상 가난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것은 특히 농촌입니다. 도시 안 보여줘요. 그런데 저는 아니 거기 들어가면, 콩고 돌아가면 무슨 일 할 거예요? 참 농촌에 제가 꼭 가야됩니다. 이 사람들을 도와줘야 해요. 도울 방법이 뭐냐. 도울 방법을 하나도 몰라요. 그때 저는 우리나라 걱정해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죽은 거, 배고픈 거, 그리고 대부분이 아시다시피 뉴스로는 안 좋은 뉴스만 나왔어요.
그래서 저는 돌아가면 꼭 농촌에 가야할, 우리 어려운 국민들을 도와줄 수 있도록 제가 꼭 하겠습니다. 그때 그렇게 제가 했는데, 말했는데 어떻게 해야 되요. 꿈처럼 한국에 학교 보니까 한국의 역사, 한국 문화, 배웠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대한민국은 이 나라가 작은 나라인데 70%는 많은 산을 가지고 있는데, 자원도 없고 어떻게 이 나라 진짜로 짧은 시간에 빠르게 개발한 이유가 무엇인지. 제가 많은 궁금점이 들어서 물어봤어요. 학교 친구에게도 물어보고, 교수님한테 물어보고. 그 대부분은 어느 교수님이 저에게 답장을 해줬습니다. 국내에 여러 과정이 있는데 농촌에서 이런 시대에 대한민국에 17년에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나왔습니다. 저도 그 시절에 열심히 해서 공부해서, 새마을 덕분에 저는 지금 박사 되는 것은 그거입니다. 그때 그래요?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연수원을 저한테 가르쳐줬어요. 그때 제가 여기 와서 찾아서 그때 부원장님이 저를 부원장님한테 질문 하다가 저한테 이야기를 시작해요. 눈물 나요. 저도 울고 부원장님도 울고. 30분 동안 진짜로 눈물만. 제가 딱 콩고하고 한국이 역사 속에 참 비슷한 점이 90%가 딱 맞습니다. 전쟁도 그것이 있고, 나라가 남북처럼 우리 콩고도 콩고민주공화국, 콩고공화국, 그리고 지배 몇 년 받아가지고 그 역사에 따라 저는 참 이거 좋은 인연이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가 2003년 이었었고, 제가 꼭 이것은 제가 다음에 나온 교육은 제가 꼭 들어가야 어떤 말씀인지 제가 배우겠습니다. 그때 당시에 지금 외국인이 특별한 세미나, 특별한 트레이닝 많이 하는데 그때 저는 외국인이 한사람 밖에 없었어요. 다 모두 뭐 농촌에 여기 올라오는 우리 새마을 지도자들이 많이 오셨어요. 384명 중에 외국인 하나 밖에 없었어요. 저 그때 뭐 느꼈어요. 뭐 강의하고 자꾸 울고, 눈물만 났어요. 그걸 깨닫듯이 개혁, 개혁, 개혁. 저를 이렇게 딱 머리에서 딱 깨어져서, 제가 결심을 세미나 끝난 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제가 올라가서 저는 꼭 이번 방학에 제가 여름방학에 우리나라 가서 새마을을 꼭 실제적으로 제가 시작하겠다. 라는 결심을 제가 했습니다.

문. 콩고에 새마을운동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답. 제가 바로 느낀 것은 콩고역사와 한국역사를 비교했습니다. 비교해서 유럽, 미국이 개발역사가 100년 넘었는데 우리와 비슷한점이 별로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아무리 지배를 받았어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나라들의 언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비슷한점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개발역사가 50년도 안되지만 저는 콩고가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울것이 유럽보다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지배도 받았고 독립한지가 52년이 지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유럽은 아프리카등등 국가들이 특히 콩고에서 개발된 역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짧은 시간에 개발된 국가로서 콩고는 유럽보다 한국에서 배우면 더 빨리 개발할 수 있다고 제가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결심을 했고, 한국에서 빨리 배워서 아프리카나 특히 콩고를 개발시킬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문. 당시 해외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답. 사실은 지금 한국에서 새마을운동은 역사를 많이 배웁니다. 한국 사람들은 해외 나가서 제일 사실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언어입니다. 아무리 한국에서 성공했지만 해외 나가서 성과가 좀 어려움이 너무 많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못하니까. 아무리 가슴이 뜨겁지만 정이 많아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말을 모르면 어렵습니다. 또 문화를 모르면. 모든 것은 한국처럼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딱 나요. 그 생각은, 그것은 한국처럼 하고 싶다, 한국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똑같이 하라, 해서는 답이 없어요. 그것은 결국은 답답하게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화, 말이 안 되니까. 돈은 똑같이 복사 되잖아요. 이게 개발하라는 일은 새마을 운동은 카피 아닙니다. 그 문화에 따라서 필요성이 그렇게 새마을운동은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고 나서 성공해서 그 지역에, 그 나라에 지도자가 나와야 그때에 한국에서 또 비교가, 평가가 많이 올라가는 것이지. 그런 길이 아주 최고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어려운 것은 언어문제. 또 문화문제. 그렇게 일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문. 콩고 정부와 주민들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반응과 인식은 어땠는지?
답. 지금 정부가, 우리 군수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중앙정부는 이게 지원도 안 주지만 우리 행사할 때마다 참석 합니다. 또는 그 농촌에 있는 군수들이 우리 같이 일을 해요. 여기 군수들 네 군데, 우리가 시작하는 지역은 네 명의 군수를 제가 한국에 교육받으러 한국 새마을 연수원에 지금 출석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교육 받아서 지금 같이 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 군수들도 어려우신 분 들이예요. 정부에도 많은 돈이 별로 없고. 이렇게 정신이 한국에서부터 교육도 받아가지고 같이 국민들이 도와줄 수 있도록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군수들하고.
사실은 국민들이 제가 시작해서, 군수들이 저를 그 마을에 저를 같이 가셨습니다. 가서 국민들이 생각은, 아 이것은 또 해외에서 나온 NGO구나. 왜냐하면 처음에는 안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자기 생각은 이름은 부를 수가 없습니다. 세계 여러 단체들, 개발단체가 많이 와요. 왔는데 뭐 한 두 달 후에는 가는 거예요. 그런데 정부도 몇 명 와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또 프로젝트는 끝까지 안하는 거예요. 그때 제가 가서 또 이야기 하다가 저 사람들이 아, 이게 똑같다 이거. 한국에서 온 사람이 또 비슷하게 또 도망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말씀 저한테 많이 했어요. 제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우리가 같이,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함께 합시다. 잘되면, 성공하면 당신들이 성공입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공합니다. 그렇게 실패하면 제 실패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저와 같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점점 모여서 일 년 지나서 2004년에는 크게 실패를 했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않고 2005년에 또 다시 한번 해서 같이 이렇게, 2007년에 좋은 케이스를, 성공한 마을을 몇 개 나오고. 지금 모두 옛날이야기는 저한테 돌 던지는 것은 그냥 역사적으로만 들어가는 이야기이구요.

문. 마을 지도자는 어떻게 선정을 하셨는지요?
답. 마을 지도자들이 옛날에는, 왜냐하면 제가 처음에 들어가서 한 지역에는 한 도에서 마콩고도 지역에서 시작했어요. 마콩고도에서 어떤 식으로 지도자 뽑아 놓는 방법은, 왜냐면 거기 제가 조금 더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나라에 전쟁이 있고. 근데 저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았고. 또는 그 지역이 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아, 이게 방법이 뭐냐. 제가 여기 마을에 마을 회장, 거기 정부에 알고 있는 마을 회장이, 그 사람이 새마을지도자를 이렇게 제가 임명했고. 거기에서 자기 마을이니까 마을 회장이, 다른 사람이 회장 임명하면 이렇게 문제 생길 수도 있고. 제가 걱정스럽게 마을 회장이 또 마을의 새마을 지도자를 임명했습니다. 그랬다가 앞으로는 나중에 제가 제 고향인 반둔두도 마을에 갔을 때에 아, 이 지역은 제 고향입니다. 여기에는 제 지역이니까 마을 회장이 다른 사람 있고, 거기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 뭐 농장이면 농장, 양어장이면 양어장. 뭐 어떤 사업이든 일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교육 후에 먼저는 교육 다 해주고 누가 이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 누가 이렇게 일 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뽑아서 이렇게 책임을 주었습니다.

문. 지도자 선발 후 어떻게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사업 추진하게 되셨나요?
답. 마을 사업을 할 때 우리가 제가 가지고 있는 국회도 있고, 돈이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 씨앗, 몇 번 한국에서 씨앗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콩고에서 씨앗 받는 시장이 있습니다. 씨앗을 제가 많이 사면은 또 싸게 살수가 있고. 그렇게 마을 당.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다시피 문제는 제가 먼저 배고픈 것 해결하는 것. 그래서 생선도 누가에 지역에는 생선 많이 양어장에 가지고 있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거기에서 생선 세 개는 샀습니다. 또 어느 생선은 제가 콩고 강에 있는 아주 큰 생선인데, 그 생선은 큰 강 말고 양어장에 키울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 생선은 새끼를 낳으면 3천 마리를 한 번에 낳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나 기르면 딱 생선이 많이 몇 마리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 따라 국민들한테 누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 먼저 드리고, 각 지역의 어떤 마을은 열심히 안 해요. 관심이 제일, 일을 잘하는 마을 먼저 그렇게 드렸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마을이 전에는 열심히 일하는 마을이 한테 배워서 거기에서 생선 새끼도 다시 한 번 받아서 또 자기 양어장에서 놓고. 그런 방식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옛날에 마콩고도는 케샷하고 가까워요. 제가 많이 다녀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지역에는 많이 발전하고 있으니까 다른 지역은 뱃길 돌아서. 제가 한 달에 한번 갑니다. 가서 보고. 또 세미나 후에는 잘하는 사람은 그 지역 마을 마다 지도자 있잖아요? 마을당 12명의 관리하는 사람. 회장 거기에서 12명, 12명, 각 마을에. 그렇게 어떤 마을에 성공 케이스를 묻냐. 거기에서 뽑아서. 거기에서 또 새롭게 누가 지도자를 할 수 있냐 하는 사람이 그 성공하는 사람만 지도자를 지금 뽑아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음에는 앞으로 누가 그 국제 세미나 들어올 때에 누구나 뽑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 이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만, 그 리더만 제가 뽑아서 한국에서 프라이드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프라이드가 없으면 사람이 관심이 없습니다.

문. 각각의 마을에서 펼친 소득증대 사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답. 제가 콩고 특히 농촌에서 땅콩, 옥수수 그것만 많이 해요. 그런데 그서만 해다가 진짜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안사는 것도 있고. 저는 돈을 버는 방법은 세 가지 단계로 하는 거예요. 첫 단계는 야채를 많이 심어요. 야채는 3주 내내 야채를 이렇게 먹을 수 있겠죠. 그 다음 다른 단계는, 깨는 두 달 후에는 깨를 이렇게 거둬야 돼요. 그 다른 단계고. 그리고 옥수수, 여러 가지는 뭐 세 번째 단계는 삼 개월 걸리니까. 그거 아무튼 두 달 마다 뭐가 생산되서 나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지역에서도 팜 오일 있잖아요. 팜 오일. 기름. 거기 지역에 기름이 있고. 그 기름을 아주, 그게 많은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그 기름에다가 ??? 올리고 사서 또 팔고. 그런 사업은 많이 하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시간이 제일 많이 걸리는 것은 생선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선은 일 년만 지나면 엄청나게 많아요. 지금도 너무 많고. 사실은 고기를 사는 사람이 없어요. 멀리 가서 팔아야 돼요. 그 과정은 돈 벌어서 지금 아까 말하다시피, 어떤 사람이 생선 많이 팔았기 때문에 자기 직접 좋은 집이 건설 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고 있는 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농산물이 너무 많습니다. 농산물이 많아서 반은 시장에서 그 과정은 지금 방법은 여러 가지 찾고 있는 중입니다.

문. 각 마을에서 펼친 환경개선 사업은?
답. 환경개선은 제가 아까 말하다시피 옛날에는 뭐 옛날에 점으로 키보야 라는 마을 비디오로 보셨는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그 기금을 한국에서 받아서 열심히 해서 마을사람들이 벽돌 짓고, 스물 하나 가구를 건설을 해서 그렇게 했는데. 근데 과정이 너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이 이게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을 관리를 잘 해야 되는데 자기 돈으로 담을 안 올렸기 때문에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뭐 전 집인데 어떤 사람이 잘하고, 어떤 사람이 잘 안되고. 그런데 그때는 아 이번에는 환경 개선하는 사업은 절대로 다른데서 와서 돈이 찾아서 여기에서 아닙니다. 자기가 직접 집을 건설해야 되고. 그리고 물, 먹는 물을 누가 마을에 안 좋은 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내가 대신에 해 드리고. 근데 좋은 집을 가지고 가고 싶으면 열심히 먼저 양어장 딱 만들어서 또는 준비 다 됐는데도 제가 생선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생선 드리면 받으면 사인하면 꼭 3년 후에는 좋은 집 가지고 가야돼요. 좋은 집이 없으면 모든 생선 제가 다 가지고 가고 다른 사람에게 드리겠습니다. 라는 그 과정은. 지금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전체 집을 가지고 있어요. 사진 보세요. 그렇게 환경이 옛날의 집에서 벗어 날수 있습니다. 전부 돈을 안 받아도 참 굳게 만들어서 제 지역의 사람들한테 제 말 잘 들으면 4년 내내 모두 마을이 좋은 집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면 농산물이 너무 많으니까. 시장만 찾으면, 목적 잡아서 힘을 모아서. 이 배고픈 게 지금 먹는 거 많이 있기 때문에 그게 해서 딱 3년만, 많이 하면 4년 내 진짜 성과가 너무 높으실 겁니다. 제가 그걸 꼭 믿습니다.

문. 각 마을에 나타난 주요한 성과는?
답. 지금 지역에 가장 좋아하는 마을에 무르무크 내에 있는 키타바 마을이 있습니다. 키타바 마을은 쾨로긴바타 섹터에 있거든요. 키타바 있고, 모키리르바수라는 마을. 거기 모키리르바수 마을 가면 이 바다 아니면 양어장입니까. 저도 너무 놀랐어요. 거기에는 야채도 잘 심고. 시장에 가면 그 마을에 사람들이 더 많이 높아요. 물고기도 팔고, 야채도 팔고, 다른 킨바타 같은 마을은 거기에서 그 돈만 사용해서 그 생선을 사고 야채를 사고. 그렇게 들어가면 단계별로 마을을. 사실은 한 번에 들여도 다 성공 안 됩니다. 잘되는 사람이 일등, 뭐 미얄라, 그 키타바 마을. 또 따라오는 마을이 킨바타, 또 다른 마을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 지역에, 몇 개 지역에 마을을 다니면서 그것은 확실하게, 제가 뭐 비디오도 앞으로 아마 다음날 제가 다시 한 번 비디오로 보여 드릴수가 있고. 그 동영상은 어떻게 마을 사람들을 깊이. 기쁨과 옛날에 먹는 물 없었고 또 생선을 그렇게 아주 가서 잡아서 먹고 배고프게 해결하는 것은 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열심히만 하면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또 조금 더 기다리신다면, 참 새마을운동은 윗선으로 우리 힘으로, 다른 사람 힘 말고 우리 힘으로 우리 마을을 바꿀 수 있게 하면 된다. 라는 제가 확실히 봤습니다. 그 과정에 따라 제가 이번에 더 크게 할 수 있게 마을 사람들이 힘으로 자기 환경을 개선 할 수 있도록 해야 그것이 Ownership 입니다. 주인감 있어야 합니다. 주인감 없으면 무슨 새마을이 되겠습니까?

문. 새마을사업을 펼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답. 사실은 제가 몇 번 포기 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부에서 관심, 처음 생각은 아 제가 정부에다 몇 번 소개 했고 여러 부, 부통령, 장관들에게 많이 소개해서 네가 알아서 해. 뭐 단체 만들어라. NGO만들어라. 네가 연구하는 사람이니까, 그때제가 박사 학생이었거든요. 하려고 했었는데 우리가 사인 해드릴 테니까 알아서 해. 2004년, 2005년에 이렇게 허락 받아가지고 일을 시작 하는 거 참 어렵습니다.
이 농촌 개발이라는 거, 가슴이 뜨겁지만 돈이 있어야 되고, 돈이 없으면 어떻게 일을 해야 돼요. 그때 그 부분은 많이 어렵습니다. 근데 더 걱정. 이것 실패하면 제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 갈수가 있겠습니까? 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또는 여기에서 뭐 가끔씩 우리 중앙회에 같이 일하다가 제가 외국인이거든요. 한국말, 또 다른 문화이니까 같이 진짜로 끝까지 할 수 있을 건지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니 그 대부분이 언어, 관계 아주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또 나라에서 저는 정치하는 사람 아니에요. 정부 사람도 아니고. 해외에서 나와서 제가 방학 때 2004년부터 방학에 한국에서 안했어요. 여름방학, 겨울방학, 콩고 갔습니다. 그리고 도시 아니고 마을에서. 그런데 제 가족은 항상 버리고. 와이프는, 아이들은 한국에 있고. 가끔씩 와이프도 화나서 콩고를 따라오면 킨샤사 수도에 있고 저는 마을에 있습니다. 그럼 너무 가족 간에 힘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이 일을 꼭 성공할 수 있게.
그런데 2007년에 성공 케이스 나와서 또 다시 한번 한국에 불러서 그때부터 세계화라는 새마을운동을 시작한 것이에요. 여러 아프리카, 여러 군데 다니면서 참 이야기하기가 조금 쉽지만, 사실 그 거세게 힘들다는 것. 돈이 없고 또 왔다 갔다 해야 되고, 또 조심 조심스럽게 해야 됐기 때문에. 왜냐하면 저는 정치인도 아니고, 해외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이 나라에 아직도 변하지 않던 나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같이 일하고. 참 너무 어려웠습니다.

문. 지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답. 제가 지원 받기 위해서 제 생각은 더 일 많이 해야 돼요. 무슨 과정을 하면 제가 지금 물 문제 해결하는 지역에 20개 마을을 했습니다. 제 생각은 100개 마을까지 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케이스를 제가 국회의원이니까 지금 정부한테 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지방 병원하고 같이. 제가 평가가 지방 병원 보고 어떻게 아이들이 많이 죽었는지 우리가 좋은 물 했던 후에 어떻게 됐는지, 그 평가에 병원 원장이 같이 저와 같이, 그리고 우리 새마을 식구들이 같이 정부에서 방문하고 이것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우리 혼자서 이렇게 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우리가 찾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준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문. 2004년 콩고에서 새마을사업을 하시면서 콩고 대통령과 정부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답. 좋은 관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정부, 국회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전에는, 국회의원 되기 전에는 꾸무가 누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옛날에 한국에 대통령께서 직접 재작년에 2010년 청와대에서 같이 식사해서 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때나, 아마 1년 후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리포트, 아주 마을 사람들도 말 하는 것, 거기 지방병원 원장도 리포트 쓰는 것은 보고 드릴 때에 제가 국회니까 대통령 직접 드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정부의 총리한테 직접 드리겠습니다. 그때에 크게 지원은 받을 수 있는 과정은 바로 그거입니다. 노력 없으면 지원을 어떻게 받아야 됩니까.

문. 새마을운동 추진하시는 과정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었입니까?
답. 제가 처음으로 2007년에 첫째 성공하는 마을. 키부야라는 마을이. 거기에서 환경이 발전하는 사업은 키부야 마을에서, 그 마을에. 마을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이 피해있었어요. 근데 사실은 이 과정은, UN은 제일 어렵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을은 네 개 마을을 가꾸다가 우리는 마을 하나로 만들었어요. 새마을 중심으로. 지금 26개 가구 한 번에 다 모든 집 똑같이, 거기에서 국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싸움도 없고. 거기에서 크게 병 걸리는 애들도 없고. 그것은 제가 잊을 수없는 제일 많은 깊이와 진짜 감동스러움, 또 성공 케이스는 많은 케이스 있지만 거기에서 처음으로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 추진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제가 마을 사람들이 또 바르게 제가 많은 힘이 사용 할 수 없게. 저번에 방문 많이 했기 때문에 또 방문 많이 하지 않게 잘 되면 제가 그렇게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집을 가줄 수 있다면, 그 지역에 정부가 지원 해준다면 모두 똑같이 집을 예쁘게 지을 텐데 그것은 아직 제 가슴 안에 담아 있습니다.

문. 콩고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답. 그런데 평가는 제가 하는 거 아닌데. 아닙니다. 평가하는 것이 아니에요. 보는 사람들이 저를 평가해 줘야지 어떻게 제가 혼자서 평가를. 저 못합니다. 참으로. 제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줘야지. 제가 어떻게 평가해 줘야 돼요. 못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문. 그래도 스스로 돌아봤을 때 이것은 잘 했고,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답. 여러 가지 제 생각은 지금 여러분들은 세계화 새마을 운동은 콩고가 최고다, 최고다 그렇게 말하며 제가 또 많은 일을 또 남아 있습니다. 거기까지 올라가고 있지만 더 많은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게 평가 제가 몇 점, 몇 프로 받았는지, 제가 그런 말 할 수가 없고. 하지만 지금까지 잘 되는 것도 있고, 안 좋은 점보다도 좋은 점이 더 많고.
특히 여기 새마을중앙회 관계도 잘 하고, 거기 지역에도 일하다가. 또 나쁜 점 보다 그 말씀 드려야 되거든요. 정부 특히 아무 때나 저한테 손을 때려본 적 없고, 아주 자연스럽게 저를 사랑하고 서포트 많이 했습니다. 돈은 안 줬지만. 그거 대부분이 다라 병원 없으면 일 못하죠. 평화를 정부한테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제가 볼 때 아, 이것은 진짜 좋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좀 더 행복해지고, 힘들지만 조금씩 하다보면 자기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제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