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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금으로 천만 원을 주셨다면서요, 그때 상황을 좀 얘기해주세요.
답. 그 말씀을 하시길래 내가 그래 얘기 했지. “난 안 받겠습니다!”

문. 처음에 돈을 주시던가요, 하사금을.
답. 아니 줄라고 말씀을 하는데 난 안 받겠다는 거지. 왜 안 받을라고 하냐, 내가 번 돈 아니다. 그건 전부 국민들 돈이거든, 쉽게 얘기하면, 아냐? 나는 내가 성공을 해야 그게 내 힘으로 하는 거지, 그래 나 국가가 주는 돈으로 땅 사서 마을에 그때 여기 와서 한 5,6만 평 사가지고 있으면 일 안하지 뭐. 차타서 양복입고 거들먹거리면 뭐 일 안 해도 부자 저절로 되는 거 아냐? 나는 그건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 할 겁니다. 그 때에 박대통령이 큰 감동을 받은 걸로 내가 지금 느끼는 거요.
그러면 내가 그 목표를 세운 것을 했느냐, 무일푼을 가지고서도 내가 70살 먹을 때까지 내가 땅을 만 평은 내가 확보 한다. 잘 산다. 그것을 성공했잖아요? 또 사회사업 농업이라든가 마을회관이라든가 이런 걸 다 내 스스로 하는 거니까, 예를 들어 조상에 의선하는 데 쓰는 거니까, 돈이라는 건 벌어서 중요한 부분에 쓰는 것이 돈이야. 사람은 자기가 해야 그게 한 거지. 남의 거 가지고 한 건 한 게 아니거든.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날 보고 그런 얘기를 해. 아유, 숙맥이다. 천만 원 줄 때 받아가지고 그놈 가지고 땅 사서, 너는 평생 부잔데 안 받았느냐며. 그렇게 하면 그거는 사람이 남한테 의존하는 것밖엔 안 된다. 내가 지금도 제일 걱정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면 바로 여러분들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우리를 그렇게 고생을 시키고 못 가르치고 했지마는 돌아가실 때 빚을 외국에서 얻어다 쓰고 너희들이 갚아라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나는 지금까지 80이 먹도록 살면서 무일푼 가지고 이렇게 농업을 해서 성공을 하면서도. 나 부자라고 해. 내가 이런 일이 있어요. 울산에 가서도 현대건설에 가서도 강의를 해달라는데 강의는 많이 했거든. 돌아가신 정주영씨 하고 농담을 했다고. 아이고 회장님 참 부자네요. 부자야 대한민국 최고 안 가는 부잡니까 부자지. 울산 반은 그 양반 거여. 그다음에 날 보고 또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선생은 그럼 땅도 많이 있소? 그래. 그 내가 웃으면서 내가 땅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나 땅 다 팔아야 회장님 자동차 한 대 값밖에 안돼요. 그런데 내가 부자라고 하는 그 뜻은 나는 빚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낳아서 지금까지 얻어먹고 댕겨 크기는 했어도 남의 돈은 무서워 해. 정부가 돈을 줘도 안 받아. 내 힘으로 해야 된다는겨. 그러니까 지금까지 농협이나 개인이나 어딜 가든 십 원도 빚이 없어요. 빚이 없어서 내가 부자다. 회장님은 이거 다 회장님 돈 아니잖아. 정주영씨가 내 등을 이렇게 두들며 참 명답입니다. 빚 없는 사람이 부자다. 왜 이 얘기를 하나. 내가 이 텔레비젼를 보거나 이렇게 봐도 젊은이들 이 돈쓰고 이러는 걸 보고 그럼 저 빚진 거 일 가구당 4,000만원인라든가 그러죠? 카드 긁어 쓴 돈은 안 들어가고도 그려. 외국에서 갖다 쓴 돈. 그거 우리가 갖고 죽어야 내 아들이나 내 손자들이 편안하게 살 거 아냐? 내가 죽으면 그 돈 안 달랄껴? 틀림없이 걔들한테 돈 달랄 거라고. 그 잘못은 할아버지들이 해 놓고 나중에 후손들에게 왜 그 엄청난 빚을 안겨가느냐. 검소하게 살아라. 나 고무신밖에 안 신는 사람이여. 평생을. 이 발만 편하면 될 것 아니여. 무좀도 안 먹거든. 한번 기자가 와서는 “선생님 일평생 신은 고무신이 몇켤레 되세요?” 그랴. 글쎄 저 할 때는 한 삼년은 신는데. 나는 신으려면 고무신 한 켤레 밖에 없어. 다른 신은 하나도 슬리퍼도 없어. 그러니 내가 천원 꼴이여. 그렇게 절약을 해야 돼. 우리 국민들이. 그런 절약정신이 없다 이거야. 가장 내가 안타까운 게 그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 재작년에 저축왕이 내가 돈이 많아서 저축왕이 된 게 아니야. 어떤 사람들은 통장이 삼백 개가 넘는다니까 아유 그 돈 다 어떡할래유. 참 머리가 안돌아가는 사람들이요. 여러분 보여 달라면 보여줘. 십원, 오원, 돈은 가지고 있으면 쓰니까, 은행에 갖다 예금을 하는 거야. 그래서 그것이 조금 키우면 그거 살만치 땅을 사. 마흔 네 번을 한 것이 만평이야. 그래 내가 목표로 했던 걸 달성을 한 거죠. 맞지? 그래서 요번에 한 것은 종이컵을 한 번 먹고 여러분들 흔히 내버립니다. 내버리지? 그게 돈이야. 그건 나 만날 가 주워오거든. 그게 내 직업은 아니야. 내 일은 일대로 하고 시간 남으면 그놈을 주워다가 한 십만 대씩 거기다 모종을 키워서 오토바이에다 끌고 다니며 팔아. 일 년에 천만 원을 그런 길바닥에서 주워도 줍는겨. 왜 못산다고 하느냐 이거야.

문. 그게 어릴 때부터 몸에 배서 그런가요.(07:15)
답. 뱄지. 뱄으니까 내가 어려서 국민학교 다닐 적에.

문. 가난이 제일 무섭다고 얘기 하셨는데 왜 그렇게 생각 하시나요?
답. 여러분들 흔히 얘기하는 사랑 얘기들 많이 하나. 배고프면 사랑 못 혀. 내말이 그 뜻을 모를거여. 배 안고파봐서, 사흘만 굶어봐. 제일 무서운 것은 인간은 먹는 거야. 나 이북에서 김정일이가 오라고 해도 갈려는겨. 공산주의, 민주주의 그걸 따지는 게 아니여. 국민들이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사느냐 하는 이게 과제에요. 이게 문제라고. 내가 요즘 한가지 안타까운 게 있어요. 처음에 이명박 대통령 여러분 찍었어요, 안찍었어요. 우리 국민들이 이명박씨를 대통령 찍어줬을 때 대통령 혼자는 못하는겨이거. 아주 내가 속으로 울화가 터지는겨. 대통령이 아무리 혼자 하려고 애 써도 안 되는거에요. 국민들이 얼마만큼 협조하느냐가 중요한 거에요. 내 말이 맞아요 틀려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날마다 데모만 하고 난리가 나고 싸움박질만 하고 말이여. 이놈이 도둑놈이고 저 놈이 도둑놈 말이여.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서로 도둑놈이라고 싸움박질만 하는 거야. 이래가지고 집구석이 되겠느냐. 나는 정치인은 아니야. 근데 텔레비전으로 보니까. 굉장히 속이 상하더라. 대통령 일에도 국민들이 응해줘야 되는 거야. 내가 새마을운동을 계속 다니며 삼천 몇 백번을 내가 강의를 한 사람이여. 강의를. 사례발표를. 그랬는데 몇 해 전에 김대중대통령이 나왔을 적에 그 양반이 다시 새마을운동을 들고 국민운동을 한다고 했거든. 어떤 분이 나한테 그걸 부탁을 하더라고. 난 못 한다고. 새마을운동 근본이 우리 국민들이 단합이 돼서 열심히 해서 쉽게 얘기하자면 불을 붙여서 숯이 다 돼, 불에 가마솥에 숱 만드는 것처럼 잘 탔거든. 근데 꺼져버렸다고, 새마을운동이 꺼져버렸다고. 안타깝죠. 뭐를 새로햐, 새로할 게 뭐있어, 국민들 잘 사는 게 목적 아니여, 그럼 잘못 하는 게 있으면 좀 고치면 되잖아. 잘못 되면 가생이를 베어 내버리고 거기다 접을 붙여. 그럼 과일나무도 더 큰 게 열리고. 이런 연구를 해야지. 왜 그 남이 하던 건 못 쓰는 것처럼 집어넣어 . 해봐라. 해보고 나면 알낀다.

문. 작년에는 중국에 갔다 오셨잖아요. 책도 발간 되고 중국에서 강의를 어떻게 하게 됐는지 얘기 좀 해주시죠.
답. 내 대강대강만 들었는데 중국에 간 것은 그 사람들이 30년을 개혁을 해 온다고 그럽디다. 한국이 새마을운동을 해서 한국이 경제발전을 해가지고 잘 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그 한 그걸 배우는 거야 저 사람네가 지금, 그래서 한국에는 하사용씨라는 지도자가 훌륭한 분이 있단다, 그걸 알아가지고 거기서도 신화사 통신이 이런 데서도 오고, 와서 한국하고 맞추고 협작을 해서 중국 새마을운동을 하려고 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날보고 오라고 했는데 가보니까 이 개인들 농민들이 아니고 그래 거기가 도대체 가면서 내가 물었지, 거기는 어디로 갈, 내가 지금 얘기를 하러 가는 데가 어딥니까 하니까, 책을 내는데, 내 책을 내는데 기념 되고 또 한가지 거긴 공산당인데 공산당의 최고가는 분들인데 거기 좀 한 10분이고 15분이고 해야 된다. 믿었지. 그러나 그 회장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가 북경의 천안문광장? 거기가 어마어마하대. 근데 들어가 보니까 제일 기분 좋은게 중국기하고 사진있잖아 태극기하고. 딱 걸어논거야. 아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만큼 컸구나. 어때요 기분. 아니 그런데 가서는 태극기도 없는데 강의하라면 기분나겄어? 딱 붙었으니까 용기나서 했지뭐.

문. 그 사람들 강의를 할 때 반응이 어떤가요? 많이 궁금해하고 이것저것.
답. 반응이야, 좋지 좋은 정도가 아니지. 근데 북경대학에서 북경을 가니까 중국에 제일 유명한 대학이 북경대학이라는 게 있고 청아대학이라는 데가 있어 청아대. 그 양반이 거길 쫒아왔어. 선생님 오셨다고. 청아대 와서 강의를 해달라고. 가보니까 책을 다 가지고 있어. 그럼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 전부 박사들, 전부 교수들 이런 사람인데, 그래도 기립박수 받아본 건 거기여. 뭐 목발집고 갔으니까, 내 머리가 이렇게 안생겼었어. 이게 이제 이번에 사고 당해가지고 머리가 이만하니까 여자들이 가새로 이렇게 잘라놨는데 병원에서. 그래 거기하고 상서성하고 강의를 하고 왔거든? 근데 또 부를 텐데 내가 지금 몸이.

문. 그때 목발집고 가시지 않았어요?
답. 아 목발집고 갔지.

문. 아 그걸 어떻게 하셨어요.
답. 그니까 중국에서도 깜짝 놀라지. 막 청아대 같은 데는 박수를 치고. 그러니까 자기네가 봐도 나이가 80인데.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강단으로 강의를 하면 두 시간 동안이 목청이 쩌렁쩌렁하잖아. 세 가지가 특수한 게 있다. 그 사람들이 그래 뭐가 제일 특수합니까, 하니까 이제 눈이 제일 특수하다. 아무리 조그만 것에도 돋보기 안 써요 우리.눈썰미가 있어서 보이는대로 다 읽어. 이런 글씨도 희미해도 이게 다 보인다고. 그렇게 눈이 밝아. 두 번째 귀가 밝아. 귀가. 이 병원서도 아주 화제야. 세 번째 목청이 밝아. 할아버지 그 목청은 그 목청이 여기서 나오는 건지는 몰라도 이 목청이 좋거든. 타고났다. 대게는 새마을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나를 평할 때 뭐라고 평하냐면 저 양반은 새마을운동을 하기 위해서 아주 타고났다.

문. 태어난 사람.
답. 타고난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선 원고 한 개도 없이 애들한테도 강의해도 100점, 노인네한테 가서 강의해도 100점, 높은 사람한테 강의해도 100점, 하다못해 국방대학원 같은 데는 별짜리들한테 강의를 해도 100점. 어딜 가서든지 새마을 강의는 다 환영이다. 그 원고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골고루 하느냐. 내 얘기는 그게 아니에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야. 제일 첫째, 많은 사람들한테 들어라 이거야. 대통령도 국민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라 이거야. 얻어먹는 놈도 한 얘기도 좀 들어봐라 이거야. 많이 듣는 거. 두 번째 눈으로 다니며 많이 봐라 이거야. 얻어먹고 개구창에 앉아서 파먹는 놈 뭘 하나 하고 가 봐라. 필요한 게 있다 . 필요한 건 내가 간직하고 필요 없는 건 버리는거야. 내말 이해 가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교육입니다.

문.선생님, 옛날 그림보니까 무슨 파인애플을 재배하셨던데 파인애플을 이용해서.
답. 메탄가스로 해가지고 파인애플은 안했어. 오이 그때 토마토 그런 걸 했지.

문. 파인애플은 재배를 안하신거.
답. 안했어.

문. 그건 아니구나. 그럼 여기 지은 비닐하우스하고 새로운 농법 같은 건 어떻게 배워서 가르쳐주셔나요?
답. 농법은 내가 배운 건 아니고 학교를 나왔으면 농업학교를 나왔어 농대를 나왔어, 경영이라고 내 얘길 했잖아? 근데 그 식물이 어떻게 해야 크는가. 이놈이 왜 안 크는가, 이놈이 추워서 못 크는가, 뜨거워서 저러는가, 근데 쉽게 얘기하면 식물의 의사가 되 버려야지. 이 기술이라는 것은 알아도 또 소용없는 거야. 안하면 소용없어요. 이 세 가지를 내가 삼년이라고 합니다. 책에도 나올거에요. 그럼 저 대학교 농과대학 박사님들도 날 보고 그랴, 아니 어디서 그런 걸 배웠냐고. 농사짓는 데 제일 필요한 게 뭐요. 첫째가. 학교 댕겼을긴데. 그걸 몰라. 부부가 협동이야. 마누라가 도와주지 않으면 세상없어도 성공 못하는거야. 두 번째가 뭐여. 내가 그 박사님들한테 물어보면 그 양반들이 뭣허냐, 아 농사지으려면 땅이 많아야지. 그 말도 맞아 땅도 많아야지 아니야 지력입니다. 땅이 병이 들면 암병이 들면 그 땅은 버리는거에요. 마을서 50년 농사져도 땅이 저렇게 건강햐. 그럼 뭐냐, 그 땅을 지력증진을 하는거에요. 땅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가지고. 땅이 건강하자면 객토를 한다든지 예를 들어서 거기다가, 그 땅이 병이 안들게끔, 하는 지력증진을 하는거에요. 세 번째 뭐냐 이렇게 물으면 아 기술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기술로는 다 알아. 안하면 소용 없는거야. 기술보다 앞에 더 중요한 게 있다면 노력이다 이거야. 첫째는 체력, 내가 건강해야 돼. 맞죠? 두 번째는 지력. 땅도 나같이 건강해야 돼. 세 번째는 피땀나게 노력을 해야된다 이거야. 내가 한 가지 예를 드는 데 난 그걸 한참 머릿속에 생각해. 내 옛날에 학교 다닐 때 국민학교 2학년 책에, 책에 그림이 나오죠. 토깽이하고 경주를 시키더라고, 아니 토깽이하고 거북이하고 경주 시키면 어떤 게 일등을 합니까. 어떤 게 일등 갖냐고. 토깽이가 일등을 하는겨 거북이가 일등을 갖는겨. 아니 솔직히 얘기하라고.

문. 토끼가 일등하게 돼 있죠.
답. 토깽이가 일등 하죠.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에요. 우리가 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 토끼 뛰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뛰었어요. 거북이가 저 뒤에서 따라와. 이놈이 게으름 피웠는데 가다가 나무 밑에서 자빠져 자. 쿨쿨. 저 거북이는 그 뜨거운데도 쉬지 않고 갑니다. 여러분들 앞날을 잘 봐야 돼. 우리의 뒤에는 무시무시하게 따라오고 있어요. 중국이 따라붙었어요. 젊은이들이 그걸 알아야 돼. 좀 쳐다보라고 어떡하나. 지금 거북이하고 토끼하고 경주를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토깽이가 돼버린다고 지금 토깽이가. 딱하죠. 여기있는 나 80된 놈이 내일 죽을 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데 딱하다고 보면. 그래서 우리 후배들이 앞으로 물론 더 잘 살는지는 모르지마는 아까 얘기한대로 제일 중요한 거는 빚 진거 이것 좀 어떻게 해결하고 죽어라. 안하면 여러분 어머니 아버지가 빚 졌는지 모르지만 죽으면 어떡할거야.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 갚아야지? 그런 책임을 전가하지 말아야지. 나는 절대 내가 죽어도 10원도 쓸데없는 전가 안합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되는 거야. 강할 땐 강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여기서 이 농사를 지어서 나도 자식이 하나 있는데 대학교는 보냈어. 내가 못 배웠으니까. 내 손자들도 지금 대학교 다 가. 어떻게든지 가르쳐는 줘야 돼. 근데 가르쳐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놈들이 어떻게 할 거냐가 문제여. 그게 문젠데. 그래 내가 자식 놈 하나 있으면서 농사를 지었었어. 요즘 또 뭘 한다고 뭐 의원 한다고 또 지방서 놔둬? 의원을 한다고 나가 쏘다니는데 내 맘은 안 그려. 지금 열심히 일을 했으면 더 좋겠어. 나 그 솔직한 심정이라고.

문. 마지막으로 새마을가족들한테 뭐 당부할 말씀이 있으시면.
답.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엔 새마을이라는 게 아까 내가 얘기했지만 한참 타오르다가 꺼졌거든. 나무도 한가지야. 나무도 불만 붙여 놓으면 기가 막히게 탑니다. 그 껐던 놈을 다시 갖다 불을 붙이려면 또 떼려고 거기다 불을 붙이면 타긴 타. 불꽃은 약하다고. 힘이 없다고. 이 새마을 운동을 절대 다시 앞으로 계승을 할라는지 아주 참 없앨라는지 그건 몰라. 나름대로 나도 80이니까. 그러나 내가 봤을 때는 후세들에게 반드시 그 정신만은 계승해야된다 나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저 책을 낼 적에 박진한 박사 그 양반이 저걸 낸다 그러기에 그 뭐할라고 내느냐 했더니 그 양반 말이 그거야. 이 새마을운동이 후세들은 모른다 이거여. 이론상으론 남아 말로는 남고. 근데 그 내막은 어떻게 되서 되는 건지 모른다 이거야. 그래서 하사용씨가 목표다 이거야. 그래서 하사용씨 것을 이걸 내 놓으면 후세사람들이 아 그분이 새마을운동을 이렇게 해서 선발대서 그렇게 해서 한국 새마을 운동이 이렇게 됐구나 하는 것이 알게 된다. 그러니까 후세들이 나중에 배가 고프면 그 정신이 또 나올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

문.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 정신이나 이건 계속 돼야된다?
답. 그렇지. 그런데 그게 글쎄 지금 그대로 이야기함과 같이 토끼만 자는 형국이여. 그래서 그게 걱정이라고. 지금 우리나라, 몰라 나는 경제인은 아니야. 그런데 요새 이 텔레비전을 보면 이게 뵈지는 않는데 살림살이가 오그라드는거 같어어째.

문. 이제 그런 얘기를 하시죠 이 새마을운동이 박대통령 때도 정신개혁 운동이다.
답. 그렇지! 바로 정신개혁운동이여. 정신개혁운동이여. 새마을운동의 원 목적은 정신개혁이여. 국민들, 그러니까 내가 이북에 이동을 하면 간다는 겨. 중국서 오라면 가고, 또 올해 어느 나라를 갈는지 모르지만 왜 이북 오라는 이유가 뭐여. 공산당, 민주당 이거 따질 필요가 없어. 국민들 배고프게 해결하는 사람, 그게 지도자다 이거야. 가장이 뭡니까. 가장이라면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할 책임이 있는 거야. 제 1순위야. 난 내 새끼들 배 안 곯게 해요. 절대 내 목숨이 떨어져도. 그만큼 책임감이 있는거에요. 대통령도 한가지야. 그런데 혼자는 안 된다 이거야. 이명박씨는 내가 요새 텔레비전 보면 난 몸닳고로 보는데 쪼끔.
이때 요것은 이제 그때당시 처음 집이라고 요거 장만해가지고는 농사를 진거거든 그래 그때 지금 요짝 집이 긴데. 그때 270평이래야 지금 이 마당에 있는 저기 여기 조그마했었거든.

문. 사모님한테 말씀을 좀 시키셔야 되는데. 이 상 받을 때 얘기를 조금만. 옛날 이제. 저한테 얘기만 하시면 안 되고 물어보세요 이렇게.
답. 그래가지고 그때당시 이걸 해가지고 땅 사가지고 그땐 밭이 이렇게 좋질 못했었거든. 참 전부 집 여기 이 밭 현재 이것이 그때당시 우리가 흙을 지게로 져다가 거길 메꾼 거야. 첨엔 270평을 사가지고 하다가 조금만큼 한푼씩 두푼씩 모아다가 뒤꼍도 조금 나면 조금 사고 또 그때는 농사를 지어가지고 직접 우리가 손수 끌고 다녔거든.

문. 그때 고생하시지 않았냐고 한번 여쭤봐주세요.
답. 고생이야, 뭐 지금 얘기하잖어. 고생을 하도 해서 지금 다리가 저렇게 됐다.

(어머님)
답. 일을 얼마나 했다 그래요.

답. 그니까 그땐 순 지게질로 하니까

(어머님)답 : 구루마가 있나 뭐.
답 : 그땐 구루마도 없었거든.

답. 그런데 여기서 그놈을 싣고서 옥산장이나 여기서 삼사십리 끌고 갈려면 고생한건 말도 못하지. 아 물로 다 떠내려가 장마때 물 막 떠내려가보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문, 이게 어떤 그림인가요 그때당시.
답 : 이건 내가 시상받은거 내가 서울에서.
그땐 서울에서 내가 시상을 받았는데 기자들이 묻더라고. 기자들이 물을 때 내가 얘기하기를 이 훈장은 받기는 내가 받았는데 이 훈장을 그땐 내가 식구들 바로 이 옷차림이야 이 스웨터 입고 몸빼 입고 내가 서울을 갔었는데 그 참 남이 보면 우습지 근데 그 기자들이 묻길 이 훈장은 우리아내가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해서 이걸 아내에게 줘야 될 훈장입니다. 그때 그래서 이걸 이 훈장을 내가 아내 목에다 걸어준거거든. 그래 그게 뉴스에도 나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이건 이 훈장을 받기 위해서 둘이 흙을 처 나르고 똥을 퍼 나르고 그놈을 끌고 다니며 팔고, 어린애들은 우니까 그걸 데리고다니지 못해 새끼를 방에다 가둬놓고 지금 같으면 징역가지. 그러나 그렇게 안하고서는 도저히 이 물건을 갖다가 팔아야되겠는데 내가 생각을 하고 걔들을 위해서 그렇게 안했더라면 지금 아이들을 공부를 내가 시키고 저렇게 잘 키울 수도 없었고. 먼저번에 서울에서 아침마당에서 지들이 그 얘기를 하더라고. 같이 갔는데.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우리한테 그렇게 심악하게 아버지가 무서워서 도망을 갔다는겨. 애들 얘기가. 그러나 나는 가야할 길이 머니까 성공 해야되겠으니까 애들한테 심악하게 한 것이 지금은 걸리지. 걸리는데.

문. 사모님 훈장 걸어주실 때 어땠어요 기분이?
(어머님)
답 : 좋았죠.

문. 그때 고생한거 다 이렇게 뭐 사그라졌었나요?
(어머님)
답 : 위안이 됐죠.

답 : 그때 아들이 하나하고 딸들이 셋이 있었거든, 딸들은 다 보냈고.

문. 하선생님은 이렇게 기사 같은거 보면 훈장 받고 뭐 하실 때 항상 우리 아내한테 줘야 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답 : 나는 지금도 한가지에요 지금도 어디 가서 강의를 하든지 내 공적보다는 아내의 공적을 더 높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왜 아내가 뒷받침을 안했으면 내가 성공을 못 하는 거야. 이 새마을 운동의 근본은 부부가 협동을 해야 되는 거거든. 내가 전국에 매일같이 강의 다닐 때 아내가 이 농장을 다른 사람들은 못할 걸로 알았거든 그러나 아내가 이걸 했고. 반면에 나는 어떻게 했냐면 부산을 갔다가 내일 부산에 강의가 있어도 밤이라도 와. 왔다가 그 이튿날 가도 가거든, 그러니까 서로 협동이 돼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내가 고생했다는 것은 진실로 내 고맙게 하는 사람이야. 고맙게 생각을 하고.
저런데 강의 가서도 항상 우리 안식구를 높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강의 하는거 아마 들어본 사람은 다 알거야.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걸어온건데 이제 둘이 다 병들고 늙어서 나이가 80이 되다보니까. 그러나 후회는 안해. 왜, 많은 그때당시 내가 이걸 안하고 하우스를 참 연구를 해서 이걸 했을 때 딴 농민들이 우리 집을 굉장히 많이 찾아왔어요. 또 농촌에 어려운 집 애들 우리 집 와서 교육을 시킬 때 이거는 내 집이 아니야. 원래는 내집은 저쪽에 움막이 기고, 이거는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서 이 집을 지은거야. 여기는 교육생들 살 집 부원들이 여기서 자는데 여기서 내가 25년간들을 걔들 교육을 했는데 걔들이 지금은 안하니까는 내가 여기서 사는거지. 그때당시에 그 아이들이 왔을 때 항상 내가 걔들한테 하는 얘기. 너희들이 농촌이라는 것은 그때당시에는 농경사회니까 어머니아버지가 땅 몇 마지기 있다고 논 두어 마지기, 한 마지기 노나 준다고 그 못살아. 너희들은 앞으로 농사를 지을 생각이면 차라리 공장으로 나가거라. 하려면 농업을 해라. 농업을 하는데 남과 똑같이 하면 절대 못사니까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제일 첫째는 과학적인 농업을 해라 하는 것이 내가 첫 마디고 두 번째는 뭐인가 상업적인 농업. 여러분들 상업적인 농업 하면 알아듣겠지. 과학적이고 상업적이고. 먹으려고 옛날엔 농사했지만 지금은 팔아서 돈을 버는 농사를 지어야 되니까. 세 번째는 선진화 농업을 해라. 앞서 가야된다. 그것이 내가 주장을 하는 건데 그때는 막 하우스를 처음에 할 때는 거름이 없었지. 그러니까 조치원 시내를 밤에 가 똥 퍼오는 게 일이여. 리어카 끌고 다니며. 그럼 똥 퍼간다고 똥바가지 뺏어서 줘패요. 근데 똥도 맘대로 못 퍼갔어. 그것도 인분도 퍼가게 되면 가을에 대체를 주던지 무슨 대가를 줘야 되는데 그걸 안하니까 못 퍼가게 하고, 그 맞거든, 고생한 얘기를 지금 책 몇 권을 써도 못 다써. 그렇게 해서 성공을 하다보니까. 처음에는 하우스 농사라는 건 이름도 몰랐고, 어떻게 하면 남보다 먼저 작물을 키워야 비싼 돈을 받고 파는가 하고 연구한 것이 바로 이 종이를 씌운 거야. 그때 종이를 요만큼 쓸어가지고 오이를 심고, 산에 가서 딱 꽂아서 심어놓으니까 어른들이 볼 땐 이상하지 이상하니까 뭐냐 그래서 그것을 오이를 키운다고 했더니 미친 놈 같으지.

문. 그때 이 하우스 비닐은.
답 : 없었지, 이름도 몰랐고. 이름도 몰랐어, 하우스라는건. 그래 처음에 종이다 요만큼 씌워서 오이를 심으니까 왜 그걸 생각을 했느냐면 이 식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과 같아. 그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식물이 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종이를 씌워보니까 종이안에서 크잖아. 근데 딴 사람은 그냥 심으니까 얼어 죽잖아. 그 내가 보니까 일찍 클 수밖에 없지. 아 따다 팔아보니까 돈이 두 곱절이니 세 곱절도 넘지. 그래 땅 백 평 농사지으면 백 평 땅을 더 사. 그 정도로 값이 비싸게 팔아먹을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걸 몰랐지 딴 사람이 그걸 보더니 한 집 두 집 자꾸 하려고 하잖아. 그러다 보니까 자꾸 확산이 되는겨. 누구 아버지는 뭐해서 돈 벌었댜. 거 가보자. 그러다가 1967년도에 정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냐면 농촌 농민들을 보릿고개를 넘기게 하려 그러는데 농어민 소득증대사업을 한 거야. 양잠을 하든지 돈 버는 걸 하라 이거야 대통령도. 그러니까 그때 대통령도 나하고 맘이 같았던 거야. 난 돈 버는 농도 하려고 했었고. 양잠이라든가 가축이라든가 양계라든가 과수라든가 비닐하우스라든가 이런 것을 하게끔 정부에서 돈을 융자를 조금씩 줬다고. 그래서 농협에 가서 했는데 그 융자를 받는데 청원군에 가서 내가 석동분을 받아 150평분. 지금 저 큰 논 한 논 만치 받은겨. 겨울에 눈은 쌓였는데 구멍을 뚫고 하고서 저 비닐 같은 걸 푹 씌워놓으니까 저거 집안이여. 겨울이면 가서 저거 쓰면 안 추우니까. 그렇게 이제 농사를 지어서 그게 이제 자꾸 소문이 나는 겨. 아무리 사는 하사용이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겨울에도 놀지 않고 농사를 지어서 돈을 많이 번다. 이놈의 말이 자꾸 나오는데 신문에 나오고 방송국에서 나와서 이 말 자꾸 떠들어대니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는겨. 관광버스를 타고. 아 나도 가서 해야 되겠다. 나도 가서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하우스가 시작이 된 건데.

문. 하우스를 그럼 처음에 어떻게 하셨어요?
답. 처음에는 충청북도 농촌 진흥원에서 진흥원장이 충청북도에 있었는데 경상남도 김해가 여기보다 한 2,3일 먼저 했다고, 하우스를. 그때 나는 작게 했는데 그때 경상남도는 비닐은 큰 걸 가지고 크게 지었거든. 나도 하우스가 있으면 내가 좀 더 크게 했지 그사람들은. 근데 여기 사람은 돈이 없어서 그걸 못한겨. 정부가 충청북도에 돈을 주니까 군에다가 돈을 줘가지고 융자를 받는 데가. 겨우 난 150평 밖에 융자를 못받은거야.

문. 기술은 이제 거기 가서 보고 오신 건가요?
답. 아니지 보지 않은 건데. 난 할 줄 아니까. 근데 그 해 눈이 많이 와가지고 딴 사람들은 전부 다 실패를 해버린 겨. 눈에 다 쓰러져가지고 눈을 안 치워가지고 나는 그걸 밤새도록 나가가지고 그 눈을 다 치워가지고는 그 하우스를 지어서 그 이듬해 그 걸 또 뜯어가지고 대나무 사서 늘리고, 늘리고 하우스를 150평을 했다가 300평 했다가 800평 했다가 1,600평 했다가 버는 대로 자꾸 땅을 사서 하우스를 늘리는 거지. 근데 이 하우스라고 하는 것이 여러 번 내 잘 이야기 하지만 우리나라이 이 눈 때문에 아마 여러 차례에 수천억이 절단 났어요. 그 절단 나는 이유는 그 뭐라고 하면 이것을 전부가 자연재해로다가 비닐이 넘어가지 않게 정부한테 보도해다고. 나는 지금 52년날 하우스인데도 한 동도 자빠뜨려본 적이 없어. 왜, 나는 눈이 오게 되면 온 가족이 나가 밤새도록 눈을 치워. 그게 넘어지면 내가 죽잖아. 작물도 죽지. 그 속에 들어있는 작물은 내 새끼나 똑같은데.

(어머님)
답. 눈 많이 와서 하우스 다 넘어졌어, 우리 것만 안넘어졌어요.

문. 밤새도록 까지 눈 치우고.
답. 아 사흘을 쓸었어 사흘 밤낮. 그렇게 했는데 이제 그땐 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를 한다고.

문. 아 사모님 얘기 조금만 들어보고. 그 처음에 종자돈 마련할 때 고생을 엄청 하셨던데 제일 힘든 게 뭐셨어요? 처음에 그 돈 모으고 농사짓고 하실 때 제일 힘든 때가 언제였어요?
답. 땅 장만할 때가 제일 힘들었지.

문. 사모님은.

(어머님)
답. 나는 일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문. 어떻게 일을 하셨는데요?

(어머님)
답. 밤에도 11시까지 밭에서 땅 고르고.

답. 일했으니까 , 지금 마냥 경운기도 없었으니까.

문. 이제 다 보니까 두 분이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그러시던데 애들은 돌보는 게 누가 돌보고 그러셨어요?
답. 아 글쎄 장에 갈 적엔 방에다 가둬놓고 갔다니까.

문. 아 사모님 얘기를 좀.
답. 한번은 나무를 하는데 애기를 포대기다 이렇게 싸 놓고 갔다 왔어요. 오니까 그냥 애가 발버둥을 치고 울어서 애가 옷이 흠뻑 젖었어요.

문. 굉장히 안타까워하셨겠네요.

(어머님)
답. 안타까웠죠.

문. 그러면 그 비닐하우스 짓고 좀 나아지면서 훈장 받았을 때 선생님 만날 나가시면 우리 이제 아내가 제일 고생했다고 하셨잖아요. 훈장 보니까 사진이 저렇게 있는데 걸어주실 때 어땠어요 기분이? 이때까지 고생한 거 다 보상을 받고 그런 마음이 들던가요?

(어머님)
답. 덤덤해요 그냥.

문. 덤덤해요? 이게 보통 훈장이 아닌데. 처음에 그러면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처음에는 너무 가진 게 하나도 없어서 일을 시작해서 한푼한푼을 모으셨을건데 사모님은 어떻게 일을 하셨나요 그때?

답. 나는 남의 집에 가 창피한 얘기지만 식구는 남의 집에 가 있었어.

문. 남의 집에요? 결혼은 하셨는데?
답. 결혼을 했는데 나는 남자니까 그때당시 세경을 받아, 돈을 받았지만 여자들은 그게 없어 그때는, 돈을 받지 못하니까. 그거 가지고 요걸 산거야. 그러니까 그때당시에 그거 지금같으면 지금 젊은 사람들 일년에 쌀 네가마니나 다섯가마니 줄게 새벽부터 일하라하면 안할거야.

문. 안하죠.
답. 내가 다만 젊은이들한테 이런 얘길 합니다. 지금 회사 같은데서 왜 쫓겨나는 사람들 많잖아. 그 이유가 왜 내가 쫓겨나는지를 알아야 돼. 내가 열심히 잘 하면 절대 안 내쫓는 거야. 뭔가는 분명 농땡이를 치고 자꾸 일도 안하고 하니까 눈에 밖에 나서 내쫓는 걸로 알지, 내가 옛날 남의 집에 있을 적에 보면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니까 딴 사람이 돈을 더 줄게 데려가려고 해도 그 사람이 못 가게 하는 거야, 자기가 더 준다는 겨. 사람은 나 할 탓이여. 성공을 하고 못하고는 내가 할 탓이지, 남의 탓을 하지 말라 이거야.

문. 근데 선생님 제가 이 그림을 보다보니까 1970년에 아까 11월 11일 소득경진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 훈장 받으셨잖아요. 근데 그때 무지 우시더라고, 화면에 보니까. 상 받으면서, 왜 그러셨어요?
답. 그건 지금도 한가지야. 너무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 박대통령이 날 보고 첫마디 물을 때, 당신은 소원이 뭐냐고. 나는 이 소원이라는 게, 배고픈 게 한이 된 사람이야. 여러분들 어렸을 때 내가 그적에 국민학교 월사금 50전을 내 못 내서 그 어린것이 학교에서 책을 짊어지고 울며 쫓겨난 거야. 걸어 다니면서 잔 껍데기나 쓰레기통에서 그걸 주워 먹고 컸어. 근데 이렇게 나이가 많은 내가 안 놀아요. 지금도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많이 나오지 않아? 악착같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악착같이. 악착같이 일을 하는데 그러면 그때 울 때 왜 내가 울었느냐면 박정희 대통령도 우셨다고 하면서 나에게 훈장을 눈에 눈물이 흘러요. 나만 운건 아니죠. 대통령도 울고 나도. 그런데 그 이튿날.

문. 아니 그럼 그 때 박정희대통령도 걸어주시면서 우셨어요?
답. 눈물이 흐르긴 않지만 눈에 맺힌 게 보이지. 근데 그분이 위층에서 앉았을 때는 많이 울었다고 그래. 그 소리는 비서들이 하더라고.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서 하사용씨의 어린 시절을 사례발표 하는 걸 들으며 우시더라고. 그게 뭐 책 뭐 청와대에서 낸 책에서도 그대로 나오니까 녹음한 것도 그대로 나오고 저 내 녹음을 들어보면 대통령이 나도 울었다는 그 말을 대통령이 직접 하니까.

문. 그럼 그때 즉석연설을 하신건가요 아까
답. 그렇지. 아까 그 책에 잠깐 봤잖아?

문. 아까 뭐 보니까 그때 원래 원고가 있었는데 그거 이제 그만두시고 뒤에서 보시던 대통령이 그 당시 상황을.
답. 그때 대통령이 나오셔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 훈장을 걸어주시면서 그 양반이 대개 치사를 하는거거든 대통령들은. 근데 그 치사문을 썼다는 것이 앞에 있는 데 그걸 번쩍 들더라고. 그래 앞에다 보이면서 여러분들 인쇄된 거 다 여러분들 책상 위에 한권씩 있다는 거야. 이거는 나중에 가지고 가서 읽어봐도 되고. 좀 전에 충청북도에서 온 농민이 한 얘기를 여러분들도 듣고 나도 들었다 이거야. 그러면서 내 얘기를 대통령이 하는 거야. 그 얘기 한 것이 녹음 된 게 지금 내 가지고 있거든.

문.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으셨나봐요.
답. 아 그러시면서 그 양반이 하시는 얘기가 하사용씨같은 분은 우리나라 농촌의 하나의 등불이다 이거야. 희망이다 이거야. 저 양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이거야. 이렇게까지 대통령이 말씀을 하시면서, 저 녹음을 들어보면 알지만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나오고 박사학위를 따오면 뭐하냐이거야. 저 하사용이란 농민은 국민 학교 2학년도 못 다녔는데 자기가 살겠다고 열심히 노력을 하니까 아 이거 농업 대학나온 놈보다 더 낫지 않느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연구하고 자꾸 알려고 하니까. 그때 내가 농약 이름을 막 불렀거든. 그때 국민 학교도 안 다닌 사람이 M22, Z78, 다이셍45 이런 말하는 건 참 대학교에서나 가르치는 거지 못 가르치지. 그러나 나는 농업을 하는 데 그런 게 필요로 하니까 그걸 익히고 사다 쓰고. 대통령이 그걸 다 들으시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분들 있으면. 그러니까 새마을운동 하는 거거든.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쉽게 얘기하자면 나를 성공사례 하사용의 강의를 들으라 이거야. 그러시면서 연수에 장관이 됐던 뭐가 됐던, 근데 이거 그 양반들 오고선 처음에는 그 양반들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 텐데 새마을 연수원에 내가 제 1기생부터 강의를 하고 하니까 그 많은 농민이나 누구나 환영을 할 거 아니야. 내 강의를 듣고 간 사람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그땐 서로 갈려고 했으니까. 와서 그 얘기를 하는거야. 서울 가서 하사용이 농민 얘기를 들어보니까 참 기가 막히더라. 그렇게 하면 다 부자 되고 잘 살 수가 있겠더라. 그러니까 이장을 요번에 보내야 되겠다. 동네사람들이 이장을 보내 이장이 가서 들어보니까 진짜거든. 또 여길 와보니까 진짜거든. 저건 이론이 아니거든. 이장이 듣고서는 생각을 하길래 이건 우리만 알아서는 안되겠다. 면장을 보내야되겠다. 그래야 이 새마을운동을 하는데 그사람들도 같이 알아야된다. 면장이 갔다오니까 군수를 보내야겠다. 군수가 갔다 오니까 도지사를 보내야겠다. 자꾸 자기네들이 스스로가 그렇게 여론화가 돼서는 가는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장관들까지도 전부 연수원에 가서 강의 들으라. 이렇게 된거야 이 새마을이라는게.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해 이 새마을운동의 근본은 누구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건 아니야.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분이 아무리 하려고 혼자 애를 써도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성공 못시켜. 다만 그 설계를 한 것을 내가 지금 생각하기는.

문. 훈장 받았을 때? 젊었을 때 몇 살이셨어요?
답. 내가 마흔 하나.

문. 40대? 사모님도 젊었을 때 꽤 미인이셨더라고요 대한뉴스 보니까.
답. 서른 여섯.

문. 서른 여섯?
답. 봐 얼마나 말랐나, 얼마나 일을 했나.

문. 근데 인물은 훤칠하셨어요. 그래도.
답. 그 때 50kg밖에 못 나갔어. 얼마나 일을 했으면, 봐 뼈만 남았지.

문. 뭐 건강하신데요.
답. 거기다가 또 병이 들어가지고.

문. 그때, 병이 결핵인가.
답. 어 폐병 들어가지고, 그래도 병원에 갈 힘이 안 되니까 약사다고 마누라보고 .

(어머님)
답. 궁둥이 주사도 놨어요.

문. 할머니가 직접?

문. 돈이 없으니까? 그럼 옆에 할머니 없었으면 벌써.
답. 죽었지.

문. 아니 어떻게 폐병이 드셨대요?
답. 군대서 그래 된 거야, 군대서. 그래서 제대 한거야.

문. 아, 폐병 때문에, 그땐 폐병이 또 많았지, 보면.
답. 그런데 군대서도.

문. 그럼 할머니 시집은 언제 오셨어요?
답. 언제가, 그때 스무살 먹어서?
답. 스무살 때에요.

문. 스무살? 아주 꽃다운 나이에 오셨네. 뭘 믿고 오셨대요.
답. 둘이 똑같이 가난하니까. 시집올 때 얘기햐? 이불 요만한거 하나 고거 달랑 갖고 왔어. 아무 것도 없어. 처갓집도 그렇게 어려운 걸 어떡해. 그것도 목화를 장모가 이삭 주워서 팔아서 고거로다 이불을 요만하게 만들어서 그거 하나 이렇게 이고 왔어.

문. 이고 왔어요? 그땐 너나없이 다 가난하셨겠죠. 그래도 맞선같은거 보셨을 거 아니에요?
답. 맞선 봤지 보기는. 맞선 봤는데 지금 같이 어딜 데려가서 다방 가서 차를 먹어 내가 그리 가니까 저 옷방으로 도망가지.

문. 저 쪽 요즘에 아프리카 같은데도 막 많이 가던데 아프리카도 가서 강의를 한번 하시면.
답. 아 저 부르면 또 가야지. 어느 나라도 갈 테니까.

문. 저가 그 때 시집오셨을 때 여기도 하선생님도 상태가 좀 심각하죠, 가난하고. 그 정도로 알고 오셨어요?
답. 외삼촌이 얘기해서 왔는데요, 몰랐죠.
답. 엿장사 했는데 뭘 아나.

문. 오셔보니까 어때요? 뭐 집도 제대로 안 갖춰있고 그당시 어땠어요, 시집 오셨을 때?
답. 기막혔을테지.
답. 초가집이라야 집도 형편없어요.

문. 어느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답. 저 짝 저렇지 뭐.

문. 그때는 그럼 농사를 짓고 있었어요?
답. 농사가 어디 있어, 땅 한 평도 없었다니까.

문. 그럼 어떻게 땅을 마련하신 거에요?
답. 아 글쎄 장가들고 요거 사가지고 농사지어 땅 산거라니까. 그래서 저축읋 하도 열심히 했다고 해서 저축 왕이 된겨.

문. 그럼 처음엔 따로따로 사셨어요? 돈 벌기 위해서?
답. 처음에? 처음에 한 삼 년 떨어졌었지.

문. 그때는 서로 약속을 하고 돈을 벌러 갔나요?
답. 그렇지.

문. 자 그때 얘기를 좀.해주세요.
답. 그때 얘기 지금 했잖어. 돈 10원도 못 받고 밥만 얻어먹고 가서 일 해주고 나는 그래도 쌀 너 덧 가마니씩 받고, 그래 술 담배도 끊어버렸잖어. 나 술 담배 안피워.

문. 아니 그럼 신혼 때 삼년 동안 떨어져 사신 거에요?
답. 그럼. 아니 그런 결심도 없이. 그 배고파보라니까. 사랑이고 콧구멍이고 생각이 나나 안나나.

문. 그때 사모님한테 어떻게 얘길 하신거에요? 삼년동안.
답. 어떻겐 뭘 어떻게 좋다고 하겄어? 새벽에 혼자 새벽에 혼자 그냥 일어나서 나갔지. 아니 그걸 좋다고 하겄느냐고. 그걸 누구라도.

문. 그래도 결심하시가 쉽지 않았을텐데.
답. 그렇게 안하고는 살 길이 없는 걸. 죽는데.

문. 그때 심정이 어떠셨어요. 할머니.

(어머님)
답. 외삼촌이 원망스러웠어요. 이런 데다 중신을 했다.

답. 있는 집인 줄 알았댜.

문. 그래도 뭐 16년만에 상도 받으시고 참 이때는 감회가 남달랐겠네요 보니까. 이 보통 상도 아니고 대통령 상도 받았으니. 그러니까 이제 하선생님이 어디가서든지 아내가 없었으면 안됐다 l이런 얘기 하시잖아요.
답. 중국을 가도 얘기하고 어딜 가도 얘기하지.

(어머님)
답. 지게지고 산에 가 나무도 해오고 그랬어요.

문. 그때 처음에 하셨을때요?

(어머님)
답. 네

답. 어떡할 겨. 나는 병이 들어 죽을라고 하는데. 해와야 떼야될 거 아니여.

문. 그러면 언제셨는데요?
답. 그때 나이 한 30도 안됐지. 한 30? 애들이지 애들. 지금 같애선 도망가 여자들 내뺐었을겨.
지금 사람은 살 사람 없어요. 그때는 한번 시집오면 죽어도 거기 귀신이 될라고 다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문. 믿고 오셨던 분이 폐병이 나고 그러면 그때 뭐 히여튼 힘드셨겠네요 되게.
답. 그 때 사람들은 한번 정해주면 딴 데로. 지금 여자들은 시원찮게 하면, 지금은 여자들이 권리가 더 세잖아. 남자들이 이렇게 하면 여편네한테 쫓겨나. 남자들. 정신차려들. 옛날하고 틀려.
하우스를 늘려서 농사만 했으면 몇 십 만평 샀어, 땅. 그런데 이놈의 교육 해달라고 매달리니까. 그러나 나는 후회 안 해. 왜, 나로 인해서 많은 국민들이 잘살게 됐으니까.

문. 이때가 몇 살이에요? 손가락 가리켜주세요.
답. 마흔 하나.

문. 사모님은?
답. 서른 여섯.

문. 그때 상 받고 나서 목에 걸어주셨네요.
답. 거기서 걸어준겨 서울서.

문. 같이 가셨네요 그러면?
답. 그렇지 같이 데리고 오라고 해서 갔지.

문. 성공사례 할 때. 아 그 때 같이 오셨구나.
답 .근데 이제 나도 양복 입으라는 걸 안 입고 또 식구도 치마저고리를 입으라는 데 치마 저고리가 어디있어 그때.

문. 아 그때 잠바 입고 계셨던데.
답. 아 잠바야. 잠바야.

문. 이거 조금만 넘겨주시죠 이렇게 . 양복 살 돈이 없으셔서.
답. 필요가 없어, 나는. 똥 푸러 다니는 놈이 양복은 어디에 필요해 거.

문. 한 번만 더 넘겨주세요. 이 때가 사진 그때. 얼마나 우시던지 그때 하. 뉴스에도 다 잡혔어요 화면에.
답. 잡혔었죠. 그거 필름 좀 줘 나.

문. 제가 드릴게요.
답. 이거 제작해서 하나 주고.

문. 그때 말고 원래 것을 제가.
답. 그리고 이 그전에는

문. 그때 뉴스에는 뭐라고 했냐면 하사용씨가 엄청 울었다. 감격에 흐느껴서 우는 하사용씨. 뭐 이렇게 멘트가 나와요 아나운서가.
답. 그래 이게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해가지고 새마을 운동 이게 5000년 가난 물리치자고 외쳤을 때. 이게 다 그때 기사에 올르고 했던건데 이런게.

문. 이 사진이 그 사진이에요? 이 청와대는 언제 방문하신 거에요?
답. 그 이튿날 갔지. 그 이튿날.

문. 다음날 바로 그 청와대 방문을 하신 모양이네요.
답. 서울서 자고 그 이튿날. 이제 아까 그 사진하고 똑같잖아 잠바 입고.

문. 오로지 그 잠바를 입고 다니시네.
답. 아 난 저 외국에 가도 잠바여. 이거는 저 박대통령 산소에 가서 성묘같은 걸 하고 거길 가면 내가 잔 올리거든. 내가 농사지으면 수박을 해서 마대에다가 담아서 짊어지고 가. 거기 갖다가 상에다 올려놓고 이 수박이 내가 가져온 겨. 지고 간다고 내가 마대에다 담아서 이렇게 힘은 다 빠졌어 여태.


남이보면 우습지. 그런데 아내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훈장은 아내에게 줘야할 훈장입니다. 그때 그래서 이훈장을 아내의 목에다 걸어준거거든. 뉴스에 나와서 세상사람들이 다알지. 이 훈장을 받기 위해서 둘이 지게를져 나르고 똥을 퍼 나르고 그것을 끌고 다니며 팔고, 어린애덜은 우니까 대리고 다니질 못하니 방에다 가둬놓고 다녔습니다.
지금같으면 징역 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물건을 팔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줄라고 말씀을 하는데 난 안 받겠다는 거지. 왜 안 받을라고 하냐, 내가 번 돈 아니다. 그건 전부 국민들 돈이거든, 쉽게 얘기하면, 아냐? 나는 내가 성공을 해야 그게 내 힘으로 하는 거지, 그래 나 국가가 주는 돈으로 땅 사서 마을에 그때 여기 와서 한 5,6만 평 사가지고 있으면 일 안하지 뭐. 차타서 양복입고 거들먹거리면 뭐 일 안 해도 부자 저절로 되는 거 아냐? 나는 그건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 할 겁니다. 그 때에 박대통령이 큰 감동을 받은 걸로 내가 지금 느끼는 거요.
그러면 내가 그 목표를 세운 것을 했느냐, 무일푼을 가지고서도 내가 70살 먹을 때까지 내가 땅을 만 평은 내가 확보 한다. 잘 산다. 그것을 성공했잖아요? 또 사회사업 농업이라든가 마을회관이라든가 이런 걸 다 내 스스로 하는 거니까, 예를 들어 조상에 의선하는 데 쓰는 거니까, 돈이라는 건 벌어서 중요한 부분에 쓰는 것이 돈이야. 사람은 자기가 해야 그게 한 거지. 남의 거 가지고 한 건 한 게 아니거든.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날 보고 그런 얘기를 해. 아유, 숙맥이다. 천만 원 줄 때 받아가지고 그놈 가지고 땅 사서, 너는 평생 부잔데 안 받았느냐며. 그렇게 하면 그거는 사람이 남한테 의존하는 것밖엔 안 된다.
내가 이런 일이 있어요. 울산에 가서도 현대건설에 가서도 강의를 해달라는데 강의는 많이 했거든. 돌아가신 정주영씨 하고 농담을 했다고. 아이고 회장님 참 부자네요. 부자야 대한민국 최고 안 가는 부잡니까 부자지. 울산 반은 그 양반 거여. 그다음에 날 보고 또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선생은 그럼 땅도 많이 있소? 그래. 그 내가 웃으면서 내가 땅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나 땅 다 팔아야 회장님 자동차 한 대 값밖에 안돼요. 그런데 내가 부자라고 하는 그 뜻은 나는 빚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낳아서 지금까지 얻어먹고 댕겨 크기는 했어도 남의 돈은 무서워 해. 정부가 돈을 줘도 안 받아. 내 힘으로 해야 된다는겨. 그러니까 지금까지 농협이나 개인이나 어딜 가든 십 원도 빚이 없어요. 빚이 없어서 내가 부자다. 회장님은 이거 다 회장님 돈 아니잖아. 정주영씨가 내 등을 이렇게 두들기며 참 명답입니다. 빚 없는 사람이 부자다.
근데 들어가 보니까 제일 기분 좋은게 중국기하고 태극기하고. 딱 걸어논거야. 아 우리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만큼 컸구나. 어때요 기분. 아니 그런데 가서는 태극기도 없는데 강의하라면 기분나겄어? 딱 붙었으니까 용기나서 했지뭐.


문. 사모님한테 말씀을 좀 시키셔야 되는데. 이 상 받을 때 얘기를 조금만. 옛날 이제. 저한테 얘기만 하시면 안 되고 물어보세요 이렇게.
답. 요것은 이제 그때당시 처음 집이라고 요거 장만해가지고는 농사를 진거거든 그래 그때 지금 요짝 집이 긴데. 그때 270평이래야 지금 이 마당에 있는 저기 여기 조그마했었거든.
고생이야, 뭐 지금 얘기하잖어. 고생을 하도 해서 지금 다리가 저렇게 됐다.
(어머님)
답. 일을 얼마나 했다 그래요.

답. 그니까 그땐 순 지게질로 하니까
(어머님)답 : 구루마가 있나 뭐.
답 : 그땐 구루마도 없었거든.

답. 그런데 여기서 그놈을 싣고서 옥산장이나 여기서 삼사십리 끌고 갈려면 고생한건 말도 못하지. 아 물로 다 떠내려가 장마때 물 막 떠내려가보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문. 사모님 훈장 걸어주실 때 어땠어요 기분이?
(어머님)
답 : 좋았죠.

문. 그때 고생한거 다 이렇게 뭐 사그라졌었나요?
(어머님)
답 : 위안이 됐죠.
나는 지금도 한가지에요 지금도 어디 가서 강의를 하든지 내 공적보다는 아내의 공적을 더 높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왜 아내가 뒷받침을 안했으면 내가 성공을 못 하는 거야. 이 새마을 운동의 근본은 부부가 협동을 해야 되는 거거든. 내가 전국에 매일같이 강의 다닐 때 아내가 이 농장을 다른 사람들은 못할 걸로 알았거든 그러나 아내가 이걸 했고. 반면에 나는 어떻게 했냐면 부산을 갔다가 내일 부산에 강의가 있어도 밤이라도 와. 왔다가 그 이튿날 가도 가거든, 그러니까 서로 협동이 돼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내가 고생했다는 것은 진실로 내 고맙게 하는 사람이야. 고맙게 생각을 하고. 저런데 강의 가서도 항상 우리 안식구를 높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강의 하는거 아마 들어본 사람은 다 알거야.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걸어온건데 그러나 후회는 안해. 왜, 많은 그때당시 내가 이걸 안하고 하우스를 참 연구를 해서 이걸 했을 때 딴 농민들이 우리 집을 굉장히 많이 찾아왔어요.
너희들은 앞으로 농사를 지을 생각이면 차라리 공장으로 나가거라. 하려면 농업을 해라. 농업을 하는데 남과 똑같이 하면 절대 못사니까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제일 첫째는 과학적인 농업을 해라 하는 것이 내가 첫 마디고 두 번째는 뭐인가 상업적인 농업. 여러분들 상업적인 농업 하면 알아듣겠지. 과학적이고 상업적이고. 먹으려고 옛날엔 농사했지만 지금은 팔아서 돈을 버는 농사를 지어야 되니까. 세 번째는 선진화 농업을 해라. 앞서 가야된다. 그것이 내가 주장을 하는 건데 그때는 막 하우스를 처음에 할 때는 거름이 없었지. 그러니까 조치원 시내를 밤에 가 똥 퍼오는 게 일이여. 리어카 끌고 다니며. 그럼 똥 퍼간다고 똥바가지 뺏어서 줘패요. 근데 똥도 맘대로 못 퍼갔어. 어떻게 하면 남보다 먼저 작물을 키워야 비싼 돈을 받고 파는가 하고 연구한 것이 바로 이 종이를 씌운 거야. 그때 종이를 요만큼 쓸어가지고 오이를 심고
이 식물이라고 하는 것도 사람과 같아. 그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식물이 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종이를 씌워보니까 종이안에서 크잖아. 근데 딴 사람은 그냥 심으니까 얼어 죽잖아. 그 내가 보니까 일찍 클 수밖에 없지. 아 따다 팔아보니까 돈이 두 곱절이니 세 곱절도 넘지. 그래 땅 백 평 농사지으면 백 평 땅을 더 사. 그 정도로 값이 비싸게 팔아먹을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걸 몰랐지 딴 사람이 그걸 보더니 한 집 두 집 자꾸 하려고 하잖아. 그러다 보니까 자꾸 확산이 되는겨. 누구 아버지는 뭐해서 돈 벌었댜. 거 가보자. 그러다가 1967년도에 정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냐면 농촌 농민들을 보릿고개를 넘기게 하려 그러는데 농어민 소득증대사업을 한 거야. 양잠을 하든지 돈 버는 걸 하라 이거야 대통령도. 그러니까 그때 대통령도 나하고 맘이 같았던 거야. 난 돈 버는 농도 하려고 했었고. 양잠이라든가 가축이라든가 양계라든가 과수라든가 비닐하우스라든가 이런 것을 하게끔 정부에서 돈을 융자를 조금씩 줬다고. 그래서 농협에 가서 했는데 그 융자를 받는데 청원군에 가서 내가 석동분을 받아 150평분. 지금 저 큰 논 한 논 만치 받은겨. 겨울에 눈은 쌓였는데 구멍을 뚫고 하고서 저 비닐 같은 걸 푹 씌워놓으니까 저거 집안이여. 겨울이면 가서 저거 쓰면 안 추우니까. 그렇게 이제 농사를 지어서 그게 이제 자꾸 소문이 나는 겨. 아무리 사는 하사용이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겨울에도 놀지 않고 농사를 지어서 돈을 많이 번다. 이놈의 말이 자꾸 나오는데 신문에 나오고 방송국에서 나와서 이 말 자꾸 떠들어대니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는겨. 관광버스를 타고. 아 나도 가서 해야 되겠다. 나도 가서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하우스가 시작이 된 건데.

문. 보고 오신건가요?
답. 아니지 보지 않은 건데. 난 할 줄 아니까. 근데 그 해 눈이 많이 와가지고 딴 사람들은 전부 다 실패를 해버린 겨. 눈에 다 쓰러져가지고 눈을 안 치워가지고 나는 그걸 밤새도록 나가가지고 그 눈을 다 치워가지고는 그 하우스를 지어서 그 이듬해 그 걸 또 뜯어가지고 대나무 사서 늘리고, 늘리고 하우스를 150평을 했다가 300평 했다가 800평 했다가 1,600평 했다가 버는 대로 자꾸 땅을 사서 하우스를 늘리는 거지. 나는 지금 52년날 하우스인데도 한 동도 자빠뜨려본 적이 없어. 왜, 나는 눈이 오게 되면 온 가족이 나가 밤새도록 눈을 치워. 그게 넘어지면 내가 죽잖아. 작물도 죽지. 그 속에 들어있는 작물은 내 새끼나 똑같은데.

(어머님)
답. 눈 많이 와서 하우스 다 넘어졌어, 우리 것만 안넘어졌어요.

문. 밤새도록 까지 눈 치우고.
답. 아 사흘을 쓸었어 사흘 밤낮. 그렇게 했는데 이제 그땐 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를 한다고.

문. 아 사모님 얘기를 좀.
답. 한번은 나무를 하는데 애기를 포대기다 이렇게 싸 놓고 갔다 왔어요. 오니까 그냥 애가 발버둥을 치고 울어서 애가 옷이 흠뻑 젖었어요.

문. 굉장히 안타까워하셨겠네요.
(어머님)
답. 안타까웠죠.

문. 그러면 그 비닐하우스 짓고 좀 나아지면서 훈장 받았을 때 선생님 만날 나가시면 우리 이제 아내가 제일 고생했다고 하셨잖아요. 훈장 보니까 사진이 저렇게 있는데 걸어주실 때 어땠어요 기분이? 이때까지 고생한 거 다 보상을 받고 그런 마음이 들던가요?
(어머님)
답. 덤덤해요 그냥.

문. 근데 선생님 제가 이 그림을 보다보니까 1970년에 아까 11월 11일 소득경진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 훈장 받으셨잖아요. 근데 그때 무지 우시더라고, 화면에 보니까. 상 받으면서, 왜 그러셨어요?
답. 그건 지금도 한가지야. 너무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래 박대통령이 날 보고 첫마디 물을 때, 당신은 소원이 뭐냐고. 나는 이 소원이라는 게, 배고픈 게 한이 된 사람이야. 여러분들 어렸을 때 내가 그적에 국민학교 월사금 50전을 내 못 내서 그 어린것이 학교에서 책을 짊어지고 울며 쫓겨난 거야. 걸어 다니면서 잔 껍데기나 쓰레기통에서 그걸 주워 먹고 컸어. 근데 이렇게 나이가 많은 내가 안 놀아요. 지금도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많이 나오지 않아? 악착같이 열심히 일을 한다고 악착같이. 악착같이 일을 하는데 그러면 그때 울 때 왜 내가 울었느냐면 박정희 대통령도 우셨다고 하면서 나에게 훈장을 눈에 눈물이 흘러요. 나만 운건 아니죠. 대통령도 울고 나도. 그런데 그 이튿날.

문. 아니 그럼 그 때 박정희대통령도 걸어주시면서 우셨어요?
답. 눈물이 흐르긴 않지만 눈에 맺힌 게 보이지. 근데 그분이 위층에서 앉았을 때는 많이 울었다고 그래. 그 소리는 비서들이 하더라고.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서 하사용씨의 어린 시절을 사례발표 하는 걸 들으며 우시더라고. 그게 뭐 책 뭐 청와대에서 낸 책에서도 그대로 나오니까 녹음한 것도 그대로 나오고 저 내 녹음을 들어보면 대통령이 나도 울었다는 그 말을 대통령이 직접 하니까.

문. 그럼 그때 즉석연설을 하신건가요 아까
답. 그렇지. 아까 그 책에 잠깐 봤잖아?

문. 아까 뭐 보니까 그때 원래 원고가 있었는데 그거 이제 그만두시고 뒤에서 보시던 대통령이 그 당시 상황을.
답. 그때 대통령이 나오셔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 훈장을 걸어주시면서 그 양반이 대개 치사를 하는거거든 대통령들은. 근데 그 치사문을 썼다는 것이 앞에 있는 데 그걸 번쩍 들더라고. 그래 앞에다 보이면서 여러분들 인쇄된 거 다 여러분들 책상 위에 한권씩 있다는 거야. 이거는 나중에 가지고 가서 읽어봐도 되고. 좀 전에 충청북도에서 온 농민이 한 얘기를 여러분들도 듣고 나도 들었다 이거야. 그러면서 내 얘기를 대통령이 하는 거야. 그 얘기 한 것이 녹음 된 게 지금 내 가지고 있거든.

문. 굉장히 감동을 많이 받으셨나봐요.
답. 아 그러시면서 그 양반이 하시는 얘기가 하사용씨같은 분은 우리나라 농촌의 하나의 등불이다 이거야. 희망이다 이거야. 저 양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이거야. 이렇게까지 대통령이 말씀을 하시면서, 저 녹음을 들어보면 알지만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나오고 박사학위를 따오면 뭐하냐이거야. 저 하사용이란 농민은 국민 학교 2학년도 못 다녔는데 자기가 살겠다고 열심히 노력을 하니까 아 이거 농업 대학나온 놈보다 더 낫지 않느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연구하고 자꾸 알려고 하니까. 그때 내가 농약 이름을 막 불렀거든. 그때 국민 학교도 안 다닌 사람이 M22, Z78, 다이셍45 이런 말하는 건 참 대학교에서나 가르치는 거지 못 가르치지. 그러나 나는 농업을 하는 데 그런 게 필요로 하니까 그걸 익히고 사다 쓰고. 대통령이 그걸 다 들으시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분들 있으면. 그러니까 새마을운동 하는 거거든.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쉽게 얘기하자면 나를 성공사례 하사용의 강의를 들으라 이거야. 그러시면서 연수에 장관이 됐던 뭐가 됐던, 근데 이거 그 양반들 오고선 처음에는 그 양반들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을 텐데 새마을 연수원에 내가 제 1기생부터 강의를 하고 하니까 그 많은 농민이나 누구나 환영을 할 거 아니야. 내 강의를 듣고 간 사람들이 지방에 내려가서 그땐 서로 갈려고 했으니까. 와서 그 얘기를 하는거야. 서울 가서 하사용이 농민 얘기를 들어보니까 참 기가 막히더라. 그렇게 하면 다 부자 되고 잘 살 수가 있겠더라. 그러니까 이장을 요번에 보내야 되겠다. 동네사람들이 이장을 보내 이장이 가서 들어보니까 진짜거든. 또 여길 와보니까 진짜거든. 저건 이론이 아니거든. 이장이 듣고서는 생각을 하길래 이건 우리만 알아서는 안되겠다. 면장을 보내야되겠다. 그래야 이 새마을운동을 하는데 그사람들도 같이 알아야된다. 면장이 갔다오니까 군수를 보내야겠다. 군수가 갔다 오니까 도지사를 보내야겠다. 자꾸 자기네들이 스스로가 그렇게 여론화가 돼서는 가는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장관들까지도 전부 연수원에 가서 강의 들으라. 이렇게 된거야 이 새마을이라는게.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을 해 이 새마을운동의 근본은 누구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건 아니야.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분이 아무리 하려고 혼자 애를 써도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성공 못시켜. 다만 그 설계를 한 것을 내가 지금 생각하기는.


문. 40대? 사모님도 젊었을 때 꽤 미인이셨더라고요 대한뉴스 보니까.
답. 서른 여섯.

문. 서른 여섯?
답. 봐 얼마나 말랐나, 얼마나 일을 했나.

문. 근데 인물은 훤칠하셨어요. 그래도.
답. 그 때 50kg밖에 못 나갔어. 얼마나 일을 했으면, 봐 뼈만 남았지.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