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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남매를 둔 입장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보니 동네에서 제가 남들이 모르는데 반장 일을 열심히 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통장님께서 저에게 ‘새마을지도자를 좀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니 ‘전혀 모르는데요.’ 하니까 ‘그냥 가서 보면 됩니다.’ 라고 하셔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사소한 일부터 연말이 되어 동네 양로원을 가서 어려우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니 그때 나이가 36세밖에 안 돼서 많이 울고 오곤 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해서 저런 분들 며느리나 자녀 역할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심정에서 마음이 자꾸 돈독해졌습니다. 또 중간에 교육을 자주 했습니다. 교육을 가면 아주 저명하신 교수님들과 여러 중앙의 사례 발표를 듣고 마음에 그런 것을 담아 와서 지역에 접목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미력하나마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흘러온 것 같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그때는 저희가 집에서 안 쓰는 불용품을 다 걷고 손질해서 알뜰 장터를 하여 조금씩 이윤 창출도 하고 물물 교환도 했습니다. 이윤 창출한 돈으로 소년소녀 가장들 밑반찬도 해드리고 아이들이 학교 가고 나면 집 청소도 하러 다녔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해서 노인들 수의도 마련해 드리고 영정 사진도 찍고 알뜰 장터도 상시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하다가 회장님들이 너무 어렵다, 힘들다 하셔서 2주에 한 번씩 했고 그다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하여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많은 이윤은 아니더라도 이윤을 얻었습니다. 부산대학교가 우리 인근에 있었는데 새마을부녀회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며 교수님들이 출퇴근하면서 저희가 장터 열고 하는 것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학술 발표회는 아니지만 어떤 자리에서 저희 동래구 새마을부녀회를 많이 칭찬해주시는 것을 제가 듣고 더 잘해야지 하는 분발심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알뜰 장터, 독거노인들 생일상을 여태까지 차려주고 있습니다. 독거노인들이 생일이 있지마는 혼자 하기는 좀 그렇고 하니 동별로 모아서 7월에 나신 분은 3명이고 5명이고 해드립니다. 그런 식으로 하고 있고 저희 동래는 예절의 고장이고 예향, 그런 쪽으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제가 일본을 한 번 가보니 일본 부인들이 일본 부녀회에서 간단한 춤을 가지고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제가 우리 동래구 매화풍물단을 창설했습니다. 매화풍물단으로서 동래구 행사, 부산시 행사 또 새마을행사든 시 행사든 찬조 출연하여 출연료를 받은 것이 저희 부녀회를 활성화는 데 종잣돈이 됐습니다. 매화풍물단에 성함을 잘 모르지만 옛날의 내무부 장관이 와서 기를 들고 한 바퀴 같이 행진도 했습니다. 그 정도였고 저희 동래구에서 매화풍물단이 한 12년 동안 활동을 했고, 1995년도에 창단해서 전국 대회에 나가서 장려상도 받고 했습니다. 한 2008년도까지 하다가 단원들이 다 나이가 들어서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스스로 해체를 하고 지금은 매화풍물단은 추억 속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하는 것은 독거노인 생일상 차려주기와 알뜰 장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궂은일은 새마을부녀회가 다 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나 2002년도 5월에 한일월드컵을 했잖습니까? 그때에 부산 사직 야구장이나 공공시설의 환경 미화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또 그 해에 9월 29일부터 10월 14일, 18일에 10회 아시안 게임을 했습니다. 환경 미화를 우리 시 전체 부녀회가 하고 각 동, 마을마다 공원 만들고 꽃 심으며 밖에 나가 살다시피 했습니다. 지금은 공중전화 박스가 없지만 길거리에 있는 전화박스를 늘 씻고 닦고 그 뒤에 화분도 놓으며 밖에 나가 살다시피 하니 어떤 사람들은 월급 얼마 받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돈을 받는다면 시민들이 세금을 얼마나 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저희는 자부심을 가지고 각 구별로, 저희 동래구는 좀 활성화된 구니까 대한민국 선수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서 선수촌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각 구, 중구는 어느 나라, 북구는 이북, 중국을 어느 지역이 맡는 식으로 하여 선수촌 안의 청소며 선수 뒷바라지, 교통 안내 등을 전부 저희 시 부녀회가 참여해서 성황리에 아시안 게임이 끝났습니다. 그 후 품평회에서 성공적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흑자로 남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때도 제가 사례 발표를 시청에서 하면서 전문가들에게 좋은 덕담도 듣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 회장으로 와서 제 13차 APEC 정상 회담을 할 때도 우리 새마을식구가 환경 녹화, 미화를 열심히 했습니다. 11월 18일에서 19일까지 해운대에 있는 누리 마루에서 1박 2일을 했지만 몇 년, 한 2년 가까이 준비를 했습니다. 2005년도는 겨울부터 시작하여 늘 거기에 매진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국가의 좋은 경사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우리 새마을식구들, 남녀가 정말 똘똘 뭉쳐서 일했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남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했다는 것에 제가 지금도 자다가도 우리가 어떻게 그런 일을 다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아마 그때 사무관, 과장님 정도는 새마을을 주제로 시험을 쳐서 합격하신 분들이니 관료 사회에서도 저희 새마을부녀회라고 하면 으뜸으로 쳐줬습니다. 그때 당시에 과장급 이상, 부구청장 정도까지는, 청장님도 마찬가지고 새마을이라고 하면 그랬습니다. 동장님들이 혹시 새마을에 대해 소홀하면 제가 구청장님을 찾아가서 ‘어느 어느 동장님, 간부회의에서 말씀 좀 잘해주세요.’ 하면 ‘바보, 등신들이 있나. 새마을을 잘 한 사람은 동의 일을 반은 해줄 건데, 그 동장이 부족해서 그렇다. 알았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조금 지나 ‘우리 동장님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하면 저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또 구청에서도 ‘회장님, 이런 것 좀 해주십시오.’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은 구청 예산이 열악한데 큰 행사에 태극기를 다 달기 위해서는 몇 백 개를 다 갈아야 하여 씻기 위해 세탁소에 가져가니 안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녀회장님이 부녀회에 좀 부탁하면 어떻습니까?’ 하기에 ‘세탁소에서 못하는 것을 저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단 몇 장 가져와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집에 가서 잿물에 한 이틀 담가 놨다가 씻고 세탁기에 한 세 번 돌리니 오물이 다 빠지고 깨끗해졌습니다. 그것이 달려있을 때는 굉장히 작아 보여도 한 장 놓고 다려보면 태극기가 참 큽니다. 그 많은 태극기를 다 가져오라고 해서 동별로, 동이 큰 동에는 좀 더 주고 작은 동에는 작게 배당해서 내가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 이렇게 하라고 하여 전부 다 자원봉사로 태극기를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그것을 문화 공보과에 가져다주니 고맙다고 돈 안 들이고 부녀회에서 이렇게 해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면서 청장님이 공보과장에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희 부녀회에 특별 하사금을 주셔서 제가 1박 2일로 울릉도에 우리 회원들, 동 회장님하고 총무를 데리고 갔다 온 일도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니 이렇게 세탁소에서 안 해주려고 하는 것, 태극기를 새로 구매를 해야 하는 것을 그렇게 해주었구나 하고 위에서 인정해주는 보람찬 일도 있었습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첫 번째 어려움은 우리 회장님들 증에 좀 연세 든 사람은 고집, 아집이랄까 그런 것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해 줄 것이 뭐 있느냐. 적당히 해주지.’하셨습니다. 젊은 엄마들은 아무래도 아이들 도시락이 문제였습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점심이고 다 해결하지만 옛날에는 도시락을 몇 개씩 싸갔잖습니까? 그렇다 보니 조금 젊은 또래들은, 제 또래들은 전부 다 저한테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좋은 말로 인센티브지만 상 같은 것,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안배를 해야 했습니다. 나름대로 쪼그마한 여자들 샘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 있지 않습니까? 쪼그마한 가방 같은 것을 몇 개 사두고 언제까지 어떻게 하면 이 상이 나간다,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 회장님들하고 모임을 갖고 있는데 우리를 참 혹독하게 많이 부렸다고 하면서도 그때가 참 좋았다고 말합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마는 그때 당시에는 저도 입이 부르터지며 일했는데 다 해냈다는 데에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셨습니까?
답. 특히나 부산은 큰 재벌이 있는 동네도 아니다 보니 어떤 행사를 하면 참여를 한다든지, 어떤 이벤트를 하는 등, 전국에서 행사를 하는 것과 똑같이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부녀회는 남편들이 교장이거나 또 가정이 좀 괜찮은 분들이 있었기에 그런 분들을 부장이니 하는 요직에 두었습니다. 회장, 부회장을 떠나서 감투 아닌 감투지만 안배를 하니 샘이 나서 한다는 둥, 그렇게 유치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저는 절대로 내 편 네 편이라는 편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에 될 때는 선거해서 돼도 그 후에는 선거 없이 계속했는데 봉사를 하는 단체는 선거를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인품이랄까, 역량을 보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어떻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아무리 저를 뒤에서 어떻게 한다 해도 일로서 승부를 걸지, 개인적으로 어떤 유감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옛날에는 요양원 원장들이 부녀회 겸임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소위 요양원 원장인데 회장 지인이라서.’ 이런 말이 들어오잖습니까? 그러면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서 ‘나는 요양원 원장의 회장이 아니고 새마을부녀회 회장이며 동 부녀회장에서 올라왔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알리고 다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다. 내가 요양원에 가서 월권 하지는 않았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도와 달라. 그리고 우리가 전부 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우리 동네, 고을을 위해서 일하지, 내가 우리 집에 와서 뭐 하나 하려는 것 없지 않느냐.’ 그렇게 맨투맨으로 그 사람에 맞는 멘트를 해가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다 그때 좋았다고 얘기들 합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저희가 집결지 행사를 할 때에 사실은 돈이 없지 않습니까? 한 동에 열 명을 모시고 나오라고 하여 회장이 열 명을 데리고 오려면 적어도 택시 두 대는 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큰 부자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쓸 수 있다. 끝나고 나서 내가 동별로 회식을 한 번 시켜주겠노라.’ 이런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자기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회장이 저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닌데 싶고 그중에 반은 좀 발목을 잡는 듯해도 열성 회원, 열성적인 동 회장들이 반은 있습니다. 나중에는 다 열성적으로 되었습니다.
지금 온천천이 우리 부산에서 아주 아름답게 탈바꿈을 했지만, 옛날에는 비린내, 하수구 냄새가 났습니다. 몇 m에서 몇 m까지는 명륜동, 복산동 이렇게 구간을 정해두고 풀을 베고 모기 방역을 하고 그 하수에 어부들이 입는 장화 달린 옷을 입고 들어가서 오물을 건져내면 그 무게와 풀 벤 것으로 경쟁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듬어서 저렇게 아름다운 온천천이 된 것입니다. 지금 거기서 음악회도 하고 수영장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이 수영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전부 다 1970년도, 1980년도 우리 부녀회가 해낸 것입니다. 저는 1976년부터 했습니다. 온천천을 쳐다보고 때로는 청계천을 갔다 와서는 자연 환경과 도심지와는 다르지만, 청계천이 우리 온천천보다 못하더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또 엄마들이 우리 온천천 진짜 좋다고 하면서 저녁에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그때는 누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계속 뺀질뺀질 노는 단체들도 있는데 왜 우리 새마을만 이렇게 열심히 해야 되느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국민운동 단체가 다 있지만 다른 단체는 남녀가 같이 하니 회의를 저녁에 하면 저녁에 쓰레기를 주우러 가겠습니까? 갈 데가 없잖습니까? 그러다 보면 유흥 쪽으로 가거나 집에 그냥 가게 되지만 저희는 남녀, 문고 전부 다 따로 회의를 하고 따로 맞는 일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 아닌 경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다른 국민 단체는 나빠서가 아니라 전부 다 지금도 남녀가 같이 회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녁에 모이고, 적당할 때 모이면 밥 먹고 또 우리는 반주 문화 아닙니까? 밥을 먹으면서 술도 한 잔 들어가면 어디 노래방 가자, 어디 가자, 2차, 3차 가자는 경향으로 흘러갑니다. 저희 새마을은 너무 일을 많이 시키니 중앙에서도 젊은 인원을 확보하라고 했습니다. 젊은 회원을 모시다시피 저희가 데려다 놓으면 새벽에 일어나고 집결지 행사도 많고 하다 보니 다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가까스로 10명 모셔두면 2명 남고 8명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단체보다 우리 새마을은, 제가 새마을을 해서가 아니고 초기부터 일로서 승부를 걸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맥락으로 지역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답. 부녀회이라서 가정일과 병행을 하다 보니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조금 안 좋아졌을 때 엄마들이 겪는 고초도 있잖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들에게 IMF가 왔을 때 우리 부녀회도 그 경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말은 못하고 이사를 간다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겪지 않아서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리 부녀회원들도 IMF를 겪은 것을 제가 미처 세밀하게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일을 겪은 것 같기도 합니다. 징검다리 봉사라 해서 남자들은 연탄, 쌀을 마련해서 저소득층에 전달했고 우리 부녀회는 김장을 해서 전달했습니다. 그런 봉사를 하면서도 우리 부녀회원들이 막상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놓쳤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 그 집이 그랬었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모두 다 회복을 해서 아이들이 잘 커서 가정이 다 잘 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하급에 계신 회원들하고 더불어서 아시안 게임에 한 달 넘게 참여를 했습니다. 특히나 저희는 한국을 관리했는데 한국 선수들은 비행기 타고 오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시안 게임 숙소에 들어오면 밥이나 모든 것이 해결이 됐습니다. 그때 9월 29일부터 아시안 게임의 본경기가 오픈을 하는데 추석이 27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26일, 27일부터 한국 선수들이 들어온다고 하니 저희 동래구 새마을부녀회는 추석도 없었습니다. 추석도 없이 선수촌에 매달려서 한 달 넘게 선수들을 관리했습니다. 특히나 우리 선수들은 다 자녀들 같지 않습니까? 어느 동은 권투선수들 홀을 맡고 어느 동은 몸 관리를 잘 하는, 먹지 않고 몸 구르고 하는 팀 있지 않습니까? 선수촌에도 아주 메달이 많이 나오는 데는 외부에서도 물건이 많이 들어오고 격려 물품이나 축전도 많이 오지만 비인기 종목의 메달이 없는 팀의 아이들은 저희가 모성을 가진 엄마로서 너무 불쌍하고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권투 선수가 ‘어머니, 저 내일 출전합니다. 기도 좀 해주세요.’ 해서 ‘너 종교가 뭐니?’라고 물었습니다. 불교라고 하면 절에 다니시는 신도인 회장님들에게 저 아이가 그렇다고 하니 당신들이 하는 108배를 하든지 뭐라도 좀 해달라고 하고 저는 기독교라고 하면 기도를 해줬습니다. 또 선수들이 사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자기들이 무언가를 따게 되면 사인을 해야 하는데 사인할 때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사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본국에서 하다 보니 선전을 했습니다. 끝나고 스리랑카나 불우한 나라, 극빈한 나라는 메달도 없이 와서 참여만 하고 그냥 가는 나라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선수들은 오픈 전에 추석도 없이 이틀 전, 나흘 전부터 선수촌에 들어와서 있으니 저희는 또 매이지 않습니까? 끝날 때까지 있다가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었습니다. 그 옆에 북한 선수들이 와 있었는데, 북구가 북한 선수들을 담당했습니다. 북한 선수들이 빨간 나이키를 입고 왔다 갔다 하면 저희가 저거 우리나라에서 다 해준 옷인데 저렇게 거만하게 뻐기며 입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러면서도 자태가 참 예쁘다고 했습니다. 저희 보고 브로치가 예쁘다, 머리핀이 예쁘다고 하면 저희가 다 줬습니다. 그런데 갈 때 다 두고 갔더라고요. 가져가면 안 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참 체제가 이상하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또 동티모르 아이가 생리를 하는데 팬티가 없어서 저희가 집에 있는데 안 쓰는 새 팬티를 걷어서 모아 주기도 했습니다. 저소득 나라에서 온 아이들에게 저희가 속옷을 많이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부녀회는 봉사심에서 충발한 단체이고 엄마들이다 보니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에 저희가 늘 8시가 되면 출근하고 6시 퇴근이어도 그 안의 문화 공연 등을 다 보고 하면 9시, 10시였는데 이때 퇴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가 제일 저희 기억에 남고 이것 끝나면 허탈해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할 정도였습니다. 더불어서 참여했고 공동으로 다녔던 그것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창단했던 매화풍물단. 북, 악기 등은 개인이 사도, 단복하고 모든 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회장으로서 ‘내가 배를 한 번 째고 아파서 수술할 요령으로 한다.’며 해주었습니다. 또 그때는 조다쉬 트레이닝 복이 참 좋았습니다. 그것을 한 벌씩 다 사주니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 보람도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니 나이 이기는 장수 없다고 뛰는 것 등을 못 하시더라고요. 누가 다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제가 해체, 해단식을 해버렸습니다. 독거노인들에게 저희가 수의도 해주고 그분들을 모시고 봄, 가을에 야유회 등을 갔습니다. 노인들 중에도 굉장히 강한 사람이 있고 굉장히 유순하고 부드럽고 자기 것도 주장을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고는 ‘아 사람은 정말 가지가지구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산을 가는데 어떤 분이 자기 집에서 가지고 온 작대기를 지고 끙끙거리며 가는데 옆에 굉장히 씩씩한 할머니가 당신은 작대기를 아침부터 짚었으니 내가 좀 짚자고 하시며 빼앗아서 종일 짚고 가시는데 자기 것인데도 빼앗기고는 돌려달라는 소리를 못 하더라고요. 그런 것을 볼 때 사람의 본성이 강한 사람은 어딜 가도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늘 하면서 저희는 사소한 일이지마는 정말 왜소하고 자기 것을 주장 못 하는 어르신들을 잘 보살펴야 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독거지 모든 의식이 독거는 아니니 수의도 저희가 알뜰 장터를 해서 번 돈으로 명주로, 아주 좋은 것으로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산에 있는 부산일보나 국제신문에 많이 났습니다. 수의를 마련해주니 노인들이 여름이 되면 그것을 햇볕에 말리고 간수하여 넣고 하신다며 ‘회장님, 수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문. 자신을 어떤 새마을지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외골수. 누가 이것을 해야 한다고 하면 제가 가만히 따져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서 해야 할 것 같으면 제 개인적으로 큰돈은 아니더라도 엄마들이 술을 먹는 것도 아니니 식사 한 끼, 차 한잔 하면서 속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같이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항상 마음에 안 들면, 여기 있는 종이도 이쪽으로 옮기기 싫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중앙의 계획이나 큰 사업이 내려올 때, 저희가 중앙에서 홍보하고 다 듣고 오지 않습니까? 와서 제 나름대로 거기다가 살을 붙였습니다. 또 중앙에서 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저희 스스로가 봐도 이건 해야겠더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큰 역사의 물줄기에서 우리는 민초로서 물방울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물방울이 모여서 큰 강이 되고 바다로 가지 않느냐, 우리 하자고 하면 엄마들이 감동하여 하기도 했습니다.
알뜰 장터를 할 때 저희가 부산여대에서 하면서 그 수익금을 부산여대에 기부했습니다. 시에서는 부산대학교에서 해서 기부를 하는데 부산여대가 그때에는 우리 동래구에 있어서 거기서 알뜰 장터를 해서 나머지는 독거노인 행사한다고 제쳐놓고 100만 원은 기부했습니다. 학교 총장님께서도 부녀회가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몰랐다 하시며 칭찬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럴 때 27개 동 중에서 한 3개 동이 반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 짐을 태산 같이 싣고 제일 늦게 와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을 펼 때가 없다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펼 때를 찾으면 있는데 버젓이 자기가 늦게 온 줄 알면서도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며 단순히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스물 몇 개 동에서 각자 친구들 것이나 불용품 같은 것, 옷이든 뭐든 가지고 오면 저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됩니다. 스스로 알아서 딱딱 차리고 자기들이 늦게 왔으면 협조를 구해서 어디라도 찾아서 앉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몇 대의 차가 돌아갔을 때 서운하기도 하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내 짐을 놔서 해방을 놓은 것도 아니고 큰일을 두고 저러는 사람을 내가 가뤄서 같이 격을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 눈 감고 넘어가고 다음에 따로 얘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3개 동의 회장을 불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당신이 만약에 복산동 무슨 일을 하는데 몇 개 동 회장이 반동을 하면 좋겠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자.’고 하니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알뜰 장터는 항상 일사천리로 잘 됐습니다. 어떤 일을 시행할 때는 꼭 누군가가 반동을 합니다. 반대 아닌 시위를 하여도 그에 회장으로서 같이 다투기 보다는 이미 그렇게 한 사람은 눈 감고 넘기고 그 일을 무사히 치르고 나서 따로 다독거리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제가 남을 설득하는 그런 힘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을 추진하는 능력도 있고 남을 설득하면서 제가 화해를 잘 시키는 편입니다. 그 대신에 제 것은 남한테 말도 못 하고 제 것을 가지고 가슴앓이를 할 때도 많은데 그럴 때는 우리 회원들이 위안을 많이 줘서 잘 넘기곤 했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초창기에는 제가 일개 동 회장을 하니까 지원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가 1990년도에 구 회장이 되니 이런 부분에 지원이 나와서 과거에 이런 일을 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유추는 했습니다. 초창기 동 회장을 할 때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많이 협조해주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구 회장이 되니 수련 대회 등 큰 이벤트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동래구는 덕유산 수련 대회를 1박 2일로 가면 대형 버스가 15대씩 갔습니다. 한 대가 만약 펑크가 나거나 유고가 생기면 바꿔 싣고 오기 위해 빈 차 한 대를 대동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돈이 중요했는데 정치적 꿈을 가진 분들이 많이 계셨고 아까 제가 말씀 드렸던 큰 거금을 써주신 지회장님도 계셨습니다. 저희가 일할 때에는 그런 지회장님이 뒤에서 딱 받쳐주시니 구청에서도 새마을에서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다 일사불란하게 도와주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근래에는 회장들이 그런 일과 겸임하지 못하여 지회장님이나 회장하시는 분들이 자기 야망이 있다 해도 그런 것을 표시하지 못하고 스스로 하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뭐든지 저희가 일을 하려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고 돈이 있어야 해결이 됐습니다. 그렇다고 돈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평상시에 신용이랄까, 신의가 좀 있으면 좀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돈이 암만 있어도 신용 없으면 되겠습니까? 새마을이라는 어떤 상표를 그렇게 드러내 놓으면 참 궂은일도, 태풍이 와서 자기 집이 무너지고 물이 들어와도 일단 집결지 행사에 나와야 하는 그런 정신력으로 저희가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 지역에서 새마을은 독특하다, 참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2010년도 의회에 들어가니 야당이 세 명 들어오고 무소속이 한 사람 들어오고 우리 여당 사람이 여덟 명인데 제가 김장하는 날, 굉장히 춥고 혹독했는데 네 분께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새마을출신이니까 새마을예산도 깎이면 안 되고 도대체 이런 단체들이 뭐하는 거냐며 구시렁거리니 김장하는 곳을 가자고 했습니다. 가서 발발 떨면서 김장을 하는 것을 보고 시래깃국을 끓이고 김치 버무린 것에 같이 밥을 먹고는 새마을이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예산 관계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습니다. 다른 단체한테는 ‘하는 것도 없던데 뭐 이렇게 주느냐.’ 합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후배들한테 ‘지방 의회든 뭐든 능력이 되면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은 차이가 크다.’ 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구청 집행부에서 봐주려고 해도 의회에서 해결을 보니 의회에 우리 같은 사람이 있어 커버되어야 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우리 후배들에게 ‘역량을 키워 각 자지단체에서 하는 선출직에 도전해서 배지를 달아라. 우리는 나이가 있으니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후배들도 자꾸 올라와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새마을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그쪽으로 도전하는 것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개인의 발전도 되지만 우리 단체의 보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그때는 저희가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이 있었고 정말 저희가 빈국이었잖습니까? 그때는 신학기가 4월이었는데 저희도 학교 갔다 오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찬장 문을 열고 지금은 묵은지라고 하면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때는 묵은 김치라도 한 조각 먹고 물 한 잔 마셔야 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때는 가난한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이 부족해도 모르고 살았지만, 이제는 아무리 가난해도 냉장고 등 있을 것은 다 있지 않습니까? 마음은 자꾸만 가난해져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그때보다는 다 부자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남을 배려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부족함이 많지요. 옛날에는 TV 보는 것보다 독서를 더 많이 했잖습니까? 새마을의 누구인데 해달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 했습니다. 옛날에 전화기도 없을 때 저희 앞의 선배들은 더 고생했더라고요. 어디 행사를 가려고 산을 넘고 내를 건너 그 집을 찾아가면 교육가기 위해서 껌껌한 밤에 조롱박으로 물을 올려서 빨래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희는 전화기 있는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또 손에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잖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발달해도 우리 정열은 옛날 정열에 비하면 식은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떻게 해라, 어떻게 하라 하기 전에 우리 모두의 국민성이 퇴락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는 없는 가운데라도 내 아들딸 어디까지 공부시켜서 뭐 해야지, 뭐가 돼야지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나 어른이나 자기 하고 싶은 것하고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이런 주의로 흘러가고 있고 드라마나 모든 것이 퇴폐적으로 가다 보니 그런 것이 국민성을 타락시키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제가 드라마 작가부터 새마을에 불러서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합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알뜰 장터에서 제가 벗어난 지 몇 년 됐어도 늘 나갑니다. 격려도 하고 동 별로, 조금 어려운 동이 오늘은 매상을 못 올려서 국수 값, 점심값도 없다고 하면 몰래 넌지시 조금씩 집어 넣어주기도 합니다. 선출직이니 이것도 선거법 위반에 들어가니까요. 그런 식으로 안배를 하고 다니고 하는데 그때보다는 물량적으로 우리나라가 월등히 잘 살잖습니까? 그렇다 보니 1990년도 5월 5일에 제가 개장을 했는데 저희가 알뜰 장터 할 때와 지금은 20년 정도 차이가 있으니 우리 생활수준과 갭이 많지 않습니까? 돈의 씀씀이도 그때는 우리가 자제를 하고 이것만 딱 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요새는 더 붙는 것도 있으니 우리 지회나 각 동이 활동할 때에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 많이 느껴집니다.
옛날에는 각 기업체든지 각 동의 유지들이 부녀회라고 하면 와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주고 가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없는 각 단체가 ‘나도, 나도.’ 하며 전부 기라성 같이 단체 이름을 걸고 있다 보니 그 유지들 입장, 한 푼 주고 싶은 입장에서 볼 때 부녀회만, 새마을만 챙겨주지 못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고 ‘이벤트를 해라. 예를 들어서 문고면 문고로서 시 낭송의 밤을 한다든지 거기에 걸맞은 것을 하고 초청을 하다보면 그곳에서 우러나는 것을 받지 않겠나.’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돈을 쓰지 않고 몸으로 때우고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요즘에는 조금 머리를 써서 지혜가 따라야 하고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조금씩 감동을 주는 것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자기 주위에 빛나는 신동이 하나 있다면 새마을에서 빨리 쫓아가서 그 아이를 발굴하여 문화과, 공보과에 데려가 ‘새마을에서 활동하다 보니 이런 애가 있었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저도 이번에 배드민턴 신동을 6살 때 발견하여 지금은 8살 되어 어디 가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제가 곧 신문에 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가 하지 않는 것을 빨리 우리가 끄집어내서 새마을을 알리고 또 알리고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돈을 떠나서 그렇게 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