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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공장 새마을 운동이 어떻게 시작 되었나요?
답. 처음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 이야기를 하니까 그 당시 내무부와 농림부가 시작을 먼저 했죠. 근데 이제 국가 원수가 관심을 갖다보니까 각 부처 장관들이 이제 해야 될 것 같아서 그 당시 상공부장관이 장예준 장관이었습니다. 장예준 장관이 ‘어떻게 이것을 할 것인가‘해서 상공부안이 그 당시 기업 지도관실이라고 있었습니다. 기업 지도관이 남계영씨라고 하는 분인데, 상공부로서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검토를 해봐라 해서 남계영 장관이 그 당시 대학 교수들 몇 분에게 의뢰를 했습니다. 그 당시 중앙대교수 백영운 씨나 이동욱 교수 같은 분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공장새마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이념을 보면, 개별적인 기업이 보면 경영 합리화 운동이고, 전국적으로 보면 산업운동인데 새마을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에 경영 합리화 운동이 합쳐진 것이라 보면 됩니다. 공장새마을운동을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1번째는 노사일체감입니다. 그 당시는 노동상권이 이 보도에 있을 때였기 때문에 노사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봐라 해서 노사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노사협의라는 것이란 예컨대, 연말 되면 한 해의 실적을 노사가 모여 같이 보고 평가를 하고 내년에의 경영 계획 같은걸 설명을 하고, 한달에 한번씩 노사가 모여 경영 계획과 경영 실적 평가를 하면 그것이 실무 노동운동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실제로 노사협의를 잘 운영한데는 그 상호 신뢰가 생기고 근로자들이 신뢰하게 된까 과격한 노동운동을 나중에 안했죠 그런 회사들은.
문. 노사 분규가 없었겠네요?
답. 네. 그런 반면에 노사 양쪽에 뭘 요청했냐면, 경영가들, 기업주들에겐 기업가 정신을 가져라. 기업 정신이란 것이 투자를 해서 소득을 얻으면 사회에 환원을 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사회환원도 중요하지만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면 근로자들에게 일정한 이익은 돌려줘라 하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기업주들에게는 기업가 윤리를 이야기 했고, 근로자에겐 근로 윤리를 얘기 했는데, 근로자들에겐 분임활동을 통해서 공정 개선이나 물자를 절약하는 거라던가, 품질 향상, 생산성 높이는 거 원가 절감하는 거 그런 걸 강조했죠. 그래서 나오는 이익은 다시, 이익을 극대화 시켜서 그 나오는 이익을 다시 근로자들에게 돌려주자 그렇게 되면 공장의 기능이 뭐냐, 저희가 그 운동을 할 때 공장은 제 2의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먹고 살 수 있는데, 우리의 일터이고. 그 당시 공장 새마을운동 하는데 있어 표어가 여러개 있었는데 가장 오랫동안 쓰여진 표어가 무엇이냐 하면, 경영자는 근로자를 내 가족처럼, 근로자는 공장일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내 집일처럼 하자. 공장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경영합리화 운동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문. 우리나라 산업발전에 상당부분 기여한 부분도 있겠네요?
답. 많이 기여했죠. 저는 지금은 우리나라 제품의 품질이 우수해서 국제 사회에서 톱 클래스에 들어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제품의 품질은 사실 수출하기에는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상당히 품질이 나빴습니다. 그런데 품질 관리해서 품질 향상 시키는데 공장 새마을운동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지금 표준협회라고 품질을 전담하는 큰 경제 단체가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표준협회가 규격협회라 해서 중앙극장 뒤 조그만 사무실을 가진 작은 규모였습니다. 인력도 그렇고 예산도 지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상공회의소가 중심이 되어서 공장 새마을운동 하면서 품질 관련 운동을 전국적으로 넓혔죠. 그래서 예컨대 그 때 어떻게 했냐면 초창기에는 정부가 주도해서 상공부장관이 공장새마을 추진위원장이 됐고, 관계부처차관하고 경제사단체장이 위원이 됐었습니다. 1976년에 공장새마을 추진 요강이란 것을 만들어서 상공회의소에 추진본부를 두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위원장, 경제사단체장이 부위원장이 되었고, 업계사람들과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추진조직은 54개 상공회의소, 지금은 상공회의소가 72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54개 지방 상공회의소가 추진지부라고 하고, 또 매출액으로 따져서 많은 36개 대기업 그룹본부라고 해서 추진지부를 두었고요. 그 당시에 정부가 중심이 되어서 만든 공업공단이 4군데가 있었습니다. 구로공단, 구미공단,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 여기에 각각 추진지부를 두어서 전국을 커버했습니다. 품질관리운동도 마찬가지로 이 조직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전국을 커버하는 운동을 15년동안 했기 때문에 품질관리의식을 확산화시키고 뿌리를 내린것은 공장새마을운동이 큰 기여를 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문. 요즘에도 이제 품질관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 새마을운동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되겠네요?
답. 확산을 시켰죠. 아까도 말씀드렸 듯, 개념 도입은 규격협회라는 곳에서 들여왔습니다. 품질운동이 시작된 것은 미국이고, 일본에서 꽃을 피웠는데, 규격협회가 일본하고 협의를 해가지고 그것을 들여오기 시작했죠. 규격협회라는 곳이 원체 작으니까 인력이 없던 때였거든요. 마침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이 운동을, 왜 새마을운동이 관심을 가졌나면, 새마을의 소단위는 분임조입니다. 분임조가 왜 중요하냐면, 자기라인에서 일어나는 문제점, 해결점은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거든요. 전국의 상시 종업원 50명 이상 공장이 그 당시 5천개가 됐습니다. 상시 종업원 50명 이상 5천개 기업을 전국 커버했죠. 아까 말씀드린대로 전국 54개 상공회의소 36개 재벌그룹하고 그리고 공단에서 종업원 50인 이상 5천개 기업을 커버했는데요. 그 모든 기업체가 분임활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분임조는 작게는 8명이고요, 많게는 15명 되어가지고 한 분임조가 매년 한 개 내지 두 개의 테마를 결정을 합니다. 올해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자, 예컨대, 원가절감을 위해서 생각해보자, 공정 개선을 하자 아니면 품질을 향상시키자, 물자를 절약하자 등 크게 보면 4가지인데요. 그 중 테마를 하나를 결정해서 해결하는 것이 분임조 활동입니다. 열심히 하면 1년에 2개정도 해결을 했고요. 보통 1개 정도는 해결을 했습니다. 그렇게하다보니 기업주 입장에서는 물자가 절약되고 공정 개선이나 품질 개선이나 원가 절감을 통해서 생산성이 높아지거든요. 기업주들도 상당히 희망을 했고 근로자들도 거기서 나오는 이익이 자기한테 돌아온다는 그런게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죠.
문. 그러면은 현장에서는 거의 분임조 토의로 조직이 갖춰지면서 일이..?
답. 그렇습니다. 1986년 통계를 보면, 분임조가 10만개고요, 분임원이 110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공회의소가 관리한 분임원과 분임조가 그런데, 그 사람들이 1년 내내 활동을 했다고 보시면 맞죠.
문. 그런데 이런 공장새마을운동이 초기에는 어려움 같은 것이 없었나요? 예를 들어서 생소하거나, 강제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반발심이 있다던지, 이런것은 없었나요?
답. 그 당시 근로자들은 지금 근로자들과는 달라서요, 회사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정신들이 대게 있었죠. 거기다 실제적으로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과가 복지로 연결이 되는데요, 저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인데 우리나라 복지 제도나 복지 효시는 공장새마을운동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74년에 처음에 기업 지도자, 기업인 반이라 해서 6박 7일 공장새마을운동 교육이 이었습니다. 6박 7일이면 7일 동안 교육을 받는데 교육내용이 뭐냐면, 국가관, 경영기법, 경영사례, 성공사례거든요. 성공사례는 기업의 성공사례도 있고 개인의 성공사례도 있는데, 이 성공사례가 보통 7전 8기입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성공하는 과정이거든요. 그런 과정을 보면서 기업주들의 생각이 변하죠. ‘내가 모르는 이런게 있구나’ 또 보면서 굉장히 어렵게 자란 근로자들을 보면서 내가 좀 도와줘야겠다 이런 생각이 나가지고 거기 6박 7일 수료를 끝나고 나오면서 자기가 회사에 돌아가서 뭘 하겠다고 의견을 쓰게 되는데 거기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회사에 소홀히 했다, 근로자 복지를 위해 뭘 주겠다. 그 당시에만 해도 지금은 큰 기업에서 식당이 점심을 무료로 줍니다만, 식당을 만들어서 무료로 근로자들에게 점심을 준다던가, 아니면 체육시설을 만들어서 운동을 하게 만들어 준다던가, 버스를 만들어준다던가, 또는 장학제도를 만들어서 장학금을 준다던가, 뭐 이런 효시가 공장새마을운동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 그러면 새마을금고나 예를 들어 구판 사업 같은 것도 일종의 그런 운동이라 보면 되는 겁니까?
답. 예 그렇습니다. 구판 사업은 큰 기업의 경우는 원가로 공장에서 물건을 들여다가 원가로 근로자들에게 줍니다. 근로자들은 외상으로 쓸수 있지 않습니까? 원가로 가져가니 근로자들은 좋고, 기업들은 이익이 없지만 근로자들을 위한 것이니 좋고. 저축도 그렇습니다. 최근엔 저축률이 많이 떨어졌습니다만, 한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저축률을 가졌거든요. 34%까진가 제가 기억하는데요. 제가 새마을운동 하면서 저축하자, 개인들이 저축하는 것이 산업 자본으로 가고 우리에게 이익되니까 저축하자고 해서 새마을 저축이 시작된것이 지금 새마을금고입니다. 공장새마을운동에서 시작했죠.
문. 그러면 그 때의 예를 들면, 조금 모범 케이스 같은 데는 어떤 데인가요? 공장새마을운동이 잘 된 곳은 어떻게 운영이 됐는지?
답. 그 때는 새마을이 공장새마을이 다른 곳과 달라서 평가를 했습니다. 연초에는 추진본부에서 정부와 협의해서 1년 동안 지침을 만듭니다. 올해는 여기에 중점을 둬서 이런것을 하겠다하면 전국에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54개 상공회의소와 36개 재벌, 4개 공단을 통해서 전국에 공장새마을운동을 추진하는 모든 공장과 기업체에 연간 지침과 사업계획이 갑니다. 그러면 연간 지침과 사업계획에 따라 그대로 사업이 됐는가 연말에 평가를 하는데, 평가는 상공부 사람 일부와 시도 사람 일부, 전국 54개 상공회 사람이 동원되서 평가를 합니다. 평가 항목이 5개에다가, 한 50개 될겁니다. 보면, 기본 조성 여건이 됐느냐, 복지는 어떻게 할 것이냐, 생산성은 실지로 얼만큼 늘어났는냐, 그 다음에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같은 평가를 하게 되는데, 1000만점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대기업은 1천점 만점에서 850점 이상 가는 것이 우수고, 중견기업은 300인부터 150인, 그리고 150인 이하 해가지고 3그룹으로 나눠서 평가를 했습니다. 우수 기업체는 훈장도 주고, 표창도 하고, 그리고 사례가 좋으면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최하는 수출진확대회의가 월간경제경향보고가 매 월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례는 월간경제경향보고에서 매 월 사례보고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공장새마을에 참여하는 기업체의 경우는 거기에 한 번 가서 보고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삼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그랬죠.
문. 대표적인 기업체라고 하면 어떤 곳이 있나요?
답. 초창기에는 노동집약도가 높은 데가 됐습니다. 그 당시 초창기에는 동명목재나 한일합섬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만, 그 당시 동명목재의 경우는 세계 최대의 목재회사였습니다. 한일합섬은 마산을 대표하는 기업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선 가지고는 일본 빼고 가장 큰 기업이었던 것 같고요. 한일합섬이나 동명목재의 경우는 장학사업과 특별학급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동명대학이 부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고요. 마산에 있는 학교 중에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라고 지금 어떤 학교로 있는지 모르지만 그 학교가 공장새마을효과로 만들어진 학교입니다.
문. 현재 남아있는 기업체는 아까 말씀하신 삼성이나 신도리코 정도가 되나요?
답. 노사문제에 성공한 케이스는 그렇게 보죠. 그 당시에는 노동운동부든 노사협의회를 통해 노사간의 공장을, 직장을 제 2의 가정으로 만들자 그렇게 했기 때문에, 노사협의회를 강조했습니다. 노사협의회를 실지적으로 잘 한 회사는 노사간의 신뢰가 생기고 회사가 투명하게 되지 않습니까. 연간계획, 월간계획을 평가하고 실적을 갖추다 보니까, 투명하고 신뢰하다 보니까 오늘날까지도 안정이 되어있죠. 그래서 대기업 가운데 잘 한 기업은 삼성인거 같구요, 중견기업 가운데는 신도리코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 신도리코 같은 경우는 어떤 케이스인가요? 지금 뭐 삼성이야, 워낙 노사관계에 있어서 그런 부분이 있는데.
답. 신도리코는 일본의 리코와 합작한 기업인데요, 사주가 3331인가 하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개성분이었는데 돌아가신지 오래 좀 됐죠. 신도리코는 공장새마을 초창기부터 열심히 한 회사인데요, 카피머신하고 팩스밀리, 한때는 카메라도 만들었던 회사였습니다. 지금까지 회사가 잘되고 중국에도 공장이 있고 수출도 몇억달라 수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주가 3331인가 하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이익의 30%는 주주에게 주고 30%는 소비자에게 주고, 30% 근로자에게 주고 나머지 1프로는 내가 갖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식을 공개하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노사간의 관계도 잘 돼있었고, 복지 시설도 초창기부터도 장학제도가 있어서 장학금을 많이 줬고요. 그리고 근로자들의 복지시설도, 온양에 그 분이 개성분이 6∙25때 온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서 다시 개성으로 갈 수 없다 해서 온양에 자기 고향으로 생각해서 온양에 공장도 많이 만들었습니다만, 거기다가 근로자들을 위한 휴식 시설도 만들어놓고 비교적 성실히 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어서 저희들에게도 인상적인 기업체로 남아 있습니다.
문. 그게 개인적인 철학+새마을운동이 작용을 좀 했나요?
답. 예 그렇죠.
문. 아까 얘기하신 기업주들이 6박 7일도안 모여서 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기업들이 보통 들어와서
답. 초창기에는 큰 기업들은 거의 다 갔습니다. 한 4~50회 정도 했던걸로 기억되는데요. 그러다보니까 보통 100명 정도니까 대기업의 사주들은 거의 다 갔습니다. 가서 그분들이 6일동안 교육을 받고 마지막에 돌아올 때 내가 돌아가면 이런 걸 하겠다는 다짐을 하다보니까 확산되는데 큰 기여를 했죠.
문. 어떻게 보면 지금 생각하는 복지라던지, 돌려준다는 경영철학 같은 것들이 그때부터 체계화 됐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답. 효시입니다. 왜냐하면 공장을 제2의 가정으로 만들자 하다보니, 그게 주인의식이거든요. 기업주는 기업주들이 주인의식을 가져야하고, 근로자들은 주인의식을 갖고 공장일을 내 일처럼 하자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오는 이익을 근로자들에게 일부 돌려주자 그런 것입니다. 복지 제도의 효시는 저는 공장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문. 아까 말씀드렸듯이 경영주쪽에서 기업 경영합리화기 때문에 상당히 메리트가, 요즘 말로 하면 매력이 있었겠네요?
답. 그렇죠. 경영자들도 도움이 많이 됐죠. 품질이 올라가죠, 생산성 올라가죠, 근로자들도 열심히 일하죠. 분임조 활동을 하면서 제안 활동을 같이 했는데요, 제안도 상당히 좋은게 많이 나옵니다. 제안활동 그리고 분임조 활동에서 성과가 나오면 성과급도 줬거든요, 포상도 하고. 잠깐 수치를 가져온게 있는데 보면서 말씀 드릴게요. 86년 통계입니다. 공장새마을운동을 상공회의소에서 15년동안 했는데 88년까지 했습니다. 그 다음에 분임활동하는 품질관리의 영역은 표준협회에 넘겨줬죠. 통계를 보니 분임활동에 참여한 업체수가 4,150개이고요, 분임조가 91,200개이고, 분임원수가 95만명이었습니다. 이 때 평균 보니깐, 공정 개선이나, 품질 향상, 원감 절감 관계되는 테마를 1년에 평균 1.5개 많이 하는 조는 2개 적게 하는데는 1개의 테마를 가지고 해결을 했습니다.
문. 그게 이제 해결이 된거죠?
답. 예
문. 서로 모여서 공정을 이렇게 하자?
답. 예. 물자는 이렇게 절약을 하자, 품질은 이렇게 높이자 하는 그런 의견들이, 그러니까 이게 브레인스토밍인데, 문제가 되는 것을 다 먼저 써놓습니다. 문제가 한 4~50개 정도를 써 놓으면,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골라 놓고 나머지는 빼 버리고, 중요한 것을 어떻게 해결하자 해서 근로자들 스스로 해결책을 만드는데, 이것이 소위 브레인 스토밍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활동 결과를 상공회의소에서 평가한 것을 보면, 분임회의는 72회를 했고, 토의 안건은 33만건이었고, 채택된 것이 12만 2천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유형 성과를 1천4백억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분임활동을 하는데 190억을 지원했고, 그리고 분임활동 잘했다고 해서 9만건에 대해 119억을 포상금으로 줬습니다. 그래서 분임활동을 하게 되면 9월에는 사내 분임조 경진대회를 합니다. 회사 안에서. 올해 우리 회사는 이런 분임활동을 했는데 이런 성과가 있다는. 보통 30분의 시간을 주면 자기네들이 나와서 발표를 합니다. 그래서 회사간에 분임토의에서 1등을 하게 되면, 지역대회를 합니다. 그런데 달성에 있는 공장같으면, 자기 공장에서 1등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대구에 가서 경상북도 대회에 가서 대회를 하고 1등을 하면 서울에 와서 전국대회를 하죠. 그래서 분임조에 대해선 해외 연수를 시킵니다. 그 때는 해외 여행이라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해외 연수 시키고 포상을 주니까 근로자들도 열심히 했고요. 기업주들 입장에선 품질이 좋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지고 원가가 절감되기 때문에 대단히 기업주도 기분 좋은 운동이죠. 그래서 이것이 활성화 될 수 있었던 그런 계기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전국 대회 1등했다면 아주 획기적인 생산 공정을 바꾸거나 이래서 예를 들어 이런 것을 바꿈으로 해서 나타난 수익이 엄청났다던지, 그런게 생각나는게 혹시?
답. 제가 구체적으로 액수는 생각이 안나는데, 우리나라 큰 기업은 거의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기업이 분임조 숫자도 많고 지원액도 많고 자원이 우수하다보니까 큰 기업들은 대게 분임토의 대상을 받았을 거예요. 생각나는건 없는데 대게 큰 기업은 다 받았습니다.
문. 그 당시 공장새마을이라는것이 원래 농촌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경제적 상황도 맞물려 있나요?
답. 경제적인 상황, 그때는 대통령께서 수출제일이고 경제규모도 작았지만, 그 때 대통령이 대한민국 CEO라고 생각해서 제가 챙겼거든요. 한달에 두 번 꼭 하는 회의가 수출진흥확대와 월간경제동향보고거든요. 그것이니깐 전국의 상황을, 규모도 작고 그러니까 훤히 알고 계시거든요. 그런 입장에서 공장새마을운동이 수출하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품질을 높이고 생산성을 높였으니까. 박정희 대통령께서 공장새마을운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매년 3월 셋째 수요일에 보면, 경제사단체가 상공회의소가 중심이 되어서, 상공의 날 행사라고 해서 법정 기념일을 하는데요, 그 때에는 상공의 날하고 공장새마을추진대회를 같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상공회의소가 주최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전년도에 가장 잘 한 분임조의 성공사례 발표를 시켰는데요. 대표적으로 기억나는게 창원 대우중공업의 김규환이라고 하는 분임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분임토의를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까지 일본에서 수입해오던 부품을 국산화시킨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그 지역 분임토의를 하면서 한일합섬의 분임조장하는 여자하고 알아갖고 결혼을 했는데요. 둘이 분임조장 결혼을 하면서 무슨 약속을 했냐하면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품질이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분임이라고 1남1년를 둬가지고 아들 이름은 ‘김품질’이고 딸 이름은 ‘김분임’입니다. 지금 아마 어디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분임활동의 성공사례중의 하나 생각나는 것이 그 사람입니다.
문. 그게 이제 농촌도 마찬가지지만 공장 같은 경우도 사례 발표라는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움직임을 줬다는?
답. 그럼요. 저는 공장새마을운동을 15년동안 했는데 두가지가 남아있습니다. 하나는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가 있지 않습니까. 마산의 한일합섬에서 만든 회사인데, 그 때 마산가면 새마을운동 하는 사람이 그 회사를 가는 것이 견학 코스였습니다. 그런데 여성 근로자들이 많이 견학을 오니까 다른 사람들이 오면 별 관심이 없는데, 여고생이 오면 좀 그런거예요. 그 나이에 자기도 학교를 다녀야되는데 못 다니니깐 상당히 열등의식도 있고 보이지 않는 그런것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일합섬의 사주 김한수씨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학교를 만들기 전에는 공장새마을운동 추진본부가 야간특별학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야간특별학교라는 것이 뭐냐면 주간만 있는 학교에서 주간과 똑같은 커리큘럼으로 공장에 있는 근로자들을 교육시켜 달라는 것인데, 86년 저희 통계보면 참여하는 기업체가 2천개고요, 그 다음에 학교가 160개고 그래서 많이 참여했거든요. 그 다음에 발전한게 김한수 사주께서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만들었어요. 그 때 1회 졸업식 때 송사답사를 하는데 울면서 했어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어요.
또 하나는 저희가 이 운동을 하면서 평균 한번, 매년 영화를 하나 만들었어요. 교육 효과가 가장 있는 것이 영화거든요. 그래서 이제 success story, 성공사례라고 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강원도 정암에 있는 탄광의 사례를 하나 알았어요. 가서 보니까 7전 8기 한 사람입니다. 가정도 팽게치고, 술과 도박에 찌들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느날 마음이 바뀌어서 새마을을 하며 바뀌어서 가정도 열심히 하고 직장에서 제일 열심히 하고 그런 사례인데, 그런 사례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조금 가미를 했죠, 감동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영화 이름이 ‘정암골의 새봄’ 이란 영화였는데. 제가 그 영화를 탄광에 가져가서 광부들과 같이 봤는데, 지금도 전 감동을 받습니다. 전부 우는거예요. 영화를 보면서. 그래서 교육효과는 대단한거예요.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인것은 정부가 사회 지도층 사람들 정신계도하기 위해서 뭘 했으면 좋겠느냐 해서 제가 제안하기를 탄광에 한번 가보자 했어요. 정부 국장, 차관, 장관 부인들 모시고 탄광엘 들어갔습니다. 탄차를 타고 가보니까 상상 이상이죠. 그 분들이 들어가서 이구동성으로 하신 말씀이 ‘야 이거 연탄값이 너무 싸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까지 투정을 너무 했구나,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겠다’ 해서 그런 효과를 받은 적도 있었고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게 84년으로 기억이 되네요. 안보교육이 나왔습니다. 땅굴도 발견되고 그래서요. 안보교육을 쉽게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 해서 공장새마을운동 추진본부에서 전국의 근로청소년들에게 땅굴 한번 방문시키자 단위 집단으로, 땅굴에 가서 땅굴을 보고 거기 군인들에게 1시간씩 안보교육을 받고오자. 갈 때는 위문품을 가져가자 해서 1년동안 9만명이 갔습니다. 버스 대절해서 땅굴에. 그래서 저희가 볼땐 보이지 않는 안보교육도 있었고. 군하고 민하고 크로스 되면서 상당히 기여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문. 지금 보시면은, 한일합선 얘기 하셨는데, 그 당시 교육이란 것에 상당히 목 말랐던 거 모양이예요. 저희들도 중요한 자료를 보다보면 공장이나 현장에서 교육을 했다, 야간 학교라던지, 그런 교육을 시작하게 됐던 어떻게 시작하게
답. 우선 새마을운동 자체가 시작될 때에도 교육에서 시작된다 해가지고 교육을 하는데요, 교육은 이념교육이 있고 실무교육이 있는데요. 이념교육이라는 것이 새마을정신, 근면,자조,협동 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선 열심히 일하자. 두 번째 자조라는 것이 우리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하자. 협동이라는 것이 안되면 우리 힘을 합치자라는 것 아닙니까. 가장 필요한 곳이 공장이거든요.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것이 그래서 정신교육을 했고 그 다음에 실무교육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품질 관리나, 원가 절감, 생산성 향상 교육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나가서 분임활동을 하면 전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도 실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극대화 시켰구요. 지금 말씀 하셨던 교육을 어떻게 확대했냐하면, 우리 나라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의식은 굉장히 강하지 않습니까. 대게 배우지 못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사람들은 검정시험을 보거나 아니면 야간 학교를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줬죠. 그러면 나중에 대학까지 가게 되는거죠. 이미 제대로 학교를 다닌 장학금 주는 제도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큰 기업은 2명까지 대학을 보내주는데 그 효시를 공장새마을운동이라 보시면 됩니다.
문. 장학사업하는?
답. 예
문. 그 당시에는 야간 대학 같은곳이 얼마나 있었나요? 부담도 사주쪽에서 했나요?
답. 일부는, 우수한 기업은 일부 부담을 했겠죠. 대학까지는 아니고. 나중에 장학사업이 펼쳐지면서 큰 기업은 자녀까지 장학금을 줬으니, 아마 직접 줬을겁니다.
문. 그 당시에 현장에서 일하시던 분들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았나봐요, 거기에서 성공하신 분들도 있던데. 그러니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가서 공부하고 그러니까 공장 내에 있는 대학교에..
답. 그럼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 컨설던트까지 된 사람 여럿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김태호라고 기억되는데 안양산업에서 시작된 분인데, 학력이 없던 분이예요. 학교를 그렇게 졸업하고 나서 작업현장에서 분임토의를 하고 생산성 향상시키던걸 쭉 하다보니까 노하우가 생겨가지고 나중에 컨설던트까지 된 사람 여럿 있습니다.
문. 그런거 같은거 보면 배움에 대한 열정을 많이 해결해줬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답. 그렇죠, 매듭을 풀어 준거죠. 한이 맺혔던 것을 다 풀어줬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근로자의 경영참여 중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노사협의라는 것은. 연간 계획같은것을 같이 만들고 물론 회사가 만들었지만 설명하는 과정에서 참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매월 경영실적 같은거 평가하고 계획같은거 실적 계산하다보면 신뢰가 생기고 근로자들이 본인 스스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 갖게 되거든요. 그래서 경영참여하고 신뢰가 생기다보니 투명하고. 이게 저는 주관적인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만 86년부터 노사문제가 분출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정부가 좀 더 잘했으면 전 지금 1인당 소득 3만달러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상권 가운데 단체행동권이나 교섭권을 정부가 유보시켰거든요. 협의해서 해결했는데 지금까지 교섭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너희끼리 해봐라 하고 던져버린 거거든요 정부가. 단계적으로 풀어놨으면 노사문제가 지금 이처럼 강경하게 되지 않았을 뿐더라 3만불은 넘어갔을 거라 봅니다 저는. 제가 상공회의소 오래 있다 보니까 저보고 사칙에 경도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립적으로 봐도 지금의 노동운동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어요. 예를 들어, 자동차 회사를 들면, 경영권의 일부를 포기했습니다. 경영자들이. 근로자들이 노동권이 갖춰져야되는것처럼 경영자들은 경영권이 갖춰져야 되거든요. 일부 자동차회사는, 생각해보세요. 전환 배치된 것이 뭐냐, 이쪽에서 바쁘다, 이쪽에선 한가하다하면 바쁜데 사람이 이쪽으로 가야되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노사간에 합의해서 못가게 하니까 이쪽 라인은 놀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잘 안팔리니까. 잘 팔리는 자동차 라인은 24시간 돌고 있습니다. 그럼 누구든지 이쪽으로(잘 되는 쪽으로) 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못하는거예요. 전환 배치가 안되니까. 새로운 기계들이 올 때도 노사간에 합의해야 되고, 공장을 옮길 때도 노사간에 협의해야 되고. 그래선 안되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정부에서 단계적으로 풀었으면, 오늘날 이렇게까지 안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문. 효율성 면에서 굉장히 많이 떨어진다는 말씀이죠?
답. 그렇죠. 효율도 떨어지고, 근로자와 노동자에게 노동권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영자들에게 경영권을 가져야 되는것이거든요. 기업들의 일부는 내가 볼땐 경영권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라는 것과 노동화라는 것과 합쳐서 경영권 일부를 가져가고 있어요.
문. 공장새마을운동이 산업 같은데 이바지 한 것이 어떻다 좀 말씀해주세요.
답. 산업에 이바지한것은 제가 말씀드렸듯이 품질을 높이고, 제안 활동을 통해 근로자들이 경영 참여를 하게 됐고, 생산성이 높아져서 자연히 수출을 늘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고요. 한계적이었지만 80년대까지는 노사문제를 기업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죠.
문. 요즘 같은 경우 다시 공장새마을이나, 꼭 공장새마을이 아니더라도 기업체 같은데 새마을운동이 발현이 된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이유가 어떤것이 있는지?
답. 제가 김영삼 정부 시작할 때 정부에서 새로운 산업운동을 무엇을 할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새마을운동을 이름을 바꾸더라도 다시 해보자고 했는데 잘 안받아들여지더라고요. 전 지금도 이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기업이라는 것이 제2의 가정 아닙니까? 주인의식을 가져야하고요. 노사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노사간에 힘을 합쳐야 합니다. 당연한것인데 잘 안되고 있거든요. 사회 분위기인데 새마을운동 하면 배고플 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니거든요. 전 지금 필요하다고 봐요. 근면자조협동의 운동 아닙니까, 기본 이념이. 근면이 뭡니까 열심히 일하자, 자조 우리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자, 협동 서로 힘을 합하자. 저는 지금처럼 이게 필요한 때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는 나라 보면 이것이 다 잘 되는 나라거든요. 이름이 새마을운동이 됐든 뭐가 됐든, 이 정신은 계속 계승되가지고 다시 가는게 기업에도 보탬이 되고 나라에도 보탬이 되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몇 십년동안 새마을운동에 종사를 하셨는데, 지나시고 보니까 새마을운동이 어떻다라고 정의를 해주실수 있나요?
답. 새마을운동, 저는 새마을운동을 보면 2가지 국민들에게 줬다고 봅니다. 하나는 하면 된다는 것과 두번째는 자신감입니다. 저희 졸업할 때 보면, 제가 1963년에 졸업하고 군대를 갔는데, 그 당시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그 다음에 우리 자신은 굉장히 폄하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군대 제대할 때 무슨 얘기가 나왔냐면, 취업 안되는 게 “농과대학 나왔습니다, 똥 푸시오” “음악대학 나왔습니다, 헌 레코드 판 파이소” “법과대학 나왔습니다, 결혼이나 이혼 준비하겠습니다” 하는 이런 농담이 했거든요, 취업하기 어려워서. 지금 보면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져서 우리 국민들이 이제 자기 폄하를 안 하지 않습니까? 하면 된다하는 철학하고 자신감을 새마을운동을 통해 우리 국민 마음 전체에 심어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공장새마을운동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이것을 제대로 잘 한 회사, 제일 아까운 것은 노사협의제도를 기업주가 끝까지 관심가지고 잘 했으면 오늘날 노사문제가 이렇게까지 안 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경우는 저희 상공회의소에 있으면서 산업운동 하는 것을 늘 봤거든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물자 절약하는 것도 옆에서 봤고, 산업협력운동 하는 것도 옆에서 봤고, 공장새마을운동은 제가 14년동안 사무국장을 하면서 마지막엔 새마을본부 이사까지 한 사람인데요, 이것을 하면서 보면 처음에 뭘 하자고 하면 오너가 관심을 가지고 같이 하다가, 품질 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TQC라고 전사적인 품질관리를 하자, 전사적인 것이 뭐냐하면, 사장부터 수위까지 하자는 것이거든요. 처음엔 사장이 나와요, 근로자들도 ‘아 사장이 관심 갖는 것을 보니 열심히 해야겠구나‘ 하는데 사장이 안 나와요. 그 다음엔 전무가 안나와, 상무가 안나와, 공장장이 안나와 그러면 이 처음부터 사주가 끝까지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이 신도리코 사주는 그 분 훌륭한 분입니다. 5년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그분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공장도 많이 가 본 사람인데, 노사협의회는 끝까지 참여하신 분이예요. 사주가 끝까지 노사협의에 참여하면, 근로자들도 생각이 다릅니다. 자기가 경영에 참여한다는 생각도 갖고, 투명하다는 것도 느끼고, 그리고 경영기획을 알게 되다 보니까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신뢰도 생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