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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4년도에 새마을연수 6기생으로 교육을 받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말들을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새마을지도자들의 성공사례처럼 나도 마을에 돌아가면 꼭 새마을운동을 실천해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새마을연수원을 갔다 오면 읍면장님들이 격려도 해 주고 많은 배려도 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데서 ‘나도 하면 된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젊은 부녀자 몇 사람이 모여 매일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도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절미저축운동을 했습니다. 부뚜막에 조그만 그릇을 놓아두고 식구대로 한 숟가락씩 쌀을 모아 나중에 항아리만큼 차면 농협에서 쌀은 가져가고 그만큼 통장에 입금시켜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너무나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새마을교육을 강조하고 설득시키면서 새마을사업을 하나하나 해 나갔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기금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기금을 마련할 수 있는 했습니다. 제가 연수원에서 교육받고 왔을 때 모내기가 시작 되었는데, 모내기를 해서 기금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하니까 마을주민들이 젊은 여자들이 모를 심다가 망가뜨릴까봐 모내기 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장님이 이장님 댁 논에 모를 심으라고 해서 꼼꼼하게 모를 잘 심었더니 여자들이 꼼꼼하게 모를 잘 심는 다고 칭찬해 주었고 거기에서 얻은 수익으로 추리닝 40벌을 사서 작업할 때는 단체로 입고 일을 하니까 모두들 좋아해 주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마을운동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에 분위기는?
답. 처음에는 모두들 반대했었습니다. 여자들이 살림이나 하지 밖에 나와서 딴 짓거리한다, 집안 망하는 일이라며 엄청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퇴비장을 만들 때 꼼꼼하게 만들어 주니까 조금씩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 한두 명이 꼭 있는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인내를 가지고 새마을사업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에 만날 저녁이면 이집 저집 다니면서 회의장에 나오라고 하고, 모여서 의논하고 회의해서 마을의 초가집을 벗겨내고 슬레이트로 다 올리고 했는데 그런 일을 여자들이 앞장서서 했고 나중에는 남편들한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당시 홍천읍이 20개의 리가 있었는데 우리 마을 부녀회가 일을 잘한다고 우수부락으로 선정이 되어 상금으로 100만 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대회를 가서 지도자들의 성공사례를 듣고 너무 감동을 받고 와서 열심히 하니까 우수부락으로 선정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초가집을 내리고 슬레이트를 올리니까 볏짚이 남아돌아 가마니 기계를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만 원 보조금 받은 것에 20만 원을 보태서 120만 원으로 가마니 기계를 샀더니 회원들이 매일같이 나와서 겨울 농한기 때 가마니를 짰습니다. 그때는 벼를 가마니에 다 넣었는데 그래서 볏짚으로 활용하려고 가마니기계를 샀습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지으려고 하는데 기금이 없어 부녀회에서 돌아가면서 공판장을 했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득으로 마을회관 짓는 데 일조를 했습니다. 마을회관을 짓고 회관에서 가마니를 짜는데 마을에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횡성 우천면에 가서 전수를 받아와서 가마니를 짰습니다. 그런데 가마니를 너무 많이 짜서 마을회관 건물 2층만큼 밖에 쌓아놓고 봄이 되면 정부에 수매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마대가 나왔습니다. 마대가 나오니까 가마니가 수매는 안 되고, 높이 쌓아놓았던 가마니는 봄이 되면서 땅에서 온기가 나오니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을에서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 여자하나 꼬챙이에 껴서 두드리니 동네가 빚더미가 되겠다며 가마니를 어떻게 할 거냐면서 화를 낸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수님과 읍장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장마가지면 모래를 넣어 제방 쌓는 게 있었는데, 가마니를 그런 식으로 사들이고 했는데 이미 가마니가 많이 망가져 있어서 그냥 가져가다시피 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많은 가마니를 치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습니다. 거기에서 인건비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기금마련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기금도 마련하지 못하니까 약 50명 넘게 있었던 회원이 30명 정도만 남고 다 빠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에는 마을마다 역량개선의 집을 짓는 게 있었는데 구판장도 하고 가마니에서 나온 기금을 더해서 새마을 부녀회회관을 지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회관 지을 장소를 먼저 구해 놓고 자갈, 시멘트, 벽돌, 목재 등을 구해다 쌓아놓고 가을에 허가를 내려고 하니까 그곳은 농사짓는 곳이라 허가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벽돌 수 만장과 자재를 다 갔다 놓고 잃어버릴까봐 세 명씩 천막을 치고 잠을 자기도 했는데 허가가 안 된다고 해서 중앙 건설과에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한 달이 되니까 회관을 지어도 된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그 일로 나갔던 회원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목수 한 사람만 쓰고 모든 노동일은 부녀회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모를 심으면 동네잔치처럼 하는데 새마을부녀회에서는 모를 심으면서 3명씩 회관에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좋은지 일손도 딸리지 않고 동네잔치도 안하고 하니까 마을에서 대환영이었습니다. 일손을 축소하면서 하다보니까 회관에 탁아소도 하게 되고, 나중에는 회관 가깝게 소우전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소우전이 들어오니까 축협에서 장날마다 밥을 해서 팔라고 했습니다. 소우전은 막가는 사람들만 소를 팔고 사고하는 사람들이 오니까 말도 거칠게 해서 식당 안에 ‘고운 말을 쓰자, 우리는 새마을부녀회입니다. 이곳에서는 술도 조금 먹고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고운 말을 쓰고 가정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여기에 와서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표를 많이 써 붙이니까 그 사람들이 이곳은 이런 곳이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장사도 정말 잘되었습니다. 남편들이 이해를 해 주었기 때문에 부녀자들이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습니다. 당시 1인당 8만 원 경비를 들여서 갔는데 남편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부녀자들이 콩이 팥이라고 해도 다 들어주면서 무슨 일만 한다고 하면 경운기를 다 가지고 와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거기에서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식당운영에서 얻어지는 수익으로 회원들에게 송아지 한 마리씩 분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시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든 사람이 이 동네는 머지않아 망가진다고 하면서 남편들에게 욕을 하고, 마누라들 내돌려서 어떻게 할 거냐며 때론 제가 지나갈 때 저한테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이것을 참지 못한다면 내 한계는 여기에서 무너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이 고마운 것 같습니다. 또 한 번은 회관을 짓는 동안 빚을 지게 되어서 건축 재료를 외상으로 사왔는데, 와상 값을 안 갚으니까 우리 집에 쫓아와서 마루에 드러눕고, 팔을 뻗고 우리 다 먹여 살리라고 소리 지르는 등 그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고 수없이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회원들과 함께 절미운동하면서 항아리를 부뚜막에 놓고 쌀을 식구대로 숟가락으로 떠서 모았는데, 항아리가 채워지면 농협직원들이 와서 수거해 가고 쌀의 양만큼 통장을 개설을 해 주었습니다. 통장개설을 해 주니까 단돈 1원이라도 내 통장을 가졌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부녀회들이 모여서 도급으로 모내기를 해서 얻어지는 수익으로 티셔츠와 추리닝 한 벌씩 사 입혔더니 회원들도 너무 좋아하고 협동심도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그때 같이 고생했던 우리 회원들도 이제는 고인이 되거나 70,80세가 대부분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회관을 지을 때 먼저 허가를 내고 자재를 준비해야 하는데, 저는 자재를 먼저 준비해 놓고 허가를 내려고 하니까 허가가 안 나는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진짜 정말 나는 왜 이럴까하는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소우전에서 식당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되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게 되었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새마을 표창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금으로 350만 원이 나와서 흙 부뚜막이었던 부엌을 시멘트로 바꾸는 작업을 부녀회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도 놓게 되었고 다리를 놓는데 여기는 다 수돗물을 먹는데 그 동네는 수돗물이 없어서 펌프 아니면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겨다 먹는데 간이상수도를 산에서 끌어들이는 사업을 했습니다. 부녀회원들이 낮에는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하니까 저녁을 먹고 난 후에 가서 수도파이프 놓는 홀을 산속에서부터 파서 내려오는 작업을 몇 개월 동안 했습니다. 그것이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퇴비도 산에 가서 풀을 베어다 퇴비를 만드는 것도 다 부녀회에서 다 했습니다. 그 힘든 과정은 정말 저는 어떤 때는 신발을 어떤 안 신고 다니고 맨발로 다니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간이상수도를 완공하고 준공식에 제가 남자고무신을 신고 행사에 참여를 하니까 신발을 사 준신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신발이 없어서 남자고무신을 신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오직 마을에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젊었지만 화장이 뭔지도 몰랐고, 머리도 그냥 질끈 묶고 일을 했고, 리회장도 하고, 읍회장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마을에 예식장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건의를 하려고 갔는데 지사님을 찾아갔는데, 어떤 기자분이 저한테 ‘큰 선물 하나 받아가지고 가세요.’라고 해서 무슨 선물을 받으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고는 지사님에게 마을에 예식장을 지어 운영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고, 바로 답변은 듣지 못하고 제가 읍회장이 되었을 때 예식장을 지어 준다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식장 지을 터가 없었고, 부지를 구할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락의 이장님한테 가서 땅이 없으니까 읍에 회관을 짓겠다고 하고, 읍장님하고 상의해서 지도자성금 3,000만 원에 지사님이 1억 5천, 군수님이 1억 2천, 총 3억을 들여서 강원도에서는 최초로 240평 건물의 회관을 지었습니다. 3층으로 지었는데, 지하와 3층은 식당을 하고, 1층은 예식장을 하고, 2층은 지회사무실로 썼습니다. 힘들게 건물을 지어놓고 난 후에 예식을 하니까 너무 잘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지원은?
답. 시멘트 지원해 주고, 잘 한다고 격려차원에서 선진지 견학시켜도 시켜주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새마을이 40년 역사가 되었는데, 그때는 정말 못살고 가난했으니까 우리 스스로 일어나서 잘 살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래도 새마을을 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틀립니다. 여러 단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많이 생기다 보니까 문제점도 많은 것 같은데, 예전에는 새마을하면 새마을과도 있고, 계도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서로 말이라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서로가 경쟁시대가 되어서 의식이 예전에 비해 부족합니다. 저는 홍천 사람만 봐서 그런지 몰라도 홍천군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의식이 바로 서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성단체회장 담임을 했는데 가만히 보면 그래도 새마을식구들이 읍면으로 확산되어서 있으니까 아직까지는 누가 다른 단체에서 새마을을 막보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나 올 때 임야 만평을 지회에 사놓고 나와서 지회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다문화가족들 결혼식도 해 주고 지금도 다 연결이 되어서 그런 사업을 많이 하고 있고, 제가 중고품 매장도 설립해 놓았는데 저는 원 없이 일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가끔씩 가족들과 새마을식구들에게 얘기하는데 저는 다시 죽었다 태어나도 새마을운동을 할 것입니다. 지금 새마을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저는 발 벗고 나섭니다. 그리고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늘 존경한다는 말과 함께 격려를 합니다. 제가 새마을 일을 하면서 1996년도에 훈장도 받게 되었고, 또 40년 새마을운동에 도부회장까지 하고, 현재는 도 이사로 있는데, 작년에 사임당 상을 받으면서 연수원에서 40년 장을 받았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부녀회 회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잘사는 시대가 왔고, 새마을운동이 세계화 되고 있는데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들도 그런 새마을 정신을 가지고 내 가정에서부터 새마을운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자식들도 부모를 본받기 때문에 전 국민이 새마을 의식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바람은 전 국민을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받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새마을을 한 사람으로서 밖에 나가서 새마을운동한 사람답게 항상 행동도 조심스럽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 의식을 가지고 국민들이 가정에서부터 새마을을 이루어 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