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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저는 새마을의‘새’자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이 50년대 60년대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산중턱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여기를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민들과 힘을 모아서 계획을 수립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으로 발족되었습니다. 우리가 새마을 차원으로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참여를 했던 것이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 분위기는?
답. 처음에 우리는 새마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다만,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의 환경을 개선해서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농촌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면서 1974년에 광주에서 새마을지도자 전국대회가 있었습니다. 광주새마을지도자 전국대회가 개최되면서 매스컴도 타고 이러다 보니까 이게 바로 새마을운동이구나라는 생각에 주민들을 새마을운동에 같이 동참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민간주도가 아니고 관주도였기 때문에 관에서 모든 것을 새마을 차원으로 이끌려고 공무원들이 와서 많은 지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지도를 하다보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관주도로 새마을운동이 탄생되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판자촌이 388동에 15,240평이었습니다. 이 판자촌에 반듯한 내 건물을 갖자고 해서 2층, 3층으로 설계를 하는 새마을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고지대다보니 공사난맥도 있고 도로도 뚫어야 되는데, 도로를 뚫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집이 포함된 사람들은 저희를 원망했습니다. 도로현장에서 집이 헐리게 된 사람이 곡괭이를 들고 저를 치려고해서 피했던 그런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사비용 10만 원씩을 주고 성남으로 전부 이주를 시켰는데, 그러다보니까 반발이 심했습니다. 차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총 6년이 걸렸습니다. 그때 많은 주민들의 협동심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인접해 있는 동성고등학교, 보성고등학교, 경신고등학교 교장들에게 얘기를 해서 매일 학생들 100여명을 지원받아 도로를 뚫는데 협력을 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일이 성사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새마을 지도자로 참여해서 엄청나게 큰 사업을 처음부터 했기 때문에 난맥도 많았지만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다보니까 주민들로부터 명실 공히 지도자로서 위상과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지도자로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정말로 어려웠던 점은 당시 땅이 국유지였습니다. 국가 땅이었기 때문에 무관심속에서 벽돌 한 장을 놓고 이것이 내 땅이다, 내 건물이다라고 살았던 것이, 이제 건축을 하면서 내 땅이 된다고 하니까 벽돌 한 장 놓을 수 있는 땅을 가지고도 주민들끼리 분쟁이 있었고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때 지도자가 이것은 원칙을 가지고 해야 된다 해서 땅을 떼어주는 조정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벽돌 한 장이면 벽돌 반절에 줄을 그어서 이것은 A집이요, 이것은 B집이요, 이렇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과정에서도 모함을 받았습니다. 가깝고 아는 사람에게는 더 배려를 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배려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 통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실제로 사전기관에 지도자들이 주민들로부터 돈을 받고 편파적으로 일을 한다고 몰래 진정도 넣었습니다. 한번은 이종춘 구청장이 점심식사를 사주겠다고 지도자들을 모았습니다. 당시 추진위원들이 9명이었는데 모두 점심을 사준다고 해서 갔더니 그 자리에서 구청장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 존경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알고 봤더니 구청장이 일주일을 동안 우리를 내사(內査) 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내사를 했냐고 물어보니까 고물장사, 과일장사 하는 사람들에게 여론수렴을 하라는 취지에서 우리 뒤를 밟도록 지시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뒤를 밟았던 사람들이 우리가 공사현장에서 라면 끓여 먹어가며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구청장에게 가서 그 사람들 고생을 많이 하니 점심이라도 사주면서 위로를 하라는 얘기를 했다며 구청장이 와서 점심을 산 사례가 있었습니다. 또 한꺼번에 388동의 건물을 만들다보니 자재를 구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겨울은 다가오는데 시멘트와 철근 파동이 나서 돈을 가지고도 시멘트와 철근을 못 샀습니다. 주민들은 집을 지으라고 해 놓고 재료도 제대로 못 사게 하지 않느냐며 우리에게 원망을 했습니다.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종로 국회의원이었는데, 그분에게 찾아가서 돈을 가지고도 못사는 시멘트와 철근을 사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이 그 자리에서 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했고, 그리고 저에게 명함과 사인을 해주면서 김성근 회장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30대로 새파랗게 젊은 놈이 회장을 만나자고 하니 수위실에서 안 들여보내 줬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보여 줬더니 회장실로 들어오라고 했고, 장기영 회장의 얘기를 전해드리며 시멘트를 사러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당시에는 한 장만 팔아도 몇 천 원씩 이익을 볼 때였기 때문에 많은 양은 안 되고 하루에 700~800포대를 주겠다며 김성근 회장이 직접 오더(order)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한대의 차가 시멘트를 가지러 들어가면 8시간 내지 9시간 걸리니까 차량 운임이 시멘트 값보다 더 많이 들어갔고, 그로인해 주민들에게 운임이 많이 들어간다고 오해와 원성을 받았습니다. 다시 구청장에게 가서 시멘트를 운반하는 차량이 몇 대 없는데, 시멘트를 가지러 들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운임이 많이 들어가니 청소차를 지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이 하루에 2대씩 청소차를 지원해 줘서 저렴한 가격으로 시멘트를 공급을 해서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주민들은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했다며, 이 사람 아니면 우리가 감히 이런 양옥집에서 살 수 있겠느냐면서 나중에는 검정콩을 갖다 놓고 흰콩이라고 해도 우리를 믿고 신임하고 따라주는 계기가 되어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당시 건축을 할 때는 승인만 얻고 준공을 해서 내 건물, 내 땅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에 불하(拂下)를 맡으려고 할 때 감정사가 먼저 와서 감정을 했습니다. 감정사에게 내 집보다 다른 집을 평당 5천 원이라도 싸게 해 달라고 했는데, 당시 우리 집은 3만 2천원, 앞집은 2만 7천원에 감정가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주민들이 앞집이 2만 5천 원이면 내 집은 2만 원정도 되어야 한다면서 여기저기서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당시 신임 동장이 새로운 업자를 데리고 왔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승인을 한 사람에게 주어야 준공이 100% 될 것 같았는데, 동장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도면을 반으로 잘라서 반은 제가 지지한 설계업자에게, 반은 신임 동장이 지지한 업자에게 주었습니다. 제가 지지한 업자에게 ‘만약에 저쪽보다 준공이 늦게 떨어진다면 나는 이 동네에서 이사를 가야하니 이익을 못 보더라도 젊음 대 젊음으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가 연말이었는데 연말에는 대부분 업무를 보지 않는데도, 그 업자가 구청에 가서 사정을 해 밤 12시까지 집에 못 가게 붙들어 놓고 가옥대장을 올리고 준공을 해서 등기까지 완료해서 갖다 주었습니다. 제가 맡은 집이 190세대, 신임 동장이 맡은 세대가 170세대였는데, 그쪽은 한 동도 준공검사를 못하고 등기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임 동장 팀에서 말하기를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했던 것이지 만약 경쟁자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했겠느냐라고 면피(面皮)를 줬습니다. 어찌되었든 주민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명륜동에 성균관대학교가 있지만 옛날에는 건달 거목이 살던 동네였고, 주먹 잡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당시 성균관대 뒷산에 천막을 쳐놓고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주먹 잡이들이 성균관대 학생들을 괴롭혔습니다. 동네 정화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방범봉사대를 구성해서 매일 저녁 파출소와 협조하여 우범지역 순찰을 돌았습니다. 그로 인해 1982년도부터 1993년도까지 11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명륜동이 선정되었습니다. 매년 5월 1일 법의 날에는 범죄 없는 마을을 전국적으로 추천해서 시상을 하고 텔레비전에 홍보를 합니다. 11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것은 농촌도 힘들지만 서울에서는 획기적인 사업으로서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이전에도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방범활동을 할 때 어려움이 뭐였냐면 우리는 사법권도 없고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야간에 순찰을 도는데 여성의 핸드백을 날치기해서 도망가는 범인을 쫓아가서 격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잡은 범인이 칼을 가지고 휘둘러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흉터가 사라지 않았지만, 저는 이 상처를 새마을에서 얻은 훈장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보람되게 생각하는 것은 판자촌을 훌륭한 양옥으로 만들어 냈고, 도로 하나 없던 곳에 소방도로를 뚫어서 소방시설을 한 마을로 만들었고, 11년 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만든 성공된 새마을운동을 했다고 저는 자평(自評)을 하고 싶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나 아쉬웠던 점은?
답.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었습니다. 건축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건축을 하다 보니 도로를 직선으로 내야 하는데 굽어지거나 계곡이 심해졌습니다. 공사를 마무리하고 나서 굴곡이 너무 심한 곳을 또 다시 복토를 내서 편편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들었습니다. 관에서 하는 장차관과 전문인들도 국가적인 시책을 하다보면 잘못되어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는데, 건축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일을 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그렇다고 해서 주민들에게 준 피해를 홍기서가 단 10원이라도 주머니에 넣었다면 벌을 받겠지만 그게 아니니 이해를 해 달라고 주민들을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사비를 걷어 도로를 반반하게 낼 수 있었고, 계단도 낼 수 있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바뀐 점이 있다면?
답. 새마을운동을 하기 이전에 저는 문맹의 청년이었는데, 새마을운동에 동참을 해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옛날에는 각 지역에 지도자 또 구(區)의 지도자, 시(市)의 지도자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을 때는 없었던 조직이 80년도에 민간으로 들어오면서 협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종로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제일 나이 젊은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저는 28살에 시작해서 41년간을 지도자 생활을 했고, 그러다보니 종로나 서울, 어디서도 홍기서 이름 석 자만 대도 알만한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지방화시대에서 지방자치시대가 이루어졌는데, 저는 1대 때는 새마을운동만 하기 위해서 지방의회에 출마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방의원들 힘이 막강하고 예산도 의원들이 주어야 새마을운동에 쓸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을 위해서 2회 때부터 의회에 출마를 했습니다. 현직의원과 출마를 해서 약간의 고난은 있었지만 내리 4선을 했지만 한번은 무투표당선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종로에서 한 번도 하기 힘든 의장을 2번이나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 만일 새마을운동에 동참을 안했더라면 종로바닥에서 제가 유명세를 탈 수 있었겠는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지방에는 새마을회관들이 있었지만 서울에는 새마을회관을 가지고 있는 구가 25개 구 중에서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장을 하는 시절에는 새마을회관을 어떻게든지 만들어 놓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구예산 9억 8천만 원, 시 예산 9억 8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그 9억 8천만 원 예산을 받을 때 공무원 노조와 제가 20일간을 싸웠습니다. 새마을 단체만 회관을 만들면 안 된다며 공무원들이 의장실에 와서 어깨띠를 두르고 ‘권력은 물러가라 구청장 하지 말라’는 데모를 했습니다. 제가 신혼살림을 차려서 10년 내지 15년이면 내 집을 갖게 마련인데, 새마을운동을 시작해서 30년이 넘어도 집하나 못 갖는 것이 이해가 되느냐,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봉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무보수, 명예직으로 일하는데 집 하나도 못 갖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해를 해야 될 것 아니냐 하면서 20일간 젊은 노조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제가 결판을 냈습니다. 의장의 권한대로, 원리원칙대로 공무원들도 국가에서 지정한 봉급만 가져가라, 수당 등은 의장이 삭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의회에서 삭감을 하겠다고 하니 노조도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습니다. 나를 건드리면 자신들도 불이익이 많으니까 추경에 하지 말고 본예산에 하면 어떻겠느냐고 협상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만 회관을 만든다고 하면 다른 단체 반발이 심하니 단 한 칸이라도 다른 단체에 주겠다는 협약서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회관을 만들게 되면 욕심내지 않고 한 칸은 다른 단체에 배려하기로 해서 집행부에서 올라오지 않는 9억 8천만 원이라는 돈을 의회 예산으로 잡았습니다. 공무원들이 10억이면 10억, 20억이면 20억이지 왜 9억 8천만 원을 잡았느냐라고 물었는데, 10억 이상을 잡게 되면 투자심의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대학교수와 민간인들이 반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법률을 피하기 위해 9억 8천만 원을 잡았다 했습니다. 당시 우리 서울시 의원 중에 지도자 출신이 한명이 있어서 9억 8천만 원을 서울시 예산에 잡으라고 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예산을 잡지 못하고 노인복지 쪽으로 예산을 세워서 돈은 잡아놨지만 예산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이었고, 저와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제가 시장실로 찾아갔습니다. 시장님에게 종로구에서 9억 8천만 원 예산을 잡았는데 쓰지 못하는 예산을 잡아놓았으니 이것을 민간보조형으로 예산항목을 바꿔주십사 하는 부탁을 했더니 종로구를 해주면 다른 단체에서도 해 달라고 할 것이라고 하기에 제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기획관리실장을 불러 9억 8천만 원의 예산을 민간보조형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기획실장은 연구를 해 보겠다고 했고, 연구를 해 보겠다고 했으니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저는 돌아왔습니다. 당시 부구청장인 최종협 씨는 옛날에 종로에서 새마을 계장을 하다가 부구청장으로 진급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당시 서울시 총무과장을 하다 왔으니 이 계통을 잘 알지 않느냐, 이만큼 만들어 놓았으니 예산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서울시에 왔다 갔다 하더니 예산을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9억 8천만 원의 예산과 지도자들이 모은 돈을 포함해서 이화동에 대지 132평에 6층짜리 28억 5천만 원짜리 새마을회관을 샀습니다. 현재 월세가 연 1억 500만 원정도 나옵니다. 종로 새마을은 구나 어디의 보조금 없이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을 제가 만들어 놓고 나왔는데, 하나의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5개 구에서도 아직까지 새마을회관을 자력으로 한 곳이 없고, 서울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새마을회관을 만든 구가 종로입니다. 제가 서울시 행사에 갈 때 마다 구청장들에게 집을 하나 주어야 이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라며 압력을 많이 넣고 있습니다. 몇 개구가 동 청사에 빈자리도 얻는 등 어느 정도 계기가 되었고, 6년 동안 제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서울시를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새마을회관을 가졌다는 것에 제일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95년도에 새마을 길을 내기로 해서 시청 앞에 가서 데모를 했을 때,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모 구시장 멱살을 붙잡기도 했습니다. 종로에서 당시 의원생활을 할 때 우리 의회에서 조례제정 없이는 새마을 길을 못 내도록 조례제정을 했습니다. 종로에서 새마을 길을 못 내니까 각 구(區)도 길을 내지 못했습니다. 각 구청장들이 전부 야당구청장 일색이었고, 여당이 없다보니 구청장이 저에게 와서 길을 내게 해 달라고 해서 의원들을 설득해 조례를 제정해서 했습니다. 새마을 길을 지은 곳이 종로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힘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산악회를 구성했습니다. 산에 갈 때 보통은 차가 30대, 많이 나갈 때는 50대씩 지도자들을 모아서 산행을 했는데, 주민들의 표를 먹고 사는 구청장들이 와서 보고 깜짝 놀랍니다. 새마을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신들 밥줄이 끊길 것 같아 그때부터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예산은 현재 하림각 남상회 회장이 당시 지부장이었는데, 차량을 쓸 때 마다 차량비도 지원을 하고 도시락 값도 지원을 하며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 종로에서 새마을에 대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계기를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새마을운동이 없었더라면 우리 국가가 이렇게 까지 왔겠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195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는 빈민국가로서 127억의 원조를 받던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빈민국가인 베트남에 가서 학교도 지어주고, 필리핀에 돼지를 사서 씨를 뿌리고, 라오스에 가서 염소를 사서 염소은행을 만들어 씨를 뿌리고, 캄보디아 가서 포장도 해 주고, 몽골에 가서 우물도 파주고 나무도 심어줍니다. 또 라오스에는 건기 우기여서 6개월 동안 비가 안 오기 때문에 농토는 많지만 농사를 못 집니다. 그런 라오스에 가서 우물을 파주고 농수를 내서 농사를 짓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세계 84개국에서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스컴에서도 새마을운동이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 광복 50년 여론조사를 할 때 국가적으로 제일 남기고 싶은 것이 뭐냐고 했을 때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1위로 나왔습니다. 그 다음이 경쟁성장, 그 다음 88올림픽 이렇게 나왔듯이 새마을운동을 몰랐던 세대들도 새마을운동이 어려운 것을 극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되었습니다. 특히 IMF때 새마을운동에서 금모으기 운동을 해서 장롱 속에 숨어있던 돌 반지, 결혼반지를 가져다가 국민공감대를 형성해서 IMF를 극복했습니다. 국민들도 어느 정도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새마을운동이 42년의 역사가 있다 보니 지도자들이 노후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을 새마을운동에 많이 동참을 시켜야 됩니다. 새마을운동에서 학생들을 위해서 장학금도 지원하고 교육도 시키고 외국연수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부족합니다. 사실 정부차원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해 전폭적인 예산지원을 해야 되는데 다른 단체와 똑같이 공모사업을 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른 단체는 이름만 가지고 있지 어떤 사업을 합니까.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있지만 뚜렷하게 어떤 사업이 있느냐 이겁니다. 전부 새마을운동에서 내놓은 사업을 따라 답사를 해서 그대로 올라오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부차원에서 새마을의 날도 재정을 했으니 평가를 제대로 해서 새마을운동에서 그만큼 일을 했으면 그만큼 예산을 지원해서 새마을운동으로 이끌고 나가 우리나라가 안정적인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 줘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국민들 앞에 호소하고 싶은 것은 눈으로 보고 느끼고 한 그대로를 평가해 주고 정치적으로 몰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우리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현장에 가서 새마을운동을 할 때 매스컴에서 새마을 모자를 벗으면 사진에 담아주고 모자를 쓰면 사진에 안 담아주는 등 편파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는 매스컴에서 새마을운동 하는 모습을 반영해 줍니다.‘땡큐코리아’라고 외국에 가서 우리가 지원한 사례를 방송했던 것이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아서 제 2방송을 틀어주고, 3방송까지 했습니다. 국민들에게 보고 피부로 닿는 것이 새마을운동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됩니다. 또한 앞으로 젊은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들이 새마을운동에 동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훌륭한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도 계시지만 역사가 더 흘렀을 때는 새마을운동이 1위로 부각될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마을을 못 버립니다. 제가 의장을 2번하고 4선을 한 사람인데, 새마을 조직의 새마을 회장을 하던지 의원을 하던지 2가지를 못하게 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 저는 탄탄한 조직을 놔두고 새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불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저는 정치보다도, 권력보다도 봉사하는 자세인 새마을을 선택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새마을에 대해서 국민들이 따뜻한 온정의 말 한마디라도 해 준다면 우리 지도자들이 정말로 보람을 갖고 일을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방역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방역기계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웬만한 사람은 제대로 하지도 못합니다. 30도 내지 32도 온도가 올라갈 때 방역을 하는데 방역약이 정말 독합니다. 몸에 방역약 냄새가 배면 목욕을 해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주인들이 꺼려합니다. 동네사람이니 받아주지 외부사람 같으면 밥을 안팝니다. 그러니 지도자들에게 일당을 주면서 방역을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안합니다. 3D현상이 높아져서 어려운 직장에서 봉급을 줘서 하라고 해도 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새마을 지도자들은 새마을 봉사정신이 뚜렷했기 때문에 땀을 흘려가면서 어려운 방역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민의 모든 건강관리도 새마을에서 합니다. 이번 우면산 사건 때도 물론 다른 단체에도 많이 와서 지원을 했지만 새마을본부 중앙에서 밥차 가져다 놓고 400~500명 밥을 전부 해 주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앞에 나서는 것이 새마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 번 인터뷰도 했지만 우리가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부산아시안게임, 2003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전부 새마을에서 자원봉사를 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또 우리 국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까. 삼풍백화점사건, 대구열차폭파사건, 여수KAL기추락사건 등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새마을이 가서 전부 수습합니다. 그러다보니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보다 목소리를 안 높이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는 국민이 더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새마을을 줄기차게 비판해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모든 여론에서 새마을이 1위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참 봉사정신을 가지고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새마을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모습으로 봐주면 고맙겠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