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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답. 제가 처음 농촌운동을 시작한 것이 새마을운동이 아니고 재건국민운동이었습니다. 제가 1963년 제대하기 위해서 예비사단에서 일주일 동안 제대 교육을 받습니다. 그 당시에는 재건국민운동 교육을 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고 난 뒤에 앞으로 내가 고향에 돌아가면 농촌 개발에 집중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마을에 마을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마을문고를 설치하면서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을 접하여 공부를 시켜서 책을 읽도록 만들어 문맹 퇴치 운동을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70년도에 들어서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새마을 조직이 탄생하게 되면서 제가 새마을 협의회 사무국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에도 참여하며 새마을중앙연수원 교수로도 갔다가 퇴직할 때가 되니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곰곰이 생각하니까 옛날에는 문맹 퇴치 운동을 했고 이제 고향에 돌아가면 컴맹 퇴치 운동을 계속 해야 겠다. 그래서 제가 돌아와서 13년째 농촌 정보화 새마을운동을 우리 면에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반마다 교육을 시키고 그렇게 새마을지도자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 주로 무슨 사업을 추진했습니까?
답. 그 당시 제가 초창기 새마을운동을 할 적에는 농촌 가꾸기, 마을 가꾸기로 마을 길도 넓히고 지붕 개량도 해야 하고 하는데 처음에 우리 마을에 마을 안길을 확장해야 하는데 주민들이 선뜻 담장을 허문다든지 집을 허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백부님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 유지였기 때문에 백부님 말씀이면 전부 다 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백부님을 설득해서 ‘큰 집 담부터 헐어주셔야겠습니다. 유지가 솔선수범해야 다른 주민들이 따라 하겠습니다.’ 했더니 ‘그래 자네 맘대로 하게’해서 저희 백부님이 담장과 지붕 일부를 잘라내는 것까지 승낙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솔선수범해서 하게 되니까 마을 안길 확장이 일사천리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저런 분도 하는데 우리가 안 따라 해야겠느냐’해서 마을 안길 확장하는 것은 재밌게 잘 했습니다. 사람만 다니던 좁은 안길도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넓히고 편해지니까 이제 지붕 개량을 하자 해서 전부 지붕 개량을 완료했습니다. 지붕 개량을 하고 나니까 또 사람 욕심에 도색이 필요해서 도색을 장려했습니다. 도색을 장려하니까 자재 그릇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가세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그릇으로 페인트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제 손으로 지붕을 타면서 페인트칠을 9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을 가꾸었습니다. 그런 것이 널리 알려져서 76년도에는 우리 마을이 대통령상도 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정말 재밌었습니다.

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마을과 지역, 정부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답. 그때는 관, 민 할 것 없이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나서서 하자고 하면 옮으니까 전부 다 따라왔었습니다. 그릇된 일이라면 다 따라오겠습니까? 전부 내 삶의 질을 향상과 관련된 일고, 내가 편리해지니까 전부 다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정부가 “문제 사항이 어떤 것이냐?” 그러면 즉각 문제 사항을 해결해 주고 관, 민이 정말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은 예를 들어 예산이 많이 들어야 하는 사업이라든지 주민이 지속적으로 해야 되는 것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생계유지 때문에 사람을 동원하는데 상당히 고초를 겪었며, 그럴 때에는 겨우겨우 설득을 하고 해서 동원을 하곤 했습니다.

문. 사업 추진상 제일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답. 새마을 조직에 81년부터 제가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새마을지도자 회비가 처음 생겼을 때 만 해도 조직에 예산이 없지만은 조직을 만든다는 그런 성취욕 때문에 열심히 하다가 82년도에 각 시도지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경남새마을지부를 탄생시키는 자금을 제 손으로 전부 다 했습니다. 하면서도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제가 이 조직에 참여를 잘 했었다는 것을 느끼고 가슴 뿌듯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 생각만큼 잘 진행되지 못했던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요?
답. 제가 이것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일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안되면 안 된 요인을 세밀히 분석하고 항상 남보다 앞서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농촌 출신으로, 농촌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옛날에 재건국민운동 강사도 해봤고 그리고 경상남도 보리 재배 유공으로 표창을 받을 정도로 농사에 관여를 많이 했기 때문에 농촌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의 실정에 따라서 사업 계획을 세워서 추진을 하니까 농민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꼭 해야 될 일들만 계획해서 하니까 주민들도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뜻 깊었고 힘들었던 일은 제가 80년대 초반부터 바다 살리기 운동을 10여 년간 제창을 해도 주민들이 잘 호응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자 KBS1과 연결이 되어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바다 오염이 심하느냐.’ 자기들이 취재를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92년 8월 30일 저녁에 저희 새마을 집으로 취재팀이 3명이 오셨습니다. ‘경남 바다 그러면 청정 해역이고 청정 해역이면 남해안이고 남해안이면 청정 해역인데 무슨 바다가 저러느냐 걱정스럽다’고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현장에 가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했습니다. 밤에 거제로 넘어가서 거제에서 자고 아침 식사하고 바다로 나가서 서보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렇게 심각하느냐.’ ‘이거 보고 심각하다고 놀라면 정말 심한 곳에 가면 어떻겠소.’했습니다. 가보니까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 내려 올 때는 3일만 취재한다고 내려왔던 사람들이 본사에 연락해서 “헬기 지원해달라.”, “수중스쿠버 지원 해달라.” 하면서 경남 바닷가에서부터 전남 장흥 고흥반도까지 제 차로 일주일동안 태워 다니면서 바다 취재를 해서 9월 16일 날 9시 뉴스에 9시 20분부터 20분간 방송을 매일 했습니다. 그걸 방송을 하니까 어촌 사람들은 물론 전 국민이 깜짝 놀랐습니다. 바다 오염이 이렇게 심각하느냐. 취재했던 과정에 제가 인터뷰했던 과정도 나옵니다. 처음에는 10년 동안 제가 그렇게 하자고 해도 안 하다가 KBS 취재 방송을 하니까 온 시민들이, 주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동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2개월 정도 하고 나니까 바다가 정말 깨끗하게 정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경남 어촌에 욕도 많이 들었습니다. ‘왜 경남의 치부를 노출 시도 했느냐’욕도 많이 얻어 먹었습니다. 안되겠어서 다시 취재팀에 전화를 해서 “제가 지금 경남에 못 살 판이다.”, “다시 한번 내려 와야되겠다.”, “그때와 지금 비교 보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그래요, 그만큼 깨끗해졌습니까?”자기네들도 그 해의 11월 달에 내려와서 보니까 자기네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만들었느냐.”, “경남 전 도민들이 얼마나 고생했겠소, 보도 한번 해주시오.”그래서 11월 19일 저녁 9시 뉴스에 전 화면과 우 화면 비교를 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못 이뤄졌던 것이 이뤄지니까 그 보람이야 말로 지금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보람이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KBS 쪽에서 바다의 날 제정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그제야 바로 수락하고 바다의 날도 제정하겠다고 해서 바다의 날까지 제정되었습니다. 올해 5월 31일이 바다의 날 17주년이었는데 그런 일을 기억할 때 마다 정말 제 가슴은 뿌듯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8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토종닭이 멸종 단계였습니다. 한번은 마을을 순회하다가 진주시 집현면 새마을지도자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새마을 경남지부 과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과장님 지나가실 때 저희 집이 바로 길가에 있습니다. 한번 들리십시오.” 한번 지나가다 기억이 나서 가니까 토종닭을 몇 마리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거 토종닭 아니냐”고 물으니까 “어떻게 토종닭을 아시느냐”,“내가 예전에 농촌에서 토종닭을 길렀기 때문에 안다. 지금은 토종닭이 멸종되고 없다.”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로 이것이구나! 우리 사라져가는 토종을 살려야하는구나! 했습니다. 그때 우리 새마을에서 1도 1특색 사업을 하자고 붐이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우리 경남은 토종닭 살리기를 도 특색 사업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또 KBS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토종닭 방송이 나가니까 토종닭에 대한 붐이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토종닭이 전국에 엄청나게 전파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장상철 지도자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뿌듯합니다.

문. 어떤 점이 아쉬웠습니까?
답. 아쉬운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거의 100% 가깝게 추진을 했고 그 전에 제가 현재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처음에 어려웠던 것은 제가 컴맹 문명 퇴치 운동을 하겠다고 작정을 하면서 2001년부터 우리 마을 회관에다 컴퓨터 10대를 설치했습니다. 제가 새 컴퓨터를 살 수도 없고 삼천포 화력 발전소에서 486을 586으로 교체하는 것을 10대 얻어다가 마을 회관에 컴퓨터 교육장을 만들었는데 그걸 가지고 인터넷을 하려니 KT에서 486을 가지고는 인터넷을 할 수 없다고 하고 그때만 해도 90년대 후반이니까 인터넷 하는 사람이 극소수였습니다. ‘도저히 이것으로 안됩니다. 적어도 586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시작하면서 워드라고 가르쳐야 되겠다 해서 시청을 방문했습니다. 시청을 방문하니까 ‘우리가 할 일을 지도자님이 하시구나. 뭐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직원을 두 명 파견해서 486가지고 일주일 동안 인터넷을 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해서 인터넷을 해 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2002년부터 인터넷 교육까지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하니까 ‘저 사람이 도에서 새마을 국장도 하고 연수원 교수도 했다고 하더니 틀림없이 지방에서 꿈이 있어서 들린 것이다.’ 그랬습니다. 제 본심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농촌 농민들 정보화에 눈 뜨도록 해야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하는데 색안경을 쓰고 엉뚱한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도의원 출마하려고 그런다, 시의원 출마하려고 그런다, 뭐 이런 야심 때문에 쇼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남의 봉사정신을 이렇게 몰라줄까 싶은 환멸도 느꼈을 때도 있었습니다.

문. 지도자로서의 자부심은 어떤 점이여 애로사항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단점은 저희 집 사람은 제발 사회일 하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가정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가정 일은 재껴두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집 사람은 그런 것을 섭섭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점이라기보다는 제 가정일 같은 것은 상당히 나태한 성격이 있었습니다. 봉사 활동을 하다 보면 내 가정을 일일이 챙기다 보면 저것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집에서는 나태하다, 꼼꼼히 안 챙긴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집에 가서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었습니다.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지금 시작해서 지금 단박에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인내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습성이 젖어서 제가 가정일을 맺고 끝내듯이 처리를 하지 못하니까 그런 것을 단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점은 제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봉사활동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꼭 해쳐 나갔으니까 꾸준한 인내력, 꾸준히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문.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답. 제가 저 자신을 평가할 때는 제 평가는 남이 해야 하지 제가 잘했다 못했다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김수환 회장님께서 한 번 편지가 왔었습니다. 김수환 회장님은 제가 저녁마다 시골 농촌 돌면서 컴퓨터를 이 마을에서 몇 개월은 저 마을에서 가르치시고 몇 개월 다른 마을마다 순회하면서 하는 것을 와서 봤기 때문에 잘 아셨습니다. 김수환 회장님이 쓰신 책도 저 때문에 쓰신 것입니다. 그 책이 완성되면서 그 책하고 내의 한 번 하고 편지를 넣어 보내면서 자기는 시골에 가서 새마을지도자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용기가 없어서 못했는데 그래도 이 녀석은 어떤 결단력을 가지고 농촌에서 새마을지도자를 하느냐. 고개 숙이게 해준다 그러면서 감사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을 받고 제가 홈페이지에 올려 놓고 심심하면 보고 제가 나태해지면 다시 보고 힘을 내고 ‘아, 이런 분이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보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고 편지를 보면서 채찍질하고 그렇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 당시 정부의 정책이나 공무원들의 지원은 어떠했습니까?
답. 그때도 자금적인 지원은 크게 없었습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았습니다. 관심도 행정 시, 군청마다 새마을과도 있고 할 때에는 새마을과 힘이 대단했습니다. 지역 개발비도 상당히 투자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새마을과도 없어지고 그러니 자연히 행정 공무원들도 새마을과 명칭을 사용할 때와 안 할 때의 관심이 현저히 차이가 납니다. 아무리 관에서 참견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지만 관이 현재까지도 관심을 안 가지면 재정적인 뒷받침이 안 되는데 어떻게 일을 합니까 그런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답. 과거에는, 우리가 어렸을 때는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 소나무가 봄에 새순이 나면 송고라 해서 껍질을 벗겨서 먹기도 하고 쑥 뜯어서 버무려서 먹고 죽을 끓여 먹기도 하고 그렇게 연명을 하다가 지금 극소수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 배 곯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잘살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옷도 무명옷, 한 며칠 입으면 닳아서 떨어졌는데 지금은 옷 한번 입으면 계속 새 옷처럼 좋은 옷, 좋은 복장이고 또 지금은 스마트폰 옛날에는 꿈이나 꿨을 그런 세상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급진적으로 짧은 시간에 변화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가 더 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미국처럼 200년이나 긴 장부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면 세계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짧은 단기간에 해냈기 때문에 세계가 다 놀라고 외국의 가난한 나라들이 한국을 배우기 위해서 지금도 새마을중앙연수원에 배우러 많이 오고 있습니다. 제가 96년, 97년 연수원에 근무할 때도 외국 개발도상국에서 새마을 교육을 받으러 소수 인원이지만 왔었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많은 숫자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도 TV에 새마을 국제화 활동하고 있는 내용을 보니까 새마을지도자가 되어 보니까 정말 가슴이 뿌듯하고, 모든 개발도상국도 우리나라처럼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해서 가난을 벗어나는 국가가 되도록 모든 국가가 노력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 살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 그게 바로 새마을 정신입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답. 옛날에는 독립 운동을 하셨던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셨던 33인 중의 한 분 옥파 이종일씨라고 계시는데 그 분은 110여 년 전에 ‘물질문명의 발전보다는 의식 개혁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의식 개혁이 되지 않고 물질문명이 먼저 발전하면 곤란한 사회가 온다.’ 그 때 110여 년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보면 딱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의식 개혁은 되지 않고 물질문명만 짧은 기간에 확 이뤄졌기 때문에 의식이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이렇게 혼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새마을운동은 그런 차원에서도 앞으로 의식 개혁 운동에 적극 강력히 추진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