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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당시 제가 지역신문 주제기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여당, 공화당 광산나주 조직부장을 맡아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화려하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면서 정치주변에 있다 보니까 뭔가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나 주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계기가 새마을이라는 것을 느껴서 관직을 버렸습니다. 당시 여당 조직부장 정도 하면 지방의 장을 나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것을 마다하고 새마을지도자로 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30이 갓 지난 때였는데 제 또래에 새마을운동을 하신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보다는 10년, 20년 이상 연배이고 현재 저와 같이 활동했던 분들은 70~80%가 다 고인이 되셨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나 마을에 분위기는?
답. 당시에는 국민운동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고 고됐기 때문에 마을을 변화해야 하는데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유일하게 새마을운동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해서 농촌에는 지붕개량을 하고 마을길을 넓혔는데 제가 살던 지역은 중도심권이어서 지붕개량보다는 마을담장 안길을 넓히고 마을회관을 짓고 공동작업장을 만들고 마을을 지나는 하수구를 정비하는 하수복귀사업들이 주된 새마을사업이었는데 사업 하나하나가 성과가 있으니까 참여하는 주민들 100%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동참해 주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제일 먼저 시작했던 것은 마을청소였습니다. 청결운동으로 아침 새벽부터 새마을노래를 틀면 모두 일어나서 자기 집 앞을 먼저 쓸고 그 다음에 동네 진입로나 마을회관 앞으로 모여서 공동으로 청소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마을은 위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었는데 위에서 장마로 인해 물이 내려오면 찌꺼기들이 마을에 축적되었기 때문에 천변정리를 했고, 또 담장개보수를 했습니다. 그때만하더라도 탱자울타리나 판자로 해서 담장을 허술하게 해 놓았는데 탱자나무 같은 경우는 가지가 늘어남으로서 마을안길의 2/3를 먹다보니까 탱자나무를 베고 마을공동사업으로 담장을 쌓기 시작해서 마을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철근 1kg와 시멘트 500포대를 가지고 하수구 복구사업을 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주는 것이 철근과 시멘트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더라도 기술자가 와서 해야 하는데 인건비가 없으니까 마을주민들의 성금으로 모아서 했습니다. 당시 어려워서 성금을 못낸 분들은 노동으로 대신 일을 하거나 부모님들이 못나오는 경우는 자녀들이 나와서 일을 하는 등 마을주민들이 협동으로 일을 했습니다. 적은물량을 가지고 1.5km 이상 복구사업을 했다는 것은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형편이 좀 좋으신 분들이 고구마도 쪄오고 수제비 죽을 끓여오는 등 아무 불편 없이 서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한 가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던 것은 새마을사업초창기에 저는 신혼부부나 다름없었는데 목수들이 인건비를 안준다면서 연장가지고 집에 쳐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같이 살자고 하니까 가족들이 모두 놀란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문. 새마을문고 사업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답. 76년도에 제가 강산구 문고회장과 새마을지도자회장을 병행을 했습니다. 문고 사업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책이었습니다. 당시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책을 산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고향 향우회를 중심으로 책 모으기 운동을 하고, 또 책을 모으기 위해서 일일찻집을 하고 또 지역에서 책 모으기 경진대회를 해서 243개 마을에 새마을문고를 육성했습니다. 문고를 육성하다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송정리역이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기다리고 시간을 보내는데 그분들한테 뭔가 도움이 될 것이 없나싶어서 무인문고를 설치했습니다. 누구나 부담 없이 책을 읽다가 필요하면 가져가고 나중에 다시 되돌려주는 무인문고도 설치해 보고, 장애자자활촌 이라고 장애자들이 글을 못 읽으니까 그림책을 보급하는 장애자자활촌도 활성화했습니다. 또 한때의 실수로 인해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분들은 시간이 지루하니까 광산경찰서 유치장에 문고를 설치했습니다. 당시 안흥모 치안본부장이 직접 격려전화도 해 주고 또 동아일보에 소개가 되어서 전국 경찰서 유치장에 문고를 설치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고운동이 정신운동으로서 새마을이 현장중심으로 뛰는 운동이었다면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모든 사회가 변하고 하고 있는 자기의 주변이 달라지고 또 농업을 하고 있는 분들이 원예 잡지나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소득이 증대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문고로 인해서 83년도에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답. 다른 어려움은 없는데 제가 그때만 해도 젊었기 때문에 새마을지도자대회를 간다든가 새마을연수원을 가서 교육을 받으면서 성공사례를 듣고 보면 나도 잘해서 훈장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새마을이 주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가정도 중요하지만 가정보다도 새마을이라고 하면 앞장서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2등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도입해서 하다보니까 전국에서 저희 마을을 시찰 나오고 또 제가 발표한 사례가 중앙회까지 올라가 사례발표도 했습니다. 새마을의 기본이 되는 모든 문제는 일반 직책만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노력하고 분석하고 뭔가 대책을 세워서 새마을에 대한 끝장을 보기 위해서 뛰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전국새마을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하는데 준비 위원장을 맡았는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시도에서 2명씩을 선발해 22명을 임시준비위원으로 선임해서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를 창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국보위도 6개월 파견 가서 근무를 해서 새마을 조직을 시작한 것이 새마을연수원 김준 원장님의 특별한 지시와 도움으로 전국 지도자협의회를 결성을 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을 극복하는 방법은?
답. 첫째 근면․성실해야 합니다. 또 마을주민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인데 모든 분들이 긍정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일은 해 본적이 없습니다. 고집을 세워서 하지 않고 함께 하는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새마을사업을 하기 전과 후의 변화가 바로 나타났습니다. 소하천을 정비한다든지, 오물 투성에 악취나 흉악스러운 것이 복귀함으로서 깨끗해지고 길도 넓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주민들이 보람을 갖고 참여를 해서 마을회관도 건립할 수 있었고, 마을에서 논 1,200평을 사기도 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네주민들이 돈을 걷어서 이장월급을 주던 때였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답. 생각해 보면 부실이냐, 완전하냐 하는 문제는 추후 10년, 20년을 쓰다보면 행정부에서 돈을 들여서 다시 바꿨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물줄기를 바로 잡아주고 길을 넓혀주었기 때문에 시행착오는 없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려움은 많이 있었습니다. 보통 하수구 1m 내지 마을안길 포장 1m가 쉬운 것 같더라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피와 땀과 한이 맺혀있는 구간입니다.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고 회의도 해야 하고, 모금도 해야 하고, 정부기관에 가서 보조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발 한발 뗄 때마다 넋과 혼이 새겨지지 않으면 그 사업을 못했습니다. 과거 새마을지도자들은 저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낮에는 웃고 밤에는 홀로 가서 울고 가정에서는 버림받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람과 긍지로 느낀 것은 마을을 탈바꿈시켜 봐야겠다는 의지와 신념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지금 하라고 한다면 저 같은 경우는 못할 겁니다. 과거 새마을운동은 몸으로 뛰는 새마을운동이었는데 지금의 새마을운동은 정신새마을운동이라고 해서 어떻게 보면 안일하고 편안한 새마을운동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교육이 바뀌고 정치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뀐 상태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라고 하면 후퇴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개발도상국가에 맞는 운동으로 노동과 인내와 신념과 긍지로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의 새마을과 옛날의 새마을을 비교해서는 안 되고 앞으로 새마을은 국제화되어 가는 마당에 과거의 모든 밑거름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함께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노력했던 새마을지도자들을 찾아보면 고인이 되신 분이 많기 때문에 어려운데 지난 터전을 기본으로 삼아 새로운 새마을이 전진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30년을 새마을에 쏟았기 때문에 “새”자만 나와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관심을 쏟습니다. 그 당시 새마을지도자들의 혼과 넋은 완전하기 때문에 공산당이 쳐들어와도 새마을은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신념으로 새마을 사업을 했습니다.
문. 지금도 새마을지도자로서 하시는 일은?
답. 아쉬운 점은 정부에서 지원만 했더라면 좀 더 많은 일들도 할 수 있었고 결과가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만 해도 순노동, 순인력, 순동원으로 했습니다. 근면․자조․협동 삼대원칙을 적용하니까 부족해도 부족하다는 말을 못하고 떼쓰고 싶어도 떼쓰지 못하고 스스로 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욕심도 없었고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쉬움이라든지 원망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 환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당시에는 지도자가 솔선하고 지도자가 참신하면 그 하나만 믿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어디 산을 간다고 하더라도 안내자가 가자고 해서 그 사람을 믿으면 따라가는데 안 따라가고 혼자가면 외롭듯이 함께 했기 때문에 그분들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길을 하자고 주민들이 다들 나와 있는데 지도자가 고되다고 안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마을의 모든 힘에 끌려가 앞장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니었나라는 그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있었던 일은?
답.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의 변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마을에 경운기가 못 들어오는데 담장을 다시 쌓고 하수구를 복구함으로 인해서 승용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혀졌는데 그 길을 거닐 때 보람을 느낍니다. 둘째는 지금은 예방소득을 하고 방역을 하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화장실도 재래식이 어서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배설물이 마을 하수구로 흘렀는데 그것을 복구해서 하수구 정비를 했을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예전에 했던 사업들이 새롭게 다시 복구되고 길도 다시 깔고 했기 때문에 흔적이 없어졌는데 그런 것을 했을 때가 가장 보람이었습니다.
문. 새마을지도자로서 자부심이 있다면?
답. 지도자로서의 자부심보다는 처음에 주민들과 제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새마을운동이다 보니까 시작을 했고 두 번째는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면 나중에 정치라도 해야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시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큰 꿈을 가지고 나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막상 새마을운동에 뛰어들다보니까 명예나 정치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 새마을지도자 3년을 하면 관직에 무조건 특채로 다 갔기 때문에 면장이나 조합장들을 제가 선출을 하는데도 정작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개인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문. 새마을지도자로서 애로사항이 있었다면?
답. 지도자라고 해서 애로사항이나 불편한 것은 없고, 지도자를 함으로 인해서 시간을 많이 뺏겼습니다. 군회장을 하고 중앙회 초대 부회장을 하고 도에서도 활동을 하다보니까 세미나도 하고 기관장이 어디를 간다고 하면 따라가야 하고 또 대통령이 지방순회를 한다고 하면 도에서 한두 사람은 대통령오찬에 초청받아 대화도 나누고 건의도 했습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출장 나오면 지도자 중에서 역량 있고 활달한 사람들이 거기에 꼭 참여를 해서 시장 지사나 군수들이 못하는 말을 지도자를 통해서 건의하는 것도 많이 있었는데 그런 것을 하다 보니까 시간을 많이 뺏기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 앞에 많이 서다보니까 내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바른 일을 해야 하고 바른말을 해야 하고 또 지도자로서 어긋난 일을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많이 변화되었고 또 제가 욕심이 없으니까 바람이 없었고, 큰 불편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를 30년 동안 뒷바라지한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명예도 갖고 하다못해 면장이나 읍장직을 갖는데 저는 그런 것 없이 하다보니까 아내에게는 미안한데 그런 것이 저한테 도움이 됐던 것은 인내심과 친화력,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사는 모든 문제도 저는 삶의 지표가 되어서 제가 생활하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움 보다는 제 자신을 정립하고 저를 내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문. 새마을지도자로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답. 주변의 일반 지도자들한테는 조금 죄송합니다. 왜냐 하면 훈장을 제가 먼저 받았습니다. 한때는 정말 열심히 따라다니고 열심히 한 사람들한테는 면장을 시켜 주었는데 그 사람들의 만족을 채워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을 주민들한테 괴로움과 도움만 받았지 그분들한테 지도자가 해 준 일이 없기 때문에 제가 사회생활하면서 그런 점이 아쉬운 점이고, 새마을로 인해서 얻어지고 잃은 것은 없었습니다.
문. 당시 정부나 공무원의 지원은 어떠했나요?
답. 지금은 새마을이 40년이 되었는데 최근 10년 동안의 새마을은 어떻게 보면 큰 성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새마을은 공무원들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정부의 방침이 있었습니다. 새마을과를 거쳐야 승진하는 계기가 중앙에서부터 이루어져있었습니다. 또 지역에서도 새마을계장을 함으로 인해서 과장도 되고 군수도 되었지 새마을 계를 거치면 안됐습니다. 군대로 말하면 육사 엘리트코스가 새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이 자기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새마을 이념이나 신념에 도움을 주는 것은 남달랐습니다. 하나의 예로 새마을지도자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서를 받으면 이 사람은 새마을지도자라 선처를 해 줘야 한다고 하면 그냥 내보내줄 정도로 새마을지도자에 대한 예우나 주변 인식이 좋았기 때문에 새마을지도자들에 대해서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보람이 있었고 관에서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복지정책을 여러 가지로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새마을사업의 지원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새마을이 보람이고 기쁨이었습니다.
문. 새마을운동 전과 후에 변화가 있다면?
답. 당시 어렵고 힘들었지만 참여의식이 좋아서 마을의 모든 공동사업은 불편 없이 했는데 지금은 개인생활을 하다보니까 참여가 전혀 없습니다. 또 본인들의 신리를 추구해 준다고 해도 관심이 없고 관여를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자율적이었다면 지금은 인위적이어도 안 됩니다. 과거와 현재는 그런 정신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해야 결과가 있는데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새마을은 외롭고 어쩔 수 없이 지난 새마을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참여시키지 않는가하는 생각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민간조직으로 40년이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개발도상국가에 새마을운동을 수출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상이나 모든 것이 일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새마을에 대한 이념과 긍지를 그대로 인식해서 국민모두가 한국의 새마을을 인정해 주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지도자들도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맞는 사업을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태권도하면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이듯이 새마을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