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고
이 인터뷰는 대한민국의 무형자산인 새마을운동을 역사적 기록으로 길이 남기고자 새마을운동 추진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증정으로 받은 자료입니다.
문.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답. 1970년 9월 30일에 군에서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한일합섬회사에 이사로 입사를 했는데 입사를 해 보니 당시 김완수 사장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1972년 12월에 실시한 대의원선거에 제가 당선되어서 새마을운동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문. 새마을운동전과 후에 바뀐점이 있다면?
답. 우리나라 국민들이 게으르고 협동심이 없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근면, 협동하는 정신운동이 잘 되었고 국민총화도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답.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우리 정신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문. 농촌위주의 새마을운동을 도시에서 추진하게 된 계기는?
답. 당시 제가 살고 있던 육사주택지가 정확하게 행정구역으로 말하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묵7동입니다. 수돗물도 없고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고 먼지가 많이 나는 불편한 마을을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야 되겠다 해서 시작한 것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문. 주로 추진하셨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답. 새마을운동사업을 시작할 때의 분위기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제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려고 할 때 마을에는 장군이나 교수, 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있어서 대화를 해 보려고 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월 24일 통장의 도움을 받아 지도급 인사 30명을 저희 집에 초청을 했는데 의외로 23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수도공사를 하자고 했더니 그 분들이 저에게 전적으로 위임을 한다고 했고 제가 육사주택지발전추진위원장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마을에 살던 대장 1명과 원로 기업인 2명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자문위원, 추진위원, 부위원장 2명을 두어 추진체를 구성하고 발전5개년계획을 만들어서 주민총회를 했는데 통과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화랑마을에 새마을운동이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수돗물이었는데 구에서 300만원을 지원받고 주민들이 8만 9천원을 모아 우리 마을에 첫 새마을사업을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가 11월이었는데 1달 후인 김장철에 수돗물을 쓸 수 있다고 하여 신나게 작업하며 포클레인으로 골목길을 파헤쳤는데 그 해에 석유파동이 나서 자재공급이 늦어졌고 파놓은 골목에 어린이들이 다치고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등의 불평에 첫 사업으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겨울이 되어도 중단하면 안 된다며 제가 철저히 감독해서 다음해 2월에 완공을 했더니 주민들이 너무 좋아했고 수고 많았다는 위로의 말을 해 주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도시와 농촌의 다른 점은 소득이 많고 지도급 인사들이 사는 마을이기 때문에 좀 더 깨끗하고, 편리하고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6월 1일에 어린이애향단을 창단했습니다. 당시는 공터가 많아서 아침조기행사를 실시했고 6.25글짓기와 웅변대회를 하는 등 7월 17일 제헌절에는 모범어린이 시상식을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육사에서 밴드도 지원받고 묵동화랑초등학교장과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 어린이들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그 후 육사도 화랑의 정신이고 어린이들에게도 화랑의 정신을 심어주며 농촌과 같이 친밀감을 갖게 하기 위해 마을이름을 화랑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조기행사를 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자, 인사를 잘하자, 깨끗이 하자, 공부를 잘하자 등 어린이애향단의 10가지 실천사항을 만들어 매일 아침 낭독을 했고 노래도 부르고 체조경기도 하고 골목길 청소도 하고 국립묘지 참배도 하는 등 마을의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그때 저는 도시의 어머니들이 참석을 하면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추교운동이 잘 되지 않겠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장관부인과 교수부인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해서 부인회를 조직을 했습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봉화산자연보호운동도 하고 국립묘지 참배도 하고 불우이웃돕기 등의 활동을 했고 반상회 때마다 효부상, 어머니상 등도 추천을 하는 등 어머니들과 아이들의 역할이 활발해 지니까 마을의 분위기가 좋아졌고 새벽종이 울렸네 방송을 틀어놓으며 마을에 소리가 나게 유도를 했습니다. 마을의 주민신조이자 화랑마을의 10대 방침인 푸르고 깨끗하게, 명랑하고 친철하자, 어른공경 어린이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 정성 모아 미래 주인공인 어린이를 육성하자 등등의 주민생활 신조를 만들어서 가가호호가 우리 마을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되느냐를 놓고 열심히 하는 가운데 1974년 말에 제가 1995년 초에 착공할 목표를 가졌던 일을 구청에 방문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마침 그때 우수마을 우선지원이라는 방침이 있었고 총 공사비 3,500만 원 중에 70% 해당하는 2,700만 원을 시에서 지원을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민들의 부담금은 800만 원밖에 안 됩니다. 부담금이 800만 원밖에 안 되더라도 수도공사와 다르기 때문에 잘 사는 집에서 많이 내고 서민들은 많이 낸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 주민총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러한 방안으로 주민총회를 열었고 그대로 통과가 되었습니다. 1975년 2월 9일 착공을 해서 5월에 완공을 할 때가 마침 월남이 패망했을 때라 우리나라 안보사절이 걱정되어 마을안길포장공사 준공식과 안보궐기대회를 겸해야 해야겠다 생각을 가지고 구자춘시장, 이맹기 재향군인회장, 안호상 재건국민운동본부장, 유근국 국민회의사무총장 등 많은 기관장과 단체장을 초청하고 주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준공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화랑마을 개막식을 하고 국민의례와 경과보고에 이어 시장님이 수고한 사람들에게 감사패를 주고 마을의 테이프를 끊은 후 마을길을 걸어갈 때 주민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민원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통사무소를 개소했는데 전업통장제도를 실시하면서 1군사령부의 주임상사를 지낸 최윤옥씨를 초대통장으로 추대를 했습니다. 통사무소에서 어린이애향단, 문고, 금고, 주민등록증을 대리로 발행해 주는 민원을 처리하고, 마을중심가에 불편이 없도록 우체통과 공중전화도 설치하고, 방범처소도 만들고, 한 달에 한번 씩 마을 신문을 발행해 소식도 알게 해 주고, 반상회에서 논의한 문제도 신문에 실어주는 등 반상회에서 자율적으로 마을회의를 논의하는 문제가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주민들이 더 긍지를 가지고 열성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1976년에 통사무소 개설을 하고 1977년에 마을자체의 환경개선은 거의 끝났는데 미군이 철수한다는 말이 나왔고 전방에 있는 마을의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기를 높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문교부 추천을 받아 임진강 북방의 통일촌이라는 마을의 백련초등학교와 휴전이 되는 7월 17일에 자매결연을 맺고 한 달 후인 8월 18일에 5,6학년 어린이 20명을 서울에 초청을 해서 애향단어린이와 함께 침식도 하고 서울의 고궁과 과학관 관광을 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졸업식 때는 화랑마을 어머니들이 백련초등학교에 가서 장학금과 상품도 전달해 주었는데 어린이들과 마을주민들의 사기를 높여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월 14일에는 화랑마을이 최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내방하니까 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이 장군 묵동이 육사부근이죠? 도시새마을운동이 어려운데 참 잘해냈습니다.”라고 격려를 해 주었고 저는 앞으로 우리 마을을 충효복지마을로 만들도록 하겠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때 우리가 500만원 대통령 하사금을 받았고 그 순간 우리의 5개년계획 중 마지막 숙원사업인 마을회관을 건축해야 되겠다 생각했는데 마을의 분위기를 보니까 마을회관을 지으려면 돈도 2,500만원이 필요하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반대하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부득이 서울시 구자춘 시장을 찾아가 500만원의 하사금으로 회관을 건립하려고 하니 500만원을 도와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해 주어서 좀 더 자신감을 갖고 1,500만원을 모금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이희수 부위원장이 마을중심가에 소유하고 있던 가게를 싼 가격으로 협조를 해 주겠다고 했고 대금은 마을 모금이 잘될 때 내도 좋다고 했습니다. 1,500만원은 쉽지 않지만 저도 500만원을 납부한다는 약속을 하고 1,000만원은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납부하기로 하는 방안을 가지고 주민총회를 열었더니 통과가 되어서 11월 14일에 착공식을 했는데 마침 수원의 새마을연수원을 나온 삼육건축의 소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했고 날씨도 따뜻하여 공사도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를 전주에서 열렸는데 저도 참가를 했고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훈장인 협동장을 수상했습니다. 훈장이라는 것은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마을회관 나머지 공사를 열심히 해서 정확하게 12월 24일에 착공해서 43일 만에 완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새해에는 마을의 어른들을 새로 건축한 회관 단상에 모시고 행사를 가졌는데 많이 좋아하셔서 좋은 분위기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그 다음해에 농축산물 구판장 개소식을 했는데 많은 내빈과 마을주민들이 참여를 해서 축하연을 하였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복지마을을 새롭게 알렸고 어린이유치원도 설립하였으며 경로잔치를 통해 어른들을 즐겁게 하는 행사도 하였습니다. 198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처음으로 맞이한 새마을운동 10주년 기념일에 동대문구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으로서 새마을운동 확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화랑마을이 살기 좋은 복지마을로 널리 알려지자 새마을운동 중앙회나 연수원에서 해외시찰자 견학코스로 화랑마을을 지정하여 말레이시아, 스리랑카에 연수자들이 견학을 다녀갔고 미국 대학생들에게 민박도 주었습니다. 새마을운동 1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나서 1984년에 저는 한일합성 수원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기술자도 아닌 군인출신인 사람이 공장장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걱정을 했지만 기술문제는 부서장에게 맡기고 저는 사원들의 복지향상과 일체감 조성이라는, 신바람이라는 공장새마을운동을 통해 사원들이 퇴직하지 않고 생산성도 향상되어 성공한 공장장으로 인정받아 1985년에 한일합성의 본사가 마산에 총무담당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본사에 총무담당 직책은 다양하고 복잡한 일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사원들의 안전사고 예방과 정신교육을 위해서 직업훈련원장직과 극기훈련을 했고 또 제가 경남복싱 회장직으로 있을 때는 88서울 올림픽에서 경남대학의 박시헌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해 경남도민들의 축제잔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0년간 몸 담았던 회사를 1990년 3월에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93년 8월 24일 20주년 기념으로 초청강연회를 가졌는데 강연회에 앞서 개발 때 사용했던 마을발전추진회라는 간판을 마을공동체로 바꿔 현판식을 했고 연세대학교 김용석 교수가 신한국과 공동체인식이라는 내용으로, 그 다음 해인 21주년 때는 새마을운동중앙회 김유혁 회장이 국제화시대의 새마을운동 방향의 내용으로 강연을 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아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가 20년 이상 화랑마을에서 도시 새마을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완수 회장님과 우리 가족들의 이해와 도움이 컸고 또 군 후배인 이병무 중령이 새마을금고 설립 때부터 마을금고를 맡아 서울시에서 가장 모범적인 마을금고로 육성해서 회관관리도 잘했고 제 사무적인 일도 잘 도와주었으며 주민들의 참여도가 높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문.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보람있었던 일은?
답. 어린이애향단을 만들어서 11년 동안 여름에 조기행사를 통해 체조도 하고 국립묘지 참배도 하면서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씩씩하게 자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준 인성교육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답. 새마을지도자로서 열정과 희생하는 정신을 가지고, 장군과 교수 등의 지도급 인사들로 추진체를 구성하였으며 어린이애향단을 만들어 마을 분위기를 좋게 확산시킨 것이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마산 본사에서 노사분규가 극심할 때 협의회장으로 하신 일은?
답. 6.15선언을 앞두고 노사분규가 굉장히 심할 때였는데 저는 노사안정과 화합을 위해서는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보다는 교양을 심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을 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소책자를 발행해 노사뿐만 아니라 경남도민이 많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경남도민의 선진의식 함양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보람을 느꼈고 퇴사 후 서울에 돌아와서도 도덕성 회복을 위해 1995년까지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문. 지도층에 계신 다른 분들도 새마을운동에 많이 참여하셨나요?
답. 난공마을에 지도층인 새마을지도자가 새마을금고를 만들어서 마을을 발전시킨 사례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 무엇이 국민들을 새마을운동에 신나게 참여하게 했을까요?
답.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정신운동이 크게 도움 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매력은?
답.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보람이 아니었나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과 아쉬운 점은?
답. 정신운동으로는 성공을 했지만 도시 새마을운동은 농촌에 비해 전출입이 많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의 미래는?
답. 새마을운동은 확실히 지속이 되어야 하고 우리나라의 국민이 선진의식을 함양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통일한국을 이룩하는데도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지금까지 새마을운동을 평가한다면?
답.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를 발전시킨 것은 새마을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새마을운동의 방향은?
답. 온 국민이 새마음으로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 도덕성도 회복되고 또 선진의식 함양에 역점을 두고 한다면 청소년들도 자율적으로 보람을 느끼면서 참여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개도국에도 적용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저개발국가도 근면 ․ 자조 ․ 협동하는 운동을 통해서 소득이 늘어나고 국민총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 새마을운동이 국가브랜드로서의 역할이 가능할까요?
답. 물론입니다. 경제발전에 새마을정신이 크게 기여했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새마을운동을 배우러 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 후배들이나 국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답. 저의 경험을 볼 때 정년퇴임한 고위공직자, 장군, 대학교수 등 이런 기업인들이 참여를 해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함양을 통하면 선진국에 진입하게 되고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도 도와주며 통일에 대비하는 것이 요즈음 말하는 자본주의 4.0시대에 걸맞은, 사회지도층이 봉사를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시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무원들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꾸고 시장이나 국가지도자가 관심을 가지고 포상도 하고 또 격려를 해 준다면 분위기도 달라지고 사회도 안정되며 정치도 정상화되면서 우리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